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몽상적 해학과 풋풋한 서정의 보편성 -김상철 (미술평론가)
몽상적 해학과 풋풋한 서정의 보편성
-모용수의 작업에 부쳐

작가 모용수의 작업세계는 풋풋하고 정감 있는 동화적 몽상과 해학이 함께하는 것이다. 마치 동화를 읽거나 민요를 듣는 듯 편안하고 은근한 서정은 그의 작업에서 전해지는 각별한 정서이다. 간결한 이미지와 원색의 명징한 화면을 통해 정돈된 화면은 어눌한 듯 하지만 특유의 감칠맛 나는 풋풋한 서정을 담고 있다. 지나치게 심각하거나 부담하기 힘든 무거운 주제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전래의 민화나 전설 같이 익숙한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풀어내는 것이기에 부담이 없는 화면은 그 자체로 정감이 간다. 그것은 우리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에 의탁하는 것이기에 낯설지 않고,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기에 지루하지 않다. 그는 아련한 동심의 저편에서 길어 올린 기억과 상상의 편린들을 모아 편안한 몽상의 꿈자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특유의 정서와 감성은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적용되며 일정기간 지속되어 온 것이다. 편안하고 정감 있는 화면과 그것을 통해 발현되는 그윽한 서정은 마치 세끼손가락에 곱게 물들인 봉숭아물과 같다 할 것이다. 은은하고 여린 것이 화사하고 예쁘지만 지나치게 진하지 않아 오히려 애잔하고, 지나치게 선연하지 않아 더욱 깊이와 감칠맛을 더하는 그런 정서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독특한 심미적 특질의 한 모양일 것이다. 둔탁한 듯 거칠고 소박한 듯 무심하지만 특유의 넉넉함과 분방함으로 무한한 변용과 해석의 여지를 담보해주는 이러한 심미특질은 정녕 낯설지 않은 것이다.

화면마다 등장하는 호랑이는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중심이 될 뿐 아니라 그윽한 몽상의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거나, 혹은 작가와 마찬가지로 그의 화면에 나타나고 있는 보편적 특질들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들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호랑이들은 무섭고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라 한 결 같이 어수룩하다. 가늘게 실눈을 뜬 정형화된 호랑이들은 이미 맹수의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의인화된 것임이 역력하다. 마치 사념에 젖어 소요하듯 화면 곳곳에서 온갖 것들에 호기심을 보이고 있는 이러한 호랑이 형상들은 마치 관조하는 사색자의 모습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것은 과장과 억지로 만들어진 우스꽝스런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익살맞은 것이어서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물론 이러한 미소는 파안의 큰 웃음이 아니라 절로 입 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게 되는 회심의 미소일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화면에 나타나는 독특한 정서에 대한 동의의 미소일 것이며, 그것을 통해 발현되는 감성에 대한 공감의 표시일 것이다.

콧등이 파란 것이 인상적인 호랑이들은 마치 마실을 가듯 어슬렁거리며 세상의 온갖 것들에 관심을 보인다. 파란 달개비에 관심을 보이다가 살구나무 꽃이 흐드러진 나뭇가지의 새들에게도 눈길을 준다. 무심히 피어난 봉숭아꽃도 호랑이의 벗이 될 뿐 아니라 물 위에 비친 보름달도 더불어 눈길을 나누는 대상이 된다. 그것은 그저 형상과 형상으로 이루어진 조형의 세계가 아니라 봄으로써 읽혀지고, 읽음으로써 느껴지는 독특한 서정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한없이 정겹고 풋풋한 서정은 물이 넘쳐나듯 풍부하고 끝이 없다. 그것은 정형화된 틀로 읽혀지는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무한히 번안되고 해석되며 그 공명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해 나가는 물위의 동심원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조심스럽고 은근하게 다가와 어느새 마음을 흠뻑 적셔 버린다.

마치 채 걸러지지 않은 거친 흙으로 벽을 바르듯 거칠고 투박한 질감을 추구하는 것은 근작들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변화이다. 몽상적 상상과 풋풋한 정서는 여실하지만 이에 더해지는 거칠고 질박한 화면은 새로운 시각적 자극을 준다, 그것은 정형화된 형상들과 아련한 정서를 더욱 농밀한 것으로 성숙시키고 있다. 마치 나이 먹은 화강암의 푸슬푸슬한 질감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화면의 질은 이미 익숙한 것일 뿐 아니라 그 읽힘도 일정 부분 기성화된 것이다. 작가가 굳이 이를 차용함은 회화적 요소의 강화를 통해 조형을 공고히 하고자 함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화면이 그저 읽힘의 대상으로 경도됨에 대한 보완일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읽힘의 내용들을 더욱 풍부히 하고자 하는 조형적 고려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일단 이러한 변화는 긍정될 수 있을 것이다. 정형화된 화면은 단조로워 질 수 있을 뿐 아니라, 형상을 통한 감성과 정서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이미지의 기능성이 지나치게 강조될 염려가 다분한 것이었다. 이에 더해지는 풍부한 회화적 표현은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킴과 동시에 회화적 상상력을 배가시키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특유의 정연한 형상미를 지닌 이미지들은 점차 그 윤곽이 흐트러져 상상의 여지를 배가시킬 뿐 아니라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도 더욱 농밀한 짜임새를 확보할 수 있음은 바로 새로운 변화의 산물이자 소득일 것이다. 그의 작업을 일관되게 관류하고 있던 보편적인 감성과 정서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점차 특화되고 개별화되고 있다 할 것이다.
 
현대라는 시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회화의 양태는 실로 다양하며, 이러한 다양성은 바로 현대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것이다. 작가는 무수한 개성의 무제한적인 발산으로 이루어진 현대미술의 격랑 속에서 극히 보편적인 옛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이 속한 시공을 표현해 내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진부하고 고루한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현대라는 시공을 반영해 내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라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해묵은 몽상의 동화적 상상과 가공되지 않은 소박하고 풋풋한 감성을 통해 건져 올린 정서는 분명 보는 이에게 일정한 공감을 느끼게 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저 옛 사람들만이 공유하고 공감하는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탯줄을 뭍은 모든 이들에게 고루 작용하고 소통될 수 있는 소중한 것이다.

 그는 분명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간속에서 건져 올려 진 절절한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표출함으로써 현대라는 시공에서의 실존을 확인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가 발현해 내고 있는 그만의 특수성이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과 튼실한 연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의 화면에 절로 회심의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작업이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이다.

- 김상철 (미술평론가)
행복 바이러스 전하는 호랑이 그림_ 모용수
‘행복 바이러스 전하는 호랑이 그림’ 모용수 
 
보고 있으면 웃음이 돋아나는 그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작가가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는 그림. 그래서 행복해지며 위안을 얻게 되는 그림. 모용수의 회화다. 
 
동화 같기도 하고 우화 같기도 하며 민화적 감수성도 보인다. 이렇게 편안하고 쉬워 보이는 그림이지만 작가가 펼쳐낸 세계는 결코 만만치 않다. 인간사의 희로애락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통 사람들의 진솔한 정서에다 담아내는 작업이므로 쉬운 그림은 아니다. 그런데 보는 이들은 쉽게 읽고 행복까지 느낀다. 왜 그럴까? 
 
모용수는 이런 경지에 오르기까지 부단히 연마했고 공부했으며 많은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런 경험은 비단 작업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결코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그림으로만 삶을 꾸린 그는 생활의 다채로운 풍파를 겪었다. 그 속에서 오롯이 그림만을 푯대 삼아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런 인생 경험은 보통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는 진솔한 정서로 발전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의 내용으로 등장하는 삶의 여러 장면은 자신의 생활이자 보통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용수는 호랑이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 주인공으로 호랑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호랑이’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로 창출한 모용수의 호랑이는 작가 자신이며 혹은 보통 사람들의 모습일 뿐이다.  
 
대부분 남녀로 보이는 한 쌍이 출연하는데 여러 정황의 풍경 속에 있다. 포옹하거나 산책을 하기도 한다. 숲 속에서 서로를 부르는가 하면 길에서 반갑게 달려오기도 한다. 사랑의 모습이다. 드라마 같은 극적인 사랑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순정이 엿보이는 정경이다. 제스처가 아니라 진심이 묻어나는 사랑 이야기로 보이는 이유는 모용수 그림이 보여주는 회화적 힘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강한 색채다. 원색에 가까운 색채인데도 부드럽게 보인다. 파스텔톤으로 스며든 색채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우리를 그림 속으로 끌어당긴다. 왜 그럴까. 질감 때문이다. 평평하고 곱게 보이는 화면이지만 작가가 개발한 질감이 깔려 있다. 다양한 석채나 자수정 등을 이용해 만든 질감은 단조롭게 보이는 넓은 면의 색채에 깊이감을 불어넣는 효과가 있다. 덕분에 강한 색감은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속 깊은 화면을 연출할 수 있는 것이다. 
 
평면화된 구성은 전통 민화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해 보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편안해 보인다. 작가는 이런 느낌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연구하고 공들여 화면을 구성했다.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추출한 정서를 우화적 구성으로 담아낸 모용수의 그림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래서 진솔한 그의 그림은 이 시대를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