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박병구의 풍경화-평면적 패턴화의 현대성과 감성적 상상 공간_김영동(미술평론가)
박병구의 풍경화-평면적 패턴화의 현대성과 감성적 상상 공간

大邱미술의 자연주의적 전통
자연주의 미술을 간단히 정의하면 자연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그림을 가리킨다. 그래서 방법적으로 ‘사실주의’와 다를 바 없지만 르네상스의 모방적인 묘사에서부터 20세기 표현주의에 와서 사물의 형태에 대한 왜곡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미술을 통칭한다. 또한 주제에 있어서 시대나 역사, 사회현실 따위의 문제보다 인물이나 초상, 자연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한 그림이란 뉘앙스를 준다. 그 개념을 좀 더 확장해 본다면 나무와 꽃, 산과 들, 바다와 섬들과 구름이 있는 낭만적인 풍경에 천착하는 태도에까지도 이 용어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 경북에서는 일찍이 이와 같은 의미의 자연주의 미술 전통이 뿌리 깊다. 서동진과 박명조 이인성과 서진달 등 초창기 작가들이 모두 자연주의적 정서에 바탕을 둔 회화로 서양화를 시작했으며 경주 출신의 손일봉은 빼어난 유화실력으로 자연주의를 추구한 근대미술의 작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로부터 시작된 大邱미술, 그 안에서도 풍경화의 전통은 금경연 김수명 권진호 등에 의해 발전되어 경북 도내로 확산돼나갔고 해방 후에는 김창락과 강우문 이경희 등에 의해 계승되면서 1970년대의 허용, 강정영, 남충모 등에게로까지 이어져 왔다.
이렇게 일찍이 자연주의 미술의 비옥한 텃밭이 된 대구의 서양화 전통은 1980년대에 지역 출신 젊은 작가들의 괄목할만한 성장을 가져오는데 밑거름이 되어 전국에서도 주목받는 사실주의 작가들을 대거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평면化, 패턴化, 개성化 한 자연주의 풍경
해방이 되고 시대적 국면이 전환됨에 따라 영남의 많은 자연주의 작가들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6.25 전쟁을 겪으면서 자연주의적 방법을 벗어나 새로이 추상을 시도하는 작가도 있었지만 구상작품을 하면서도 현대화된 회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시대적 과제로 대두했다. 1949년 대구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 백락종을 위시해서 향토작가로서 박인채와 강우문, 이경희 등 지역 출신들인 대표적인 구상작가들이 그러한 변화를 시도했었다. 또한 대구에 정착한 월남 작가들의 태도에서는 보다 현저하게 그런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서창환의 1950년대 풍경작품은 완전히 평면적 구성으로 바뀌었다. 당시는 자연주의와 추상의 중간지대에 있는 작품을 평면화(化)한 정도에 따라 구상 또는 반(半)구상 작품으로 분류되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 지난 1980년대에는 상당한 수의 젊은 작가들이 사실주의 기법을 구사하며 대구화단의 전면에 새롭게 등장했다. 특히 한유회와 같은 단체들이 결성되어 70년대까지 한동안 추상 일변도로 추진되던 미술운동에 가려있던 과거의 전통을 새롭게 하자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구상미술을 진작시킬 운동을 촉발시켰다. 거기서 배출된 지역작가들 중에 상당수는 다양한 개성의 자연주의적 화풍으로 전국적으로 지명도를 알리는데 성공을 거뒀다. 그 중에서도 평면화한 패턴의 특징 있는 화면으로 현대성을 추구한 경우가 바로 개성 있는 작가로 인식되는 박병구의 회화세계라 하겠다.
박병구의 회화에서 주제는 언제나 자연이었다. 특히 풍경대상에 대한 작가의 주된 관심은 바로 변함없는 이상적인 자연 본성에 있다. 그래서 그의 미적 취향을 자연주의라고 할 만 하지만 양식 면에서 평면적인 패턴화가 두드러진 그의 풍경화면들 볼 때 명백하게 자연주의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야 한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상의 사실적인 깊이 묘사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 있는 패턴(pattern)化를 추구했다. 20세기 초 야수파와 다리파, 청기사파 작가들의 경우에서 보듯 現代化를 추구하는 과정에는 먼저 화면에서 평면화가 필히 수반되었다. 또는 대상의 재현적인 묘사가 아닌 조형적인 왜곡이 시도되고 그리고 구성적인 구축의 단계에 도달해갔다.
그렇지만 유럽 미술의 역사적인 시기에 거의 모든 작가들이 표현주의적인 특징을 띠며 평면화의 단계를 시도했던 것과 달리 박병구의 평면화 과정에는 또 다른 형태로 패턴화의 단계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주관적 정서로부터 대상을 심하게 왜곡하지는 않는다. 단순화와 전형성을 부각시키면서도 혼란스러운 붓질과 두터운 물감 층(impasto)으로 심리적 내면의 정념을 토로할 의도를 보이고 있지도 않다. 평면화를 거치면서 표현주의와는 먼 조형적인 특성으로 개성적인 풍경을 확립했다. 그 결과 현재의 개성적인 화면은 화가의 정신적인 면보다 여전히 객관적 자연을 반영하는 면이 더 크게 차지하는 듯하며 여전히 자연의 상징으로서 기능을 한다. 그래서 이 작가의 조형철학에는 다시 말해 세계관에는 자연주의 정신이 견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자연과 감성적인 상상 공간
자연주의 풍경화가의 목표는 언제나 자연의 모습을 정직하게 그려내어 그 감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있다. 그래서 실제로 사생에 기초해 제작을 하며 특히 인상파 작가들의 경우처럼 현장에서의 작업에 충실하려 한다. 대구 영남의 자연주의 화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철저한 사생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전통이 강조돼 왔었다. 손일봉과 김창락의 작품들이 특히 그렇고 강우문의 풍경화들에서도 현장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풍경화들이 많다. 자연주의 작가들은 현실에서 치열한 삶을 사는 동안에도 그림을 그릴 때 그들의 눈길은 언제나 자연을 향했다. 박병구 역시 작품의 소재를 찾으러 남해안 일대를 누비며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때가 있었다. 특히 80년대 학번 출신들이 졸업 후 겪게 될 시대적 급변상황들을 어떤 태도로 맞이했는가에 따라 그들 작품의 화풍이 결정되곤 했다. 되돌아본다면 여러 갈래의 선택을 앞에 두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돌파할 때 이 작가의 경우는 판단과 결정에 필요한 지혜를 아마도 자연의 현장에서 구하려 했던 듯하다. 그 많은 사생이 바탕이 되어 오늘의 그림이 나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그의 화면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관념화되고 이상화된 자연에 가깝다. 작가의 상상력을 통하여 재창조된 자연으로써 심상적 풍경이라 하겠다. 그래서 한 평론가는 그것을 ‘몽환적 풍경이 자아내는 미학’이라고 평했다. 그의 화면 속 경치들은 어디를 봐도 항구 여일한 자연이 펼쳐진다. 마치 로코코시대 앙트완느 와토가 그려낸 자연처럼 비도 오지 않을 맑은 날이 계속되며 근심걱정도 없는 세계처럼 느껴진다. 또한 19세기 말 피뷔 드 샤반느의 상징주의적 풍경화에서처럼 흐르던 시간도 멈춰 고요한 평화가 지속되는 아련한 광경이 한없이 전개된다.
그렇다고 꿈 속 같지는 않다.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고요한 것이 아니라 반짝이고 일렁이는 작은 움직임들이 있다. 그림 속에 반복되고 있는 선과 형태 그리고 색채가 리듬을 만들고 원근에 차별 없는 채색에도 불구하고 풍경의 형태로써 원근감이 감지되도록 한 시선처리로 인해 일어나는 활달한 움직임들이 있다. 단순화한 형과 색으로 조화로운 풍경의 구성을 만들어 거기서 발랄한 기운과 생기가 느껴지도록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작가의 경우는 평면적 패턴의 현대성과 감성적 상상 공간 사이의 긴장이 불러일으키는 생동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수없이 많은 현장을 통해 새로운 구상회화의 길을 찾아 헤맨 결과 현재에 이르렀다는 작가의 주장처럼 그는 자신만의 분명한 회화적 개성을 획득한 셈이다. 긴 시간 동안 그의 몸과 정신에 각인되었고 내면으로부터 끄집어 낸 심상적 풍경화란 견해에 공감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작가의 풍경들을 보면서 간혹 초현실적인 공간감에 잠길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더욱 마음의 풍경화로 불릴 만하다. 그것이 나른하고 몽롱한 기분에 잠기게 하는 졸음 같은 것이 아니라 명쾌하게 때로는 매우 예민한 감각으로 지각을 깨우는 묘한 생기를 발생시킨다고 느끼곤 한다.

영남 구상미술의 미래와 박병구 회화의 실험
박병구 작가는 구상미술이 시대에 뒤쳐진 양식이 아닌가하던 시각에 강한 저항감을 느끼며 강력한 회화로 거기에 답하겠다는 신념을 키워온 작가다. 그런 편견을 깨겠다는 포부를 밝힌 적이 여러 차례 있었으며 손 일봉, 김창락, 허용 등으로 이어오는 대구 구상미술의 한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지금까지 대구출신의 구상작가들 중에는 너무 사실적인 묘사에 치우쳐 기교만 빛났다는 평가를 듣는 작가도 있고 시대적 표현을 담지 못한다는 평도 있었다. 구상미술의 미래를 보는 다양한 시각이 있겠지만 박병구작가는 전인미답의 경지를 열어 보이겠다던 젊은 날의 꿈을 접지 않은 채 여전히 굳은 의지를 굽히지 않고 구상미술의 새로운 비전을 개척해주길 주길 바란다.

2016.2.19.
김영동(미술평론가)
박병구 국문평론 變調된 自然의 序曲, 홍준화 박사 서문

박병구 展
― 變調된 自然의 序曲 ―

무릇 예술이란 인간의 자연과의 접목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예술이란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그렇고 저러한 것’들이 된다.
화가에 의한 대자연의 회화적 접목은 ‘그렇고 저러한’ 방법의 한 과정이자 결과를 산출하는데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역사 이래 풍경화가 독립된 회화 장르로 군림하기에 이른 것은 그리 오래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독자성을 확보한 풍경화는 오늘에 이르러 무궁한 발전과 함께 회화 영역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조차 급조된 회화적 현상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현실적으로 오늘날의 화가들은 세계현상을 급조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왜 일까?

기존의 풍경화가 추구하였던 아름다움은 도대체 그렇게 까지 쓸모가 없는 것인가?
박병구의 풍경화는 미력하나마 앞선 의구심을 일소에 날려버릴 만큼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풍경화는 자연을 급조한 듯 하기는 하지만 변조(變調)된 자연(自然)을 통해 풍경화가 갖추어야 할 면모로서 그 다정다감한 서곡(序曲)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박병구의 그림은 미려(美麗)하기는 하나 천박(淺薄)하기보다는 정려(靜慮)하다. 그의 풍경화에는 형과 색의 적절한 조화가 내재 해 있다.

현상적으로 볼 때 그의 풍경화는 크게 두 가지 속성을 겸비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그의 그림이 다채로워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 정도를  지나쳐 현란스러울 정도로 다채롭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사뭇 정숙한 내음을 뿜어낸다. 현란스러움 속에 정려한 맛을 겸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사계(四季)라는 소재는 미려함의 대변체이다. 캔버스에 현상된 회화적 모습은 각양의 색조를 발산하고 있다.

그렇게 그것들은 각양의 특성을 드러내며 사계를 현상하고 있는 것이다.
대자연의 현상에 대해 예술가가 어느 정도까지 그것을 ‘자기화(自己化)할 수 있는 지’ 하는 것은 중요하다.

박병구의 그림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또 다른 속성은 형의 변조이다. 이에 따라 그의 그림은 앞서 지적했듯,

다채로운 현상적 속성을 발산하고 있지만 지나칠 정도로 천박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형은 무릇 모든 사람이 아무 거리낌 없이 공유할 수 있는 형의 일반화 과정을 거친 정화된 형을 양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박병구의 풍경화는 적절히 조절된 조형적 요소들의 적시를 통해 그 회화적 속성을 강화하고 있다.

형의 변조 및 그 적용에 덧붙여, 그의 색은 순수한 원색, 즉 순색을 벗어난 색의 사용으로 퇴색된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렇다고 해서 침울하다고 할 수 만은 없는 색조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순색보다도 더 강렬한 인상을 제공하는 색감을 제공하고 있다.
박병구의 풍경화는 그렇게 변조된 형과 색의 조화, 즉 그것들이 서로 어울려 각기 정숙한 미려함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그렇게 변조된 형과 색을 적용하다 보니, 그의 풍경화에는 규격화를 벗어난 독자적인 ‘그림 틀’이 등장한다.

이는 그의 대자연에 대한 관조(觀照) 태도(態度)가 남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광활하게 펼쳐진 대자연에서 현실적으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것들은 한정적이다. 이러한 한정된 한계 안에서 화가의 눈으로 독자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또 다른 확장된 눈으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나간다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병구는 그러한 예술가적 곤난(困難)을 잘 헤쳐 나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능히 그에게 주어진 화가로서의 특권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박병구의 풍경화에는 대자연의 몸체로서 땅, 하늘, 그리고 물 등은 수시로 급박하게 변조된 듯 하긴 하지만  여전히 일관된 속성을 지닌채 나름의 평정(平靜)을 유지하고 있고,

그 육신위에 덧붙여진 풀, 꽃, 나무 등은 온갖 교만한 자태를 드러내면서도 육신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그 속으로 빨려 들어 침잠되어 있다.
박병구의 풍경화는 그렇게 대자연의 육신과 실체들이 어우러져 천박하기 보다는 고요한 미려함을 드러내고 있고,

그렇게 그것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보다 숙련된 정신의 침잠을 유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변조를 통해 대자연의 서곡을 완성하기 위한 꿈을 품고서!

-홍준화 박사 서문 

박병구 국문평론 꿈결 같은 단색조의 서정적인 풍경, 신항섭 평론

박병구 작품전

꿈결 같은 단색조의 서정적인 풍경

형상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현대회화에서는 색채의 중요성이 증대한다.

 

물론 물체의 고유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상파의 시각으로부터 색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전개되기 시작한데 연유한다.  

설령 사실주의 표현기법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에도 색채를 비현실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박병구의 작품도 색채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통해 자연주의의 조형적인 틀을 벗어나고 있다.  

실제에 가깝게 재현하는 일반적인 자연주의 표현기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현실에서 맛볼 수 없는 회화적인 아름다움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시선에 익숙한 정겨운 우리 산하를 취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풍경화는 백일몽 속의 한 장면과도 흡사한 정서를 내포한다.  
현실색을 중화시키는 듯한 미묘한 중간색조가 그러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음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보기 싫은 것은 그리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중간색조라는 통일된 색채이미지로 요약되는 개별적인 조형의 원리를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다가 전체적으로 밝고 명랑한 빛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기술적으로는 물론 밝은 색채이미지는 감산혼색에 의한 결과이다.

 

어찌 보면 컬러필터로 색채를 조율한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여기에다가 묘사기법에서 하늘 바다 강 그리고 먼 산 따위의 이미지는 대부분 평면화하고 있다.  평면화한다는 것은 단순화를 의미한다.

아울러 평면적인 이미지에는 필연적으로 단일 색면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그림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 이미지가 평면화됨으로써 시각적인 인상이 간결하다.

그래서일까.  그림의 이미지가 일목요연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시각적인 장애를 느끼지 않는 흐름의 정연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그림은 거의 정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기에 정지된 시간 속의 그 고요한 침묵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정적인 분위기는 정관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의 풍경화는 어떤 경우이든 현실을 떠나 있는 듯하다.  어쩌면 이상적인 세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거기에는 정태적인 세계가 전개된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이끌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일시에 중단된 채 정적에 휩싸이고 있다는 느낌이다.

행동을 그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내면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그렇다.  사색을 유도하는 그 정적인 이미지야말로 그의 그림이 지니고 있는 특색의 하나이다.

그것은 순화된 세계를 의미한다.  지상에서 또는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움직임을 중지시킴으로써 시간이 정지되고 세상은 불현듯이 침묵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 침묵이란 완전한 정지가 아니다.  정신 및 감정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내면의 움직임으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그림에서는 일체의 일상사 그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맛보는 감정적인 해방감이 감지된다.  거기에는 정결한 정신의 쉼터가 자리한다.

정신과 눈을 맑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회화적인 공간에서나 구현될 수 있는 정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그림이란 바로 이와 같은 기능을 한다.

단지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국한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 및 감정세계의 정화라는 목적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풍경화는 자연과 유리된 삶의 방식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는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순화의 장소가 될 수 있다.

그처럼 순화된 세계와 마주하고서는 삿된 마음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작품의 대다수가 멀리서 바라보는 원경인 까닭에 수평구도를 따른다.  더구나 호수, 강, 바다와 같은 물이 있는 풍경이 주류를 이룸으로써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인상이다.

예로부터 농경민족으로서의 삶의 터전이 되어온 천혜의 자연조건을 거짓없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농경민족의 그 순연한 삶의 방식을 그림 속에서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비록 산이 많다고는 하지만 도전적이지는 않다.  인간을 따스하게 안아들이는 듯한 포근한 산세야말로 우리 산하의 한 특징일 것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사계절이 뚜렷하고 햇볕이 따사롭고 비교적 기후가 건조한데다가 산과 물이 많은 한반도의 지형적인 특색을 잘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취재하면서 나름대로의 자연관을 확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림은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각박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정신과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삶의 휴지부인 것이다.

그는 그러한 기능을 기대하면서 순화되고 정화된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그러한 기능을 자청하고 있다.  
  최근 작업에서 그는 색상의 범위를 좁히고 있다.  동일색상 계열의 색채이미지만으로 처리함으로써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증가한다.

동시에 아른한 과거의 시간 속을 소요하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회고적이고 복고적인 정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과거의 시간으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회화적인 환상 속에 빠져들게 된다.  아울러 그 환상적인 분위기는 문학적인 서정미로 연결된다.

풍경화의 궁극은 바로 서정적인 문학성과 만나는데 있다.

이후에 전개될 그의 작품세계의 방향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신 항 섭 (미술평론가)

박병구 국문평론, 김영동 미술평론가

박병구의 풍경화-평면적 패턴화의 현대성과 감성적 상상 공간


大邱미술의 자연주의적 전통


자연주의 미술을 간단히 정의하면 자연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그림을 가리킨다.

그래서 방법적으로 ‘사실주의’와 다를 바 없지만 르네상스의 모방적인 묘사에서부터 20세기 표현주의에 와서 사물의 형태에 대한 왜곡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미술을 통칭한다.

또한 주제에 있어서 시대나 역사, 사회현실 따위의 문제보다 인물이나 초상, 자연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한 그림이란 뉘앙스를 준다.

그 개념을 좀 더 확장해 본다면 나무와 꽃, 산과 들, 바다와 섬들과 구름이 있는 낭만적인 풍경에 천착하는 태도에까지도 이 용어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 경북에서는 일찍이 이와 같은 의미의 자연주의 미술 전통이 뿌리 깊다.

서동진과 박명조 이인성과 서진달 등 초창기 작가들이 모두 자연주의적 정서에 바탕을 둔 회화로 서양화를 시작했으며

경주 출신의 손일봉은 빼어난 유화실력으로 자연주의를 추구한 근대미술의 작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로부터 시작된 大邱미술, 그 안에서도 풍경화의 전통은 금경연 김수명 권진호 등에 의해 발전되어 경북 도내로 확산돼나갔고

해방 후에는 김창락과 강우문 이경희 등에 의해 계승되면서 1970년대의 허용, 강정영, 남충모 등에게로까지 이어져 왔다.
이렇게 일찍이 자연주의 미술의 비옥한 텃밭이 된 대구의 서양화 전통은 1980년대에 지역 출신 젊은 작가들의 괄목할만한 성장을 가져오는데 밑거름이 되어

전국에서도 주목받는 사실주의 작가들을 대거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평면化, 패턴化, 개성化 한 자연주의 풍경


해방이 되고 시대적 국면이 전환됨에 따라 영남의 많은 자연주의 작가들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6.25 전쟁을 겪으면서 자연주의적 방법을 벗어나 새로이 추상을 시도하는 작가도 있었지만 구상작품을 하면서도 현대화된 회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시대적 과제로 대두했다.

1949년 대구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 백락종을 위시해서 향토작가로서 박인채와 강우문, 이경희 등 지역 출신들인 대표적인 구상작가들이 그러한 변화를 시도했었다.

또한 대구에 정착한 월남 작가들의 태도에서는 보다 현저하게 그런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서창환의 1950년대 풍경작품은 완전히 평면적 구성으로 바뀌었다.

당시는 자연주의와 추상의 중간지대에 있는 작품을 평면화(化)한 정도에 따라 구상 또는 반(半)구상 작품으로 분류되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 지난 1980년대에는 상당한 수의 젊은 작가들이 사실주의 기법을 구사하며 대구화단의 전면에 새롭게 등장했다.

특히 한유회와 같은 단체들이 결성되어 70년대까지 한동안 추상 일변도로 추진되던 미술운동에 가려있던 과거의 전통을 새롭게 하자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구상미술을 진작시킬 운동을 촉발시켰다. 거기서 배출된 지역작가들 중에 상당수는 다양한 개성의 자연주의적 화풍으로 전국적으로 지명도를 알리는데 성공을 거뒀다.

그 중에서도 평면화한 패턴의 특징 있는 화면으로 현대성을 추구한 경우가 바로 개성 있는 작가로 인식되는 박병구의 회화세계라 하겠다.
박병구의 회화에서 주제는 언제나 자연이었다. 특히 풍경대상에 대한 작가의 주된 관심은 바로 변함없는 이상적인 자연 본성에 있다.

그래서 그의 미적 취향을 자연주의라고 할 만 하지만 양식 면에서 평면적인 패턴화가 두드러진 그의 풍경화면들 볼 때 명백하게 자연주의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야 한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상의 사실적인 깊이 묘사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 있는 패턴(pattern)化를 추구했다.

20세기 초 야수파와 다리파, 청기사파 작가들의 경우에서 보듯 現代化를 추구하는 과정에는 먼저 화면에서 평면화가 필히 수반되었다.

또는 대상의 재현적인 묘사가 아닌 조형적인 왜곡이 시도되고 그리고 구성적인 구축의 단계에 도달해갔다.
그렇지만 유럽 미술의 역사적인 시기에 거의 모든 작가들이 표현주의적인 특징을 띠며 평면화의 단계를 시도했던 것과 달리 박병구의 평면화 과정에는 또 다른 형태로 패턴화의 단계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주관적 정서로부터 대상을 심하게 왜곡하지는 않는다. 단순화와 전형성을 부각시키면서도 혼란스러운 붓질과 두터운 물감 층(impasto)으로 심리적 내면의 정념을 토로할 의도를 보이고 있지도 않다.

평면화를 거치면서 표현주의와는 먼 조형적인 특성으로 개성적인 풍경을 확립했다.

그 결과 현재의 개성적인 화면은 화가의 정신적인 면보다 여전히 객관적 자연을 반영하는 면이 더 크게 차지하는 듯하며 여전히 자연의 상징으로서 기능을 한다.

그래서 이 작가의 조형철학에는 다시 말해 세계관에는 자연주의 정신이 견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자연과 감성적인 상상 공간


자연주의 풍경화가의 목표는 언제나 자연의 모습을 정직하게 그려내어 그 감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있다.

그래서 실제로 사생에 기초해 제작을 하며 특히 인상파 작가들의 경우처럼 현장에서의 작업에 충실하려 한다.

대구 영남의 자연주의 화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철저한 사생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전통이 강조돼 왔었다.

손일봉과 김창락의 작품들이 특히 그렇고 강우문의 풍경화들에서도 현장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풍경화들이 많다.

자연주의 작가들은 현실에서 치열한 삶을 사는 동안에도 그림을 그릴 때 그들의 눈길은 언제나 자연을 향했다.

박병구 역시 작품의 소재를 찾으러 남해안 일대를 누비며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때가 있었다.

특히 80년대 학번 출신들이 졸업 후 겪게 될 시대적 급변상황들을 어떤 태도로 맞이했는가에 따라 그들 작품의 화풍이 결정되곤 했다.

되돌아본다면 여러 갈래의 선택을 앞에 두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돌파할 때 이 작가의 경우는 판단과 결정에 필요한 지혜를 아마도 자연의 현장에서 구하려 했던 듯하다.

그 많은 사생이 바탕이 되어 오늘의 그림이 나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그의 화면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관념화되고 이상화된 자연에 가깝다. 작가의 상상력을 통하여 재창조된 자연으로써 심상적 풍경이라 하겠다.

그래서 한 평론가는 그것을 ‘몽환적 풍경이 자아내는 미학’이라고 평했다. 그의 화면 속 경치들은 어디를 봐도 항구 여일한 자연이 펼쳐진다.

마치 로코코시대 앙트완느 와토가 그려낸 자연처럼 비도 오지 않을 맑은 날이 계속되며 근심걱정도 없는 세계처럼 느껴진다.

또한 19세기 말 피뷔 드 샤반느의 상징주의적 풍경화에서처럼 흐르던 시간도 멈춰 고요한 평화가 지속되는 아련한 광경이 한없이 전개된다.
그렇다고 꿈 속 같지는 않다.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고요한 것이 아니라 반짝이고 일렁이는 작은 움직임들이 있다.

그림 속에 반복되고 있는 선과 형태 그리고 색채가 리듬을 만들고 원근에 차별 없는 채색에도 불구하고 풍경의 형태로써 원근감이 감지되도록 한 시선처리로 인해 일어나는 활달한 움직임들이 있다.

단순화한 형과 색으로 조화로운 풍경의 구성을 만들어 거기서 발랄한 기운과 생기가 느껴지도록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작가의 경우는 평면적 패턴의 현대성과 감성적 상상 공간 사이의 긴장이 불러일으키는 생동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수없이 많은 현장을 통해 새로운 구상회화의 길을 찾아 헤맨 결과 현재에 이르렀다는 작가의 주장처럼 그는 자신만의 분명한 회화적 개성을 획득한 셈이다.

긴 시간 동안 그의 몸과 정신에 각인되었고 내면으로부터 끄집어 낸 심상적 풍경화란 견해에 공감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작가의 풍경들을 보면서 간혹 초현실적인 공간감에 잠길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더욱 마음의 풍경화로 불릴 만하다.

그것이 나른하고 몽롱한 기분에 잠기게 하는 졸음 같은 것이 아니라 명쾌하게 때로는 매우 예민한 감각으로 지각을 깨우는 묘한 생기를 발생시킨다고 느끼곤 한다.

영남 구상미술의 미래와 박병구 회화의 실험


박병구 작가는 구상미술이 시대에 뒤쳐진 양식이 아닌가하던 시각에 강한 저항감을 느끼며 강력한 회화로 거기에 답하겠다는 신념을 키워온 작가다.

그런 편견을 깨겠다는 포부를 밝힌 적이 여러 차례 있었으며 손 일봉, 김창락, 허용 등으로 이어오는 대구 구상미술의 한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지금까지 대구출신의 구상작가들 중에는 너무 사실적인 묘사에 치우쳐 기교만 빛났다는 평가를 듣는 작가도 있고 시대적 표현을 담지 못한다는 평도 있었다.

구상미술의 미래를 보는 다양한 시각이 있겠지만 박병구작가는 전인미답의 경지를 열어 보이겠다던 젊은 날의 꿈을 접지 않은 채 여전히 굳은 의지를 굽히지 않고 구상미술의 새로운 비전을 개척해주길 주길 바란다.

2016.2.19.
김영동(미술평론가)

박병구 국문평론, 이미애 평론가

‘의경(意境)을 통한 일상 풍경의 재해석’- 박병구의 <기억의 풍경展>

서양화가 박병구는 도시풍경에 따르는 필연적인 각박한 삶의 현실에서 벗어나 주변의 여유로운 자연공간을 중심으로 체험한 일상의 풍경에 주목해 온 작가이다.

그래서 그는 길을 가다가도 무심히 지나치며 바라본 자연의 이미지나 여행길에서 마주친 낯선 지역의 풍경들이 여느 사람들처럼 단순한 기억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비친 정경(情景)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의미를 부여해 왔다. 그리고 그 기억을 되살려 대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인식하면서 비움과 채움에 초점을 두어‘회화’라는 매체로 재구성하는 작업에 천착해 오고 있다.  
 조형적 측면에서 바라본 그의 작품 속 화면 공간구성은 실재적 풍경이 아닌, 작가적 내적 감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치열함이 배어 있다.

‘일상(日常)’이라는 의미 자체가 예술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얼핏 평범하게 보이는 그의 일상은 여느 작가들과는 달리 무한한 모티브가 되고 작업의 중요한 소재(素材)가 되어‘현대미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예술작품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미술’이란 일상, 즉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활에서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삶의 의미와 감성을 조형요소의 원리를 통해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예술행위를 말한다.

그렇다면 예술은 일상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작가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창조적이고 표현적인 형식(작품)을 통해 보편타당한 미적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비춰 볼 때 작가 박병구 역시 일상을 중심으로 도식적인 광대한 도시풍경에서 벗어나 작고 아담한 외곽의 자연 풍경을 즐겨 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종종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단순한 풍경과 무심히 마주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일부 기억과 여운으로 남아 있는 시골의 나지막한 집들이며

그 주변의 풍경과 소도읍(小都邑)의 정감 어린 풍경을 대상으로 저마다의 특징을 살려 작품으로 재구성해 왔다.

그는 평소 위압적인 대도시의 살벌한 생활환경에 묻혀 치열하게 부대끼면서도 푸른 산과 너른 들판을 끼고 아늑하게 자리 잡은 평화로운 촌락이며

자연과 더불어 놀이터로 삼았던 논두렁, 밭두렁 등 아련하게 남아 있는 유년시절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곧잘 틈만 나면 도시를 벗어나 시골의 일상적 풍경을 찾아 나선다고 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아니라서 다소 낯이 설긴 해도 그곳엔 정서적,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그는 어디를 가든 여행을 떠나면 언제나 자신이 접한 여행지의 풍경들을 기억 속에 저장하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일상에서의 체험을 여행에 주목하는 이유다.
 발걸음 닿는 대로 가다보면 머무는 곳마다 인정 많은 주민들과 짧은 시간이나마 일상을 함께 누릴 수도 있고 생소한 경험을 통해 또 다른 일상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의 소재를 직접 발품으로 찾아 눈으로 기억하고 작품으로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의 작품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단조로운 일상에서 느끼는 삭막한 도시 풍경과는 달리 기억 속 자신이 경험한 자연의 풍경과 시·공간적으로 교류하는 감성의 표현을 절절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새삼 그의 작품을 대하는 순간, 접할 수 있는 밝고 명쾌한 색채감은 어쩌면 풍경화의 사실적 재현보다는 감성적인‘언어구사’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기억 속의 낯선 풍경은 과거라는 시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아련한 향수와 추억을 언뜻 눈에 띄게 감성적인 색감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작업 할 때 선택하는 색채는 여유로운 공간 구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적인 미감의 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절제감이 돋보이기도 한다.

단지 색상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닌 작품 전체에서 보이는 분위기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전반적으로 파스텔 톤의 튀지 않는 색채를 사용하며 미세한 색채의 변화를 통해 공간적인 깊이감과 자연스러운 연결을 시도하고 있는 것도 특이한 작업기법이 아닐 수 없다.

예술가의 심미적(審美的) 특성은 일상에서 본 단순한 대상을 물리적 자극이 아닌 감각에 바탕을 두고 의미를 부여하며 관찰하게 마련이다.

여느 사람들이 볼 때엔 아무 것도 아닌 대상에 작가가 나름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경험하는 모든 일상적인 것들 속에서 새로운 발견에 도달하며 주관적인 경험의 이미지를 화면에 담아낸다.

이는 곧 예술 활동을 통해 개인적인 삶을 감성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축적된 경험 속 기억은 각자의 방식대로 상징적인 이미지를 통해 시각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 박병구의 일상 속 풍경은 단순히 작업에서 얻어지는 물리적인 자극만이 아닌 또 다른 창작의 의미를 가지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게 되고

이를 모티브로 감성이 묻어나는 작품을 완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고 하겠다. 이 같이 일상의 소재와 개인적인 기억에 초점을 맞춰 소재를 시각화 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과거나 현재에 한 번 쯤 보고 느꼈을 정서적 감성과 시공간을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알랭드 보통(Alain de Botton․1969~)의 『여행의 기술』에 등장하는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1819 ~1900)은

“어떤 장소의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그것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며 그 방법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다.
 작가 박병구의 작품도 관람자의 시각에서 볼 때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적 풍경을 새롭게 형상화하는 과정으로 재탄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예술의 기법은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묘사한 작품을 통해 백미(白眉)를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그림’이라는 기록의 매개를 통해 시간이 멈춰 버린 기억 속 풍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 이미애 (수성아트피아 전시기획팀 팀장·미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