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사랑의 얼굴 또는 밝게 채색된 시절_김노암 (문화역서울 예술감독)

조강남 전시 서문 (일부발췌)

사랑의 얼굴 또는 밝게 채색된 시절

- 김노암 (문화역서울 예술감독)

 

모든 예술은 진지하다. 그 외연이 어떠하든 자지 자신의 심리에 대한 깊은 성찰,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사회적 현상과 자연변화에 대한 유별난 관심과 몰입 등은 예술가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업적이던 취미로건 간에 예술에 종사하는 한 우리는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성실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고독한 순간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일관되게 중력을 거부하듯 자본과 상품과 유희하며 무중력 상태로 떠오르는 여인들을 달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비록 사물화된 에로티시즘일지라도, 또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달콤한 것이다. 결코 지루하지 않은 순간이 연속되는 현대 여성의 라이프스타일의 주요한 경향이 ‘캔디걸’의 사생활로 표현된다. 조강남의 그림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랑의 순간이자 환희이다. 그것은 ‘사랑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개인의 아니 일반 대중의 보편적인 환타지일지라도. 

그림 속 인물은 작가나 관객 자신처럼 동일화되는 나르시스의 회복을 통해 사랑은 구체적인 얼굴을 회복한다. 모호하고 흐릿하던 얼굴은 점점 실체를 갖게 되고 그것은 작가이자 관객의 시선에 초점을 만들어주는 구체적인 사랑의 이미지이다. 어쩌면 기호로 살아남아 유통되는 가장 유력한 사랑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조강남의 인물들은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순수하게 몰입하고 공감한다. 어떤 갈등도 고통도 끼어들 틈이 없는 순간이다. 관객은 기분 좋게 그림 속 인물들을 질투할 수 있다. 질투하는 순간마저 유쾌하고 행복하다. 세상이 정말 저렇게만 되어간다면 모든 예술가는 고통의 예술로부터 해방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밝고 아름다운 순간은 사실 너무도 어두운 불안과 깊은 우울과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떠올리니 그게 우리 인생의 비극이다. 

 

인생의 의미는 누구도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이다(우디 앨런). 우리는 결코 행복하지도 사랑이 넘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방향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멈출 수 없는 충동이다. 사랑의 뒤 머리만 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지나쳐 가버리는 사랑의 순간을 부여잡고 그 얼굴과 눈을 마주하고 싶은 것이다. 

 

조강남 작가의 이미지는 아직까지는 무리 없이 작동하는 이미지의 세계, 자본주의의 건강함과 도시생활의 기쁨과 희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인 것이다. 관객은 현실의 희로애락과 사회관계의 좌충우돌 속에서 사랑과 평강이 넘치는 팝의 세계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사랑의 얼굴을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