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김수연 평론 - red pollution (고충환)

김수연의 작업
붉은 노을과 붉은 오염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현대인에게 있어서 자연은 더 이상 원시인에게서처럼 두려움이나 경외의 대상이 아니며, 칸트에게서처럼 인간의 인식용량을 넘어서는 숭고의 대상도 아니고,

파스칼에게서처럼 피안의 세계를 암시하는 신성의 지표도 아니다. 야생과 야성으로서의 자연, 소여된 자연, 주어진 그대로의 자연은 이제 인공정원과 화원, 화초와 화병, 그리고 정물화의 형태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나아가 실제보다도 더 실제 같은 플라스틱 조화(造花)가 자연을 키치화 하고 있으며, 자연 혼이 휘발된 그 빈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또한 현대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향 역시 상실했다. 고향은 더 이상 현 존재가 유래한 자궁이나 자연을, 그 원형을 연상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기껏 변두리 다방의 수조 밑에 가라앉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물레방아와 초가집 모형으로 키치화된 사물로써 고향을 향수할 수 있을 뿐이다.

자연에 대한 상실감, 고향에 대한 상실감, 원형에 대한 상실감이 한데 모여서 현대인의 정체성 상실을 낳고 있다.

현대인은 결여와 결핍을 존재론적 상처나 되는 것처럼 떠안고 사는 존재로서,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존재인 것이다.

김수연의 작업은 환경오염을 고발한다는 표면적인 의미와 함께, 기실 그 이면에서는 이런 상실감을 파고들어서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 고향, 원형에의 그리움을 주지시킨다.

김수연이 제작한 동영상 화면은, 고즈넉한 분지와 멀리 수평선이 바라다 보이는 갯벌, 담쟁이덩굴과 억새풀,

설경의 수림과 물레방아를 배경 삼아 이따금씩 한가로이 소요하는 사람들의 실루엣으로써 상실된 고향과 자연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 장면들 사이사이로 오수를 흘려보내는 하수구와 연기를 내뿜는 굴뚝, 정체된 자동차의 행렬과 크레인을 이고 있는 철골 구조물들, 그리고 전쟁 장면이 몽타주로 삽입된다.
원래 몽타주는 구 러시아의 전위적인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이 정식화한 기법으로서,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일관된 서사나 정조에 반(反)하는 이질적인 장면을 통해 극적 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소외효과, 소격효과와의 연관 속에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이나 현실은 그 자체 진정한 실제이기보다는 기실 이데올로기의 효과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이데올로기의 더께를 걷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일상이나 현실을 진정으로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친근한 현실을 오히려 낯설게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가리고 있던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인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작가의 작업에 적용해보면, 일관된 서사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보다는 자연의 이미지 즉 인간의 인식에 의해 해석되고 각색된 자연에 지나지 않으며,

더욱이 그마저도 여타의 문명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 물레방아는 더 이상 상실된 고향을 연상시키지 않으며, 아득한 수평선은 피안을 암시하지 못한다.

억새풀밭은 낭만의 지표이기를 멈춘 지 오래이며, 담쟁이 꽃잎은 다만 희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다.

고즈넉해 보이는 자연 풍광은 사실 이처럼 문명의 이기들에 의해 오염돼 있으며, 인간의 욕망에 의해 왜곡돼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자연 풍광에다 은근한 적갈색의 모노톤의 화면을 중첩시킴으로써 마치 그 경물(風物)이 온통 붉은 노을 속에 감싸인 듯 보이게 한다.

일견 자연을 신비화하고 있는 것 같은 이러한 필터 효과는 그러나 일종의 반어법의 한 형태로서 도입된 것이다.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들을 붉은 오염 혹은 공해(Red pollution)라고 칭하는데, 이러한 주제의식이 붉은 노을과 의미론적으로 부닥친다.

그러니까 화면에서의 붉은 노을은 사실 그 이면에서의 붉은 오염 혹은 공해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화면에서의 연기를 내뿜는 굴뚝은 낭만적이고 묵시록적인 기념비처럼 보이며, 유유히 흐르는 구름은 기꺼이 을씨년스런 철골 구조물을 지지하는 스펙터클한 배경화면이 되어준다.  

이러한 동영상 작업에다가 작가는 세기말적이고 묵시록적인 비전이 감지되는 암울한 배경음악을 삽입하고 있다.

한스 짐머가 블랙호크다운이란 영화를 위해 만든 음악이다. 미군이 개입한 전쟁을 다룬 이 영화에서의 블랙호크는 소말리아 분쟁에 투입된 미군의 전투용 헬기의 이름이며,

블랙호크의 추락이라는 영화 제목 그대로 미군이 소말리아 분쟁에 휘말려 이를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발목 잡힌 꼴이 되고만 현실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그 주제에 있어서 미군의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지옥의 묵시록과도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소말리아 분쟁이나 베트남 전쟁은 소위 세계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의 신제국주의와 그 침략의 양상을 엿보게 해준다.

이렇게 비판적인 주제를 다룬 영화이니만큼 음악 또한 다분히 세기말적인 비전과 함께 묵시록적인 애조를 띠고 있다.

작가는 이 음악으로써 환경오염과 문명비판을 주제로 한 자신의 작업을 뒷받침하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김수연은 동영상 작업 중 일정한 스틸화면을 취해서 이를 판화로 찍어낸다.

그러니까 동영상 화면과 스틸화면 즉 영상과 판화의 형식을 빌려 환경오염과 문명비판이란 주제의식을 심화하고 다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작가가 이미지를 석판화로 찍어낼 때 도입한 사진제판기법은 사진과 판화의 이질적인 두 장르를 서로 매개시켜주는 미학적 장치랄 수 있다.

 

사진제판기법은 현재 거의 모든 정통적인 판종에 널리 차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진제판기법은 정통적인 판화와의 일체감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일궈냄으로써 그 프린트의 표면질감이 기왕의 사진과도 다르고,

더욱이 차갑고 기계적인 느낌의 디지털프린트와도 다른 인상을 준다.

그러니까 그 표면질감이 손끝에 만져질 듯한 미세한 요철효과와 안료의 중첩효과 그리고 특히 종이와의 유기적인 관계로부터 유래한 이미지는

프린터를 매개로 한 압력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는 판화만의 아날로그적 미덕이랄 수 있다.

이처럼 김수연은 사진제판기법을 매개로 한 포토리토그래피(사진석판화)로써 사진의 현장성이나 사실성과 더불어 판화의 물질성을 효과적으로 결합해내고 있는 것이다.
김수연이 제안한 일련의 이미지들은 얼핏 환경오염이나 문명비판이란 주제가 무색할 정도로 정적이고 고요하며 평화롭기까지 하다.

이미지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엷은 갈색조의 화면은 자연을 붉은 노을로 물들이며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작가는 정작 이 이미지에다 붉은 오염 혹은 공해란 주제의식을 대질시키고 있는 것이다.

공장의 굴뚝이 내뿜는 연기도 멀리서 보면 그 자체 자족적이고 즐길만한 자연풍경으로 비칠 수도 있음을 주지시키면서, 바로 여기에 실제와 이미지와의 아이러닉한 관계가 작용하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구름이 연기와 구분되지 않으며, 붉은 노을은 기실 오염물질이 대기와 화학반응을 일으킨 것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내는 작가의 반어법적 표현이 주는 메시지가 세련된 형식과 함께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고충환 평론 

김수연 평론-지옥의 묵시록과 세계의 장엄한 종말(고충환)

김수연의 작업

지옥의 묵시록과 세계의 장엄한 종말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최선의 세계를 의미하는 유토피아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 속에선 존재하지 않는,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세계다.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과 보상심리가 만들어낸 그 세계는 완전한 자기동일성의 논리로 구조화돼 있어서 일체의 비동일적인 것, 차이 나는 것, 이질적인 것, 타자에 해당하는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어쩌면 그 세계는 질서라는 이름의 제도에 의해 완벽하게 짜여진 고도로 인공적인 세계, 전제주의와 전체주의, 경찰국가와 전자정부의 또 다른 형국일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비동일성의 논리에 의해 지지되는 디스토피아는 일체의 다른 것들, 차이 나는 것들, 이질적인 것들, 일탈적인 것들, 급진적인 것들, 상식과 합리와 논리에 붙잡히지 않는 것들,

샤먼과 토템, 마술과 요술, 점성술과 연금술, 사디즘과 마조히즘, 엑스터시와 오르가즘, 무분별한 욕망과 분출,

과도한 무질서와 혼동, 금기와 터부, 잉여와 여분, 결여와 결핍, 그리고 광기와 같은 타자들의 제국이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자기동일성의 논리와 비동일성의 논리. 정체성의 논리(유토피아 제국에 입성하려면 정체성이란 패스포트가 있어야 한다)와 차이의 논리.

정상적인 것들의 제국과 비정상적인 것들의 제국. 선남선녀들의 제국과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나라.   

그리고 헤테로토피아. 김수연은 근작에서 헤테로토피아를 주제화한다. 원래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미셀 푸코가 정식화한 개념이다.

주지하다시피 푸코의 저작에는 주요한 공간 혹은 장소 개념 두 곳이 등장하는데, 판옵티콘과 헤테로토피아가 그것이다.
나는 너를 볼 수가 없는데 너는 나를 볼 수가 있는,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의 감시체계가 판옵티콘이라면, 헤테로토피아는 부재하는 장소며 탈장소의 개념이다.

분명 실제 하는 장소지만, 정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장소며 망각된 장소다. 이를테면 군대, 감옥, 기숙사, 정신병원, 공동묘지, 그리고 공창지대처럼 사회의 한 형태이면서도 소외된 사회며 커뮤니티다.

보다 광의적으론, 사실 이 의미가 무엇보다도 결정적인데,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장소며, 보다 적극적으론 이질성이 생성되는 장소다.

단순히 실제 하는 장소 개념으로서보다는 의식적인 개념이며 실천적인 개념이다. 정상성의 사회로부터 비정상성의 낙인이 찍혀 사회 변두리로 추방된 변방-사회며 잠정적인 사회 개념이다.
그 곳에는 일종의 억압이 일어나는데, 이를테면 정신병원은 정신병자와 함께 잠정적으로 사회를 불안하게 할 수도 있는 소위 반사회적 주체를 격리수용하는 시설이며,

공동묘지는 삶의 관점에서 볼 때 지극한 금기에 속하고, 또한 공창제도는 합법적으로 욕망을, 성을 관리하는 제도의 수행성을 증명해준다.

푸코는 이 일련의 반사회적 사회에 내재된 억압의 계기들, 금기와 터부의 계기들에 주목하고, 궁극적으론 그 계기들에 내장된,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원동력에 주목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푸코 식으로 재해석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를테면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주인(동시에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분배하는 주인)과 정체성을 인정받으려는 노예와의 게임 곧 인정게임에서,

특히 그 게임에 작용되어지는 노예의 자의식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계기를 본 것이다.         

육체와 영혼이 거래되는 장소. 중세 이야기 중에는 유독 자신의 그림자를, 영혼을 악마와 거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아마도 신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억압적 이데올로기(이를테면 세속적인 삶에 한눈을 팔면 지옥에 간다는 식의 이데올로기) 탓이 클 것이다.

종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는 그렇다 치고, 적어도 외관상 신도 죽고 이념도 죽어 진정한 인본주의 사회를 실현한(?) 현대인에게도 이런 일은 일어날까.

유감스럽게도 그 일은 현대에 와서 오히려 더 억압적으로, 은밀하고도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푸코는 개별주체에 대한 제도의 감시가 이전처럼 육체를 감금하던 것에서 개인의 의식을 파고드는 것으로 진화한 것으로 본다).
인간을 복원하기 위해 신을 죽였지만, 정작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절대적인 신, 무지막지한 신, 인정사정없는 신이 그렇게 죽은 신의 빈 자리에 대신 등극했는데,

자본주의 물신이 그것이다. 그 신은 인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뻔뻔하기조차 하다(자신의 속물근성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그 신은 세계를 크게 유산자 계급과 무산자 계급으로 나누고, 무산자 계급에게 여지없는 비정상성의 낙인을 찍어 사회의 변방으로 내몬다.

부자 되세요(부자가 아님, 사람도 아니지요). 자기관리를 위해선 스펙이 필수지요(졸라, 평생 인턴만 뺑뺑이 치다가 그 모양 그 꼴로 죽으세요).

몸값을 올리세요(몸값?). 똥배가 부의 상징인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먹고 살기 힘들 때 일이지요(아직도 먹고사는 일에 종사하세요?) 등등.
이렇게 사회로부터 추방된 타자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들만의 공동체를 찾아냈는데, 그곳이 바로 헤테로토피아다.

 

지구 밖이 아닌 지구 안쪽에, 도심 밖이 아닌 도심 안쪽에 둥지를 튼, 도심 속 변방인 그곳(비정상성의 간섭에 의하지 않고, 정상성 자체의 모순과 한계에 의해 스스로 내파 하는 곳)은 버려진 곳, 폐허가 된 곳,

도심의 쇠락을 침묵으로써 증언해주고 있는 곳이다. 이를테면 재개발 건축현장의 빈 방(변두리로 쫓겨난 원주민들)이나, 버려진 공장지대(도산된 중소기업), 교각 밑 어스름한 곳과,

수변시설물 같은.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저마다의 발가벗은 몸을 전시한다. 이렇게 발가벗은 몸을 전시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한번도 발가벗어본 적이 없는 자신의 영혼과 처음으로 대면하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동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며(자신과 마찬가지로 쓸쓸하고 피폐해진 영혼을 냄새 맡는 커밍아웃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현듯 그곳에 들이닥칠 물신을 위해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를,

자신의 몸이 갖는 상품적 가치를 확인하고 전시하기 위한 것이다(피 얼마? 신장 얼마? 눈알 한개 얼마? 몸 포기각서 얼마? 그리고 주민등록증 얼마?).
그곳은 장소도 의심스럽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도 의심스럽다. 그곳도, 그 일도 친근하면서 낯선데 알만한 장소 탓에 친근하고, 비정상적인 상황 탓에 낯설다.

여기서 작가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 소외효과, 소격효과를 시도한다. 누가 그들을 지목하고(알튀세는 제도가 개인을 호명할 때 정체성이 생성된다고 한다),

그들에게 비정상성의 낙인을 찍고, 그들을 타자로써 추방하는가? 작가는 자본주의 물신이 팽배해진 시대에,

천민자본주의의 속물근성이 노골적인 시대에 있을 법한(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현상들,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는 소외와 모순의 계기들을 추슬러 한편의 장대한 드라마로 재구성하고 극화해 보여준다.

그 드라마의 색조는 전작(붉은 오염)에 흐르던 지옥의 묵시록만큼이나 암울하고 비극적이고 비장하고 장엄하다.

세계의 장엄한 종말? 노예는 정체성을 쟁취하고,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의 허위를 넘어설 수가 있을까?

작가의 전작도 그렇지만, 근작 역시 어설픈 답보다는 암울한(차라리 음울한)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

김수연 평론-꽃에 숨은 따끔한 독설(김승현)

꽃에 숨은 따끔한 독설

인간이 오랫동안 한눈을 파는 동안 지구가 황폐해졌다. 이러한 문제는 이제 소수 환경단체의 것만이 아닌 범세계의 골칫거리가 되어버렸고

서구화와 산업화에 매진했던 우리 또한 그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길이란 없는 듯 하다. 한참이나 늦어버렸지만 지금은 자연에게 진 빚을 갚을 때다.

물론 자연은 인간에게 빚을 놓은 적도 없다. 인간이 얄팍한 꾀를 내어 침묵하는 자연을 파먹다가 자신마저 다칠 입장에 섰으니 이제는 생명체와 자연계 앞에서 고개 숙일 때인 것이다.

반성의 기미를 보이는 것이 가상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자연을 물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건강한 물주로부터 더 벗겨먹는 꿈을 꾼다.

입으로는 자연과 인간이 구분되지 않는 신토불이를 말하지만 손과 머리는 그게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 인간이 세계의 왕자로 군림하려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은 조금도 늦추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그러하도록 내버려 둘 때 자연은 반짝거리고 인간은 풍요롭다. 자연은 인간에게 보호받고 치유받기를 기다리는 무력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작디 작은 기관을 지닌 방대한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이 옳다. 결국 인간은 제 살을 파먹다가 뒤늦게 다가온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셈이다.

환경에 대한 의식을 지금의 궤도에 올려놓기 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진이다. 긴 말이 필요 없는 보도 사진가들의 충격적인 사진과 지구의 오염도를 전해오는 위성사진은

환경문제를 보편적이고 가까운 문제로 부각시키는데 한 몫을 하고 있는 사진의 본보기다. 김수연도 사진을 통해 환경을 이야기하는 또 한 명의 사진가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을 고발하고 드러내는데 치중하지 않는다.
 그가 첫 개인전에 달아놓은 “The positive warning for environment" 이라는 제목이 당황스러웠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당시 그가 보여준 꽃은 스튜디오에서 매우 깔끔하게 연출된 것이었다.

흑백과 컬러이미지를 하나의 화면에 공존케하고, 꽃의 다자인적 요소를 부각시킨 완성도 높은 사진이었으나,

정물사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평이한 인상으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환경을 위한 긍정적 경고 라 해석될 그 전시의 제목은 환경에 관한 기존의 사진이 고발에 머문 소극적 작업이었음을 시사하는 바.

결국 정면승부를 걸어 보겠다는 게 그의 심산이었음을 알려준다. 그 사진을 지켜보는 일이란 박물관의 화석을 구경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꽃을 보며 흘린 감탄이란 생명의 아름다움에서라기보다 는 부동의 즉물성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박물관 진열장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당시의 모든 환경과 사회적 망에서 떨어져 나온 하나의 물질이다.

생명이 붙어있는 꽃이 그러한 토대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는 더더욱 초라한 회색이 되고 만다. 꽃을 꽃이게끔 하는 것은 그 존재의 주변에 펼쳐지는 갖가지 사연과 이를 움직이는 생태계의 섭리다.

이로부터 빠져나온 꽃이란 뿌리박을 땅을 잃은 박제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처연하게 다가온다.

이 연작인 환경문제를 다룬 사진이 되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난제가 남지만 ,맵시나는 인공미의 뒤에서 조작된 자연의 차가움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근작을 보면 그의 작업관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진 속의 고가든가 그 앞에서 색채를 머금고 있는 꽃들은 이미 현실 속에서 ‘보호관찰’의 대상이 되어 버린 품목들이다.

대문만 열면 늘어 서 있었을 초가와 한옥은 도시로 부터 추방되고 들에 피던 꽃들도 부가가치 높은 상품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꽃들 역시 화원에서 거래되는 꽃처럼 싱싱하고, 잘 다듬어져 있다. 꽃의 상품화는 아스팔트 위에서 성립한다.

상품화한 꽃과 사라져가는 전래가옥은 각기 산업화의 결과물과 축출물이며,

따라서 양자 간의 조화롭지 못한 만남은 산업화의 와중에 하나의 상품이 되어 살아남은 생물과 고사의 위기를 맞은 문화간 생경한 만남이다.

이 부조화는 표면에서 드러나는 흑백과 컬러이미지 간의 채도차이 만큼이나 동떨어져 있다.

흑백과 컬러의 충돌이 빚어낸 간극은 이미지에 서린 문화의 충돌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그 골을 넓히는 것이다.

초가와 튤립의 만남이 주선되는 이 ’불륜의 현장‘은 두 이미지를 하나의 지지체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사진의 수완으로 지켜진다.

그 덕분에 오려붙이기 식의 초보적 몽타주로는 수행할 수 없는 완벽한 ’불륜‘은 성사되는 것이다.
 포토 몽타주(photo-montage)는 일찍이 정치적 선동의 도구로 맹위를 떨쳤던 창작의 한 방법이다.

분쟁 속에서 한편에 서야했던 몽타주가 김수연의 손에서는 인류 공동의 사안인 환경을 위해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진 역시 구호를 외치지안 시끄럽지는 않다. 좌우대칭의 수평구도로 이루어지는 화면구성은 바람없는 수면처럼 평온하기만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저곳에서 이는 몽타주의 파문은 작지 않다.

정적인 이미지들의 비약적 만남이 초래하는 몽타주의 역동성은 김수연 사진의 뼈대이다.

그의 사진이 구현하는 이러한 ‘정중동’의 역설은 고급스러운 유머처럼 많은 것을 생각게 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는 그의 사진이란 신열을 내는 현실의 환경에서 나오는 까닭에 뒷맛이 곱지 못하다.
                                             
-김승현.서남미술전시관 학예연구원-

김수연 평론-missing the lost environment(최건수)

missing the lost environment」시리즈는농가의  벽면들을 찍어 놓은 사진들로 꾸며진다.

서남 학예 연구원 김승현은, ‘...인간이 오랫동안 한 눈을 파는 동안 지구가 황폐해졌다...이러한 문제는 이제 소수 환경단체의 것만이 아닌 범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어 버렸고,

서구화와 산업화에 매진했던 우리 또한 그 elf레마에서 빠져나올 길이란 없는 듯 하다.

한참이나 늦어 버렸지만 지금은 자연에게 진 빚을 갚을 때다.’ 라고 시작하는 글에서 김수연의 사진의미를 풀어낸다.

그러나 김수연의 의도와 김승현의 맞장구를 배반하고 싶은 것은 또 무엇인가? 이 놀부 심보에 김수연 사진에 대한 얘깃거리 하나를 얹었으면 하는 욕심으로 속내를 털어 놓는다.

사진가와 평론가가 설정한 이 사진들의 패러다임(환경사진)을 벗어나자 마치 블랙홀처럼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끌어 당기는 무엇이 앞을 가로 막는다.

그것은  도시. 속도. 산업화... 같은 것에서 벗어나고자 극히 단세포적 추측이 그것이다.

오늘의 사회에서 내일에 대한 전망을 잃어버리고 낙원은 옛 것에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발상이랴! 그럼에도 그것이 그리운 걸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김수연의 토속사진의 맛을 느끼는 동안 문득 옛 서랍들의 사진첩을 끄적인다. 그들의 사진은 김수연의 그것보다 훨씬 향토적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또 하나의 까닭은 재치와 감각이 어우러져 있는 90년대의 젊은 사진가가 본 그리운 대상으로서의 고향과 삶의 일부분으로 가난과 고난을 운명처럼 보듬어 안고 있는 상징으로서의

농가모습을 당시 이 땅의 사진가들은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찾아본 사진가들은 정해창를 비롯하여 임응식, 김제권, 김광석, 이해문, 이형록, 최민식 씨 등인데 실망스럽게도 이들의 사진에서 농가 그 자체가 주제가 되는 경우는 찾지 못했다.

‘너무 익숙한 것은 사진적 대상이 되지 못했’거나 또는 당시의 생활주의 리얼리즘에 너무 경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져 보았다.

반대로 오늘날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서는 ‘초가집’은 인기 품목으로 등재되어 있다. 각종 공모전의 도록을 살펴보라,

박정희씨의 새마을운동 후 초가지붕이 걷히고 그 곳에 슬레이트가 덮인 후에는 도로변에서 ‘초가집’을 만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으로 변했다.

이런 여건 속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승주 ‘낙안 마을’, 온양 외암리 ‘민속마을’, 그리고 횡성이나 멀리 제주도 성읍의 ‘초가집’만이 간혹 보이고,

나머지는 용인 민속촌의 초가집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모두 ‘고향’이란 감투를 쓰고 말이다.

이런 사진은 늘 그런 장소에서 쉴 사이 없이 찍혀지고, 그런 제목을 붙이기에 마치 70년대 순정영화처럼 손수건이 젖도록 울어도 극장문을 나서면

삼류 영화라고 단정해 버리고 싶은 ‘나쁜 사진은 아니나 좋은 사진도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김수연도 그것을 염려 했을까?

그는 초가집을 찍어놓고 “이 사진들은 환경사진입니다”라고 말한다.

마치 입센의 처방 ‘경계선 표지 말뚝을 옮기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이다.’ 라는 말을 따르듯 보편적 정서를 특이한 정서로 바꾸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가는 길은 ‘근사하고 특이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경계선의 표지 말뚝을 다시 제자리에 옮겨 놓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왜 그러고 싶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내 주변의 이런 저런 모습 때문일 것이다. 오늘 보도된 짧은 단신.

「․…시인 정지용의 생가(초가집)가 사람이 살지 않는 관계로 폐가가 될 운명에 놓여있다. 이 집에 살기를 바라는 예술가, 또는 고시생에게는 무료로 이집을 내 드립니다. 연락바람…」

이란 글귀를 보니 마음 한 구석에 서늘한 그늘이 내린다. 늙어가는 시인의 집에 마음이 쓰인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 빛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랴

 시인의 체취는 사라지고 빛 바랜 종이 위엔 그의 시만 남은 것인가?

또 다른 문제는 우리 주변을 강하게 에워싸고 있는 후기 산업사회에 대한 불안감, 또는 무감각 등과 같은 징후들이 안전장치 없이 우리 삶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것에 대한 위기감 같은 것이다.
 리오따르는 포스트 모던의 조건(Lyotard: The postmodern condition)에서 현대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레게 음악을 즐기고, 서구적인 것을 감상하며, 점심으로 맥도널드 음식과 저녁에는 쿠루아상(Croissant)을 먹으며,

동경에서는 파리제 향수를 뿌리며 홍콩에서는 복고풍의 의상을 즐겨 입는다. 지식은 TV게임을 위한 재료로 둔갑한다. 키치가 됨으로써 예술은 애호가들이 선호하는 취미에 맞춰가기를 열망한다…
 이처럼 현대라는 풍경 속에서 망가진 개인의 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절망감.

따라서 이런 것들로부터 일탈하고 싶은 현대인들의 열망과 좌절 같은 것이 진열되어 있다. 그 토대 위에서 김수연의 사진을 바라 본다면 그의 의도를 얼마나 배반하는 것일까?
 예상대로 사진은 용인 민속촌에서 찍혀졌다. 오늘날 우리가 옛 생활 모습을 엿보는 것은 권력에 의해서 강제로,

또는 관광 상품으로 새롭게 조성된 곳에서나 가능하다. 유럽의 그것처럼 모던한 사회에 클라식한 모습으로 녹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외딴 곳에 격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집들은 정지용의 집처럼 빈 집이거나 마네킹이 사는 집들이고, 사람 냄새가 가셔진 깔끔하게 단장된 집들이며, 또한 앞 뜨락에 서서 구경하고 감상해야 할 집들이다.
 이 김수연의 초가집들은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2:1로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아파트의 구조물 처럼, 어설픈 초가의 모습을 벗고 견고한 사진가의 조형의지 속에서 해체 후 다시 구축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의식 아래 에서는 툇마루에 앉아 하염 없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을 바라 볼 수 없다.

또한 곰방대 입에물고 맨드라미, 봉선화, 백일홍, 분꽃이 피고 지는 꽃밭에서 모이 줍던 장닭이 먼산 쳐다보다 삐죽이 열린 사립문 사이를 빠져나가 햇볕 가득한 고살길로 접어드는 것을 어찌 볼 것인가!
그런 것은 휴일 날 민속촌으로 나들이 나간 도시인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진가는 그것이 속상하다. 끝내 하얀 배경지를 뒤로 하고 , 그 꽃들은 스튜디오에서 사진가의 정교한 연출에 의해서 다시 찍혀진다.

2:1로 구획된 사람이 없는 초가집과 스튜디오에서 인공광선을 받으며 찍혀진, 그 잊혀진 꽃들과 정연한 질서와의 만남.

함께 있어야 할 것들이 함께 있지 못하고 하나는 관광지에서, 다른 하나는 스튜디오에서 찍혀져 사진가의 강제에 의해서 어설픈 동거를 해야 하는 고통이 사진에 스며 있다.

그것은 현대의 또 다른 아픈 풍경이다. 그러니 이렇게 태어난 고향을 어떻게 마음의 고향으로 삼을 것인가?
 「고향은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 진다」그래서 이 사진들은 난산 끝에 사산으로 끝난 고향 이미지인 셈이다.
갈 수 없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실패, 그 실패를 통해서만이 다다를 수 밖에 없는 향수가 김수연 사진에 진득이 묻어난다.

나는 다시 한 번 스튜디오에서 찍혀진 사진에 주목하다. 그러나 키를 맞추고 일자로 늘어서서 개별적 아름다음을 드러내는 파,코스모스, 맨드라미등의 몸짓에서 불안감을 느낀다.

모여서 이루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마치 역사와 사회의 구속감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가벼움」을 만끽하는 90년대의 신세대처럼,

꽃들은 스스로의 존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싶은데, 그것들은 여전히 불안하고 획일적이다.

꽃들은 개별자로 서 있지만 이미 당도한 후기 산업사회의 새로운 질서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질서를 동경하며 서 있다.

그것들은 ‘새로운 미’, 예를 든다면 선형적이고 통일적이며 구조적 미를 만든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상에서의 탈출과 급격한 존재 전환을 꿈꾸지만 여전히 완전한 미를 이룰 수 없는 불안정하고 유동적 상태에 놓여있다.

따라서 이 꽃들은 화병에 장식된 일회용 꽃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넘지 못하기에 그의 고향은 가상의 고향일 수 밖에 없다.

이제 정리하고 매듭짓자. 전체적인 그의 사진은 앞서 말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느껴지지 못할 만큼 견고한 구성력과 섬세한 연출력의 소산이다.

특히 배경을 이루는 초가집은 4*5 사진기가 주는 입자의 섬세함이 아름다운 흑백의 계조로 보여주고, 전경을 이루는 화려한 컬러 꽃들은 배경의 차분함을 배반하며 시선을 머물게 한다.

흑과 백의 질서에 컬러 질서를 아우르는 사진이 김수연 사진의 외향적 지향점일 것이고, 그 구성은 성공적이다.

아마도 이런 성공의 배경은 그가 학부 과정에서 전공한 디자인에 크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빈틈없는 구성력이야말로 사진의 대상이 갖고 있는 원초적 푸근함과의 충돌이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키며 긴장을 생산하고 있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까닭에 나는 이 아름다운 사진 앞에서 불안과 갈등을 느끼는 것이다.

사진은 아마도 사진가가 말하고 싶은 것과 사진가가 미처 말하지 못한 그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택스트와 콘택스트 사이를 왕복하는 것은 아마도 보는 사람의 몫이자 권리일 것이다.

내게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전이 또는 그 화학반응이 늘 관심거리다.

그런 면에서 김수연 사진은 내게 사진이 본래의 촬영의도에서 벗어나 기화된 상태로 ,일정한 형태 없이 허공에 부유한다는 것에서 새삼 흥미로운 것 이었다.

 

-최건수 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