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구멍은 공간이다-박영택
구멍은 공간이다
박병윤展 / PARKBYUNGYOON / 朴炳潤 / painting
2014_0827 ▶ 2014_0902

소통을 위한 구멍들
● 꽃과 마릴린 먼로의 얼굴, 여성의 몸이 구멍 사이로 얼핏 드러난다. 불투명한 막에 감싸진 후경은 구멍을 통해 조금씩 그 내부를 보여준다. 이 관음적인 시선의 유인은 감추면서 보여주는 방식이고 두 개의 다른 세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개별적인 여러 구멍을 통해 비로소 전체의 상이 가늠되는 형국이기도 하다. 우리는 특정 대상과 세계를 자신의 관점 내에서만 바라보고 이해한다. 각자 자신의 관점에 의해서만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한다. 가치관, 신념, 이데올로기 등이 그의 관점을 형성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되고 편협한 시선이다. '나'라고 믿는 것 역시 허위에 해당한다. 진정한 주체란 없다. '나' 역시 사회적,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니 주체나 정체성이란 것도 사실은 허구적인 셈이다. 나의 상대적 개념인 타자 역시 그렇다. 그렇다면 인간은 서로 다른 시선으로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소통이나 이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까? 아마도 작가는 그러한 인식 아래 '소통'이란 문제를 그림의 주제로 삼은 듯하고 이에 따라 구멍 작업이 나온 것 같다. 그림 속의 구멍은 하나의 관점, 시선, 소통의 통로나 교류 등을 암시한다. 문제는 이런 연출이 전달하는 주제가 쉽게 읽힐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매력적인 화면 자체를 완성시키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박병윤은 캔버스에 이중의 화면을 구성한다. 바탕 면에는 특정 소재를 사실적인 기법 아래 재현했다. 꽃이나 마릴린 먼로, 누드 등이 선택된 소재들이다. 이는 자신의 욕망과 관련된 것들이다. 화려함과 여성성을 은유하는 이미지이자 관음적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 그러나 고독하고 단절된 삶을 사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소재들이 그려진 색채로 뒤덮인 화면 위를 다시 투명한 하얀 색 층으로 뒤덮는다. 마치 거즈나 헝겊으로 봉인한 것도 같고 불투명한 막을 형성시켜 놓은 듯하다. 화려한 색채와 단색조가 동시에 자리하고 있고 나란히 배열된 구멍이 반복적인 패턴을 이루고 있다. 여러 구멍들이 모여 이는 환영적인 대상을 평면적으로 돌려놓은 것이자 꽃잎과 살의 촉각성과 막의 질감을 상당히 예민하게 지각시키는 편이다. "어린 시절 한복집 앞의 비단 옷감 단층에서 무지개색이 울렁거림을, 옷 수선 집 벽면에 꽂혀있던 동그란 실패의 나열에서 정갈함을 보았다." (박병윤) 이중의 겹, 겹쳐진 공간의 층이자 내부와 표면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화면이 되었다. 그 표면/피부에 원형의 구멍을 여러 개 만들어놓았다. 그려진 구멍이지만 실제 막을 뚫어놓아 밑층이 드러나 보이는 듯한 연출이다. 구멍 하나하나가 새로운 화면/장면을 생성시키고 각 부분들에 시선을 집중시켜준다. 저마다 다른 시점이고 부분적인 장면이지만 기실 그것들이 모여 전체적인 풍경을 형성해준다는 메시지다. 여러 통로, 소통의 장에 의해 우리는 편견이나 오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도 있다는 전언 같다. 그 구멍들이 모여 '네트'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중요한 덕목이 여럿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나와 다른 이의 사유, 감각, 감수성과 강렬하게 접촉시킨 다는 점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 만난다. 나와는 다른 몸, 감각, 감수성과 취향들과 대면한다. 들뢰즈를 비롯한 탈근대철학이 제기한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는 '나'에 집착하는 존재론을 깨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관건은 '나'라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나와 다른 타자, 내 밖에서 벌어지는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나'를 알려면 "문밖"의 '낯선 기호'(들뢰즈)와 부딪쳐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사유가 발생한다. 외부와의 마주침이 없으면 사유와 생성과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강신주) 그러니 진정한 변화의 계기는 낯선 기호인 다른 사람과의 마주침에서 오며 다른 이의 예술작품에서 온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저마다 나만의 관점, 나만의 구멍으로 세계를 본다. 그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 그럼 어떻게 나를 벗어나 타자, 외부의 입장에 설 수 있을까? 이른바 그 '재현의 한계'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신을 객관화하는 한편 자기만의 관점에서 벗어나 무수한 타자의 관점에 서서 사물과 세계를 보려는 이, 그렇게 무수한 관점(구멍)을 소유한 이들이 성숙한 인간이고 좋은 예술가일 것이다. 박병윤의 작업 의도 또한 이 '구멍'작업을 통해 타자와의 진정한 소통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시각화하고자 한 것이다. ■ 박영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