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내밀한 현대인의 이상 공간 - ‘슈필라움’으로의 초대_김상철(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

내밀한 현대인의 이상 공간 - ‘슈필라움’으로의 초대

김상철(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

 

  예술은 작가의 예민하고 섬세한 직관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다. 제한적인 개인의 인식과 느낌은 구체적이기보다는 모호하고 애매하기 마련이다. 바로 그 모호함을 구체화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 할 것이다. 

  작가의 화면은 실내라는 특정한 공간의 조건을 중심으로 맑고 정제된 원색으로 구성되고 있음이 인상적이다. 탁하고 거칠며 어두운 색채는 배제되고 높은 명도의 색채들로 이루어진 화면은 강한 장식성과 더불어 시각적 쾌감으로 다가온다. 공간은 직선을 근간으로 잘 정돈된 질서를 보이고있다. 그것은 현실의 일상에서 채집된 것이지만 작가의 주관에 의해 해석되고 가공됨으로써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환치되고 있다. 원근이나 명암 등 합리적인 공간 표현은 배제된 채 오로지 기본적인 투시의 원칙만으로 사물 간의 관계를 설정한 공간은 일종의 절대 정적과 같은 고요함으로 충만하다. 인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정연한 질서의 공간은 순간 그것이 그저 눈에 보이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담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작가의 작품 중 눈에 뜨이는 것은 바로 ‘슈필라움’이라는 명제이다. ‘슈필라움’은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나만의 놀이 공간을 뜻하는 말로, 독일어 '놀이(슈필·spiel)'와 '공간(라움·raum)'의 합성어라 한다. 즉 타인의 관심이나 간섭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심리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온전한 자신만의 놀이 공간을 일컫는다. 이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는 '케렌시아'(Querencia)를 들 수 있다. ‘케렌시아’는 투우경기장에서 소가 잠시 숨을 고르는 영역으로, 현대인들에겐 남에게 방해받지 않는 피난처, 휴식 공간을 의미한다. 즉 ‘케렌시아’가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잠시 휴식을 취하며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는 안식의 공간을 가리킨다면, ‘슈필라움’은 휴식뿐만 아니라 온전한 자기다움을 되찾고 자신의   삶을 재창조할 수 있는 활동 공간이라는 차이를 말할 수 있다. 즉 공간의 크기나 상황, 조건 등과는 관계없이 혼자 있어도 지겹지 않고, 마음껏 자신을 드러내며 새로운 삶의 동력을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것이 바로 ‘슈필라움’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삶은 늘 위태롭고 불안한 것이어서, 인간들은 늘 이상향을 갈구해 왔다. 이상향의 대상과 내용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른 양태로 제시되고 표출되어왔다. 현대 사회는 기계문명의 절정을 구가하며 경험해 보지 못한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이른바 ‘인간적인 삶’이라는 가치에 대해 늘 회의하고 갈망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속도와 효율을 강조하는 무한경쟁의 삶 속에서, 그리고 급변하는 상황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감은 급기야 현대인들에게 만성적인 병적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회자되는 ‘힐링’이나 ‘웰빙’ 등의 가치는 바로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핵심적인 단어라 할 것이다.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고 바르게 읽어 낼 수 있는 단서가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셈이다. 

  작가의 화면은 색채와 이미지로 충만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비어 있는 정적인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인적도 드러내지 않는 절대 정적의 공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속에 깃들게 한다. 보는 이는 빈 의자의 주인이 되고 공기의 흐름을 주도하는 생기가 된다. 정교한 장식과 화려한 문양, 그리고 잘 정돈된 실내는 관객을 위한 작가의 배려인 셈이다. 작품의 명제가 지시하듯이 그것은 작가에 의해 구축된 현대인의 도피처인 ‘슈필라움’인 것이다. 굳이 작가의 의사를 강조하지도 않으며, 특정한 가치를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정돈된 공간 속에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일상에서 누적된 삶의 피로를 떨어내고 고갈된 기운을 재충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작가의 진솔하고 따뜻한 초대라 할 것이다.  

  화면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가 흥미로운 것이다. 전통적인 고가구와 상징성 강한 문양, 그리고 직선을 근간으로 하는 화면의 구성이 바로 그것이다. 재료의 사용과 화면의 구성은 다분히 서구적인 조형의 틀을 차용하고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동양적인 이미지를 취하고 있다. 더불어 문양의 내용들은 보편적인 인간의 욕망과 바램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는 일정 부분 민화와의 연계를 상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더불어 직선으로 구획된 화면의 구성은 민화의 유명한 <책가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주지하듯이 <책가도>는 책을 비롯한 도자기·문방구·향로·청동기 등이 책가 안에 놓인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문(文)을 중시하던 조선 후기의 작품 형식이다. 놓인 사물들은 전적으로 남성을 중심으로 한 욕망이자 이상의 또 다른 상징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전통적 요소들을 차용하고 해석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슈필라움’을 구축한 것이다. 

  전통의 차용, 혹은 재해석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전통의 깊이는 매우 깊고 넓은 것이기에 목적한 바를 쉽게 이루기 어렵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경우 소극적인 변형이나 부분적인 차용을 통해 전통과 창작의 애매한 경계에 서게 된다. 작가의 경우 분명 일정 부분 특정한 내용, 즉 민화 등을 비롯한 전통적인 것들로 부터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를 매우 효과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하여 표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현대라는 시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슈필리움’이라는 가치를 제시하고 여기에 전통적 가치를 수용해 냄으로써 전적으로 자신의 개별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되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시대에 대한 성찰과 전통의 해석과 수용에 대한 진지한 노력과 성취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고 누추한 공간이라도 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공간, 자아를 확인하며 온갖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꾸고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슈필라움’이라 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내밀한 삶의 경험과 공간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우리들에게 숨을 고르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은밀한 공간을 제안해 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그의 진솔한 초대는 반가운 것이며 기꺼이 참여 해 볼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서원 작가의 에 부쳐_주수완(우석대학교 조교수. 미술사학)

최서원 작가의 <The Present>에 부쳐

 

* 주수완(우석대학교 조교수. 미술사학)

 

현대 민화로 소개되고 있는 최서원 작가의 작품들은 민화 중에서도 특히 책거리 풍의 민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책거리는 주로 선비들의 서재에 있는 책장에 다양한 기물들이 늘어선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실제 그런 귀중한 물건들의 진품을 책장에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조선시대 당시에는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때문에 아마도 이처럼 그림으로나마 그려서 방을 꾸몄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나마 욕구를 해소하는 감상행위는 한편으로는 허세로 치부할 수도 있다. 만약 누군가 독일제 고급 승용차나 이태리 명품백을 가지고는 싶은데, 가질 수 없으니 마당에 독일제 승용차 벽화를 그려놓고, 옷장에는 명품백이 인쇄된 벽지를 발라놓고 마치 재력이 있는 사람인냥 뽐낸다면 그것은 정말로 허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책거리가 보여주는 허세는 단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대리만족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다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박물학적 취향이나 지식, 혹은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을 품위 있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책거리는 긍정적인 표현의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최서원 작가의 현대적 책거리들도 그 연장선상에서 읽어볼 수 있다. 작가의 작품들에 자주 사용되는 “슈필라움”이란 제목은 ‘개인적인 유희(슈필, Spiel)의 공간(라움, Raum)'을 의미한다. 평면적인 그림이지만, 이 그림으로 인해 그림이 걸리는 곳은 마치 자신의 취향이나 내면을 비춰주는 제3의 공간으로서 방 안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이케아 매장의 가구 진열 방식처럼 우리에게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고 있다. 이렇게 최서원 작가가 꾸며놓고 제안한 유희 공간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책장에 놓였을 청나라로부터의 진귀한 수입품이나 옛 것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즐겨 진열하고 자랑하였던 골동 취향의 기물들도 등장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것은 책이나 화병, 찻잔, 가구 등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이다. [그림1] 이러한 소품들은 더더욱 지적 유희의 쇼윈도처럼 우리도 쉽게 그런 공간을 따라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이 일어나게 한다. 비록 그림 속의 물건들은 실제로 사용할 수 없는 그림일 뿐이다. 하지만 만약 사용할 수 있었다면 단순한 물건에 그쳤을 형태가 평면의 그림으로 그려지고 실제의 용도와 쓸모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그 물건 자체를 인식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최서원 작가의 작품에 있어 “The Present”라는 개념은 선물의 의미, 그리고 현재의 의미와 함께 바로 “있는 그 자체”, 또는 “현재성”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정교하게 그려진 2층 자개농 그림은 실제로는 구하기 어려운 귀한 가구를 그림으로 그려 공간을 장식한 것이다. [그림2] 그림 속의 자개농은 물건을 수납할 수 있는 기능은 할 수 없으므로 결코 농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순수한 형태만 가지고 공간을 꾸미고 있다는 점에서 자개농은 물건의 수납이라는 쓸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아름다움 때문에 새로운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런 외부 사물의 ‘현재성’을 발견하는 행위는 점차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나아감으로써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현재성에 바치는(증정, 이 역시 present의 개념이다) 최고의 ‘선물’이자 찬사가 아닐까. 이는 마치 불교에서의 관불삼매(觀佛三昧) 수행과도 닮았다.

 

결국 유희의 공간이란 현실 세계에서 외부로 향해있던 자신의 정신을 다시 안으로 돌려 자신의 현재성을 발견하여 이를 자기 자신에게 오롯이 돌려주는 공간이며, 그것이 진정한 휴식이요 놀이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서원 작가의 그림 속 기물과 가구들은 하나하나가 새로운 고유의 생명력을 얻어 살아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나 나옴직한 신비스런 공간에서 물건들이 현재성을 얻고 나와 대화를 나눌 것처럼 기다리고 있어서 왜 작가가 <슈필라움>이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실감나게 한다. 사람은 등장하지 않지만, 물건들의 성격과 그 배열만으로도 방금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가 사물들을 더욱 살아나게 하고 있다. [그림3] 아마도 지금 그림 속에 부재하는 그 사람이 바로 그림을 관찰하고 있는 관찰자로서의 나 자신임을 아는 순간, 나는 차원이 다른 그림 속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환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그림 속 실내 인테리어를 연상하게도 되는 독특한 현대적 화풍임에도 민화라는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되는 이유는 이 작품들이 지니는 특징적인 공간 개념 때문일 것이다. 배경이 되는 공간 자체는 매우 평면적이면서도 그 안의 책장과 가구는 강한 원근감으로

그림  

 묘사되어 말하자면 부분적인 원근감으로 전체적인 원근감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그림4] 때로는 같은 깊이에 있는 가구들이 서로 다른 시점에서의 자유분방한 원근법으로 표현되는 것은 전통적인 민화에 보이는 복합적인 원근법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민화에서의 이러한 복합적인 원근법은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생각을, 한편으로는 비논리적인 공간으로 보이는반면, 최서원 작가의 복합적 원근법은 다양한 차원이 공존하는 현대물리학을 보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도 논리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때로는 굳이 빛을 화면상에 표현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조명기구에서 나온 빛이 화면 속 공간에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연상케 하여 이것으로 공간감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림5] 그림 속 사물들에는 그림자가 딸려 있지 않아 매우 비현실적인 공간임을 암시하면서도 마치 조명의 빛을 받아 자라고 있는 사물들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화면 속의 모든 사물들은 빛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도 받게 된다. 이런 관념적인 공간표현 기법은 전통 민화 책거리 공간구성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덕분에 작품 속 공간은 실제와 관념의 경계를 오가면서 존재하는 지적 유희의 공간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최서원 작가가 꾸민 이러한 지적 유희의 공간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항상 유쾌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 유희의 공간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주변의 세계를 탐구하는 데서 느끼는 재미와 그 탐구를 통해 결국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희열을 경험하게 해주는 아주 특별한 방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