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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Honore Fragonard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1732년 4월 5일 그라스 – 1806년 8월 22일 파리

프랑스의 풍속화가

국적  : 프랑스  

출생지 : 남프랑스 그라스 

수상 : 1752년 로마대상  

주요작품 :  <음악 레슨>, <목욕하는 여인들>


아카데미적 회화를 구사하였으며, 주로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화폭에 담았다. 주로 여인들을 한 풍속화를 즐겨 그렸으며 섬세하면서도 관능적인 미를 보여준다. 

아버지는 잡화상 점원이었으며 가족이 1738년 파리로 이사했다. 1747년 변호사의 도제로 들어갔는데 그 변호사가 프라고나르의 그림에 대한 소질을 알아채고 그에게 그림을 배우도록 제안했다. 

파리에서 J.샤르댕에게 배우고, 이어서 F.부셰에게 사사하였다.  1752년에는 로마대상을 받고, 1756에서 1761년에 로마에 유학중 G.B.P.티에폴로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파리로 돌아와 1765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로마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로는 아이와 여인 등을 소재로 한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동판화에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역사화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대부분 여인과 아이의 초상, 혹은 목욕하는 여인이나 연인들을 소재로 한 풍속화를 주로 그렸으며, 섬세하고 미려한 관능적 정취를 짙게 표현하였다. 동판화도 뛰어나 부셰의 후계자로서 한 양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적으로는 루이 15세, 16세 시절의 귀족들과 가깝게 지내는 등 화려한 생활을 했으나, 프랑스혁명 후에는 완전히 멀리하며 파리에서 쓸쓸하게 죽는다. 작품은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그네, 런던 월레스 컬렉션>,  <음악 레슨>, <목욕하는 여인들, 루브르미술관> ,  <여교사>, <사랑스러운 아이> 등이 널리 알려졌다.


* 〈그네 The Swing〉(1766)

섬세하고 쾌락주의적 작품으로 유명한 그네는 촉망받는 역사화가였던 프라고나르가 후원자였던 상 쥘리앙 백작의 의뢰로 그리게 되었다. 백작은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어줄 것을 주문하였다고 한다. <그네>를 그린 뒤 프라고나르는 점차 초상화, 풍경화, 일상생활의 정경을 화려하고 장식적인 색채로 표현하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검은 구름이 깔린 어두운 하늘과 울창한 숲 속, 핑크색의 화려한 옷을 입은 아름답고 젊은 여인이 그네를 타고 있다. 구름 사이로 스며든 한 줄기 빛이 화려한 옷으로 감싼 여인의 모습을 눈부시게 비춘다. 여인은 그네타는 재미보다 장미 덤불 속에서 비스듬히 누워서, 바람에 날릴 때마다 옷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자기의 은밀한 곳을 훔쳐보며 즐거워하는 정부(상 쥘리앙 백작)에게 시선을 주고 있다. 정부는 더 잘해 보라는 듯 손을 들어올린다. 그래서인지 번쩍 들어올린 여인의 발에서 벗겨진 신 한 짝이 공중에 떠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뒤에서 그네 밀어주는 데만 열심인 어수룩한 여인의 남편 모습도 보인다. 그네와 에로티시즘이 조화를 이루는 이 그림은 사치와 쾌락이 물씬 풍기는 선정적인 작품이다. 풍속화가로서 프라고나르는 선배 화가인 와토나 부셰보다 더 큰 명성을 얻는 등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프랑스혁명 후에는 화려하고 에로틱한 작품으로 인해 그의 미술이 근본적으로 배격되는 수난을 겪고 파리에서 외롭게 죽었다.


대단히 활동적인 미술가였던 프라고나르는 550점이 넘는 회화와 수천 점의 소묘(그중 수백 점은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음), 35점의 에칭 판화를 제작했다. 그의 양식은 주로 루벤스의 작품에 기초를 두었으나 동시대의 화가들처럼 꽉 차거나 지나치게 장식적이지 않았으며, 활기차고 유연했다. 활동했던 상당 기간이 신고전주의 시기에 속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전까지 계속해서 로코코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들 중 단지 5점만이 연대가 적혀 있으며, 나머지 작품의 연대는 판화나 문서 등의 다른 자료들을 기초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