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성근 개인전에 부쳐 II : 세상 밖으로-주성열

성근 개인전에 부쳐 II : 세상 밖으로

프로로그 - 시공간을 뛰어 넘는 감성여행
그의 전시 평문을 쓰는 일이 두 번째이다. 2005년 11월 초에 열린 개인전 도록에 글을 채우면서, 그의 열정이 묻어난 그림들의 현기증 나도록 맑고 투명한 이미지와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을 기억한다. 원하든 아니든 시간은 흐르고, 그도 그림도 긴 터널을 통과한 기차처럼 또 다른 풍경 속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나는 그들과의 동행을 허락받고, 기꺼이 몽상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한다.

1. 글을 시작하며 - 창작의 행복한 고행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본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김환기 
 
김성근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가평의 작은 마을 ‘가둘기’에서 심상을 출발시켜야 한다. 무엇이든 감싸 안는 자연 즉, 포근한 우주 삼라만상의 유기적 삶을 경험한 그의 몸은 도시적 감성보다는 토속적이며 자연친화적인 환경에 밀접하다. ‘가둘기’는 어린 시절 자연이 제공하는 풍요로움을 몸으로 느끼게 한 낙원이었고, 훗날에는 애정과 연민의 공간이 된다.
이번 전시에 제시된 풍경은 지난 개인전에서 보여준 재현적 풍경과는 달리 현실을 닮아있지 않다. 작가가 체험한 시간과 공간을 밝고 고요하게 몽상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자연을 향하는 욕망의 직접성이 상상력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달리 말하자면, 자연을 향하는 이성적인 욕망에서 니체(Nietzsche)의 상상적인 욕망으로 전이되는 과정이다. 플루서(Vile'm Flusser)의 용어를 빌리면, 인간이 세계를 변형시키는 팍툼(factum)으로부터 세계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것 즉, 다툼(datum)이라는 인식으로의 회귀다.
변화는 구상화 작업에서 축적된 연출방식, 사진의 정체적이고 관념적인 요소를 탈피하고 디지털 사회가 추구하는 변화와 감각적 취향의 패러다임으로의 방향전환을 뜻한다. 종속적 구성보다는 젊어진 취향의 삽화적 구성, 맥루한(M. McLuhan)이 말한 ‘핫미디어’로서의 선명한 색감과 고화질의 저변 확대, 디지털 구술문화가 지닌 항상성, 미디어를 통해 보는 가상과 실제의 모호한 구분을 그는 새롭게 감지하고 있다.
보이는 풍경화에서 상상의 풍경화로 옮겨가는 것. 일상을 떠난 가상의 풍경화는 감상자에게는 그다지 큰 사건이 아닐 수 있어도 작가에게는 매우 획기적 전환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화면에 포착하는 일이 인간 욕망과 이성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과 다름 아님을 조심스럽게 밝힌 적이 있는데, 진정으로 자연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를 떼어내고 분류하여 평가하는 일은 가당치 않을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폭력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는 분명 예전과 달라져 있다.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는 동안의 자연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에서 적잖은 고행이 수반되는 작가적 삶에 대한 성찰이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자연을 화폭에 품으려는 대부분의 작가들처럼,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창작의 과정이 수행자의 고통과 그것을 극복한 기쁨을 함께 가져오는 길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축적된 문명의 욕망을 조금은 털어버리고 밝고 아름다운 몽상의 세계에 대한 상상과 신비로움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몽상이 그를 어디까지 끌고 갈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규범에서 벗어난 그의 여정은 현실재현의 알레고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음이 분명하다. 이제 자연을 무한한 변화와 생성을 추구하고 인간을 성찰하게 하는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고 김성근의 몽상으로 추상화 된 풍경은 호소하고 있다.
욕망은 꽃을 시들게 하지만 소망은 꽃을 피우는 것이 삶의 진실이다. 인간이 문명의 욕망과 자연의 소망을 동시에 원하도록 길들여져 있다 하더라도 상반된 갈등을 버리지 못하는 자에게 세상을 사는 일은 고통이거나 그냥 묵묵히 견디는 일인 것이다. 황홀한 삶의 몰락과 승화 된 삶의 환희가 여정 속에서 융화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풍경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치유하고 재생산해내는 자연 원래의 위력을 회복시키는 임무는 인간의 몫이다. 인간이 자연을 타자화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억지스러운 풍경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새로운 삶은 불가능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 休息의 공간-이상향의 이미지
이미지란 자연이 그 자체로 지니고 있는 근원적 의미를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재현해 내는 것도 아니라, 그 대상을 상상력을 통하여 숨어 있는 의미, 새로운 의미의 운반자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보들레르 (Chaeles Baudelaire)
그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푸른빛이 발하는 시각적 충격이 신선하다. 세밀하게 그려진 실상과 정연한 화면 구성은 금세 감정이입을 발생시키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림이 꼭 아름다워야 하는 건 아니지만 관객에게 미적 쾌감을 주는 본래의 의무를 실행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구름을 헤집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그의 참으로 명쾌한 시각적 판단과 세심하게 드러난 작가 정신을 만나게 된다.     
그가 명명한 타이틀 <세상 밖으로>는 인간의 욕망으로 문명화된 공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공간, 이름 붙여지지 않은 이상적 공간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현실도피는 아니다. 인공적 탐욕과 근심이 좁혀놓은 현재의 실경으로부터 평화와 휴식을 제공하는 순수하고 정화된 공간으로의 전환을 꿈꾸는 몽상의 세계를 말한다. 
하늘을 포함한, 공간과 공간 사의의 논리적 연관 관계를 거부한 모자이크식 공간은 우리 시선으로는 쉽게 조망될 수 없는, 문명이 배제된 자연만의 모습이다. 이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거나 구경하는 풍경과 다소 다르다. 그에게 하늘은 인간이 문명화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므로 영원한 안식처로 이상화 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르카디아(Arcadia)로, 자연을 자연 자체로 파악하려는 것, 자연을 시각화 하려는 의도보다는 휴식과 명상과 기도를 하는 생성의 장소 즉, 모태로 보존하려는 것이다.
휴식을 취하다 떠난 자리인지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인지, 그림 안에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공간이 펼쳐져 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더 안정적인 공간에서의 휴식을 취하는 자의 여유로움으로 느껴지는 푸른 공간은 유쾌하다. 자리는 언제나 비어있기에 누구든 아무 때나 와서 쉴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밀짚모자의 소유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소유 가능하다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하다. 
자연을 생의 동반자이자 생명의 원천으로 승화시키려면 자연을 탐구할 것이 아니라 숭고한 우주의 모습으로 되돌려야 한다. 그래서 자연의 모습처럼 적나라하게 알몸을 보여주는 그림의 공간은 최소한의 도구에만 의지하여 가식 없이 자연으로 향하도록 우리를 설득하고 있다. 
그는 궁극적으로 문명이 제거된 원초적 공간, 불필요한 것을 제거한 진공의 세계, 영혼의 정화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를 조망한다. 그 공간은 참다운 진실의 빛이 차단된 문명의 공간, 네온 빛으로 가득 찬 인공의 공간, 순환하지 못하는 팽창의 공간, 시간의 흐름이 차단된 막힘의 공간, 욕망으로 넘치는 황홀한 공간에 물든 이들에게 무심할 것을 요구한다. 허공을 나는 새와 구름에게도 그저 자취를 남기지 말 것을 요구한다.
지나친 넘침과 막힘으로 시종 곤란을 겪는 인위적 세계의 순환장애를 말끔하게 해소해 줄 자연의 세계는 인공낙원이 아니라 자연의 낙원이다. 하늘아래 살면서 넒은 우주를 모두 살펴 적합한 자리를 찾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하고 바쁘게 돌아간다 해도 쉬려는 자에게 훌륭한 공간은 마련될 수 있다. 당장 하늘을 품어 보라. 그 공간은 나를 쉬게 해준다. 공중에 삶의 은신처를 마련한 새들이, 원한다면 우리를 위한 공간을 그들이 배려하지 않을 리 없다.

3. 休식의 시간-비동시성의 동시성
우리가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위대하고 훌륭한 걸작은 시의 적절하게 사는 것이며, 자연의 흐름에 따라 아주 단순하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이다.”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작품에 제시된 시간은 객관적 시간이 아니라 경험적 시간의 개념이다. 절기의 명시가 명확하지 않고 휴식의 계절인 가을에서 시작되는 듯하지만, 두 개 이상의 계절이 혼재되기도 한다. 과거 속에 현재가 있고 현재 속에 과거가 있는, 두루 퍼져있는 시간에 대한 성찰이다. 시간에 대한 성찰은 종교적 감수성을 지니게 하고, 거기에 몰입함으로써 심란한 일들을 잊고 몽상의 이미지에 이르도록 한다.
현실과는 달리 그림에는 어둠의 세계와 밝음의 세계가 동시에 드러나 있다. 어둠은 추억의 시간이고 그리움을 일깨우는 시간이며 정돈되는 시간이다. 어둠의 시간이 닫히면 기다림 뒤에 희망이 싹트는 유한한 밝음의 시간이 순환하는데, 어둠은 밝음과 겹치고 밝음을 어둠과 겹쳐 한 몸이 된다. 인간이 영원과 초월의 존재를 인식하는 몽상의 시간 즉, 밝음과 겹치는 어둠의 공간은 인간적인 삶을 복원하려는 의지, 생명을 성숙시키는 의지,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고 모성적 상상력을 보존하기에 서로는 혼돈이나 단절을 지니기 보다는 닫힘과 열림이 동시에 흐르는 상호 보완적인 공간이 된다.
‘미래는 과거보다 더 늦은 것이 아니며 과거는 현재보다 더 이른 것이 아니다.’라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주장처럼 화가는 시간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고 공간 어디에서나 편재가 가능하도록 재현되어 있다. 보편적으로 시간은 절대적인 연속성을 지닌다는 불가역적 믿음이 있지만 개개인이 느끼는 시간의 관념은 다르다는 생각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이는 선형적 사고방식에서 구조적 지각방식으로의 변화인데 과거의 시간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이 한 공간에 정돈되어 있어 우리는 그 모두를 동시에 보게 된다. 이는 디지털시대의 시간개념과 유사성을 지닌다.
또한 그의 종교적, 경험적으로 축적된 시간들은 자유로이 넘나드는 순환성을 가지며 매우 주관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어차피 우리는 어제와 오늘을 통합하여 살고 있다. 과거는 어쩌다 생각만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품고 회상하고 그리워하며 영위하는 시간의 토막이다. 감정이 시시때때 다양하게 변하는 것만큼 체험으로 축적된 과거는 몽타주처럼 혼재되어 동시에 의식하며 살아가게 한다. 그러기에 그림 안의 공간은 천상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인 작가가 꾸민 유토피아적 공간, 행복의 시간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다.

4. 휴식의 동반자-여성적 감수성
“짜라투스트라가 말했다-대지는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그 피부는 여러 가지 병을 앓고 있다. 예를 들면 이 병들 중 하나는 ‘인간’이라 부른다.” Nietzsche
빈 미술사 박물관에 만토바 출신의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 Mantegna)의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비밀은 왼쪽 하늘에 그려진 구름에 말을 타고 가는 인간의 형상이 어렴풋이 오버랩 되어 있는 것이다. 김성근의 작품 중에도 암시적 형상을 문자로 드러내는 숨겨진 구름 이미지가 있는데 이는 작가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의도적 반영이다. 다빈치의 아이디어에 따라 자연을 단순히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예술적 상상력을 끌어내는 원천으로 보고 자연에 얽매이지 않으려 의도한 작가의 반증을 보여준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언어가 만든 시스템으로 세상을 탐색하고 분별한다. 바다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바다가 있기에, 우주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생명체가 지구에는 넘쳐나고 있다. 작가는 바다를 그리고, 감상자가 판별의 어려움을 느낄지도 모를 ‘말풍선’ 형식의 구름 모양을 보여주는데, 베이컨(Francis Bacon)의 ‘마음의 욕구에 따라 어떤 사물이 나타난다.’고 하는 말을 빌려 이해를 돕기로 한다. 이는 다소 이기적인 발상임을 감수하더라도 ‘아는 것을 본다.’라는 주장처럼 보이는 것은 보려는 감상자의 의지에 따라 의미가 적용될 수 있으므로 인간의 획일화된 시각적 판단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프랑스어 바다와 어머니(mer/m&egrave;re)라는 두 단어는 발음상의 차이가 없어 발음 기호로 표기해도 구분되지 않는다. 생명의 발생지 혹은 요람으로서의 바다는 생명체의 어머니임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바다가 바다라는 이름을 달기 이전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바다와 구름, 어머니는 한 몸이다. 언어로 구별되지 않는 순환적 대상이다.  
김성근이 회상하는 유년기의 아늑한 집이 진정한 그의 집이다. 나지막해서 거북이를 닮았던 유년의 집은 하늘 속 모노톤으로 아스라이 과거로 보내고, 유사한 감정을 수반하는 미래의 집을 그림 밖에서 새로이 몽상한다. 그림처럼 밖에 모자가 걸린, 누구나 상상하는 미래의 집은 있을 수 있다. 이 진정한 휴식의 공간은 시간적으로 앞서있어 보여줄 수 없으므로 미래의 공간 유토피아를 담고 있는 집으로 승화된다. 이는 감상자도 마음으로 꿈꿀 수 있는 집이기에 관조의 폭은 넓어진다. 
이처럼 그림에는 두 개의 휴식 공간이 감지된다. 하나는 그림 밖의 공간 즉 감상자가 서있는 몸의 회복을 위해 마련된 거처이며, 다른 하나는 그림 속에 그려진 정신적인 평화를 위한 공간이다. 그림 속 다양한 사물은 여러 인물들을 제시하는데, 지팡이를 의지하던 노인, 여성과 남성, 농부, 노동자, 우산으로 몸을 가리던 사람, 잠시 보따리를 내려놓은 나그네… 그들은 또 다른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며 걸어놓은 모자, 의자, 지팡이와 보따리를 잠시 잊고 있을 것이다.
구름은 유동적이어서 순환적인 속성대로 공간을 채우거나 비워 가는데, 특히 뭉게구름은 흩어지면서 가볍게 분해되어 수직 상승하는 생명의 진정한 실체로서 역동적인 구름의 이미지를 극대화 하고 있다. 세속화된 공간에서 더 이상 거룩한 곳은 찾을 수 없기에, 상승하는 구름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꿈꿀 권리를 회복하며 정신이 투명해지는 유토피아를 펼쳐 보인다. 원시적 생명력을 가진 투명하고 건강한 뭉게구름은 현실에서 순수를 꿈꾸는 것과 닮아있기에 자유로운 몽상의 세계로 이끌어 근원적 안식의 세계로의 인도한다.
자작나무일까. 가늘고 하얀 나무는 청명하면서도, 땅 속에 강인하고 깊은 뿌리를 내리고 오래 서 있는 속성을 보이며 머무름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준다. 상처를 보듬은 흔적 옹이로 장식된 하얀 나무의 건조한 껍질은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을 대신하는 알레고리로서 자신의 아픔을 지닌 채 다른 상처를 거두어야 하는 일상과 일체감을 이룬다. 질곡의 세월을 견딘 남성다운 소나무의 강건함도 연약하지만 부드러운 수직적 실체 앞에서 빛을 잃는다.
인위적으로 만든 도로나 자연의 흐름을 재단한 인공낙원을 구실로 홈을 파놓은 곳이 아닌 매끄럽고 부드러운 공간은 이성보다는 감성을, 남성적이기보다는 여성적 논리가 깃들어있다. 이에 따라 작품은 풍경을 바라보는 객관적 시각, 보편적 시각, 남성적 시각, 판단의 시각, 분별의 시각, 이성적 시각에서 중성적 시각, 여성적 시각, 주관적 시각, 느낌의 시각으로 성격이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적 감수성을 지닌 작가의 욕망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된 도시적 삶의 공간을 거부하고 모성적 본능으로 공간 일체를 감싸 안으며 그 안을 달콤함으로 채워간다. 
이상은 세속사회의 관습화 된 시각을 털고 구원의 색, 구원의 공간을 발견해 나가는 작업과정이면서 결과이다. 푸르고 싸한 빛깔이 초월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일상과의 소통을 거부한다는 의미는 진정 아니다. 빛으로 충만하기에 빛나는 색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도 자연에 기댈 수 있기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몽상의 시간을 말하고 있다.

5. 맺는 말
“우리가 예술품을 이해하면 할수록 그 만큼 즐거움을 줄어들게 된다.” 아도르노
남은 말을 추슬러야 하는 시간이 왔다. 분석하고 설명하기가 간단치 않은 그림들이었다. 명쾌하고 깨끗한 세계의 강렬한 빛의 감흥은 더 이상의 수사가 필요 없으리라는 장애를 만들었다. 그것은 결국 새 생명의 에너지를 간직한 고요한 빛과 진지함이 빚어낸 가벼운 세계, 초월적 힘을 담고 있는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의 표시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상투화된 개념과 선입관으로 그림을 대한 건 아닌지, 혹은 지나치거나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자꾸 서성거리면서 말문을 닫는다. 다만 작가가 금기와 억압으로 굴절된 길을 가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장식성과 멋 내기가 과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장점이다. 치밀한 디테일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순수함과 속됨의 경계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음을 은폐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색이 가져다주는 난감함도 있을 수 있지만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푸른빛은 순수했던 시절의 행복한 경험을 표현하기에 더 없이 적절한 색임을 부인할 수 없다.
감상자와의 소통을 극대화하려는 작가의 의도 또한 곳곳에 나타나 있다. 그림의 장식성과 정밀한 테크닉을 일부러 거칠게 표현한 부분은 고민과 사색을 거친 회화적 장치이다. 작가는 간혹 그림을 잘 그리는 일이 죄가 되는 듯하다는 불편함을 드러내며 잘 그려진 그림을 두고 못마땅해 하기도 한다. 그것이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예상하지만 노자(老子)적 무심의 정신세계를 공유하기 위해 고뇌를 딛고 만들어진 필요한 방식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채롭게 채워진 공간은 대지에 몸을 맞대고 살면서 더 이상은 살아온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낙원의 상실을 보상하는 치료제를 발라 놓은 듯하다. 감상자의 몸으로 스며드는 빛깔, 살아가는 불편한 일을 잊게 만드는 낭만적인 환상, 그리고 이기적인 인생을 영위하는 자들의 위선적인 행복이 아니라 진정한 즐거움을 주는 희망적인 감동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풍경화의 풍경은 작가가 소유한 자연,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대상물이다. 자연을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인간의 이성적 논리와 시각적 특권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구경거리로 전락한 이러한 자연의 복원을 꿈꾸며 생의 방향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의 이번 작품들은 자연을 풍경으로 그리지 않으며 대지를 구체적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소유하기 힘든 하늘처럼 보이는 공간만을 제시하고 거기에 인간의 흔적은 최소화하고 있다. 풍경이 되기 전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유지하고 인정해주는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소극적으로나마 강조하고 있다.
욕망을 가볍게 만드는 건 세월일까라는 질문을 한다. 나이가 든다고 욕망의 무게가 허공을 나는 새의 깃털처럼 가벼워질까. 나는 어디로 가기에 휴식도 없이 무거운 욕망을 짊어지고 가는가. 되돌아가거나 나아가는 방법도 잊어버렸다. 순수한 세계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욕망을 챙기기 위해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 하는 오래된 집은 이제 땅으로 기어들어가나 보다. 자연은 없고, 물질적인 사유에 집착하는 인간만이 존재하는 세계. 작가가 제시한 유토피아는 가능할 것인가. 작가의 꿈이 이루어질까.
그가 다채롭게 제시하는 이미지들은 길 위에 머무는 자들의 소박한 몽상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도 분명 마음먹기에 따라 이런 모습으로의 변신이 가능하리라. 종말의 세계와 비교해  보면 분명 살만한 공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이 사라지는 날 인간만이 덩그러니 남아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우리가 취해야 할 응답은 뻔하고 뻔하다.
에필로그-남아있던 비판적 시각
그림을 처음 대하면서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는 느낌 하나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심상을 기점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루어낸 이미지들이 첨단 디지털 방식의 모니터 영상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작가가 지나치게 자의적 이미지에 함몰되어 능동적으로 발상하지 못한, 일종의 각성에 그친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일이다. 그가 원하는 이미지가 실재 풍경과 관계없다고 하더라도 그림 안 풍경에 몰입한 나머지 경험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회피하는 은둔자적 처신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위험한 생각도 든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언명처럼 그는 실존으로부터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만의 울타리를 다듬는, 어찌 보면 사회에 대해 지나친 결벽증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만약 그렇다면 그의 ‘몽상놀이’는 가상도 실제도 아닌 관념의 이미지가 주는 유리알 유희처럼 유념 ․ 관념에 따라 다양하게 변질 될 수 있다는 짐작이 가능해진다. 현실감이 사라진 몽환적 실재가 시공을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가 말하듯 표상의 세계만 보여주고 마는 것은 아닌지도 염려스럽다. 자연에 진실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침묵하기 위해서이다. 너무 많은 말과 이미지를 드러내어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면 인간이 하는 예술에는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       
주 성 열 / 예술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