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엄윤숙의 회화에는 말이 없다.
[뉴시스아이즈]전준엽의 미술 산책-엄윤숙의 '말없는 회화'

엄윤숙의 회화에는 말이 없다.

서양미술사에서 말이 없어진 것은 세잔 이후부터다. 현실 세계를 재현하는 데서 벗어나 화면 속에다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회화가 현실의 이야기를 담아내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말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말이 없어진 회화는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새로운 수단을 만들게 되었다. 이야기 대신 감성과 이성으로 대중과 소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회화성’이라고 한다. 회화라고 구분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생겼다는 말이다. 이러한 영역은 회화의 기본 요소가 되는 점, 선, 면, 색채가 성격을 가진 독자적인 언어가 되었다는 얘기다. 즉 점, 선, 면은 더 이상 사물의 윤곽을 닮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며, 색채 또한 무언가를 실감나게 설명하기 위해 쓰이지 않게 되었다. 독자적 언어를 갖게 된 점, 선, 면, 색채는 화면 속에서 조화를 만들어 감성과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미술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던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는 100년이나 된 옛날 이야기다. 미술의 이러한 문법은 100년 동안 수없이 변형되며 끊임없이 새로운 미술 언어를 생산해냈고, 지금까지도 유통되고 있다.

이야기가 없는 엄윤숙의 회화도 ‘감성’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 온다. 감성을 자극하는 그의 첫 번째 언어는 색채다. 농익은 중간 톤의 색채가 빚어내는 조화는 고급스럽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 처음 느껴지는 감성은 격조다. 격조 있는 화면은 회화의 본령에 대한 향수를 자아낸다.

두 번째 보이는 언어는 붓질이다. 속도감이 엿보이는 세련된 붓질은 오랜 공력의 결실로 보인다. 많은 작품 제작 경험이 없이는 나타낼 수 없는 붓질인 것이다. 붓질과 어우러져 나타나는 것이 질감이다. 색채를 여러 겹 칠하면 나오는 두터운 느낌은 깊이 있는 화면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림을 오래 볼 수 있다. 그의 그림을 계속 봐도 싫증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질감 덕분이다.

엄윤숙 회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변형된 형태가 빚어내는 구성의 묘미다. 사물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 그의 화면은 단순하다. 그런 만큼 치밀한 계산이 따른다. 그러나 꼼꼼하게 재단된 구성만으로는 설득력 있는 화면을 얻기는 어렵다. 본능적인 감각이 뒤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구성에 힘을 실을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재능이다.

감성에 침투하는 엄윤숙의 회화를 보자.

‘국화차 한 잔’이라는 서정적 제목을 붙인 정물화다. 검정 탁자에 찻주전자와 화병이 나란히 놓인 구성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은 크게 두 개의 요소가 경쟁하면서 긴장감을 준다. 우선 배경의 분홍색과 검은색 탁자는 거의 추상화처럼 평면화되어 있다. 마치 미국 서정 추상의 대가 마크 로드코의 명상적 추상화면 같은 분위기인데, 분홍과 검정의 극단적인 대비가 경건한 긴장미를 연출하고 있다. 이에 비해 청회색으로 처리한 정물들은 최소한의 사실감을 갖고 변형되어 있다. 두 개의 정물은 검정 탁자의 윗부분을 중심으로 가지런히 놓이면서 거꾸로 된 직각 삼각형 구도를 보여준다. 화병에 꽂힌 흰 꽃을 기준으로 하는 직각 삼각형의 직각도는 탁자 위 오른쪽 모서리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데, 이 때문에 화면의 긴장감이 더해지는 것이다.

◇ 긴장미로 승화된 붓 터치와 색채

이러한 긴장감을 다독여서 긴장미로 바꾸어주는 것은 흰 꽃에서 튕겨져나온 듯 보이는 몇 올의 가는 붓 터치와 화병 뒤에 숨어서 빠끔히 모습을 보여주는 누런 색의 과일이다. 거기에 덧붙여 흰 점으로 슬쩍 찍어 놓은 화병의 하이라이트와 탁자에 비친 희미한 찻주전자 그림자에 찍힌 하이라이트가 화면 왼쪽 아래의 작가 사인으로 연결되면서 역삼각형의 팽팽하던 구성에 자그마한 파문을 일으킨다. 작가의 재치가 반짝이는 대목이다.

‘해바라기’를 그린 그림에서는 엄윤숙의 숙련된 색채 운용이 빛을 발하고 있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연상시키는 구도다. 마른 해바라기의 품새하며 누런 색 바탕이 고흐 그림을 빼닮았다. 그런데도 고흐의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작가의 힘이다. 그것을 받침하는 것으로는 청화백자 화병이다. 색채도 이질적이고 화병에 그려 넣은 전통 문양 또한 그림 전체 분위기와는 겉도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화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는 것은 색채 덕분이다.

엄윤숙은 바탕에 여러 가지 색을 켜켜이 중첩시켜 최후의 색채를 만드는 방법을 쓴다. 그런 탓에 배경의 누런 색에서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돈다. 누런 색 아래 청화백자에 쓰인 청회색을 칠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청화백자 밑에는 누런 색을 깔아놓았다. 이러한 제작 방법으로 얻은 색채는 물감의 두께가 빚어내는 묵직함과 함께 중후한 밀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엄윤숙의 그림에는 윤곽선이 없다. 색면과 색면이 만나서 생기는 자연스런 결과물로서의 선이 있을 뿐이다. 이는 정물을 그리겠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가 그리는 정물은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에 따라 화면을 구성하기 위한 요소에 불과한 것이다. 엄윤숙의 정물화에 정물은 없고 점, 선, 면, 색채가 빚어내는 아름다움 만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전준엽(화가)

엄윤숙의 작품세계_신항섭(미술평론가)
엄윤숙 서양화가

엄윤숙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마음속으로 짤막하게 경탄했다.
낯선 그림이었는데, 첫 눈에 아주 세련된 색체 및 형태 감각의 소유자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고상한 패션으로 치장한 매혹적인 여성과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의 그림은 단숨에 내 마음을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그림을 보면서 마치 연애하는 듯한 감정에 젖어들었던 것이다. 그 이후 그의 그림은 주시의 대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형태의 전시회를 통해 그의 작품과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그를 여러 형태의 전시회에 소개를 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 그림을 통해 느끼는 행복감이란 그런 것이다.

그의 작업은 정물화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일상적인 소재들을 가져다가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저 어디서나 흔히 구할 수 있는 컵이나 접시 화병, 거기에 꽂힌 낯익은 꽃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일단 그의 캔버스에 들어온 소재들은 고상하면서도 세련된 색채로 꾸며진 특별한 의상을 입는다.
시골아가씨가 갑자기 세련된 도시아가씨로 둔갑하는가 하면, 평범해 보이는 중년부인이 우아한 귀부인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의 감각은 가장 앞서가는 염색전문가 및 패션디자이너를 연상케 한다.
그가 보여주는 조형감각은 그림으로서의 전통적인 격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재를 변형하거나 왜곡시키는 조형적인 해석력은 기능이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선다.
거기에다가 오직 특출한 미적 감수성에 의한 미묘한 혼색 및 색채대비에서는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듯하다.
지식이나 아이디어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색채감각인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형태의 윤곽선은 날이 서있다.
자칫하면 손을 베일 듯 형태와 그 형태를 둘러싼 공간과의 접점을 아주 예리하게 전달한다.
그 날카로움은 어지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미적 감수성과 지적인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중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다. 사실적인 형태를 버리는 대신 그보다 훨씬 더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선과 형태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일상적인 감각으로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비상한 조형세계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가 만들어내는 윤곽선은 사실적인 형태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시신경을 극도로 긴장시킨다.
그러나 그 긴장감은 깊고 오묘한 공간감을 형성하는 색체이미지에 의해 완화된다.
사려 깊고 고상한 표정을 지어내는 색채이미지는 윤곽선의 도전적인 태도를 너그럽게 수용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색채대비에서 오는 시각적인 긴장이 점차 미적 감흥으로 전이된다.
이것은 조형언어의 경이로움이다.
그림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영적인 울림같은 어떤 환희의 감정인 것이다.
- 신항섭(미술평론가)
엄윤숙의 작품세계2_신항섭(미술평론가)
엄윤숙의 정물화는 그의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독특한 색채이미지를 구현하는데 그 중심적인 위치에 놓인다. 정물화는 지적인 조작이 용이한 장르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소재 선택에서부터 구성 및 구도 그리고 색채조합은 물론이려니와 형태묘사에 이르기까지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그의 작품세계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색채이미지만 하더라도 정물화이기에 자의적인 해석의 범위가 넓고 자유롭다.

정물화를 통해 조형의 마술, 즉 무한히 열려 있는 창작의 바다에서 꿈의 유영을 즐기는 것이다.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조망할 경우에도 정물화는 백모란과 같은 존재로 그의 작품세계가 개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물화의 경우 소재에 따라 색채배열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그의 색채감각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꽃을 소재로 한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도 강렬한 색채이미지를 지향하는 그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꽃은 저마다 고유의 색채, 즉 화려한 색깔을 가지고 있어 그 색깔을 중심으로 하여 배색이 결정될 수 있다. 전체면적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적을지라도 꽃의 존재감은 그 중심에 있기 마련이다. 향기처럼 발산하는 강렬한 존재성으로 인해 꽃이 중심적인 이미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