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솔, 숲을 떠나다-김정대
솔, 숲을 떠나다.

오래된 물상들에 대한 심취는 구명본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내재하는 일관된 정조였다. 
그의 작업실을 방문해보면 이러한 작가의 기조를 단박에 눈치챌 수 있는데 잘 정돈된 고풍스런 물상들이 놓여져 있는 작업실 분위기에서 작가의 과거에 대한 깊은 존중과 
자신이 현재까지 진행하여 체득한 자기내면에 대한 탄탄한 신뢰감을 엿볼 수 있다.   
클래식한 풍경이나 정물들을 클래식한 화풍으로 그려온 그가 근자에 들어 몰두해온 모티브가 다름 아닌 ‘소나무라는 바에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주지하다시피 소나무는 한국의 산야에 지천으로 보여지는 한국인들의  오랜 역사와 함께한 친근한 나무이다. 
회화적 대상으로서 소나무가 주는 미감에는 여타의 식물(특히 꽂)보다는 거칠고 딱딱하고 투박한, 한마디로 남성적인 이미지가 우선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생명 할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이 식물의 내력에는 예로부터 한국 사람들의 실용에 깊이 개입하였고 늘 푸르른 모습이었기에 강건하고 고고한 인품을 상징하는 바이기도 했다.
구명본은 그러한 면면들을 가진 모티브로서 소나무를 마치 정물같은 풍경의 대상으로 접근하고 있는 인상을 주는데 그러한 연유에서는 몇 가지 회화적 단서 때문입니다. 
소나무는 원래 “자연”이라는 큰 공간감을 배경으로 존재하는 자연물이다. 

그 공간에는 새벽과 한낮, 혹은 칠흑의 밤이 있을 수 있고 춘하추동의 사계가 만들어내는 대기의 온도와 습도가 진행된 서정이 있음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러한 자연의 배경대신 배접된 “한지”라는 평면적 물성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는 소나무가 있는 사실적 풍경이나 아닌 소나무 자체의 본연에 몰두하여 좀더 직선적으로 대상을 표현해보려는 회화적 의도로 읽혀진다.
그리고 일련의 군락, 혹은 숲에서 분리시킨 마치 “따내어진”듯 선택된 몇 그루의 소나무를 화면에 등장시키는데 
이러한 일련의 심미적 의도를 거치면서 일상의 소나무들은 오브제틱한 대상으로 전이되고 보는 이로 하여금 미묘하게 낯선 느낌을 주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이러한 일련의 회화적 장치를 통하여 “감정이입”이라는 예인들의 본질적인 목적을 도모함인 듯하다. 
마치 시인이 언어를 정제하여 노래하듯 소나무 몇 그루는 가족인양 친구인양 연인인양 얽혀졌다. 
오랜 세월 함께할 숙명을 지닌 그들의 존재감은 소나무라는 서사적 상징과 형태적 속성 속에 이입하고 의인화시켜 기원(祈願)처럼 표현하고픈 작가 내심의 발현일 수도 있겠다.

현대인의 삶에서 소나무의 실용과 미감 그리고 그 상징들의 의미들은 점점 밀려나고 잊혀져 옛 것으로 퇴화해버린 것은 사실이다. 
현대의 도시들을 조감해보면 사람과 소나무들의 생태적 경계는 더욱 선명해지고 그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어찌 소나무뿐이겠는가. 
다만 소나무라는 한 매개를 빌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꼭 기억하고 잃어버리지 말아야할 가치들에 대하여 곰곰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기를 
작가는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헤아려 볼 일이다.  

김정대 (미술평론,인디프레스대표) 
소나무와 닮아져가고 싶은 자기내면의 발현-김정대

소나무와 닮아져가고 싶은 자기내면의 발현

미술작품을 이루는 조형요소들, 이를테면 점, 선, 면 그리고 색들에 개입하는 태도에 따라 작가 특유의 개연성이 드러난 다고 한다. 
“무엇을 그리느냐” 보다는 “어떻게 그리느냐”가 미술가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법하다. 조형요소에 개입하는 화가의 손끝은 언제나 선택의 격렬한 연속에 직면하게 되는데 
얇고 두꺼운, 크고 작은, 길고 짧은, 무겁고 가벼운 것들에 대한 매우 감각적인 판단의 세계이다. 워낙 예민하여 미시적 세계가 미적 체험의 근간을 이룬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중견 화력 구명본의 손끝 또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미세한 층위를 더듬는다. 
정물화의 시기와 오브제의 시기를 거쳐 수 년 동안 진행된 소나무 연작을 매개한 그의 심미적 여행은 이미 아르카익한 시기는 지나가고 성숙기에 접어든 듯하다. 
감각은 더욱 정묘해지고 화면은 점진적으로 안정되어졌다.
“일 년 농사짓는 마음으로 작업을 한다.”는 작가의 발언에서 그의 예술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소나무에 애착하는 바에는 소나무가 가진 그 생태적인 조건들에 호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다.이 수명 긴 식물은 노송이 되어서야 아름답다. 

소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디테일은 세월이고 그 세월의 디테일을 더듬고 있는 구명본의 손끝은 소나무와 닮아져가고 싶은 자기내면의 발현일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 흘러갈수록 더욱 더 찬연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예술가적 풍모를 꿈꾸는 것이리라.
아름다움은 보전되어 생존하여야만 실감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대상이 된다. 
그와 다름 아닌 예술가도 산다는 생태적인 조건에는 진정성뿐만 아닌 세월을 이겨내야만 하는 필연의 조건이 있다. 
구명본의 이번 전람회는 그러한 작가적 면모의 확인이며 또다시 시작되는 여행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김정대 (새미 갤러리대표) 

낡은 사물들에 부여하는 예술가의 심미-김정대

낡은 사물들에 부여하는 예술가의 심미

열려진 창으로부터 햇살이 실내로 들어와 흰천으로 덮혀진 탁자위의 물상들을 비추면 어둠속에서 그 존재조차 희미하였던 물상들은 또렷하게 자기 색채를 발하며 둥글고 각진 모양의 형태를 실감케한다. 
양감의 밝은 쪽 반대편의 그림자는 태양의 경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구겨진 천의 주름과 접근된 또다른 물상들의 굴곡을 조금도 거스리지 않으며 전개된다. 
그러한 실내풍경 속 정물들의 조화 관계를 천 위의 유채라는 유래깊은 미술방식으로오랫동안 그려왔던 화가 구명본은 어느 때부터인가 
그 햇살의 서정과 물상과 물상들이 이루어내는 조화관계와 전통적인 그리기의 방식을 접게 되었다. 
정물화가로서 명성이 더해갈 즈음 그의 급격한 변화는 그를 아는 많은 식자들에게 아쉬움을 주었지만 결국 그는 변화된 화격을 추구하게 된다.

1996년 그의 네 번째 개인전 이후 발표된 작품들은 재현의 방법에만 머물지 않고 강력한 자기주관이 개입되는 ‘개성적인 양식 구축’이라는 뚜렷한 성향을 보여주게 된다. 
꼴라쥬, 오브제, 이질적 요소들의 병치 등 많은 현대적 미술 기법들이 적용되어진 그의 화면은 ‘의지와 상상력’이라는 예술적 핵심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서 접근하려는 의욕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객체 미감의 존중뿐아니라 작가자신의 예술적 표현이라는 주관적 미감으로 확산이 뚜렷해진 것이다. 그러한 작가 태도의 변화는 많은 형식적 변화를 가져오는 필연의 원인이 아닐까 한다.

오랜세월을 묵은 물상들은 시간이라는 색깔이 더하여진다. 어떤 이들은 그 물상들의 색감이 주는 아름다움에 무심하여 쉽게 폐기하곤 하였지만 어떤 이들은 쓸고 닦으며 보존하여 
후인들의 심미를 일깨운다. 화가 구명본은 그러한 고품들에 심취하여 그리며 접목시키고 연출하여 자신의 작품으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그들 고품은 그가 즐겨사용하는 색조인 황색계열의 모노톤 화면속에서 어우러져 새로운 생성감을 보여주는데 
접혀진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오래된 책갈피들을 어루만지듯 가해진 붓길의 세례를 받으며 화면에 정갈하게 배열되고 펼쳐져서 미술적인 조형요소들의조화로운 장이 된다. 

먹물 떨어뜨림, 드리핑, 암시적 기호, 목기들의 접목 등 분방하게 형성되는 미적 세계의 배경이 될 수 있는데에는 작가의 심미적 부여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화면의 중앙에 등장하곤하는 오래된 물상들은 화면전체의 모티브로서 마치 기념비적 성격을 띠며 화면전체를 응집하는데 
정물화가로서의 오랜 역량이 충분히 가해진 사실적인 모양이 인상적이라 할 수 있겠다.

“상-또하나의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는 연작형식의 최근작품들은 한국사람들의 삶과 풍속들에 오래동안 스며들었던 상징물과 십이지신상의 형상들을 차용하고 있는데 
혹자들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점점 소멸해지는 전부하거나 낯선 유물같은 존재들이라 치부할 수 있겠으나 
작가는 그 물상들에게서 한국 특유의 토속성과 전통 그리고 한국사람들의 정서와 고유미감을 발견하고 제시하고자 한다. 
첨단의 공학이 발달한 복제의 시대속에서도 고대인과 중세인 그리고 근대인의 순박한 실용과 미감을 관통하는 ‘원류의 것’을 찾아가보는 작가의 체험들은 
그의 화면속에서 암시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 혼재하며 미술적인 조형요소들을 빌어 발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화면들은 배경의 추상적인 작위성과 모티브의 정교한 실재감은 서로 강하게 대비되며 화면의 이중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로 격렬한 대립에서 오는 역동적인 이중구조라기보다는 황색조 혹은 깊은 무채색의 모노톤 화면속에 정착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반응하는 상호보완의 관계라 할 수 있겠다.

결국 그의 작업이 형식의 변화는 있었지만 정물화에서 섬세하게 발휘 되었던 조화감을 놓치지 않고 있음을 잘보여주고 있다. 
이제 한층 심화된 내용으로 준비된 다섯 번째 작품전을 지켜보면서 객체의 미적가치를 훼손하기보다는 
적절하게 자신의 미감과 융화시켜 새로운 생명성을 부여하려는 구명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화풍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대상에 대한 정중함은 앞으로 많은 실험적인 미술적 시도를 하더라도 쉬이 변하지 않으리라 예견해 보면서 
그의 심미안으로 본 사물들과 공간들과 시간들의 격있는 조화관계를 기대해보는 것도 기분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정대 (미술사·갤러리 인디프레스 대표)

구명본전 리뷰-옥영식
[부산매일신문]
1996년 11월 6일 수요일
미술평론가 옥영식
전시회리뷰 - 구명본전

때묻은 물건서 건져 올린 담백한 자연주의
구명본의 화면(10월28일~11월 3일 송하갤러리에서 전시)은 소박하여 반문명적인 자연주의에 가깝다. 따라서 이 현란한 산업물질문명의 공간을 벗어나 시·공간적으로 퇴행하여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백화점」으로 표상되는 질펀한 상품화시대의 풍요와 윤택함으로부터 보잘것없는 궁핍의 공간으로 시점을 이동시킨다. 그리고 뒤돌아보게 한다. 
그 뒤돌아보는 공간에서 발견한 것은 정신적인 간소함과 담백한 것이 지닌 가치다. 뒤돌아보면서 구명본의 시선이 포착한 것은 하찮고 때묻은 「낡은 물건」이다. 
그의 작품제명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이지만 지금은 이미 수명이 다해서 낡고 빛이 바랜 패종시계, 헐어버린 쇠가죽가방, 손때 묻고 해질대로 해진 한지의 고서, 
검은빛 무쇠의 차 달이던 화로와 솥. 영락없이 우리 주변에서 잊혀지고 사라져간 물건들이 지닌 표정을 읽고 음미하고 있다.
그가 매료되고 있는 표정이란 낡은 것이 지닌 삶의 자취이며 형언할 수 없는 그 미묘한 때깔이 머금고 있는 인간과 자연과 삶의 숨결인 것이다.
구명본이 정신적으로 자연주의에 가까운 까닭은 이러한 낡은 것에 대한 정신적 단순성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극사실의 재현적 표현법을 빌린 사진이미지와 사물차용의 오브제기법을 혼용하고 있는 그의 화면 만들기는 
결과적으로 얼마만큼 그가 「낡은 것」이 머금고 있는 미묘한 표정과 숨결을 섬세하게 감지해 내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기록인 셈이다.
하찮은 것을 고귀한 것으로 환원시키려는 그의 시선은 투명하고 따뜻하여 시적인 감수성이 엿보인다.
그러면 낡은 것이 새것보다 심적으로 편안함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낡음으로써 완성되는 사물의 다양한 질감과 이미지의 풍부함 즉 전체성일 것이다.
다시 말해 부분에서 직관되는 전체성의 가치다.그러나 낡은 것이 지닌 표정을 그리는 일은 어디까지나 현상적인 것이므로 자연의 무궁한 숨결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숨결을 감지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은 숨결 그 자체가 되는 것이며 정신적 자연주의보다 앞서는 것 역시 자연스런 삶 자체를 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최근작인 단감 같은 주홍빛이 발갛게 피어나는 생기 머금은 바탕빛을 배경으로 한 먹 얼룩의 그림이 주목을 끈다. 그 자체로 되려는 단서로 보였기 때문이다.

실상과 허상이 조우하는 내면의 풍경-김정대
실상과 허상이 조우하는 내면의 풍경

때때로 사물들은 한 사람의 생애보다 더 오래도록 남아 희귀한 추억으로 회고되기도 하고, 멸종의 위대함으로 실존의 허망함조차 일깨우는 유적이 되곤 한다. 
색상환 속의 어떤 것이라 가늠해 보기 힘든 색깔의 내력에는 시간이 묻혀진 붓질이 있었겠고, 
그 붓질의 겹층 속에 잠긴 사물들은 확연한 단정으로서가 아닌 무성한 신비와 가지가지 형용언어들의 접두를 동반한 짐작으로만 파악될 뿐이다. 
현존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진 이 시대에는 오래된 물상들은 깨끗하게 바래어지고 어떤 고귀함마저 깃들어져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정화해 낸다.

화가 구명본은 그 유적과도 같은 고품들과 함께 근자의 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 한시절 이전 정물화가로서의 화력을 쌓아온 그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해석 그리고 재현의 화법에 몰두 하였었고 
조화있는 형식의 추구, 비례감각, 금욕, 질서, 명료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클래식한 미적 태도를 가진 화가로서 기억된다. 
그리하여 전통적이고 보편한 심미취향에 기운 그의 정물들은 수평위의 수직이라는 극적인 정적상황으로 연출되어져 
화실의 여느 귀퉁이에도 있을 법한 서정적인 침묵의 세계를 내용하였었다. 
그런데 그가 고품들에 내재한 옛이야기들에 호기심 하였을 즈음부터 그의 화면에는 뚜렷한 상징과 서사의 어법들이 배열되기 시작하였고 
꼴라쥬, 오브제 등의 방법과 조감의 시점으로 화면은 급격하게 평면화되고 있음을 감지해 볼 수 있다. 
사물이 가질 수 있는 공기의 양을 충분히 확보하여 원근과 음영 그리고 색채의 현실감을 적절하게 도모할 수 있었던 그의 화면은 
공기를 잃고 점점 납작하게 되면서 사물들은 현재적 존재감을 상실하며 관념과 시간으로써 차원하는 가상공간을 떠다니는 초현실적 존재로서 드러나게 되었다. 
그 사물들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사실화법에 의해 정교하게 그려져 화면의 전체를 응집하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기호와 추상의 흔적들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저변한 무의식의 서술인듯 자동 기술적으로 표현되어져 묘사된 물상들을 배경한다. 
그리하여 의식과 무의식 혹은 실상과 허상이라는 이중성의 충돌에서 발생하여진 새로운 미적 국면은 추상의 세계도 아니며
외적 리얼리티의 추구라고 말할 수 없는 독특한 생성으로서의 그의 내면 정경을 보여준다. 
또한 그러한 면면들에서 놓치고 싶지 않는 자신의 처음 내력을 여전히 이어내고 더불어 한층 새로워진 화풍을 구축해 보려는 의욕을 동시에 드러낸다. 
즉 사물들이 가지는 절대적 외형의 미에 보내는 그의 신뢰를 사실화법으로써 표현하여 추상의 무작위성으로 기인될 수 있는 표현의 과잉을 절제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실재의 외형에만 경도될 수 있는 과거화법을 우회적으로 검증해 보려는 의도를 감지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한때를 풍미하였던 사물들처럼 그도 한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 시절동안 전화된 미적 동기로써 자신의 화업을 일구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버려야만 할 것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가치들을 가늠해 보았으리라 
“어떤 사물이 그것 자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미적 태도를 취하는 주관에 대해서만 미적 대상으로 성립한다” 라는 미학적 명제를 유념한다면 
그의 근작들은 더욱 심화된 내적 실체를 접근해 보려는 의지에서 비롯하였을 것이며 그의 옛적 이미지들에 대한 서사가 황당한 신화나 고졸한 설화로서가 아닌 
허구 속에서도 고개 끄덕일 수 있는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기에 그의 주관이 엷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안정된 가치관과 전통적 회화방식에도 경외해보는 그의 예술적 대토는 미술의 미래만을 지향하며 
그 벼랑 끝으로만 달려가려는 이들에게 자신의 본연에 물음할 수 있는 계기를 줄 수 있다는 생각도 해 보면서 
그가 탄탄한 자신의 미적 체계를 열심히 만들어내는 많은 가능성을 가진 화가임을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음을 일견하여 보는 것이다. 

1996. 10.
金 正 大 
(미술평론·갤러리 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