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통합과 생성의 화면-박영택

갈영- 통합과 생성의 화면   박영택(경기대학교교수, 미술평론) 

 갈영의 회화는 불가사의한 힘들에 의해 점유된다. 그것은 끊임없이 요동친다. 꿈틀거리고 흘러다니며 어디론가 이동 중이다. 그런 느낌이다. 
화면 전체를 액체성이나 바람, 기운의 흐름으로 바꿔놓고 있다. 그렇게 정지된 부동의 화면에 기이한 움직임을 부드럽게 안긴다. 
생성적인 상황성을 감촉시키는 한편 무척 다이내믹하고 속도와 시간, 공간의 힘들이 감지된다. 특히나 화면 자체가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마냥 활력적이다. 
현실적인 자연을 모방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적인 것들로 충만하며 죽은 물질, 질료들이지만 살아있는 상태로 나아간다. 
납작한 화면, 붓질, 색상과 형상들이 외부세계를 지시하거나 즉물적인 차원에서 물성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끼리 자족적인 생명체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것을 딱히 무엇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작가의 그림이 구체적인 대상을 재현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뭇잎이나 꽃, 인체와 자연을 자연스레 연상시키는 선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동시에 붓질, 색채, 납작한 화면, 질료로 귀결되는 추상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둘 사이에 묘한 균형을 잡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추상표현주의나 색채추상에 유사하며 
모더니즘적 회화의 근간에 충실해보이지만 동시에 이를 넘어서서 이질적인 것들을 융합하고 여성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통합적인 포용에 기반 한 작가만의 ‘회화’를 실현해보이고 있다는 인상이다.  

 갈영의 화면은 회화와 드로잉간의 전통적인 구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둘은 혼재되어 있고 상호보조적이다. 
대담하게 나뉜 색 면 사이로 자잘한 붓질이 관통하고 서로 상이한 선, 색들이 충돌하며 부딪친다. 그 파열음이 움직임, 동세와 함께 화면을 박진감 있게 끌고간다. 
그래서인지 캔버스 전체를 뒤덮는 모종의 리듬이 두드러지게 감지된다. 출렁이는 선, 움직이는 색, 힘과 방향을 지닌 면들이 가득하다. 
아울러 감추어진 구상적인 모티프의 존재를 넌지시 암시하지만 분명한 묘사는 피하고 있다. 그것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자연의 이미지와 그와 상반되는 도시이미지가 혼재되어 있는 세계의 풍경인 듯도 하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가 살고 있고 체험하고 있는 현실풍경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인 셈이다. 
자연과 인공의 도시란 상극적인 동시에 불가피한 생의 장소이다. 도시 속에 자연이 있고 자연 속에 도시는 개입한다. 이 두 세계는 분리되지 않고 현재의 우리 삶을 규정하는 장소들이다. 
그 장소, 공간은 사람들의 의식과 마음의 꼴들을 또한 윤곽 짓는다. 그래서 그 풍경은 또한 내면의 풍경, 심리의 공간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갈영의 그림은 추상의 기본적 요소에 충실하면서도 부단히 자신의 외부세계를 끌어안으면서 그리고 그로인해 파생하는 내부, 심리풍경을 통해 모종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편이다. 

 그림 안에는 유기적이고 부드러운 유선형의 선, 식물의 형상이 가득하고 그 사이로 날카롭고 딱딱한 직선과 기하학적 선들이 뒤섞여있다. 
서로 상반되는 것들 간의 조화나 융합을 떠올린다. 흡사 음과 양의 조화 같은 것 말이다. 또는 도시와 자연, 인공과 생명의 것들이 충돌하고 공존한다. 
여기서는 이원론적인 세계가 극복되고 다원적이면 다차원적인 세계의 이해내지는 자아와 타자를 구분해내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끌어안고 
그 타자의 수용 속에 더 커지는 자아를 경험하는 인식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따라서 화면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묘한 조화로 충만해 보인다. 
그것은 단지 기하학적이고 직선적인 것들의 충돌에 의해 가능한 것만이 아니라 한색과 난색, 투명하고 불투명한 질감, 넓적한 붓질과 자잘한 붓터치 등의 요소에 의해서도 강화된다.

 이처럼 작가는 서로 상반되는 것들을 화면으로 불러들여 그것들 간의 조화로운 상황을 연출한다. 그것은 또한 회화/그림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 조형적 모티브를 근간으로 하고 
그 위에 형상적 요소를 얹혀놓으면서 이 둘이 만들어나가는 화면을 실험하는 선에서 이루어진다. 작가는 주어진 공간 안에서 그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아니 적극적으로 주어진 틀 내에서 그림을 그린다. 
아니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공간을 분절하고 색/물감으로 덮어나가고 그 어딘가에 가늘고 예민 선들을 흘려놓았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그리고 묘사한다기 보다는 주어진 공간에 또 다른 공간을 가설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과 공간간의(색채와 색채 간에도) 길항작용을 적극 모색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유희’는 다분히 환영적이다. 
공간 속에 여러 공간이, 화면 안에 몇 차원의 공간이 파생되어 나가는 느낌이다. 
 
 주지하다시피 회화(화면)는 인간의 상상력과 추상적 공간개념이 펼쳐 보이는 지극히 인위적. 관념적 절대공간이다. 
그러니까 평면 위에서의 일루젼은 자연에서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가정상 평평하다고 전제된 면 위에서 보여지는 허구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 허구는 미술의 운명이자 현실계를 인식하는 한 몸이다. 
작가는 주어진 캔버스 화면을 부드럽게 절개하고 그 사이로 파고든다. 화면은 기하학적 선과 유기적 형태감 속에 여러 겹으로, 다층적 공간으로 구획된다. 
이질적이고 상반된 요소들 간의 길항에 의해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원근법에 의한 일루젼과는 색다른 환영, 깊이를 불러일으킨다.
이 일루젼은 앞서 언급했듯이 실재하는 외부세계를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의 지각과 감각 속에서 무엇인가를 야기하는 환상과 연관된다. 
형태와 색채가 관람자 속으로 침투하고 반향을 일으켜서 보는 이를 감동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흉내 낼 수 없는 서명과 같은 물감 자국, 붓질, 즉 자필적 제스처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제스처를 통해 어떤 구상적 내용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사적인 감정과 정서를 캔버스라는 물질적 장에 직접적으로 옮기고자 한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개인적 표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녀는 그림과 자신간의 합일을 중시하는 듯 하다. 
자신의 온 몸으로 그린 것은 결국 감정 몰입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것은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작가의 의무는 관람자로 하여금 그의 내밀한 감정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며 그의 미술은 독창성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가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만의 고유한 신체적 흔적, 스트로크, 물감 자체의 물성, 그리고 움직임의 장이자 구조로서 캔버스 표면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결국 그 화면은 작가의 활동적 현전의 징후로 가득하다. 
생명체가 지닌 모든 감각과 사유의 모든 것들이 여러 겹의 흔적과 표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갈영의 화면, 그림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노스탈지아를 향해-이수균

그리고 노스탈지아를 향해...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이 수 균

모더니스트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재현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데 그림그리기의 초점을 맞추어 왔다. 
세잔느는 사과나 여인의 누드를 그리면서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것이 환기시켜 줄 수 있는 그 다른 무엇을 보여 주고자 고민했다. 
물론 그 다른 무엇의 정체를 사과의 본질이거나 사과의 사과다움, 또는 인물의 정체성 등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세잔느가 세잔느로서 자기만이 파악하고 
느낄 수 있었던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결국 사과의 본질은 세잔느의 본질로 환원되는데, 그것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변증법적 인식의 순환구조 속에서 예술가의 독특한 세계를 형상화하게 해 준다. 
그리고 예술적 실천의 장점은 이러한 본질로의 회귀가 추상화와 단순화를 거쳐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변형의 역동성 속에서, 
그리고 예술가의 고유한 영역 안에서 구체적 형상으로 응결되고 변조한다는 데 있다.

나는 현대인이 예술 작품 앞에서 경험하게 될 의식의 흐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갈 영의 작품 앞에서 나의 의식의 흐름을 관조해보고 싶었다. 
우선 눈을 통해 감각의 표면을 흔드는 어떤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고, 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거기에 반발한다. 그리고 각각의 형태와 색채 속에 그 일차적 원인을 전가해본다. 
그리고 그 기하학적인 형태와 기하학적으로 변형되어 가고 있는 형태들의 공존을 확인하며, 내 최초의 감각적 경험들과 다시 비교해본다.
이러한 의식의 자극 또는 감각적 상처가 나와 함께 공명함으로써 일어난 자각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자극의 강도는 그 공명이 어느 층리에서 일어나고 있는가에 많이 좌우되지만, 
일차적으로는 그 공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삼각형이나 원, 사각형, 날카로움, 부드러움, 평평함, 넓음, 좁음 등의 형태들과 진하고 연한, 묽고 두터운, 
그리고 밝고 어두운 색채들은 우리 인식 경험의 기초적인 사물과 밀접하게 연관됨으로써 세상과 나의 공통분모로서 작용한다. 작품과 나와의 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내 의식의 표면에서는 바깥쪽의 그림으로부터 온 자극과, 안쪽에 존재하는 의식의 깊은 곳 속에 잠재해 있는 형태들과의 쉴 새 없는 대응과 비교 과정을 거쳐 자극의 근원을 파헤치고 
뼈와 살을 입혀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주고자 한다. 그러면서 나는 그 자극이 나의 기억의 어느 한편과 조우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비로소 그 최초의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의미로
예술적 자아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나의 예술적 자아를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힘을 튼튼하게 갖춘 작품, 그것이 나에겐 진정한 명화이고 예술작품이다.

나는 갈 영의 작품 앞에 섰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겐 예술작품이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득 갈 영의 작품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낯선 감정들이 아련한 슬픔의 형체로 다가옴을 느낀다. 폴 클레가 말하는 힘은 바로 여기서는 슬픔이고 향수였다. 
요동치는 듯한 회전력과 불안한 형태들의 배치, 느릿하게 익어가는 도시의 태양, 푸른 야광 속에 잠긴 파열음이 나에게는 흘러가버린 청춘을 향해, 
다다를 수 없는 노스탈지아로 향하는 뱃머리의 푸른 깃발처럼 흔들린다. 열린 창, 푸른 바다, 눈부신 태양, 뱃고동 소리, 소녀의 웃음소리...  

갈 영의 소중한 전시를 축하하며, 더 멋진 작품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