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NOTE
2021-07-10 작가노트 2018 (ISF2018 국제조각페스타)
작가노트 2018 (ISF2018 국제조각페스타) 

1. 나의 조각작업은 ‘나’라는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삶의 의미와 그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끝임없는 실험과 탐구의 기록이다.
 나의 작가적 행위는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것에 대한 기록이며, 그 행위만이 나의 실존을 증명하고 있다.
 정신적 사유와 육체적 노동이 반복되는 일상, 매우 몰입하여 아득하게 세상과 구별된 것 같은 하루를 보내는 삶. 
 때로는 감당해내기 어렵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번뇌로 인해 두려움에 휩싸여 매순간 삶의 기로에서 불안과 공존하는 삶.
 하지만 그 현기증과 같은 불안감 조차도 현존하는 자유의 가능성이기에 현재의 꾸준한 움직임을 통해 주체적인 삶을 이루고자 한다.
 결국, 나에게서 조각은 내가 나의 삶의 능동적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의 표상인 것이다.
 조각의 매체로서 강한 물성을 지닌 대리석이라는 존재는 젊은 작가인 본인에게 짊어 지워진 삶의 무게와도 같다. 
 그 존재(삶)와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 상호보완이 되기도하고, 그 본질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또한 그 안에서 삶의 애착(Amor fati) 또한 생겨난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통해 ‘자기실현’이 이루어지듯이, 작가로서의 끊임없는 움직임을 통해 대리석은 작품이 되어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2. 대리석을 매개로한 행위의 중첩. 
 첫째로 표면에 무수히 반복하여 흡집을 내는 것, 혹은 흔적을 새기는 행위이다. 
 이러한 반복적 행위 속에서 돌에 새긴 상처의 흔적들은 제각기 다르고 고유하지만, 큰틀에서 질서와 규칙을 형성한 듯 보여지기도 한다.
 돌에 가해지는 조각적 행위(긁고, 파고, 갈아내는)와 돌의 물성이 만나는 충돌하는 지점에서 남겨진 흔적의 ‘중첩’이 일련의 규칙과 질서가 된다.
 둘째로 돌의 파편(piece)이나 기본 단위로서의 조각(sculpture)을 집적, 배열하는 것이다. 
 조각과정 중, 덩어리(mass)의 일부로 존재하다가 형태의 구현을 위해 껍데기로서 버려지는 파석(破石)들의 군집 (또는) 그 첫번째 시도이고, 둘째로는 ) 매체에 대한 작가의 능동적 개입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기본단위를 집적 또는 배열하는 방
식이다.
 작가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물성을 강조하는 최소주의와는 다르게, 주체인 작가가 주어진 조건에 개입하여 얻어낸 각기 고유한 조각(Piece, Sculpture)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커다란 형상이다.

 마지막으로 조각적 드로잉(Sculptural Drawing). ‘조각가의 드로잉은 재료로 사용되는 매체의 물성탐구 로부터 출발하며, 필연적으로 메스(mass)를 조절한다’는 개념아래 제작되는, 본 작가의 조각적 드로잉(혹은 부조)이다. 대리석의 표면에 조형의 기본단위(점,선,면)를 조각기법을 통하여 중첩한다. 
 이것은 작가의 영감을 가장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포착해내는 작업으로 여기서 획득한 텍스쳐는 위의 두 작업방식의 바탕이 된다.

3. 작품에 내재한 신앙적 모티프(Faith Motif).
 작품 속에서 주요한 조형기호로 드러나는 원형은 시작과 끝점이 연결되어, 구분이 모호한 순환의 구조이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을 포괄한 모든 것에 대한 전지적관점의 영원성을 의미하고 있다. 
 삶 속의 그릇된 관념이나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자유로 이르는 길. 영원을 얻는 구원으로 이르는 길은 작가인 내가 최종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목적이자 안식이다.
 ‘Coram Deo’, 삶 속에 반복되는 무수한 과정과 매순간이 모여 완성으로 귀결되는 것. 보잘 것 없고 미약한 것들이보여 숭고함에 도달하는 것. 구원에 이르러 진정한 안식을 찾는 길이다.
 ‘Fiat Lux’, 성경에 기록된 세상의 처음에 행하여진 행위 ‘빛이 있으라’. 나의 작가적 행보 또한 미약한 시작단계이나 그것이 작가로서 도달하고자 하는 삶의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라는 인식이다.
 
“내가 내 삶의 온전한 주인이고자 하는 바람처럼, 내 작품은 자신을 찾아 나가는 수단이고 방법이다. 

나의 작업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내 생각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지 어떠한 무엇으로 귀결된 것이 아니다.” 
(_작가노트 2016 발췌)
2021-07-10 작가노트 2017 (N갤러리 개인전 -순백의 질서)
작가노트 2017 (N갤러리 개인전 -순백의 질서) 

내 존재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어떤 만족없이 결핍되어 무언가를 채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욕망한다.
최근의 나는 ‘내 삶은 어떤 것인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수없이 질문하며 스스로 답하기 위하여 대리석에 무수히 많은 흔적을 새기고 있다. 돌에 새긴 상처의 흔적들은 제각기 다르고 고유하지만 큰 틀에서 질서와 규칙성이 존재한다. 
나는 내 삶에 불확실한 진행에서 오는 불안을 카오스(Caos)로 규정했다. 다만 절망으로 폄하하지 않고, 불완전한 내 존재의 끊임없는 움직임이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 사고하며, 불안감은 결국 현존하는 나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풀이하였다.
나는 대리석이라는 강한 물성을 가진 재료와 대면한다. 조각을 한다는 행위- 긁고 파고, 새기며 갈아내는 조각적 행위를 반복한다. 그리하여 대리석의 본질과 부딪혀 규정되거나 계획한 형태가 아닌 충돌 과정에서 남겨진 행위의 흔적과 잔재만을 드러낸다.이것은 규정된 형태로의 완성보단 과정의 산물을 보여준다. 
무질서한 공격적 행위들이 무수히 반복될 때 생겨나는 일련의 규칙들과 질서의 중첩은 과정 중 생겨난 우연적인 패턴(pattern)을 보여준다. 이러한 나의 꾸준한 움직임은 현재의 삶에 대한 나의 노력이 아직 오지않은 현재인 ‘미래’로 안내해 주리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입체작과 평면 부조작으로 구성되며, 혼돈으로부터의 질서(Order out of Chaos), 이클립스(Eclipse) 그리고 불완전의 가능성(The possibilities of Imperfection)으로 키워드를 압축한다.첫째, 혼돈으로부터의 질서(La Nouvelle Alliance)는 카오스 이론에 대한 담론이 담긴 1979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자연과학서의 명제를 인용한 키워드이다. 대리석이라는 재료에 새기거나(Carving) 갈아내는(Grinding)는 행위의 불규칙적이고 무수한 반복은 작가가 예측가능한 범주이거나 혹은 예상 하지 못한 상처를 표면에 남기게 된다. 이 행위에서 본 작가는 조각적 행위에 집중하게되고 재료의 입자와 형태의 불규칙적인 파괴를 경험하게 된다. 과정이 지난후, 새겨지고 남겨진 흔적들은 꽤나 일정한 질감과 패턴으로 보여진다. 형태를 재현해내는 것이 아닌 조각적 행위의 과정이 결과가 되어지는 작업이다. 

둘째로 내 작업속에서 이클립스(Eclipse)는 월식을 나타내는 용어로 빛이 잃게 되는 것. 즉, 중요성 혹은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것들이 빛을 잃거나 권한을 잃게 됨을 지칭하였다. 혼란과 두려움으로 대변되는 이클립스를 통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있다. 그것은 이미 규정 되어져 고정된 관념과 속박에 대한 종말. 예컨대 새벽이 오기 전(Before dawn)의 짙은 어둠과 같으며, 새로움 혹은 시작이 도래함을 알리는 전조이자 희망의 메타포이다. 

마지막으로 불완전의 가능성(The possibilities of Imperfection)이다.
30대 중반의 현재를 보내는 본 작가는 결핍되고 불완전한 구축되지 않은 세계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 것 인가’ 라는 질문 속에는 ‘나는 작가로서의 삶이라는 과업(課業)을 감당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당연
히 늘 포함되어있다. 어쩌면 나의 이런 조각적 행위는 질문 속의 답을 찾기 위한 부단한 연구 과정이다. 
지금 작가로써 보여주는 행위들, 사고를 선행하는 손의 움직임들과 재료와의 상보적(相補的) 투쟁들이 자기실현을 위한 과정이길 스스로 기대해 본다.

2021-07-10 작가노트 2016 (키미아트 개인전-AMOR FATI)
작가노트 2016 (키미아트 개인전-AMOR FATI)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_헤르만 헤세<데미안> 
누군가 나에게 무슨 작품을 하는가? 물어보면 나는 대답하기 어렵다. 

내 작업은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해도 될까? 내가 내 삶의 온전한 주인이고자 하는 바람처럼, 내 작품은 자신을 찾아 나가는 수단이고 방법이다. 
나의 작업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내 생각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지 어떠한 무엇으로 귀결된 것이 아니다. 
몇 년 동안 꾸준히 구상작업을 해왔었다. 기억이 머무는 정황적 장면의 구성과 감정의 스침을 간결화된 구상적 표현으로 드러내는 행위였다. 석산으로 뒤덮인 이탈리아의 한 마을에서 시간을 모르고 해오던 작업은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나를 틀의 지배 안에 가두어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규제가 되어있었다. 나는 자신을 가두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기 위해 구상의 틀은 깨뜨리기로 하였다. 추상작품으로만 이루어진 전시를 준비하며 본디 조각이라 칭하는 근본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기로 계획하였다. 물론 추상조각만으로 다시 나를 속박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형(形)에 대한 저항이고 자유로움이고자 함이 있을 뿐이다. 
조각(彫刻)하는 행위- 긁고(沠), 파고(掘), 새기는(刻) 원론적인 행위의 반복이다. 
범주는 정하였으나, 결과는 예측되지 않는 작업. 과정에서 결과를 찾아내는 행위. 대상에게 물질적 공격을 가하여 생기는 과정에서 완전히 파괴된 그로테스크, 혹은 완전히 날것의 상태도 아닌 접점을 만들어 내는 일련의 행위를 추구하였다. 

본 전시 구성작들은 3가지의 주된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다. 
아상블라주(assemblage), Fiat Lux, 그리고 내면(Internal) 발현이다. 
아상블라주(assemblage)는 덩어리(mass)의 일부로 존재하다가 형태의 구현을 위해 껍데기로서 버려지는 파석(破石)들의 군집이다. 그 파석들은 형태구현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행위의 부산물이지만, 일련의 행위를 그대로 보여주는 과정 자체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 들에게 약간의 연마를 가하거나 지지대를 삽입하여 곧추세워 공간을 점유하게 하는 행위. 쓰임새가 없다고 파기된 유약한 잔재들이 모여 한 공간의 주체가 되는 일, 하나씩 둘러보면 그 하나하나가 각기 유일한 고유의 형태임을 알게 되는 일. 소소한 일련의 과정들이 뭉쳐서 나란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 모든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아내는 삶의 과정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Fiat lux et facta est lux" (Genesis 1:0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라틴어 바이블 첫 장에 쓰인 태초에 가장 처음 생겨나는 일에 대한 기록이다. 
Fiat lux는 탄생이며, 창조의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반면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눈 최초의 행위이기도 하다. 혼돈(caos)으로부터 탈피하며 새로운 창조를, 시작을 꿈꾸는 염원이기도 하며, 밝음(陽과) 어둠(陰)의 구분으로 시작된 형이상학적 이분법과 위계질서로부터 저항하고자하는 대상의 단어로 나에게 인식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내면(Internal-)의 발현이다. 작품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 내면에 가장 어두운 그림자로 감춰 두었던, 타인의 시선에 휘둘려지지 않은 온전한 나의 모습과 대면하는 일. 내, 외적으로도 성숙한 자기를 완성하고자 하는 일. 작업을 통해 성취하고 싶은 궁극적 목표이다. 그리고 Amor Fati. 매 순간 찾아오는 선택과 결정과 경험이 모여 만들어낸 지금의 나, 지금 순간들이 모여 만들어낼 미래의 나. 그 모든 운명이야 말로 존재의 증명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유가 있으며, 가치가 있다.
2021-07-10 작가노트2019 Awaken the dawn
Awaken the dawn. [새벽을 깨우다]


1. 
나는 ‘인간이 개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현 세계에 내던져진 자’라는 표현처럼, 삶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왜 존재하는가)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불안감을 가진 채, 그저 덩그러니 놓여있다.
어떤 특별한 계기로 생의 유한성을 체험하고, 결국 삶이란 것은 머지않아 끝나는 피할수 없는 과정이라는 한계상황 임을 자각하였다. 자의와 상관없이 세상에 놓여지고 떠나야하는 삶의 여정에서, 나는 무엇으로 삶의 가치를 증명할 수있는가? 나는 나의 의지를 통해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허비되지 않을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 위에 있는 불안의 세계’로 부터의 탈주를 시도한 것이다.

2. 
먼저 자각이 필요했다. 이는 ‘나는 무엇으로 증명되는 가’라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물음이다. 현재의 나는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부여받은 역할을 수행하지만, 예술을 하고 있는 나, 구체적으로 ‘조각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자’라고 정의 하였다. 즉, 예술적 행위, 조각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나타나는 예술세계의 양태가 나의 주체적 삶의 양태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매일매일 반복된 예술적 행위가 진전을 이루어 작가의 예술세계를 나타내어 주듯이, 미숙하고 불 완전한 현재의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노력하는 삶의 과정을 통해서 주체적인 자기실현으로 도달할 것이다. 
이것이 무작정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내가, 흑암(Darkness)의 세계에 균열을 내고 스스로를 던질 차원의 틈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나에게 ‘예술작품’은 스스로 결정 지어지는 창조적 행위의 반복을 통하여 얻어지는 결실이며, ‘예술적 행위’는 ‘나’라는 개별적 인간이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은 피투성(被投性)의 존재가 가진 불안의 세계로부터 균열을 내는 행위인 셈이다.

3. 
어둠으로부터 균열을 내어 빛을 받아들이는 것,  나의 작가적 행위를 통한 삶의 주체적 자기실현 의지로써 새벽을 깨우리라는 공언을 하였다.
나의 예술활동의 주된 질료는 대리석이다. 나와 대리석은 상보적 투쟁행위를 일으키고, 그러한 시간들이 모여 작가의 세계를 만든다.
질료를 종속 시키고자 하는 나의 의지적 조각행위와 대리석의 사물로 존재 하려는 성질은 끊임없이 부딪혀 투쟁한다.  이러한 행위의 과정 속에서 작품의 질감과 굴곡을 만들어내고, 이것들은 작품의 형태가 되어 작품은 그 생명력을 얻는다.
대리석은 작가가 감당해내는 예술노동의 실체이며, 작가의 삶 속에서 끝없이 부딪치고 투쟁하며 전진하는 상보적 대립체이다.
예컨대, 시지프 신화에서 형벌을 받는 시지프가 정상에 오르는 것이 삶의 양태라면, 나에게 대리석은 시지프가 굴리며 올라가는 돌 덩어리와도 같은, 육중하지만 그것이 있음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삶의 무게인 셈이다.
‘왜 이런 구별된 삶이 나에게 주어졌는가’의 답을 정상에서 찾기보다 돌덩어리에 밀리고 밀며 한 걸음씩 올라가는 과정 안에서 찾기로 한다. 혹여,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해도, 현재의 삶의 애착(amor fati)을 가지고 한 걸음 내딛어 본다.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결국, 나의 삶에 대한 의지의 표명이다. 어두움이 지나고 새벽이 찾아오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 일것이다. 그러나 나는 '새벽을 깨우리라’ 고 말하고자 한다. 이것이 나의 삶의 주체성에 대한 표명이고 예술가의 자유의지이다.

작가노트 2019_ 새벽을 깨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