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식물통역사’ 박진이가 전하는 생명론_이재언(미술평론가)
   ‘식물통역사’ 박진이가 전하는 생명론
  
- 이재언 (미술평론가)

  보이지 않는 적들과의 지루한 싸움에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간다. 전대미문의 재난이 의외로 장기화되고 있어 코로나블루도 생겼다. 언제쯤 온전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지금에야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 또한 평범함과 소박함이 우리에게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이제야 깨닫고 있다. 오늘의 암울한 상황에서는 거대한 서사보다 작은 서사가 요구된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장대한 스펙터클이나 지구를 위험에서 구하는 슈퍼맨 같은 영웅담이 아닐 것이다. 진부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한 송이 들꽃이나 들풀 따위가 전하는 생명의 울림 같은 것이 아닐까.  
  오늘의 동시대인들이 처한 정신적, 정서적 상황이 이리되고 보니, 한국화가 박진이의 작업이 갖는 의미가 새삼 돋보인다. 작가는 소박하고 진부해 보이는 평범한 일상, 혹은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이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한 재발견에 비중을 둔다. 그동안 작가가 설정한 주제가 ‘마음의 소리’, ‘치유적 풍경’, ‘편집된 자연’, ‘삶을 바라보다’, ‘뒤란의 페이소스’ 등으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접하는 정물적 풍경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자기 미의식만큼의 분량과 성질들을 관객들에게 편안하게 전달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대상을 객관적으로 스캔하듯 재현하는 데만 열중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대상의 표피 뒤에 유동 상태로 있는 본질적인 울림, 즉 생명의 이야기들을 직관하려 한다. 또한 작가는 마치 ‘식물통역사’처럼 흔하고 진부한 것들에 귀를 기울여 생명의 소리를 예민하게 포착해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연결한다. 그 결과 작가의 그림은 삽화처럼 편안하고 담백하면서도 어떤 리듬이나 패턴을 띤 추상적인 질서로까지 넘나들게 된다.  
  작가 작업의 관건은 역시 단조롭고도 평범함 속에 섬세하면서도 뉘앙스가 풍부한 화면으로 승화시켜내는 데 있다. 정확한 통,번역을 위해서는 대상의 성질에 대한 밀도 높은 직관도 요구되지만, 매개적 재료에 대해서도 예민할 필요가 있다. 한국화가로서 먹을 안료로 사역함에 있어서도 바탕(ground)이 되는 것의 재질과 마티엘 같은 조건들에 따른 변화를 대단히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석분 같은 재료들로 도포된 캔버스 표면에 물리적인 작용과 반작용, 즉 물성적 상호작용들의 측면들에 대해 내공을 쌓아 왔다. 
  작가의 화면 속 이미지들은 종이 위에 그려진 한국화와는 사뭇 다른 감각으로 구현된다. 형식으로 치자면 벽화에 더 가까운 작가의 그림. 우열의 문제는 아니고 번역의 문제라 할 수 있을 텐데, 촉촉하게 물기를 많이 머금어 생기가 살아 있다. 내면에서 내면으로 전달되는 경로에는 생기가 관건일 터, 이런 점에서 작가는 실험에서 적지 않은 소득을 거두었으며, 작가만의 그림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작가의 화면이 흰 바탕 그대로 있어도 완성도에서 손상이 없는 이유도 촉촉함에서 오는 생기 때문이다. 바로 이 화면들로 인해 우리의 가슴이 훈훈해진다. 김월수 시인이 작가의 작품을 절묘하게 노래한 시 몇 구절을 소개함으로써 마치고자 한다. “빛으로 열린 세상 / 흰 여백 속으로 흐르는 / 생명의 강”(김월수, ‘바람이 분다’ 중)

 
삶에 대한 진솔한 기록, 그 소박함과 담백함에 대하여-김상철

 

삶에 대한 진솔한 기록, 그 소박함과 담백함에 대하여
  ---박진이 개인전에 부쳐 ---

                                                  김상철 (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

  삶이 예술의 원천인 것은 자명하다. 반복되고 이어지는 일상은 무심한 듯하지만, 소리 없이 그 내밀한 사연들을 일일이 축적하며 풍부한 삶의 이야기들을 이루게 된다. 일상은 그저 작고 소소하며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기에 기억되지 못하고 그저 스쳐지나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삶의 이야기는 물론 아득한 우주 저 먼 곳의 신화와 전설 같은 것까지도 발견해 내는 것은 바로 작가의 섬세한 감성이다.
  작가 박진이의 작업은 극히 평범하고 소박하다. 일상에서 쉽게 마주치게 마련인 작은 풀과 꽃, 그리고 현실적인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소박한 풍경 등이 그의 주된 소재이다. 이미 익숙한 사물들을 과장되게 꾸미거나 극적인 상황 연출을 통해 억지스러운 조형미를 추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작가의 화면은 그 자체가 이미 일정한 서정의 풋풋한 정겨움을 전제로 한다. 은은한 동요의 선율처럼, 혹은 운율이 잘 맞아 떨어지는 서정시를 연상케 하는 그의 화면은 그래서 부담 없이 보는 이에게 전해지며 특유의 안온한 감성을 유감없이 전해준다. 마치 눅진한 조미료의 맛을 덜어 낸 푸성귀의 싱그러움과, 탄산과 단맛에 오염되지 않은 맑은 샘물의 청량함이 바로 그의 작업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이라 할 것이다. 작은 것에 주목하고, 그 평범함을 있는 그대로 용인하며 받아들이되 자신의 시선이 머무는 모든 것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바로 화면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내용인 셈이다.
  작가의 화면은 대단히 금욕적이다. 형태는 단순하고 명료한 선으로 개괄되고 있으며, 색채는 최소한의 운용으로 담백함을 더한다. 넉넉한 여백과 단순한 개개의 사물들, 그리고 담백한 색채의 운용은 일종의 금욕주의적 엄숙함을 연상케 한다. 이에 이르면 그의 화면은 단순한 일상의 소소함을 담아내는 서정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사유를 유발한다. 지극히 조용하고 또 담백한 허정의 화면은 이미 소재가 지니고 있는 객관적인 내용의 묘사나 재현이 아닌 일종의 사색과 사유로 읽히는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특히 여백을 통해 보는 이의 사유를 유발하는 구성의 묘는 그의 화면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장치임을 말해주고 있다. 작가의 화면은 이름 모를 가냘픈 한 송이 꽃의 피어남을 통하여 한 생명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스러짐을 통하여 생명의 순환을 성찰케 한다. 그의 작업이 그저 눈으로 읽음을 통해 전해지는 말단적인 감성에 그치지 않음은 바로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작가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에 의해 포착되고 가공됨으로써 비로소 예술의 단서가 되고 소재가 된다. 작가가 드러내고 있는 일상에 대한 소박한 표현은 아마 그 자신이 삶을 통해 매일 같이 마주하고 있는 일상에 대한 진지한 기록이자 사색의 증거일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삶을 기록하는 일기장 같은 것이며, 그는 이를 통해 삶에 대한 건강한 사유와 생명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화면이 담백하고 맑은 것은 단순히 조형적인 기교나 재료와 같은 말단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말단적인 가치는 아닐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그의 진지한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며, 일상을 통해 건져 올린 삶에 대한 단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양과 색은 그저 이를 표출하기 위한 도구와 수단에 불과할 뿐 그의 작업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를 통해 전해지는 삶과 생명에 대한 그의 진지한 사유를 읽어 내는 것일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현대라는 사회의 효율을 추앙하는 부산한 번거로움과 물질에 의해 망실되어 가고 있는 인간 본연의 가치에 대해 작지만 은근한 근본적인 문제를 새삼 상기시킨다. 개개의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존재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 생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성찰은 어쩌면 인간 중심으로 이루어진 오늘날 문명이 간과하고 있던 가장 근본적인 것들이다. 작가의 작업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오히려 본연의 담백함과 맑음을 훼손할 염려가 있지만, 그의 화면은 분명 작고 소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그 가치에 대한 확인으로 읽혀진다. 그리고 그것은 개개의 생명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존중으로 확인된다. 현대미술은 자극적인 표현과 파괴적인 조형이 난무하고 또 온갖 기계적인 것들이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과 자신이 확인한 것만을 취하며, 이를 일일이 손으로 더듬듯 표현해내는 그의 아날로그적 감성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소박하고 담백하며 건강하고 진솔한 그의 일상에 대한 진지한 기록은 그래서 더욱 사랑스럽고 빛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