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화면의 경계에서 서식하는 그림_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구상희, 화면의 경계에서 서식하는 그림

 

-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구상희는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크기의 나무 박스를 제작한 후 정면과 측면에 각각 회화적 장치를 얹혀놓았다. 우선 미술을 다루고 있는 신문 기사를 화면에 콜라주한 후 부분적으로 밝은 색의 물감을 칠해 덮었다. 이미지와 문자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지우는 한편 의도적으로 특정 문자와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 다음은 프레임을 따라 여러 색깔을 거느린 각각의 물감을 나란히 배열해서 부착시켰다. 이는 사각형의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림은 정면과 측면 모두에서 발생된다. 물감을 마치 가지런히 흘려 일정한 크기, 두께를 지닌 물질로 표면을 채워 넣은 것은 정면에서 보여주는 붓질의 표현적 제스처와는 달리 물감의 본래 상태를 그대로 응고시키고 있다. 회화적 재료인 물감이 스스로 조각적인 상태를 만들어 보인다. 동시에 그것이 선, 면을 이루고 회화의 내용을 만든다. 또한 물감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틀, 용기에 채우고 있다는 인상도 든다. 사실 화면이란 일종의 그릇에 해당하기도 한다. 화면을 물감을 담고 있는 용기로서 이해한다면 회화는 물감을 채우는 다양한 방식을 선보이는 일련의 행위가 될 수 있다. 

 

 작가는 색을 지닌 물질, 물감을 화면의 측면에 고드름처럼 매달리게 했다. 중력의 법칙과 시간의 경과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물감은 경계 부근에서 긴장감 있게 멈춰 섰다. 바닥을 향한 물감들이 수직으로의 경로를 보여주다가 모서리에서 순간 멈춰선 형국을 연출하는 셈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물감은 주어진 사각형의 화면 안에서 생을 마친다. 회화는 화면 바깥에서 존재할 수 없다. 반면 이 작업은 화면의 바깥을 부단히 모색하는 동시에 그 접점에서, 경계에서 사는 물감, 회화의 존재를 보여준다. 중앙과 측면, 중심과 모서리 모두가 회화적 영역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는 화면만이 아니라 전시 연출에서도 이어진다. 작가는 사각형의 화면들을 전시장의 벽면과 벽면이 만나는 모서리, 구석을 사이에 두고 부착하기도 했다. 한 벽면 끝에 자리한 화면이 꺾인 벽면을 타고 다시 다른 화면으로 연장되는가 하면 새삼 전시장의 벽이 아닌 모서리에 시선을 주목시키는 것이다. 

 

 작가는 나무로 이루어진 화면/시각형의 박스 전체를 회화적 영역으로 다룬다. 우선 정면에는 미술 기사를 다룬 신문을 부착했다. 신문은 종이라는 물질인 동시에 이미지와 문자를 내장하고 있는 시각적 오브제다. 납작한 평면의 오브제가 화면의 피부에 붙어나간다. 그 위에 밝은 색 톤의 물감으로 부분적인 붓질을 가했다. 회화의 평면성을 유지하면서 추상적이고 표현적인 붓질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진과 문자를 통해 구체적인 이미지를 안겨주기도 한다. 고흐나 알렉스 카츠의 그림 일부가 보이고 영문 텍스트로 쓰인 미술관련 기사가 불현 듯 드러난다. 작가는 가독성의 체계를 지닌 신문을 의도적으로 망실시킨다. 지우고 덮고 문지르는 일련의 행위를 통해 신문을 부재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남겨둔 곳은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의 토로 같기도 하다. 작가에 의하면 그 같은 방법론은 “현대미술에 대한 허구이자 부정이며, 동시에 본인이 가고 싶은 목적지이고 욕망의 양가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은 표면보다도 사실 측면에 방점이 놓여있는 듯하다. 본래 화면은 정면과 네 측면 그리고 뒷면, 이렇게 6면체의 박스로 이루어졌다. 통상 그림은 정면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정면성의 법칙’은 서구미술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역사였다. 동시에 그 정면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프레임이다. 액자, 액틀이라고 불리는 프레임은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인 평면성과 천으로 이루어진 물질을 은폐하기 위한 장치다. 외부세계를 충실히 재현해왔던 회화라면 실제 세계를 보는 듯한 환영을 벗어나게 하는 물질의 흔적이 시각적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기에 액자가 이를 막아서는 것이다. 동시에 액자는 화면에 난 소실점에 관자의 눈을 맞추기 위해, 그의 시선/신체가 그림의 정중앙의 자리에 서도록 하는 틀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것은 일상의 벽과 회화적 공간을 분리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한편 현대미술에 와서 재현에 대한 극복과 추상미술과 사물성에 대한 논의 속에서 화면과 액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해졌다. 

작품을 에르곤(ergon)이라 하고 액자를 파레르곤(parergon)이라 부른다. 이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한 이가 자크 데리다이다. 그는 ‘파레르곤이 작품의 외부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따라서 움직이면서 작품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에르곤과 파레르곤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이러한 논의에 힘입어 파레르곤은 어느 한쪽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어느 한쪽으로부터 배제되지도 않는 이중적 지위를 갖게 되었고 이후 에르곤과 파레르곤의 관계를 다루는 일련의 작업들이 출현했다. 액틀과 좌대가 사라진 현대미술이 등장하는가 하면 화면의 중심부를 벗어난 이질적인 영역에서 또 다른 생을 모색하는 여러 시도들이 감행되고 있다. 

 

 구상희 또한 프레임에 물감이 올리고 그것들이 작품의 내부로 개입하는 듯한 형국을 연출한다. 화면의 모서리 내지 프레임에서 그림을 발생시킨다. 작품의 프레임을 따라 물감을 흐르게 하면 물감의 속도, 움직임이 프레임이 끝나는 지점으로 몰려가서 순간 멈춰서버린다. 각각의 색을 지닌 물감은 주어진 프레임에 의해 불가피하게 흔적을 남긴다. 결과적으로 프레임이 그림을 완성하는 주체가 된다. 프레임을 따라 흐르는 줄무늬, 색띠를 만드는 것은 물감의 상태, 낙하의 속도, 중력의 법칙 등이 결합되면서 가능한 것이고 그것은 종국에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인 상태로 마감된다. 그렇다면 작가의 의도를 최소한으로 하고 주어진 프레임의 조건과 자연법칙에 의해 그림을 만들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작가는 화면의 중앙에서 배제된 측면에서 역설적으로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고 이는 에르곤과 파레르곤, 작품의 내·외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한편 이 둘이 서로 불가피하게 결합되어 있거나 교차하는 듯한 형국의 연출이 된다. 작가에 의하면 ‘에르곤이 생명을 다한 파레르곤에서 다시금 작품의 생명이 시작되어 흐르는 생동감과 생명력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의도라고 한다. 이는 결국 ‘중앙을 해체하고자 하는 것’이자 ‘모서리와 구석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구상희는 이러한 여러 인식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박스형 화면을 선택했으며 작품 역시 전시장의 모서리에 걸거나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열했다. 그를 통해 벽, 공간이 작품의 구성요소로 불가피하게 개입되고 있다. 또한 다섯 면을 지닌 화면을 접하는 한편 기존에 익숙했던 회화의 공간과는 다른 장소들이 우발적으로 펼쳐지는 상황을 목도하게 한다. 나로서는 프레임을 따라 흘러가는 물감들이 멈춰선 긴장된 그 자리가 무엇보다도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모서리에서 또 다른 생을 만들어나가는 회화의 의지! 

 


세상을 보고 읽는 볼록의 ‘반사-투과’체_김성호(미술평론가)
세상을 보고 읽는 볼록의 ‘반사/투과’체

김성호 (Sung-Ho KIM, 미술평론가)

화가 구상희는 작품의 화제(畵題)인 미적 대상을 일련의 매개체를 통해서 바라본다. 그 매개체는 이미지를 미술로 만드는 구조의 틀인 프레임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유리의 투명함과 거울의 불투명을 오가는 반투명의 존재로 다가온다. 이 반투명의 매개체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지각(perception)의 프레임’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주요한 진입로이자 ‘인식(cognition)의 시작점’이다. 또한 이 프레임은 관객들이 한 화가의 작품 세계를 즉각적으로 지각하고 판단하는 '첫인상(first impression)'이자 ’인식의 첫 발자국‘이며, 화가가 보는 방식을 따라 세상을 읽어내는 ’의미(meaning)의 지평‘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프레임은 창작자에게나 관람자 사이에서 ’지각론(perception theory) → 인식론(epistemology) → 의미론(semantics)‘으로 이어지는 예술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I. 변화하는 반투명의 프레임   
구상희에게 있어 첫 번째 프레임은 표현주의적 심미적 풍경화가 담고 있는 캔버스라는 단순한 사각의 틀이었지만, 이후에는 고흐와 같은 20세기 거장의 명화에 대한 오마주로 발전한다. 즉 고흐의 작품을 ‘지금, 여기’의 일상의 공간 속에서 재해석해 옮겨 놓는 패러디의 방식을 새로운 프레임으로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이후 명화의 패러디를 효율적으로 도모하기 위해서 왜곡과 변형의 조형적 변주를 지속적으로 실험했던 그녀의 도로 반사경에 관한 탐구는 아나몰포시스(anamorphosis)라는 왜상(歪像)과 관련된 새로운 프레임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한편, 반사경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구상희의 회화 속 광학 장치는 TV 모니터, CC-TV와 같은 시뮬라크르의 감시 체계로 확장되었다. 더욱이 도로 반사경과 같은 볼록의 반사체 즉 볼록 거울(convex mirror)은 최근에는 아크릴 반구, 유리 반구, 유리 구 등 ‘볼록의 투과체 즉 볼록 렌즈(convex lens)’로 변형되면서 구상희의 회화에 담긴 프레임을 다방면으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구상희의 회화는 그간 ‘1) 표현주의 풍경을 담고 있는 캔버스의 프레임 → 2) 명화의 현대적 재해석과 패러디의 프레임→ 3 )도로 반사경처럼 왜상을 드러내는 볼록의 반사체 프레임 → 4) 모니터와 같은 감시 체제의 시뮬라크르 프레임 → 5) 빛을 확대 굴절시키는 아크릴 반구, 유리 반구와 같은 볼록의 투과체 프레임’과 같은 형식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정리해 볼 수 있겠다.
특히 구상희의 최근의 작품에 있어, 작품의 구조를 유지하는 프레임 그리고 세상을 보고 읽게 만드는 매개체는 ‘볼록의 반사/투과체’로 대표된다. 그것은 ‘볼록의 반사체/볼록의 투과체’로 풀이되며, 달리 말하면, ‘볼록의 거울/볼록의 유리’라 할 수 있겠다.
II. ‘볼록 거울’과 긍정의 아나몰포시스
먼저 구상희의 회화에서 볼록 거울이라는 매개체는 ‘반사경’으로 구체화된다. 이것은 고흐의 명화를 현대의 일상 공간에 재해석하여 배치하는 일련의 시리즈 작업에서 등장했던 문손잡이와 같은 볼록의 반사체가 본격적으로 도로 반사경이라는 소재들로 변주된 것이다. 보라! 도시의 마천루나 해외의 관광지 관련 이미지들뿐 아니라 다양한 실내 풍경 이미지들은 그녀의 반사경이라는 볼록 거울 속에 가득하다. 이러한 볼록 거울 속 반영 이미지들은 왜곡과 변형을 드러내지만, 최대한의 가능한 전체상일 뿐만 아니라 여전한 실재의 다른 모습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구상희의 회화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탐구되었던 아나몰포시스 즉 왜상이라는 광학적 담론들이 도로 반사경이란 소재를 통해서 다시금 현대적 의미로 조명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즉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매체 위에 효과적으로 얹어 놓고자 했던 르네상스의 투시도법(광학의 구조를 드러내기)에 따른 왜상과는 다른 차원의 왜상(광학의 구조를 비틀기) 연구를 통해서 구식의 광학 담론을 현대적으로 변주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지하듯이, 반사경 속 세계란 현실을 닮은 의사체(擬似體)의 리얼리티면서도, 좌우가 뒤집힌 반사(反射)와 반영(反映)의 허구(fiction)이자, 외관이 비틀어진 변형과 왜곡의 시뮬라크르(simulacre)로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볼록의 거울은, 구상희의 언급대로, 현실과 그것에 대한 왜곡의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반사경은 현대를 비추는 이중 구조를 형상화한다. 반사경은 내 앞에 펼쳐진 세상과는 또 다른 왜곡된 형상들을 드러낸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왜곡된 진실은 한 줄기 실타래 끝과도 같이 거울 속 세계로 아련하게 이어진다. 거울에 비추어진 왜곡된 진실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다시 발견하고, 교차적인 세계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생각해 보라! 볼록 거울에 비친 모든 이미지들은 실물보다 축소된 크기로 나타나고 물체가 바로 선 형태의 정립허상(正立虛像)으로 나타난다. 볼록 거울이 빛을 반사하면서 넓게 퍼트리는 관계로 거울 뒤로 허초점(F)을 형성하는 까닭이다. 이 볼록 거울은 반사각이 넓기 때문에 전경을 보여주는 자동차 백미러,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커브 노선에 설치한 도로 반사경 등으로 사용된다. ‘실제로는 빛이 모이지 않고 생긴 허상’, ‘백미러에 보이는 것보다 실제로 가까이 있는 자동차의 실재’ 그리고 ‘도로 반사경이라는 가상의 화면에 보이기 시작한 코너 길의 자동차의 실재성’ 등은 구상희가 볼록 거울에 반영된 이미지를 통해서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이미지들에 관한 다양한 질문들이자 왜곡의 변형의 아나몰포시스 이미지들을 ‘긍정적인 무엇’으로 바라보려는 그녀의 답변들을 이끌어 낸다.   
작은 반사체로 넓은 면을 한꺼번에 본다는 볼록 거울의 위상은 18세기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고안한 원형 감옥인 팬옵티콘(panopticon)의 욕망을 재생산한다. 그것은 ‘한 권력자가 만인을 감시하는’ 체제이다. 이러한 감시의 욕망 체제는 현대에 들어와 CCTV 영상, 차량용 블랙박스 등으로 점차 상호 감시를 일상화하는 시놉티콘(synopticon)의 체제로 바뀌게 된지 이미 오래 되었다.  
구상희는 일상에 만연한 상호 감시를 꾀하는 시놉티콘의 억압 체제로부터 그것의 행간을 비워내고 긍정의 메시지를 읽어낸다. 마치 백남준이 최초의 인공위성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을 통해 조지 오웰(George Orwel)의 암울한 소설 『1984』(1949)의 ‘빅 브라더’의 세계를 비판했던 것처럼, 구상희도 자신의 볼록 거울을 메타포로 탐구하는 일련의 ‘볼록 기억(convex memory)’ 시리즈를 통해서 현대의 시놉티콘의 세계를 비판하고 그곳에 희망의 인공호흡을 통해 화해와 소통이 교차하는 세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보라! 구상희의 작품에서 볼록의 구면을 따르는 TV 모니터의 줄무늬는 블라인드가 드러내는 위장(감추기)과 감시(지켜보기) 그리고 이미지 경계의 모호함(흐리기)의 차원이 한데 담겨 있다고 할 것이다.

III. ‘볼록 렌즈’가 탐색하는 ‘오목 거울’의 효과와 상호 작용   
구상희의 최근 회화는 ‘볼록의 반사체’인 ‘볼록 거울’에 반영된 이미지로부터 ‘볼록의 투과체’에 투과되는 조형 세계로 이동한다. 구상희는 ‘평볼록 렌즈’라 불리는 다양한 크기의 투명한 반구(半球)를 고흐의 화집 위에 올려놓고 고흐에 대한 오마주를 선보인다. 반구는 마치 물이 담겨 찰랑이는 둥근 플라스크(flask)나, 화집 위에 내려앉은 투명한 이슬방울을 닮아 있다. 투명성의 볼록 렌즈는 그 아래 위치한 화집의 글씨나 그림을 크게 보이게 만드는 돋보기 효과를 기대한다.  
그런데 이러한 ‘볼록 렌즈’의 효과는 '볼록 거울‘과는 상반되는 동시에, 흥미롭게도 ‘오목 거울(concave mirror)’의 그것과 닮아 있다. 오목 거울에서 반사면(P)에 맺히는 상은 물체의 위치에 따라 바른 상(정립상)과 거꾸로 된 상(도립상)으로 달리 나타난다. 늘 정립상을 만드는 볼록 거울과는 달리 오목 거울은 초점(F)과 구심(G)에 대한 물체가 놓인 위치에 따라 그 형상을 달리한다. 즉 물체가 초점보다 거울 가까이 놓이면 바른 허상(정립 허상)이 물체가 초점과 구심의 사이에 놓일 때는 거꾸로 된 실상(도립 실상)이 각각 확대되어 나타난다. 쉽게 말해 반사면에 물체가 근접하면 실물보다 큰 바른 상이 나타나고 멀리하면 실물보다 작은 거꾸로 된 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오목 거울은 반사된 빛을 구심점 앞에 모으기 때문에 모은 빛을 멀리 보내거나 빛에너지를 집중시키는 랜턴(lantern), 반사 망원경, 탐조등, 등대, 채화기, 자동차의 전조등, 치과용 거울 등으로 사용된다.
‘볼록 렌즈’는 빛을 반사하지 않고 투과시키는 것만 다른 뿐, 빛을 모으는 효과는 ‘오목 거울’의 상황과 유사하다. 게다가 ‘오목 거울’처럼 ‘볼록 렌즈’ 역시 ‘물체가 가까이 있을 때는 실물보다 크기를 크게 보여주고 물체가 멀리 있으면, 실물보다 작게 보여 준다. ’고흐의 자화상‘이나 ’꽃이 피는 아몬드 나무‘, 또는 고흐가 그린 ’고갱의 의자‘와 ’고흐의 의자‘ 위에 올린 볼록 반구는 특수한 텍스트나 이미지를 확대시키면서 마치 고흐의 눈물샘과 같은 양태로 서정적 심미감을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화면 위에 올린 레진(resin)의 광택 효과 또한 이러한 볼록 렌즈의 효과를 교차시키고 배가시킨다.
구상희가 세상을 보고 읽는 볼록의 ‘반사/투과’체는 볼록의 반사체(볼록 거울)와 볼록의 투과체(볼록 렌즈)라는 상이한 세계가 만나 형성하는 메타포의 세계이다. 특히 ‘볼록 거울/볼록 렌즈’의 광학은 구상희의 작품 속에서, 왜상과 굴절 광학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이고 관성적인 인식을 탈주하고 희망에 관한 역전의 가능성을 더듬는다. 구상희의 ‘볼록 거울/오목 렌즈’는 ‘볼록 렌즈/오목 거울’의 효과를 서로 탐색하고 교차시키면서 저마다의 심미적인 작용마저 상호 교환한다. 마치 프리즘이 백색광의 광원(光源)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적외선과 자외선이라는 파장이 극과 극인 존재들을 추출해 내었듯이, 구상희의 회화는 볼록 거울과 볼록 렌즈의 메타포를 탐구함으로써, 오늘도 부정으로부터 쉬이 보이지 않는 긍정의 아나몰포시스와 더불어 절망으로부터 찾기조차 쉽지 않은 희망의 소통 의지를 진지한 마음으로 길어 올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