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획(劃)으로 만든 조각_박정수(미술평론가)
획(劃)으로 만든 조각
- 박정수(미술평론가)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생명을 위한 물길의 발원지가 있다. 거북은 발원지를 찾는 여행자가 된다. 거북의 걸음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함께한다. 무거운 삶의 무게위에 경쾌한 흔적을 싣는다. 흔적은 바람이 되고, 즐거운 기분이 된다. 세상의 처음에서 세상의 끝을 향하는 철학적 질문에 응답하는 시작점이다.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이 된다. 흔적에는 아주 오래된 부족에서 전해지는 전설을 담는다.

오늘을 참는 자신의 모습을 대견해 하며 그것에 대한 자신의 자긍심을 전설로 풀어낸다. 온갖 감정을 실어 밤새 고민하며 쓰는 사춘기시절의 붓질과도 같다. 편지를 위한 붓에 먹을 흠뻑 담는다. 머금은 붓은 거북의 모습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우직한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다. 자신의 모습을 만든다. 세련되고 도회적인 모습보다는 다소 뭉툭하고 다소 거친, 그러면서 감정이 풍부한 모습으로 구현된다. 수많은 연습과 반복되는 감정표현이 숨겨진다. 한 번에 써 내려간 인상의 표현이다.

붓질이 시작된다. 먹을 힘껏 머금은 붓은 거대한 획(劃)을 만든다. 획은 그어지고 만들어지며, 자르고 쪼개면서 새로운 희망을 형성한다. 조각이기에 만든다고 하지만 노준진의 작품에는 긋는다는 말이 더 합당하다. 획은 생명 자체이며, 생명을 유지하는 도구가 된다. 시작과 마지막을 포함한 획은 정점이며, 삶의 완성에 이르는 이상향이다. 획을 짊어진 거북은 우직함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 담겨진 체계 속에서 자신과의 조화를 대상으로 자리한다. 있는 그대로의 접근이다. 특별한 기교가 없는 덩이와 육각형 석조위에는 화려한 생명이 자라면서 자연의 모습이 형성된다. 그렇다고 특정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달필가가 써내는 먹물 흠뻑 머금은 붓질이 지나듯 하다가도 우직하거나 투박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이중구조가 만들어진다. 애정과 친구 사이와도 같은 삶의 정신과 현실의 모습을 대변한다. 철학과 현실의 이중주가 된다. 획이라고 하는 동질성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사회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노준진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보통과 특별이 있다. 주어진 상황에 초연할 수 있는 이성과 예견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공존한다. 여기에 그가 실현하고자 하는 정신세계가 있다.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시작된다. 거북위에 살아있는 획에는 순리를 지키려는 온순함과 역경을 감내하면서 성취하려는 분출의 힘이 있다. 이중구조의 조각 작품에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다. 자신의 주변에서 형성되고 응집된 살아가는 기질로 완성된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거기에서 자신에 주어진 삶을 고찰하고 이해한다.

거북이 세상을 향해 말을 건다. 들어주는 이 없어도 무던히 말을 거는 거북은 어느새 세상의 한 켠을 차지한다. 거기에서 생명을 만들고 미래를 준비한다. 한편으로 거북은 지금의 거북일 뿐이다. 변화와 적응, 진화를 준비하는 변화무쌍한 마술사가 된다. 이전에는 달팽이 이거나 곰이거나 산양이었다. 자신의 예술가적 삶을 위한 변화일 뿐이다. 그것은 그가 놀이 삼는 돌덩이와의 술래잡기다. 돌덩이와 술래잡기를 시작한다. 숨어있는 동무의 옷자락을 핑계 삼아 얼굴을 만들고, 머리카락을 도구 삼아 옷을 입힌다. 숨어 있는 친구를 찾기 장독대에 다가가거나 장독대를 치우지 않는다. 친구를 감추고 있는 장독대는 어느새 연필이 되고, 먹물 머금은 붓이 된다. 거기에는 이미 생명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가끔씩 자신이 숨는다. 돌덩이 뒤에 숨어 있으면 어느새 새로운 돌은 조각가의 뒤에서 묵묵히 바라본다. 들켰다는 당혹감 보다는 술래로서 질료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부담감이다. 그래도 그들은 거기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사이가 된다.

노준진은 조각이 지닌 질료와 매체의 전형성을 따르면서도 현대의 시각예술로 표현되는 감흥과 교감을 위한 독특한 성질을 발현시킨다. 밀가루 반죽을 만지는 기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의 접근이다. 딱딱하고 굳어있는 매체에서 회화적 감흥을 발견한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성에 대한 본질파악을 위한 접근이며,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의 가치이며 예술의 가치이다. 물질 구조에 대한 설명보다는 시작점과 끝점을 하나로 이어내는 예술로의 표현이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자신이 지닌 본래의 순수성을 확보하는 범위에서 시선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사상과 내재된 삶의 접근이다. 거북은 여전히 어딘가로 향한다. 현재에 머물지 않은 발전하는 정신성에 대한 현대적 의미로의 접근이 필요하다. 

자연에 자연을 새겨넣다
자연에 자연을 새겨넣다
- 노준진 6th 개인전 [나무는 타투이스트]명동성당 1898갤러리

타투는 종교적, 주술적 사상의 표식이었으며 신분의 상징 혹은 전투적 의지나 맹세의 발현이기도 했다. 정인(情人)의 이름 한 글자를 몸에 새겨넣으며 영속과 귀속을 표상하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는 나를 드러내는 외피적 수단으로서 장신구의 목적성과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에 이르렀으며, 문화와 예술로서 존재가치를 각인시키고 있다. 시간의 지배 혹은 자비 앞에 그 방법과 목적은 변화하고 분산되어 왔지만, 주체가 뜻하는 추상을 표현하고 그것에 영구적인 기운을 부여한다는 타투의 기원(origin)은 변모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타투가 영속성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볼 때, 노준진의 작품은 방향성을 함께 한다. 돌은 변화의 대척점에 서 있는 물질이다. 영구, 영속, 무구의 상징인 돌의 시간은 인간이 체감할 수 없을만큼 느리고 우직하다. 태초부터 돌은 무겁고 진중한 주체로 흔히 묘사되어 왔지만, 작가의 섬세한 손 끝에서 돌은 부드럽고 유려한 석조각으로 재탄생된다. 우둘투둘하고 투박한 곡선은 물론 매끄럽고 유연한 곡선까지, 인간이 쌓아올린 직선의 미학을 버리고 자연의 상징인 곡선으로서 작가 자신의 심상을 표현한다.

예술가는 본디 자연에서 깊은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노준진의 개인전 연작 또한 동물과 식물이 창연한 숲의 움직임이 선연하게 묘출되어 있다. 작가의 눈으로 동화적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깊은 숲의 세계로 발길을 들여놓는다. 사락사락 잎사귀들이 볼을 비비는 소리와 청명한 수풀 내음을 느낀다. 하늘이란 캔버스 위에 저마다 다른 형상의 구름이 수놓이듯, 나무는 잔가지를 손으로 삼아 수많은 형상의 잎사귀를 스케치하고 채색하며 대지를 채운다. 온갖 문양과 패턴을 그려넣어, 숲의 외피와 진피를 눈부시게 가꾸어 놓는다. 작가는 코끼리, 물고기, 고양이, 기린, 낙타와 같은 동물로서 나무의 생명력을 조형하고, 그 위에 나무의 잎사귀들을 타투처럼 새겨넣었다. 코끼리처럼 튼튼한 아름드리 벚나무는 벚꽃잎 타투로 사랑스러운 봄 내음을 부여받고, 바람에 휘감기는 버드나무는 동그란 원을 그리며 자연의 순환과 회귀를 내포한다. 이렇듯 작가는 자연에 자연을 새기며 영구한 자연에 대한 그 자신의 맹목적인 염원을 읊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간 노준진은 돌의 유무형적 틀을 깨고 쪼개고 다듬어 돌이란 주체를 석조각으로 치환해왔고 이로써 형형색색한 돌의 서사(敍事)를 수없이 써내려왔다. 그런 의미에서 노준진의 이번 개인전 연작은 타투가 지닌 화석적 의미는 물론 변화하고 변주되는 또다른 미래적 시도라 이를 만하다. 돌의 서사는 그로 인해 매번 새로운 과정과 결말을 맞이하리라 의심치 않는다.

예술가를 예술의 주체로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이든 소비하고 없애버리는 작금의 시대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고 남기는 것이리라. 유형의 자산으로서 작품을 남기는 것 못지 않게, 사람들이 되새김질을 반복할 수 있도록 선연한 기억 한 가지를 새기는 것이 예술가의 소임일 것이다. 노준진의 이번 개인전 연작이 전시관을 찾은 누군가에게 짙은 무형의 타투 하나를 새겨넣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노준진, 빛으로 쪼아낸 돌에 동물의 형상으로 생명성 부여
노준진, 빛으로 쪼아낸 돌에 동물의 형상으로 생명성 부여
- 왕진오 기자
 
기암괴석을 정으로 쪼아 익숙한 이미지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수 만번 아니 그 이상의 망치질이 필요로 할 것이다. 특히 자연의 돌에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한 정성의 시간은 가히 무한이 아닐까한다.
 
조각가 노준진이 오석, 사암, 대리석을 주재료로 사용해 만든 거북이, 두꺼비, 달팽이, 다람쥐, 수달 등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친숙한 동물들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다.
4월 5일부터 서울 성북구 아트스페이스 에이치에서 막을 올리는 '노준진_빛을 조각하다'전에는 무생물인 돌에 빛으로 생명성을 부여한 작가의 대표작이 함께한다.

작가에게 있어 동물은 '순수함'가진 따듯한 생명체를 의미한다. 노 작가는 돌의 재질과 특성에 맞게 동물을 선택해 조각을 하기도 하는데, 이번 전시에는 에폭시 상감 기법을 이용해 돌 한 부분을 열어주고 빛으로 채워주는 기법을 활용했다.

노준진 작가는 "제가 만든 동물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유물로 여겨지는데, 저는 동물들이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작품은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예술이란 두터운 갑옷을 두른 거대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작고 귀여워, 일상에서 함께할 수 있을 정도의 친숙함을 가져다준다.
또한 현대화된 생활공간에 LED조명을 활용해 입체감을 살려놓은 아이디어로 인해, 사무실이나 거주공간 어디라도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조화를 이루는 것도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돌이라는 재료적 특성, 단색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 때문에 점차 애호가들의 눈길 가장자리로 이동한 조각의 새로운 변신을 엿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