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질박한 막사발에 담은 어머니의 사랑-최광진(미술평론가)
질박한 막사발에 담은 어머니의 사랑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관계란 어떤 것일까? 공자는 그것을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인 ‘인(仁)’에서 찾았고, 그것을 국가에까지 확장하여 모두가 사랑으로 어우러지는 ‘대동사회’를 꿈꾸었다. 그러나 도덕이 무너지고 패륜이 성행하는 오늘날 현대 사회는 그러한 가치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진정한 휴머니즘과 이상적 인간관계의 모델을 찾고자 한다면 바로 어머니의 모성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자식을 내 몸보다 더 중히 여기는 모성의 희생정신이야말로 어떤 종교보다도 세상에서 가장 덜 이기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약하지만, 모성은 세상의 무엇보다도 강한 힘을 갖고 있지 않은가.    
노진숙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는 모성의 희생적 사랑이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녀는 대부분의 여류화가들처럼 육아에 치어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술적 열정을 자극한 것은 늦가을에 떨어진 낙엽이었다. 거름이 되기를 자처하며 숲 속에 가득히 떨어져 있는 바싹 마른 나뭇잎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을 떠올렸다. 그래서 2011년에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서는 죽음과 소멸을 통해서 생명을 낳는 낙엽을 세밀하게 그린 작품들을 통해 어머니의 희생적 모성을 담아내고자 했다.   
어머니가 되어야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듯이, 이제 두 아들의 어머니가 되어서 그녀는 어머니의 사랑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 것이다. 
2014년에 열린 두 번째 개인전부터는 낙엽 대신 그릇을 통해서 모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막사발과 같은 그릇에 들꽃을 고봉으로 담아 그리는 형식이 이때부터 시작되어 이어져 오고 있다. 그렇다면 막사발이 어떻게 모성의 상징성을 대변할 수 것일까.   
조선시대 제작된 막사발은 말 그대로 흙을 뭉텅 떼어내 대충 빚어 유약에 텀벙 담갔다가 꺼낸 것이다. 어떤 특별한 용도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사용되고, 때로는 막걸리 잔이나 개밥그릇으로도 사용된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어리숙한 형태지만, 어머니의 마음처럼 무엇이라도 들어주고 수용할 수 있는 드넓은 포용력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무명의 조선 도공들이 만든 막사발은 일본에서 국보로 취급되고, “일본과도 안 바꾼다”고 할 정도로 신비화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로 할 수 없는 텅 빈 충만함과 무엇이라도 포용할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국말로 ‘막’이라는 말은 즉흥적 충동에 따른다는 것이고, 여기에는 인간의 이성적 계획이나 이기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자연의 섭리를 끌어들이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좋은 막걸리는 청주와 달리 곡식과 누룩을 혼합시키고 발효시켜 단맛, 신맛, 쓴맛, 떫은맛이 잘 어우러진 오묘한 맛을 낸다. 막사발은 금이 가면 금이 가는대로, 유약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개의치 않고 더 큰 자연의 멋을 얻고자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러한 한국 미술의 특징을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막사발에서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는 자연의 지혜와 본능의 위대함을 발견했다. 자연의 지혜와 본능은 이성적인 남성성보다는 포용적인 모성성에 가깝다.  
노진숙의 작품에서 약간 삐뚜름한 형태로 질박하게 그려진 막사발은 어머니의 젖가슴의 형태를 연상시키면서 조선시대 막사발의 정신성을 환기시킨다. 자신을 비움으로써 존재를 드러내는 막사발의 미학과 자신을 헌신적으로 희생함으로써 존재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러한 막사발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꽃잎들을 고봉으로 담았다. 마치 밥을 고봉으로 담아 꼭꼭 눌러주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말이다. 다이어트가 필요한 요즘은 그랬다가는 큰일 나지만, 옛날에는 비록 가난할지라도 어머니가 밥을 꼭꼭 눌러 고봉으로 담아주었다. 물리적인 밥만 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따스한 정과 사랑을 듬뿍 담아주는 것이다. 이제 어엿한 어머니가 된 작가는 그러한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자신의 꿈과 희망이 되었음을 새삼 상기하고 있다.  

“어머니가 지어주신 밥이 우리의 살과 뼈와 피만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나에게 꿈과 희망을 키워준 밥이었다.”(작가노트)

얼마 전 그녀의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생사를 오가는 사투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헌사이자 모성에 대한 찬가이다. 동양화 물감인 석채를 써서 세필로 쑥갓 꽃이나 가지 꽃, 파 꽃 등 작은 꽃잎들을 하나하나 그려나가면서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꿈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릇에 담긴 화려한 꽃들은 이제 곧 시들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운명적 슬픔을 예시한다. 때로는 수묵과 채색이 공존하며 화면에 긴장감을 주지만 화려한 채색이 지배적이며, 소재가 화면 전면에 단순하게 부각된 표현방식에서는 문인화적인 단정한 기품이 느껴진다.  
그녀의 작품은 따뜻하고 서정적이며 언제나 희망에 차있다. 이러한 긍정성은 그녀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매사에 불만보다는 감사를 우선하며, 사회에 대한 저항보다는 이상향에 대한 지향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긍정적 태도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틀에 박힌 관습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 예술적 창조성을 확보하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럴 때 역사의식을 생기고, 반전의 힘이 더해져 작가의식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처럼 주제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악역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악역이 빠지면 예술이 자칫 계몽적으로 흐를 수 있다. 
노진숙이 주제로 삼고 있는 모성성을 어떤 특정 소재로 국한하지 않고, 개념적으로 접근한다면 무한한 확장력을 가진 주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설정한 모든 이분법적이고 편협한 생각에 대항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또한 모성은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대신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 대한 백신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의 작품들을 기대하게 한다. 

최광진(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