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원형적 메타포로 풀어낸 참 행복한 풍경-신병은
원형적 메타포로 풀어낸 참 행복한 풍경

평론 - 시인 신병은

풍경, 세상을 새롭게 보려는 마음의 창

 ‘우리가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실제로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섬세하고 폭 넓은 시각을 갖지 못했다는 뜻이다’ Richard Carlson의 말이다.  
  나를 열면 너가 보인다. 나를 읽고 너를 읽는 것이 통섭과 소통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꽃의 눈에는 꽃이 보이고 바람의 눈에는 바람이 보인다. 김상선이 즐겨 담는 메시지 중의 하나는 ‘바람’이다. 그리고 대상의 이면에 담겨있는 소리다. 가만히 귀대면 들리지 않았던 소리에 대한 관심이다. 그의 바람은 살아있는 화석이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에도 스스로 살아남아서 떠도는 실체일지도 모른다.
  그의 그림 앞에 다가서면 우리 사는 세상이 참 좋은 세상이라고 나직이 속삭여 주면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마음을 보여주고 들려준다. 그는 한때 해바라기 등의 정물을 통해 시들어가는 것들에 대한 애착을 담았고, 또 바람소리에 대한 관심을 화폭에 담았으며 그리고는 꽃과 나비를 거쳐 이제는 이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는 ‘자연 그리고 소통’이라는 포괄적인 주제성을 담아낸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스케일이 클 수밖에 없다. 대작 중심으로 한 것도 이러한 그의 철학을 담아내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랑법은 품이 넓다.  ‘무애’라는 말이 있다. 막히거나 거치는 것이 없음을 뜻하는 무애는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라는 전언과 통해 있다. 쉽게 태어나거나 쉽게 꽃피는 것은 없다. 무릇 생명있는 것들은 삶의 아슬한 팽팽함으로 살아가고 있다.  바람 불고 꽃피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읽으면서 기실 자신을 읽고 있는 중이다. 독서의 고수는 바로 자연을 읽고 끝내는 자신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럴 때 제대로 된 발견이 가능해 진다. 그 발견이 몸이 되고 삶이 되고, 내 피로 흐를 때에 한 편의 작품이 가능해진다.  아울러 관자로 하여금 ‘산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조형 즉 형상화란 관찰의 힘을 구체적인 삶과 연결짓는 사색이며 힘이다. 이 힘이 바로 우리 삶의 아픈 현실을 견디고 이겨내는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가 왜 이 낯익은 화두를 다시 꺼내들었을까.  아마 세계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읽어보려는 의지가 분명하다. 우리가 가끔 복잡한 삶의 현장을 떠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아닐까를 생각해 보듯 그 또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궁금한 것이다.
  나를 찾아 읽고, 읽어낸 나름의 의미를 고스란히 안겨놓으려는 것이 그의 의도라면 숨은 그림찾는 재미 또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의 풍경은 전복적 상상에 의한 재생이 아니라, 새로운 풍경으로 향하는 상상의 매체로서의 풍경이다. 그냥 풍경이 아니라 의미를 담고, 의미로 자리하는 풍경이다. 여기에는 자신을 읽겠다는 조형적 전략이 숨겨져 있다. 
  다소 이질적인 것 같으면서도 바다와 꽃과 나비, 그리고 누드의 신비감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는 그림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브제들은 저마다의 상징법으로 미적 호응을 이루는 이미지로 변형되어 있는 생의 의미를 엿본 체험의 풍경이다. 무엇이 풍경으로 자리하는가의 대답은 한 상황 속에 자리하고 있는 특수성과 화가의 정서적 특수성이 교감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전략은 공간적 신비감으로 확대되면서 세상을 보는 망루라는 새로운 미적 공간으로 안내해 준다. 그것은 그 스스로 이미 마음의 빈 공간을 마련하고 그 안에 풍경을 들여놓는 데서 가능하다. 논어에는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이라 했다. 앎의 기본은 솔직함과 겸손이고 나를 지우고 너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이기도 하다. 너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은 빈 공간을 가질 수가 없다.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비로소 대상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고 무언가를 안다고 느낄 때 다른 것을 새로이 발견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다.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면 우리 삶은 순환의 원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김상선의 풍경은 세상을 새롭게 보려는 마음의 창이다.  그의 작업은 풍경에 대한 몇 개의 창으로 비친다. 
  첫째, 작품들 면면마다 공통적으로 연결되는 연두빛 색감이다.  
연두빛은 맑고 깨끗한 희망의 이미지다. 그의 해석이 아니더라도 엑스포를 통해 꿈꾸는 지역민의 여망을 화폭에 담아두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녹색 톤과 조화된 연두빛이 작품 면면마다 기댐으로써 가식없이 진솔한 그의 기질이 드러나고 있다. 이는 의도된 것이 아니라 붓과 나이프 끝에 묻어난 그의 천성 그대로다. 그는 천성적으로 꾸미거나 장식을 다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그가 작업을 끝내고도 천성을 닮은 거친 질감이 살아있는 작품에 더 많은 애정을 갖는 것이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연두색감에 의한 희망적인 메타포의 정립, 그의 작업에서 얻은 또 하나의 수확일 것이다.
   둘째, 바람과 물의 풍경이다.
바람의 풍경은 동백 숲과 나무와 백도를 통해 조형미감으로 드러내고 있다. 나무들의 역동적 움직임을 통해 바람의 깊이를 헤아려 낼 뿐만 아니라, 바람의 의미를 조형적으로 탐색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바람은 곧 길과 연결되어 숲길로 이어지고 인간의 삶의 길로 연결된다. 
  숲에 비가 온다 ... 숲 너머로 숲의 세상이 보인다 ... 정겹게 소곤소곤 하나, 둘, 셋, 넷 ... 나무와 나무, 풀과 풀이 서로를 건너고 .... 세상의 창을 열고 비껴가지 않은 삶에 닿고 싶어 .... 서로에게 내려서는 법을 귀뜸하며 .... 눈 가고 마음 가고 .... 나무가 나무를, 풀이 풀을 건너고 있다.
   물의 풍경 또한 길을 통해 드러난다.  물은 근원적으로 맑은 것에 대한 투영이며 흐름을 표상하며 서로를 건너고 소통하는 영원한 표상으로 자리한다. 그의 물은 길에 대한 또 다른 풍경이다. 이처럼 세상을 보는 창으로서 풍경은 자유자재로 시선의 각을 달리하면서 체험 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 내면서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있다. 사실 풍경은 그 자체로 넓고 깊다.  근원적 깊이에서 가시적인 현상까지의 폭을 헤아리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체험적 사유로 넓이와 깊이에 닿으려 고민하고 있는 그의 야무진 의도는 풍경에 대한 볼륨을 한겹 더 두텁게 하고 있다.
  그가 즐겨쓰는 연두빛 색감은 또 다른 세상을 연상시키고 대상과 대상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할뿐만 아니라,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풍경 오브제는 우리를 신선한 상상력으로 안내한다. 그래서 그의 풍경체험은 세상과의 교감을 의미하지만 다만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만이 아니다. 수채화처럼 맑고 밝은 색감으로 우리 삶을 투명하고 가볍게 터치하려는 그의 기질이다.  보이는 풍경을 통해 보이지 않은 모습까지 소통의 길을 열면서 풍경의 볼륨을 높혀가는 김상선, 그가 이렇게 풍경의 새로운 의미 탐색에 귀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순환적 삶의 은유

  세계는 응시하는 사람에게 본질의 인식세계, 문제의식을 열어 놓는다. 문제의식은 자신의 삶의 창에 비친 대상의 본질이며 삶에 대한 문제인식이다. 세잔의 초록에 세잔의 감정이 녹아들어 있듯 김상선의 그림은 김상선의 몸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몸이 들어있다는 말은 그의 미적 경험의 반영이라는 의미의 또 다른 말이다.
  미적 경험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에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하면서 대상들의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읽어내는 일이다.  김상선은 그의 성격에서도 보이듯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무엇보다 앞세운다. 
  김상선의 그림을 읽는 몇 가지 관점은 첫째는 관념 혹은 사실만이 아니라 관념이 형상화되고 사실이 의미화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미적구속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로운 정신(Nomade)에서 ‘나’를 넘어선 ‘나’의 그림을 그린다는 점이며, 세째는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으로 상투적인 틀에 붙잡히지 않고 많이 그리고 또 그만큼 많이 지운 조형적 경험의 결과라는 점이며,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림을 남과 다르게 그릴 수 있는가’에 의미를 두는 점이다. 
  그는 그동안 한결같이 자연과 인간, 현실과 꿈 사이에 공존해온 삶이 그의 조형목표인 순환적인 삶의 근원에 어떻게 닿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면서 스스로 풍경 속에 설 수 있는 법을 탐색한다. 늘 보아오던 풍경을 조형적으로 새롭게 발견하고 해석해낸 그의 그림은 관자의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한 순간에 열어젖히고 마르고 건조한 구석마다 파릇파릇한 잎성을 피워준다.
  풍경 속에 안겨있는 새로운 의미를 탐색해 낸 그의 저력, 이것이 바로 작가와 관자의 소통의 길이고 예술의 위대함이다. 모든 예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실체의 관계성을 풀어낸 세계의 풍경이란 점에서 낯익은 소재를 낯선 느낌으로 담고 있는 독특한 조형법도 알고 보면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 있게 만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었다.
  그는 요즘 순환적인 자연의 표정을 어떻게 안아 전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해 신이 나 있다.  순환적인 삶의 회귀를 꿈꾸는 그의 시선을 단지 서정으로서 바라보기 보다는 명상의 깊이로 다가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분명 한 작가의 삶과 시선의 틈새에 웅크려 있는 그의 은유적 데포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은유는 현실을 떠난 현실의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빠져 나온 현실의 꿈꾸기인 리얼리즘이다. 그림 속의 대상은 스스로에게 몰입되어 표현된 상관물이지만, 작가는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며 그 이면에 담겨있는 조형의미를 발견해 내려는 것, 원형적 삶의 모습을 탐색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예술은 삶의 체취를 향한 영원한 회귀인지도 모른다. 사물의 확신과 실질성에 도달하는 것, 대상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 구현이며 육화된 형상화라면 존재로서 존재를 이해하게 될 때 진정한 조형적 깊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생각하면 우선 먼저 메를로 퐁티의 말이 기억난다. “.....예술이란 결코 모방이 아니며 또한 본능적 욕구나 훌륭한 취미에 의해서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표현과정일 뿐이다... ” 그가 한동안 관심있게 바라 본 것은 삶의 일상 속에 있는 인간적 고뇌와 시선 저쪽에 위치한  꿈이며, 그것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다. 
  모든 것이 물화되어 가는 오늘을 살아가는 작가로서 진정한 삶의 가치는 결국 보편적 꿈에 대한 회귀이며 은유적 꿈꾸기라 믿고 있다. 겉으로는 현란하고 수식적인 삶이지만 그 속에 살아가는 개개의 삶은 외롭고 고독할 수 밖에 없다.  “삶의 위장술을 벗는 나무처럼 탐욕과 허영을 벗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는 걸까, 진정으로 삶의 안쪽에 나있는 길을 나서면서 자신의 삶을 검정받을 수는 없는 걸까“
  이러한 보편적 삶에 대한 그의 고민은 자신의 그림 안에서 은유적으로 형상화되어 관객에게 은밀하게 전달되고 있다. 무엇이 그토록 무거운 고독 속에 가두어 두는지, 삶을 바라보는 그에게는 그것은 억압이며 무거움일 수 밖에 없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해가는 일상과 현실 속에 웅크린 대포름된 인간의 모습은 현대적 삶의 외연이자 내포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삶의 단순한 제스쳐가 아니라 진정한 삶의 가치로 되돌아 가보려는 반어적 작가의식이다. 도식적인 관념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그가 꿈꾸는 삶은 그래서 다분히 은유적이고 회귀적일 수 밖에 없다       
  그의 작품이 다소 원색적으로 시선이 옮아가게 되는 것도 알고 보면 은유적 삶을 향한 데포름이자 그만의 꿈꾸기다. 그래서 작품 앞에 서면 한동안 마음 속에 웅크려 있던 삶의 에네르기가 일시에 폭발하여 세상의 이곳 저곳에 마구 붓길을 내고 있는 것 같다. 자연과 인간, 현실과 꿈 사이에 공존해온 삶이 그 나름의 인상 속에서 데포름되므로써 꿈틀대는 삶의 현재를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그의 조형목표인 순환적인 삶에 대한 인식과 갈망에 닿아 있다  여기에 친숙한 소재를 통해서 낯선 느낌을 전해주는 독특한 조형법은 그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규명하고 그 가치를 화면 속에 담아 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흔히들 평범한 표현만큼 정확한 표현이 없다고 한다. 선명하고 분명한 표현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참된 소통은 고정관념의 일방성을 거부하고 그 정체성를 제시하려는 자유로운 정신의 끈질긴 모색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삶에 있어서 프롤로그이든 에필로그이든 그것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이해하고, 삶의 안에 채워갈 은유적 꿈을 꾸려는 것이 그의 작업이기에, 이러한 은유적 묘미를 읽어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감상이 아닐 수 없다.    
  창작은 자연을 읽고 자신을 읽는 행위다. 제대로 읽을 때 결국 대상도 작가도 작품의 한 부분이 되어 그 속에 들앉게 된다. 독자가 작품을 읽는 것도 알고 보면 작품 속의 작가를 읽고 그 속에 안겨있는 서정과 명상을 읽는다. 작품을 통해 그 안에 웅크려 있는 작가의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도 즐거운  매력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맑게 휑궈지는 그의 풍경,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서정적인 풍경을 원형적 메타포로 풀어놓은 작가 김상선을 읽을 수 있는 즐거움과 함께 우리로 하여금 삶의 근원에 한걸음 다가서게 할 것이 분명하다.
 참 좋다.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