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아름다운 여인을 향한 그리움의 고백 . 이태근의 조각 - 김종근
아름다운 여인을 향한 그리움의 고백 . 이태근의 조각   - 김종근


한 여인이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녀의 가늘게 감겨진 눈 사이로 눈물방울 하나가 뚝 떨어져 아주 천천히 예쁜 볼을 타고 내려옵니다.
그녀는 침묵한 채 아무 말이 없습니다. 부풀어진 머리로 보아 지금도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중 입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그녀가 고요하게 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의 흐름”도 그녀의 어깨를 흔들지 못하고 “세찬 바람”도 그녀의 머리털을 흩트려 놓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겨 눈물 흘릴 뿐.

이태근의 <바람 불어 좋은 날>에 작품을 보고 로댕이 흰 대리석에 생명을 불어 넣은 듯 한 작품을 연상하며 묘사한 부분이다.
그의 작품은 이처럼 마치 애틋한 여인의 사진을 보는 듯, 그녀의 독백 혹은 고백을 듣는 풍경처럼 영상처럼 선명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아름답지만 어딘가 마음 한 켠이 짠하다.
또 다른 작품. 정말 단아한 모습의 여인이 머리를 흩날리며 지긋이 눈을 감고 있다. 그 위로 바람이 불고 있다. 머릿결이 크게 흩날릴 뿐, 그녀는 허공을 향해 다소곳이 얼굴을 치켜든다. 그리고 빙그레 옅은 웃음을 짓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소녀가 있다. 단정한 소녀가 단발차림으로 정면을 쳐다보는 모습이 정갈한 차림의 소녀이다. 여학생 교복 차림으로 순결하고 정숙한 열일곱 살 옷차림의 여고생 차림이다. 
인형을 들고 눈물을 찔끔 흘리는 앙증맞은 소녀도 있다.
이 모두 이태근 조각의 공통점은 여인과 소녀들이고 ,우리에게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로망틱한  장면들이다. 

이렇게 이태근 작가는 여인 혹은 소녀의 초상들을 주제로 핑크빛 대리석에, 뽀얀 살결 같은  대리석 돌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에 오로지 눈길을 주고 정진해 왔다. 
마치 “돌 속에 조각의 상(像)이 존재하기 때문에 조각가가 할 일은 여분의 돌을 떼어내는 것뿐”이라는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말처럼 그는 돌을 보면 그 돌 속에 숨어 있는 여인의 모습을 이내 발견한다.
물론 그 소녀 혹은 여인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작가도 그녀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고 있다. 설령 그것이 누이라고 해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당연하게 작가의 마음속에는 여인이 누구의 모습을 상상하고 떠올리며 작업을 했는지 있을 것이다. 단발머리의 단정한 소녀에서 머리를 흩날리는 우아한 여인의 초상에 이르기까지 그의 조각들은 누이나 동생을 모티브로 한 것인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누이인가 동생인가가 아니라 왜 그가 이러한 모습을 한결같이 형상화 하고 있는가 라는 점이다.
이태근은 어느 인터뷰에서 그 작품 속에 여인은 누이에 대한 그리움의 초상이라고 했다. 
그는 누이의 아름다운 순간의 내면과 가슴속의 누이를 담아내고 싶어 한 것이다.
즉 누이를 통해 어떤 슬픔이나 우울보다 그 청순한 아름다운 날들의 추억과 밑 모를 그리움의 순간들을 정지 시키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마치 뭉크가 사람들에게서 죽음의 모습을 보고, 쟈코메티가 인간의 얼굴에서 영혼의 가벼움을 보았다면 이태근은 여인들의 얼굴에서 진정한 남자가 갖는 그리움의 본질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형상으로 바람 부는 날의 그윽한 미소를 가진 얼굴을 빚어 놓았다. 그만큼 작가의 깊은 내면에는 이런 소녀에서 단아한 누이로 변해가는 그 기억속의 아린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조각에서 ‘누이’를 통한 그리움의 원형을 주저 없이 읽어낸다.
그러기에 나는 그의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작품 앞에서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라고 노래했던 미당 서정주의 국화꽃 앞에서가 떠올랐다.  
결코 소박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끝없이 순결한 표정으로 우리 앞에 선 따뜻한 조형미를 발견하게 된다.  
독일의 문호 괴에테는 “꽃을 주는 것은 자연이고 그 꽃을 엮어 화환을 만드는 것은 예술”이라고 했는데, 이태근 작가는 그 누이라는 꽃을 가지고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앞에 눈물방울을 뚝 떨어뜨리는 바람 부는 날의 화환을 아름답게 조각해 낸 것이다.
이태근의 작업이 전적으로 이런 단일한 초상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가끔 남자와 여자의 러브 스토리가 담긴 작품도 모자를 쓰고 머플러를 두르고 서있는 여인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도 있다.
이런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보통 조각 작품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3차원의 입체작업이지만 그는 표현을 꼭 입체적으로만 드러내지  않고 납작한 돌로 여인을 부조로 새겨 놓은 듯 평면적인 입체감을 병행하여 빚어내고 있다.
그만의 특성을 살려내고 있는 부분이다. 아마도 그러한 조각의 표현이 다른 작가와 차별성을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재료도 표면의 결이 거칠고 단단한 화강암에서 부터 결이 부드럽고 따뜻한 대리석에 이르기까지 그는 돌의 특성에 따라 각기 여인들의 초상을 선택한다.
색감도 흰색에서 여린 핑크빛 ,검은 오석에 이르기까지 꼭 어떤 돌을 고집하지 않는 다양함을 구사하고 있다.
 "나는 대리석 안에 들어있는 천사를 보았고, 그가 나올 때까지 돌을 깎아냈다." (미켈란젤로)고 했던 말처럼 그가 꿈꾸던 여인의 이미지가 돌출될 때 까지 그는 납작한 돌에서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어들면서 아름다움을 구현한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은 한없이 아름답고 정겹다. 그의 작품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그리움의 간절한 진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려 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혹여 외부로부터 그가 만든 여인의 흉상들이 너무나 정직하고 성실하기에 장식적이라고 비난의 화살이 퍼부을까 걱정된다. 
그러나 아름다운 부분을 가지거나 지향하고 있다고 그것이 결코 흠이 될 일은 아니다. 진실이 있다면 그것에 아름다움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것으로 만족 할 일이다. 
예술가는 이런 것으로 혼자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피해서도 안 된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그 진실한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진다. 
이태근의 누이를 향한 그 진실함을 나는 신뢰한다. 그의 작품에는 불변하는 여인의 아름다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바람이 오롯하게 새겨져 있다.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그 여인의 숨결이 들려오지 않는가?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누이 혹은 그 그리움의 진실. 그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이
하얗게 빛나는 그 대리석 위에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누이로 표상된 여인의 초상 조각-고충환

누이로 표상된 여인의 초상 조각

조형예술의 기원이 동양에서는 산수로부터 비롯되었다면, 서양에서는 인체로부터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동양에서는 자연을, 그리고 서양에서는 인체를 심미적 대상으로 여겼다. 이러한 발생 결정론을 곧이곧대로 인정할 필요는 없지만, 이는 적어도 자연과 함께 인체가 진작부터 작가들의 주된 소재로서 받아들여져 왔음을 말해준다. 인체에 대한 이러한 관심 자체는 이중적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 즉, 자기의 존재를 묻는 인간의 자기반성적 본성이 그 하나이고, 일종의 심미적 대상으로서의 인체에 대한 관심이 또 다른 하나이다. 자기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미의 주체이자 객체를 발견하려는 작가들의 욕구가 인체를 소재로서 채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과 욕망이 그치지 않는 한 인체는 앞으로도 계속 작가들의 가장 중요한 소재로서 남아 있을 것이다.

이태근은 인체 중 특히 여체를 소재로 하여 생명이 없는 돌에다가 생명을 불어넣는다. 돌 그 자체는 비록 생명이 없긴 하지만,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그 결이 거칠고 단단한 화강암으로는 남자의 초상을, 그리고 그 결이 부드럽고 따뜻한 대리석으로는 여자의 초상을 새긴다.
먼저 화강암에 새긴 거칠고 투박한 작달막한 키의 남자의 초상을 보면,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반쯤 치켜든 결의에 찬 자세로 먼 곳을 웅시하고 있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있는 또 다른 한 남자의 초상은 옆으로 길게 찢어진, 감은 듯 뜬 듯한 눈이 부처를 닮았다. 이 두 남자의 초상은 그대로 인간의 이중성을 암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눈을 치켜 뜬 남자의 초상이 자기 외부의 세계(질료적이고 감각적인 세계)를 응시하고 있다면, 눈을 반쯤 감은 남자의 초상은 자가 내부의 세계(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화강암의 결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미세 요철 효과와 실재의 비례에 못 미치는 작달막한  체구, 그리고 양식화되지 않은 사실적인 표정이 거칠고 강인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영락없는 땅 사람(地人)을 연상시키리  만치 순박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현실 저편을 응시하는 듯한 관조적이고 관념적인 인상을 준다.

이외에 부끄러운 곳을 손으로 가린 채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든 소년과 포옹하는 연인 그리고 가족상을 제외하면, 작가의 대부분의 조각은 여성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화강암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결이 곱고 때로는 마치 그 속이 들여다보일 듯 투명한 흰색과 살색의 대리석을 이용하여 여성들을 새겼다. 이 여성들의 조상은 비교적 사실적인 방법을 따르고 있는 남성의 초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양식화돼 있으며, 또한 하나의 전형으로 불려질 만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전형이란 개인차를 넘어서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일종의 정서적인 공통분모와도 같은 것으로서, 말하자면 둥그스름하고 통통한 얼굴, 앞으로 약간 내민 듯 도톰한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발머리에서 한국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이 발견된다. 양식화되었다고는 하나,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된 생생한 표정 역시 이러한 전형적인 인상을 강화하고 있다. 목이 긴 단발머리 소녀로부터 성숙한 여인에 이르는 이 조상들은 작가 자신의 누이를 소재로 한 것이지만, 그 누이는 우리 모두의  누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누이는 누이이면서 어머니이기도 하고, 친구이자 애인이기도 하다. 그 누이는 실체가 있는  하나의 인격체이기도 하고, 그 실체가 흐릿하거나 아예 없는 막막하기만 한 관념의 대상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 누이는 누이에게 혹은 님에게 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딱히 누구랄 것도 없는 무명의 대상에게 수신된 편지 속의 누이이다. 그리고 그 편지는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수신된 것이며, 편지 속의 누이 역시 하나의 감각적 실체이기보다는 관념적 대상으로 봐야한다. 이를테면 과거시제로서만 현재에 건져 올릴 수 있는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잃어버린 것들, 잊어버린 것들, 상실한 것들이 누이로 대변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실재하거나 때로는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누이를 통해서 작가는 돌이킬 수도 치유할 수도 없는 그리움과 향수의 원형을 표상한다. 그리고 환조(丸彫)와 부조(浮彫) 사이에 위치한 일종의 저환조(低丸彫) 조각에서 이러한 누이에 대한 작가의 관념은 더 감각적이고 양식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서 저환조 조각은 저부조 조각과는 비교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납작한 돌에 새긴 조각으로서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으며, 특히 표면에다 간략한 선묘(線括)를 더하는 식으로 약식 표현된 머리카락을 보면 이러한 평면화의 경향은 회화적 표현마저 얻고 있다. 단발머리 소녀와 성숙한 여인을 새긴 이 조상에 적용된 납작한 형태 자체는 여성스러움 혹은 작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누이의 이상형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입한 왜곡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회화로 치자면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등장하는 실제보다 길게 늘여진 여인의 얼굴과 신체가 여인이 내재한 우수와 슬픔, 그리고 우아미의 정조를 강조하는 것과도 같다. 그런가하면 머리에 물동이를 인 통치마를 입은 몸매가 한눈에도 넉넉하게 배가 부른 항아리를 닮은 여인에게서는 어머니로서의 누이의 한 전형을 만날 수 있다. 그녀의 풍만한 배는 그대로 풍요와 다산을 암시하며, 그 모성에의 상징성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 태모(太母)와 지모(地母) 신앙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이외에도 작가는 과실수를 배경으로 서 있는 일군의 가족을 표상한 작업에서 일종의 풍경조각을 실현하기도 한다. 여기서 풍경조각 자체는 단독상으로 표현된 대부분의 조각과는 비교된다. 그러니까 단독상이 모델 자체의 인격이나 정조를 압축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다면, 풍경조각은 일종의 배경에 해당하는 어떤 정황을 끌어들여 이를 모델의 인격에 결부시키는 식의 서술적인 방법에 근거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풍경조각은 실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킨다. 이태근의 조각은 일말의 양식화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사실주의 조각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다시 말해서 돌 자체의 자연색 혹은 고유색을 그대로 살려내는 것은 물론이거 니와(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다양한 색채들은 모두 자연색 그대로이다), 표면을 인공적으로 처리한 부분과 돌 고유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요철 부분을 대비시킨 것에서는 시각적으로 주제를 강조하는 힘이 있다. 또한 전통적인 돌조각 기법을 그대로 계승한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설명하자면 먼저 석고로 본을 만든 다음, 그 본의 부분 부분을 마치 자로 재듯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돌의 표면에 옮겨 표시하고, 그 표시에 따라 돌의 표면으로부터 그 속으로 새겨 들어가는 식이다. 이와 함께 이태근의 조각에서는 일종의 정면성의 법칙으로 불려질만한 요소가 발견된다. 양식화의 경향과도 통하는 정면성의 법칙은 세부가 생략된 간략한 표현과 함께 돌의 덩어리가 비교적 처음의 형태를 유지하며, 대상의 특징적인 요소를 정면에 집중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그 자체 일종의 원시주의(프리미티비즘)와 소박한 표현(아르카이즘)에 그 맥이 닿아있다. 이상의 것들로서 작가는 누이로 표상되는 친근하면서도 소박한 한국 여인의 초상의 한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충환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