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Chaos - 작고 큰 우주, 피어나는 生의 의지_이호영
Chaos - 작고 큰 우주, 피어나는 生의 의지

  터지는 색감, 무수히 움직이는 물감의 흔적들. 질서 내지 않은 색들이 울리는 공간은 음악으로 가득 차 보인다. 인공의 터치가 들어가지 않은 공간- 화면은 언뜻 무질서해 보인다. 작가는 그것을 카오스라 말한다. 이성적인 질서가 들어가 있지 않기에, 우리가 알아챌 사물들이 들어가 있지 않기에, 온통 물감과 물감의 움직임이 만드는 자율적 리듬만이 남아있는 공간의 구성이기에 혼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오스의 세계는 인간 역사 이전의 우주의 시원으로부터 지금의 우주, 코스모스(cosmos)를 이루는 구조적 요소를 일컫는 것이니, 역설적으로 보면 우주적 질서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우주적 본연이든, 개별적 본연이든 그 기저에는 움직임이 있다. 시간은 인간의 공간에서 뿐만 아니라 우주의 공간을 관통하고 지배하는 폭력의 기재이다. 시간은 모든 것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우주는 그 시간의 축 위에서 팽창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천체물리학의 입장이다. 노재환은 그러한  우주, 카오스의 근간을 이루는 행위에서 아름다움의 근간을 추구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현대미술은 시각이 가지는 근간을 탐구하고 추구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러한 경향은 지금껏 우리의 시각이 가지는 본다는 관념을 뒤흔들면서 혼돈을 야기 시킨다. 혼돈으로 가려면 알고 있는 익숙함을 버리는 것이다. 알고 있는 사물을 치움으로서 관객들은 익숙함에서 낯섦으로 변모한다. 낯섦은 질서에서 혼돈으로 이끄는 통로이다. 거기에서 새로운 질서로 향한 문, 혼돈이 시작된다
   노재환의 화면에는 사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물이 있어야할 자리에 물감들이 만드는 공간이 있다. 한편에서는 어두운 공간에서 발현하는 밝음을 향한 공간, 다른 이면에서는 밝은 공간에서 어둠으로 향하는 공간들이다. 같은 이미지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를 하는 공간으로도 변화한다. 그 공간을 이루는 것. 화면은 사물이 사라진 흔적의 공간, 카오스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앎 이전의 근원으로 향한 공간, 혼돈 속이다. 혼돈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우주의 질서이다. 단지 인간의 인식 하에서 무질서해 보이는 것이다. 혼돈은 그러므로 혼돈이라고 번역하기에 무리가 있다. 그리스의 언어 카오스(chaos)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노재환이 만드는, 관객에게 공유하고 싶어 하는 공간은 근원의 흔적들이 만드는 이미지들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앎, 인식이전의 이미지들, 흔적들이 남아 이루고 형성된 공간들이다.
  마블링의 방식은 물감과 물의 성질이 다름을 이용한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기법이다.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이 방식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선택이다. 물감과 물감들이 만드는 화면은 혼돈이라고 불리지만 피어나는 것들, 생으로 향한 움직임의 역동성을 가진다. 피어나는 것은 움직임이다. 움직이기에 피어날 수 있다. 그 움직임은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생명은 움직임의 결과들, 진행들이다. 그래서 생은 피어나고 지는 것을 순환시킴으로서 지금에 이른다. 봄은 다시 오지만, 지금 봄은 지나간 봄이 아닌 새로운 봄이다. 늘 우리는 새로운 시간 속에서 미지의 시간을 여행한다. 작가가 추구하는 것은 그러한 혼돈이다. 같아 보이지만 같지 않는. 달리 보이지만 같은 구조에 있는 것들. 그런 것들은 기존의 질서, 관념을 깨어야만 만나는 근원, 원형질 같은. 그러한 이미지를 관객들에게 툭 선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카오스는 생으로 피어나는 욕망을 향하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혼돈 속 우연과 즉흥의 상태 즉 무질서하고 혼돈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현상들 속에도 질서와 규칙성을 지배하는 조형적 법칙이 존재하며 그것의 형상들과  혼돈 속 정체성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 작업들은 무질서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현상 속에 숨어 있는 정연한 질서를  실험하여  미지의 공간에 대한 새로운 표현,  혹은  메타포를  제시하는 것이다.’  우연과 즉흥이 필연과 질서로 변화하는 지점은 우주의 시선으로 옮길 때이다. 물과 물감이 혼합되거나 따로 움직이는 작용을 하는 것은 인간의 질서에서 움직이는 않은 한 자연적 질서에 따른다. 
 무의식의 확장은 작품의 디지털화이다. 원본을 종이나 캔버스를 사용하여 완성하고, 그 원본의 이미지를 디지털화함으로서 무수히 많은 변화를 가지는 작품으로 진화시킨다. 디지털화된 이미지는 하나의 사건을 복수의 사건으로 변모시킨다. 하나의 작품이 같으면서 다른 복수의 작품으로 동시에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작가는 디지털이 만들어 주는 수많은 우연성을 만나고 동시에 선택하는 것이다. 

- 이호영(아티스트, 미술학 박사)

묵시적 생명체를 통한 시 지각적 감각의 변이-이형옥

 묵시적 생명체를 통한 시 지각적 감각의 변이   

글:李炯玉(조형예술학박사, 이형아트센터관장)

  21세기, 우리는 흔히 말하는 첨단산업의 지식정보화시대에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문화경쟁력제고와 다각적인 콘텐츠개발에 대한 일반대중과의 이해와 소통이 없을 때 시대문화는 상호이질성을 낳게 됨을 인식한다. 이것은  Digital시대에서 급성장하는 과도기의 전형으로 일반대중에게 다양하게 접근하여 이루어질 때 하나의 조형적 매체예술(mass-communication)로 설득력을 갖게 된다.
  한국에서의 현대미술은 6-70년대 모색과 형성을 거듭하며, 80년대에는 정신성의 환원과 확산의 시기라 규정되나 지속과 단절 또는 혁신의시기로 동시대의 공존을 의미하면서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발전되어 왔다. 여기에서 평면과 매체조형작업은 확산적인 환경공간에서 시지각적인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일종의 오브제와 공간이 조화를 이룰 때 앙상블라즈(Assemblage)를 이루어 그 자체로서 독자적이며 총체적인 조형공간을 연출한다. 그러나 매체조형작업라고해서 반드시 그와 같은 확산적인 환경공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역(逆)으로 확산적이 아닌 축소지향적인 시 지각표현, 다시 말해서 작품하나 하나가 독립된 단위로서 그 자체 속에 별개의 환경을 지니고 있는 연작설치가 또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그 별개의 환경 그것은 다름 아닌 다양성세계의 그것이며, 그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시적(微視的)인 것이기는 하되, 또 한편으로는 시각매체라고 하는 또 다른 매개 영역으로 관조자들의 시선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작금의 이러한 형식미술이 하나의 세계적인 현상으로 번져가고 있는 가운데 노재환의 평면조형은 최근 들어 그 다양한 양상 속에서  나름의 독자적인 시도를 펼쳐 보이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노재환 그가 우주적 자연생태계 실상과 경각심을 제기하면서 작금의 우리가 백년 뒤에도 맑고 깨끗한 자연을 볼 수 있을까하는 화두로 일연의 작업을 시도하고 있음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번의 전시는 그 이전의 작업과의 연장선상에서의 출발이자. 개념미학의 당초 작업과는 차도가 있어 보이는 것은 강한 원색조의 바탕위에 상징적이며 기호적형상물을 이입하여 드로잉 또는 드리핑의 연작으로 평면위에 결합시키는 작업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순수자연 환경 속에서 인공 환경으로 전위 되어가는 현대사회의 초 극적 신개념의 형식을 단순히 노출된 이미지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개입으로 파생된 공간이 표출되어 결합(Matiere, Collage. Dripping)이라는 감각적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된 작품들은 때로는 부풀어 보이기도하며, 주어진 인공환경(물체)이 자연환경 속에 매몰, 잠재된 환경으로서 확산성을 이루어 자연 속에 통합되어 보이는 시 지각적 조형예술이기 때문이다.
  이번전시에서 노재환은 보다 본격적으로 매제(媒材)작업에 매력을 느껴 시지각의 매체조형작가로 전향한 듯이 보이며, 그것은 일련의 Human & Creation연작 그리고  Wood속의 유영공간 작품에서는 우주속의 자연관으로 산,나무,꽃,바람,강,돌,바다,비,눈,곤충,사람,물고기,새,잠자리,나비등의 존재가 문명으로부터 보호되고 또는 자연생태계의 영원성을 지향하는 묵시적 언어가 시간 속에서 잠행하듯 펼쳐져 환상 세계를 이루어내며, 화면구성에서 형과 색채대비 또한 감성이입과 결합되어 장식적 수단으로 표출되어 보이도록 하고 있다.
이것들은 많은 시간 속에 노출된 무수한 형상들로 오브제로서의 꼴라즈가 캔버스판위에 주관적 시간의 차이와 시간의 순환으로부터 또 다른 감각적 차원에서 들어나게 하는 형상의 이미지로, 멀티구성의 반복과 연속성으로 부풀어진 것들이 형의 전위를 통해 공간조형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일루전적 작품들은 이전의 잠재성에서 현재의 평면조형의 확산과 다중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결과물로 매체조형작가 노재환에 있어서 매제(媒材)로서의 그 조형예술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즉 하나는 평면으로서의 시 지각, 입체로서의 매체확산성을 찾는 조형언어 그것이다.
  서두에 지적했듯이 매체조형작가 노재환의 작업은 각기 다른 한단위로서 시간의 흔적을 결합하는 신비성을 표현한 순수함과 청명한 자연을 갈망하는 조형예술로서 생성공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매체작업이 작가로 인하여 확산, 통합되어 구성하고 있거니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판타지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재환의 이와 같은 일련의 작업을 두고 그것이 미술작품으로서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는 솔직히 말해서 필자로서는 Analog 와 Digital의 접목이 가져오는 형이상학 이성구조의 개념미학의 New identity작품으로 귀걸 하고자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수많은 반복과 시간 속에서 재현되는 실험적인 작품이며, 미술과 창의적 매제의 통합과 또 다른 메시지는 미래에 다가오는 자연에서도 인류가 현재와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던지며 그것들을 해결해보려는 시 지각조형예술형태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앞으로의 전개양상이 크게 기대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시도가 현대시각미술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새로운 매체영역을 제시해주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시간의 잠행(潛行) 그리고 흔적(痕迹)의 실험-이경석

시간의 잠행(潛行) 그리고 흔적(痕迹)의 실험

작가 정신의 참 모습은 순수하고 맑은 정신에서 비롯하는 감수성과 이지적 사고에 의한 자유로운 발상(發想)의 논리성, 그리고 이를 저변으로 하는 실험성이 다양한 매체에 의해 이루어질 때 그 참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사무사(思無邪), 사고(思考)와 생각 중에 사악함이 없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마음의 사고를 지니는 작가일 때 그 표현성은 생명력을 오래 지니는 것이라고 시경(詩經)에서도 작가 정신의 순수성을 말하고 있다.

노재환 선생의 작업은 시간의 잠행(潛行)을 통한 생명의 과정과 신비성을 비형상적인 표상성(表象性)에 의해 이루어 가고 있음이다. 생명체의 신비성과 순수함, 그리고 조형적 상징성들을 다양한 매체의 물성(物性)과 결합시켜가며 신비로운 조형공간의 모습으로 시간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하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 다양한 매체를 통한 체험의 확산은 발상의 자유로움, 즉 개성적인 감수성의 다양성을 표현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오늘의 회화적 표현은 그것이 오브제가 되었건 콜라주가 되었건 판화적 공간과 릴리프적인 요소가 되었건 간에 매체의 자유로운 선택과 물성의 다양성이 어떻게 이미지에 효용성으로 적용되어 지느냐 하는 문제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제 요소들이 작가의 감수성과 실험성에 어떠한 논리성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노재환 선생의 작업들에서 일관되게 보여지는 것은 ‘생명체와 시간의 흔적’ 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보여주는 시간의 모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잠행하며 그만의 독특한 감수성의 해석으로 보여주고 있음이라 하겠다. 오랫동안 실험성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그만의 이미지들은 회화적 공간에 차용되어지는 판화의 물성과 오브제의 효용성들이 시간의 잠행을 통해 얻어지는 기억의 흔적들을 자유롭게 느끼게 하고 있음이다. 이번의 개인전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작업들은 이러한 그만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물성(物性)과 오브제적인 공간과 드리핑에 의한 효용성들을 이미지와 결합시켜가며 시간의 잠행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신선한 실험적 내용들로 제시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작가는 순수한 감수성과 논리성을 실험 정신과 결합시켜가며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짐 없는 평형감각을 이루어 갈 때 참 모습의 작가정신이 작품에서 읽혀 질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의 작가정신이 이번 작품 전을 통해 더욱 성숙되어 가리라 기대하며 바라고 싶다.

                                               2009년 1월에
                                             이경석(경남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