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신홍직 작품의 즉흥성과 흥에 관한 유희_Whimsical & Fun

신홍직 작품의 즉흥성과 흥에 관한 유희

‘Whimsical & Fun’

 

예술에서 “자유란 무엇인가?” 이것은 신홍식작가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 던지는 화두다. 인간의 본능은 자유로운 삶에 기초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정신의 본질은 자유다.’ 헤겔의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살기 위한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내부에서 외부로 드러내기 위해 인생의 대부분 시간을 몰두하며 살아간다. 특히 예술인은 일반적인 삶의 태도를 초월한 특수한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예술에 있어서 자유로운 표현의 정의는 진부한 물음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본래 예술의 존재가치가 자유로운 의식으로부터 끓어 오르는 열정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신홍직작가의 작품 속에 자유함의 속성은 구속이라는 단어와의 대척점(Antipode)의 의미가 아닌 전자와는 차이가 다른 함의가 있다. 단지 회화의 형태나 장르로써가 아닌 형식미학의 본질에서 탈피를 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유럽을 여행하면서 대서사의 뿌리깊은 유럽문명을 접하고 호화로운 미술관에서 위대한 유럽대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들의 작품 속에 열거한 회화의 전통미학을 관측하고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미묘한 사유와 많은 감회들, 이것은 일개의 작가로써 성찰하는 감동이라기 보다 오히려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압박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화폭에 전하는 독특한 감각은 물론 대가들(Old masters)의 아우라와 기술적 표현의 극치미학, 동시에 환영(幻影)주의에 기초한 미술사적 한계상황을 직접 목도하면서 오히려 새로운 형식의 자유로움을 획득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신홍직은 “내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 대상을 통해서 나의 회화적 조형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다.”

“자연에서 느낀 감동을 형태와 색채를 과장시켜 화면이 추상적으로 어우러짐을 즐기고,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캔버스에 물감을 나이프와 손으로 속도감 있게 칠하고 질감의 효과를 통하여 감상자로 하여금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려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작품의 조형성, 질료적 특징의 회화적 요소를 중시하고 이러한 자연으로부터의 관조적 현상을 감상자가 느낄 수 있도록 매개하고자 하는데 목적성을 두고 있다. 그는 회화적 조형성을 여전히 재현과 표현이라는 간극 사이의 표현방식에 몰입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단지 관자에게 전달하려는 시각적 호기심이라면 이미 고전 미학의 범주에 근거를 두고 작업하고 있다는 모순어법의 사유가 발생 할 수 있다는 것에 고민이 있다.

   

사실, 신홍직의 작품에서 우리는 빛과 색의 풍경화로 알려진 19세기 인상주의 선구자인 영국최고의 화가인 ‘윌리암 터너(William Turner)’와 모네( Monet)의 ‘해돋이 인상’ 작품에서 그의 ’일출’ 작품과 일반적인 시각적 표현의 유사성을 연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 동시적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고전주의 순수이성주의 철학자 ‘칸트’나’데카르트’ 와의 대척점에 있는 ‘라캉’과 ‘들뢰즈’의 현대주의 철학적 사유체계는 오늘날까지 끊임없는 논박 사이에서 특수한 계보적 이론가치가 탄생되듯 신홍직작가는 터너의 ‘노예선’의 격렬함은 불, 물, 바람이란 대자연속의 고요함과 양극적 원소를 그의 작품 속에 현대적인 변용(變容)을 꾀한 것이고 의식화된 화법의 ‘일출’은 마음풍경(Mind-scapes)으로 그만의 고유한 무의식적 충동과 사유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시도하고 있는 ‘풍경’작품의 특징은 그의 의지와 달리 단순한 사진과 같은 원근법을 적용한 일반화된 시점의 풍경이 아닌 공간 투사(透寫)라는 자신만의 망막현상을 통한 상상 속의 잔상을 추상하며 구상성을 융합한 시각적 옵스큐라(Obscura)를 구축하고 있다. 따라서 캔버스라는 전통의 매체를 이용한 단지 야수적(野獸的) 인상주의 풍경화의 빛과 색채, 묘사법의 과정을 따르는 ‘재현의 공간’이 아닌 ‘의식의 공간’으로 전환된 조형적 의미의 작품이라는 측면을 관자(冠者)에게 오감(五感)으로 직접소통을 가능케 하는 역설적 의미의 작품들이다. 

 

그가 60평생 그려온 오일, 캔버스를 매개로 정통회화 방식의 천착은 단순한 열정과 에너지가 아닌 삶의 자유로부터 발현된 의식화된 일련의 회화적 질서, 즉, 미학적 코드(Code)의 새로운 발견일 수 있다. 덧붙여 말한다면 붓이 아닌 역동적인 몸체의 일부인 손의 섬세한 감흥은 그의 체화된 신기재(New Mechanism)일 뿐만 아니라 모든 정신을 손끝으로 모으는 일종의 ‘기의 흐름’과 같은 일체의 정신성과 혼을 포괄하고 있다. 마치 헝가리안 랩소디(광시곡)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Maestro)와 같이 때로는 감미롭고 장중하며 때로는 빠르고 역동적으로 지휘봉을 움직이는 그의 손과 몸짓은 그의 영혼의 표출이며 순간속도로 내제화된 즉흥성은 그만의 시각적 도발(挑發)을 의미하며 캔버스에 모든 열정과 땀을 쏟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사실 최근 현대회화의 성향은 작품에 용해되는 노동성과 시간성을 이미 초탈하고 있다. 무조건 많은 시간 동안 그리고 많은 물감을 캔버스공간에 바른다고 좋은 작품이 되는 시대는 더욱 아니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노동성만을 강조한

다면 스스로 장인(匠人)의 덫에 걸리는 것이다. 그는 회화의 방법론에서 이러한 현상을 이미 의도된 매체의 즉물성과 유희(Fun)적 요소로 만들어 내는 감각을 구축하여 왔다. 요즘 회화작품에서 유행처럼 흔히 보이는 조작에 의한 도상(Icon)을 만드는 감각적이고 대중적인 아이콘은 기피하고 새로운 현대적 절대순수 미학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때로는 고흐의 텃치(Touch)가 보이고 즉흥적인 야수주의의 대담성과 기괴한 색상이 발견된다. 잘 다듬어진 유려한 색채감과는 거리가 멀다 시공을 초월하는 듯한 그의 조색(調色) 과정의 색면(Color field)) 그리고 과감한 선의 움직임(Line Gesture)은 바로 감각적 유희가 잘 계산된 직관(直觀)이다. 이것은 빛이 사물을 통한 형태가 갖는 단순한 고유색이 아니고 바로크적 광기로부터 체득한 도발적 색상이라는 즉물 상태를 세련화한 것이다. 괴테의 색채론에 의하면 모든 색상에서 밝음은 노랑(Yellow)부터 시작되고 어둠은 파랑(Blue)부터 시작되는 원리다. 과학적 색채의 스펙트럼 기술론보다 인간의 눈을 통한 순수 감각적 수용을 말한다. 색채의 밀도와 색채의 구현방식은 가공적인 기계적 미학일 뿐이다. 그의 색채의 선택과정도 매우 흥미롭다. 현대미술의 현재성(現在性)이라는 재현(再現)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것은 시대착오적(Anachronistic)인 작가의 표현방식으로 평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순간적인 몰입의 착시현상(錯視懸象) 일 뿐, 그의 고유영역의 색채밀도는 원시성에서 기인하고 있다. 날것에 대한 본능적인 향수, 다듬어 지지 않은 순박한 미감을 선호하면서 현대적 감성을 바탕으로 상당히 연극적이고 모험적인 맛을 도출하고 있다. 그의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 구상적 이미지의 단순한 표현이었던 기존의 한국작가들이 보여왔던 시대착오적 구상회화가 분명히 아니다. 고전적 화가 조르주 루오 같은 우직한 텍스츄어(Texture)와 결(Layer)에 현대적 천재화가 ‘장미셀 바스키아’ 같은 소피스트 (Sophist)적 자유로움이 타자에게 즐거운 시각적 유희를 제공하고 있다. 때로는 프랜즈 클라인(Franz Kline)의 엄중한 붓의 움직임과 현대적 팝아티스인 크리스토파 울(Christopher Wool)의 휘 젖는 듯한 선의 추상적 알레고리(Allegory)의 표현성도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 맨하탄의 ‘타임 스퀘어’ 풍경은 단순히 우화적 형상성(形像性)을 표현한 도시(Urban)분위기가 아닌 지구촌의 고도화된 화려한 도시문명의 광기와 동시에 화려한 색채의 전율(Ecstasy)을 전달하고 있다. 이것 또한 묘사된 풍경이 아닌 바로 의식으로 변환되어 나타나는 ‘영혼풍경’(Spiritial-Scapes)이 되는 것이다. 즉, 의식과 욕망의 찌꺼기 같은 속물로부터 환치되는 표현적 수단으로써의 회화적 수사(修辭)인 것이다.   

 

금세기 최고의 미술사가의 한 사람인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모더니티(Modernity)회화의 평면성(Flatness)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으며 형식주의 미학의 무의미에 관한 순수 모더니즘의 확장성을 설파하였지만 궁극적으로 추상표현주의의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의 회화적 가치에 정점을 찍으며 그의 이론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은 광활한 예술지형에서의 무한대립이며 공존이다. 동시대미술의 난해함과 모호함에 대한 상보적 관계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의 이론도 또한 현대미술 비평의 대명사로 알려진 미술사가 로젤린드 크라우스(Roselind Krouss)와 차이를 논쟁하며 진행 중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현대미술의 철학적 담론과 허구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기도 한다.

 

신홍직의 회화 개념은 평면적 공간에 관한 실험적 접근의 감각적 표현이 아닌 정교한 미의식을 기반으로 일종의 의식의 배설이자 캔버스 공간에 형이상학적 조형언어라는 카타르시스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화면에 반복 칠하며 과도하리만큼 강하고 빠른 스트로크(Stroke)는 두터운 표층(表層)질의 평면성(Flatness)의 시공을 초월하려는 의지의 표출이자 한편으로는 변화와 차이에 대한 ‘묵시적 구원의 제스처’인 것이다. 이것은 자크 대리다(Jacques Derrida )의 해체주의적 의식행위일 수도 있으나 오히려 새로운 조형공간을 끊임없이 재 구축하려는 ‘의식의 몸부림’인 것이다. 따라서 평면성의 한계를 극복하며 과거 구상적인 모더니즘의 경향에서 새로운 방법적 회의로 자신의 회화론을 진화시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인 것이다.

 

현대적 화가 도널드 저드( Donald Judd)는 기존의 평면성에 대한 임계점의 탈피를 주창하며 격자 형태(Grid)의 조형의 틀을 파괴하고 설치적 요소가 강한 작품, ‘특수한 대상’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세계적 수준의 작가들은 기존의 조형성과 미학개념과 대립하며 늘 새로운 형태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진화해 왔다. 또한 세계적인 작가 일본의 무라카미 다카시의 수퍼플렛 (Supper Flat)은 일본문화에 대한 깊이가 없는 평면성의 회의(懷疑)부터 출발, 세계문화를 융합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 개념이 확장되어 일본 만화의 유치하고 과도한 표현, 순수미술의 심미성 등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결합한다는 의미로 세계적 화가가 되었다. 이제는 경향의 혼재에서 자기만의 특별한 개념적 조형언어를 구축해야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다. 

 

신홍직이 그리는 꽃, 자연, 일출 그리고 바다풍경의 넘실대는 파도, 모래 백사장 등 작가가 담아내고 있는 대상에 관한 상징적인 형태의 모호성, 광포함, 등은 사실 한국적 흥(興)과 즐거움으로부터 촉발되는 시각적 언어로써 그의 작품에서 반응되는 시각적 메타포(Metaphor)는 기의(시그니피앙)적 요소로써 작용하며 깊은 통찰을 통한 표면의 강렬한 부딪침과 양감의 구축은 하나의 방법적 요소로 기능하며 그 함의는 상당히 깊고 거세다. 그가 그리는 하늘, 땅, 바다, 사람은 동양사상을 기반한 天,地,人의 묵시적 표상이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삶을 펼쳐가는 하나의 초월적 우주공간의 중심 일 수 있고 파도는 우주 에너지의 파동이라 유추 할 수 있다. 한 점 들의 인간 군상은 배회하는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에 관한 은유와 상징인 것이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우리의 시선을 오래 머물게 하는 시각적 사유의 특별함이 있다. 그렇다면 그 이상을 넘는 지평은 무엇을 말하려는지 작가는 관자들에게 강요가 아닌 그 자유로움에 대한 함의를 구체적으로 캐스팅(Casting)하며 이제 시각적 언어로 예리한 답을 해야 한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두터운 질감의 핸드텃치(Hand Touch)와 핑거링(fingering) 작업은 기존의 화구사용이 아닌 회화적 접근의 특정 할 수 없는 영역에서 ‘평면적 재현’이라는 표현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으며 이러한 요인은 바로 한국적 멋과 흥(Excitement)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제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흥(Fun)과 여유에서 오는 풍자(Satire)에서 유래한 미학적 고유성과 질량에 기초한 서구적 표현 사이의 교집합에서 케이 팝(K-Pop)과 케이 컬쳐(K- Culture)를 넘어 세계인들이 환호하는 대서사와 보편적 담론을 융합하는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끌어 내야 한다. 예술가가 사회적 이슈와 담론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시각적 감성만을 사람들에게 매개하는 아류(Epigone)작가에 불과 할 것이다. 

 

신홍직 작가의 작품 궤적(軌跡)과 총량(總量)은 감히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정도로 다양하고 매우 묵직하며 거대하다. 이 기반에 작가적 신념만이 아닌 철학적 미학의 담론이란 엔진을 얹어야 하며 이러한 사명감 속에 국내적인 활동을 너머 세계적인 무대로 그의 거점을 옮겨가야 하는 노마드(Nomad)의 시대정신이 대단히 필요한 시점이다. 사실 한국의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을 겨우 단색화로 특징 지우려는 경향이 부끄럽다. 더불어 물론 설치미술과 추상미술 미디어 아트 등 많은 작가가 있지만 대단히 지협적이다. 단색화를 정신성과 ‘과정의 모방’이라는 수행의 결과물로 치부하는 것 외에 아직 글로벌 확장성의 개념이 미약하다. 이제는 다양한 실험성의 작품들로 세계무대에 도전해야 한다. 여기에 신홍직 작가도 해당된다. 향 후 한국미술사에서 그의 역할과 책임은 매우 크게 작용할 것으로 본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하위문화라고 일컫는 대중성을 획득할 키치的 (Kitsch)요소와 아방가르的 시대정신은 오랜 미술사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늘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해 오고 있다. 그의 자유로운 열정에서 현대적 아방가르드 정신을 그의 새로운 전략적 미학의 뉴 버전을 기대해 본다.

 

이붕열 (미술비평,독립큐레이터, IACO Agency 대표)  

신체적인 역동성 및 질감표현을 신념하는 행위의 미학_신항섭(미술평론가)

신체적인 역동성 및 질감표현을 신념하는 행위의 미학

신항섭(미술평론가)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또는 인상주의와 같은 재현적인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은 소재나 대상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미적 감흥을 어떻게 해서든지 빠른 시간에 캔버스에 옮겨놓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어쩌면 미적 감정이 비등하는 순간에 캔버스에 정착시키는 것이 이상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리라. 하지만 처음 받았던 인상이나 감동이 약해지기 전에 단숨에 작업을 마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재현적인 작업은 어차피 오랜 작업시간이 요구되므로, 처음 마주했던 인상이나 감흥을 그대로 전하기는 사실상 힘든 일이다.

  신홍직의 작업은 재현적인 표현양식이 안고 있는 이와 같은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표현주의적인 기법을 원용했다. 대다수의 작품은 단 한 차례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여러 날을 두고 보며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시작한 지 몇 십분 또는 몇 시간 만에 속사로 완결된다. 대작일 경우에도 하루를 넘기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의 작업실에서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작업실에 들어서면 공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벽과 바닥에 둘러싸여 있는 작품들이 내뿜는 에너지와 강렬한 시각적인 이미지에서 열기가 온몸으로 전해져오는 듯싶다. 유난히도 큰 팔레트를 비롯하여 큰 붓과 나이프, 물감 튜브 그리고 여기저기 묻어 있는 물감 등이 작업과정의 열기를 그대로 전해준다. 작업중인 이젤 위의 캔버스와 마주하면 힘차고 거칠며 빠른 손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물감의 질감이 시선을 압박해온다. 두터운 질감은 요동치듯 사뭇 격동적이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게 한다. 자잘한 붓 터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유채작업에 익숙한 눈에는 완연히 다른 시각적인 인상이 놀랍기만 하다. 

  풍경이든 인물이든 정물이든 소재 및 대상을 가리지 않고 두터운 질감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형태에 앞서 유채물감의 색깔과 질감이 먼저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격렬하게 펼쳐지는 물감의 존재감은 앵포르멜의 한 지류로 생각될 정도이다. 이렇듯이 격정적인 신체적인 힘을 이용하는 표현기법과 마주하면서 언뜻 고흐를 떠올리게 된다. 순색의 물감을 튜브에서 나오는 상태 그대로 듬뿍듬뿍 찍어 바르듯이 그려나간, 고흐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신체적인 힘의 역동성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또한 신체적인 힘에 의탁하여 내면세계를 격정적으로 쏟아내는 뭉크가 연상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재현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실주의 및 인상주의 계열 작업과는 접근방식이 완전히 다른 표현주의 성향임을 말해준다. 표현주의적인 작업방식은 형태묘사에 중점을 두는 재현적인 그림과 달리 내면세계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다. 물감이라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성에다 그 자신의 표현감정을 덧붙여 힘찬 신체적인 힘으로 밀어붙인다. 이는 내면을 표출하는데 긴요한 신체적인 힘의 화법이다. 이를 통해 형태나 내용을 파악하기도 전에 시선을 압도하는, 감각적이고 직설적이며 주관적인 조형언어가 제공하는 감정의 샤워를 경험하게 된다. 이는 잠재된 욕망을 자극하는 미적 쾌감이라고 할 수 있다.  

  유채물감을 사용하는 유화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단시간에 끝내는 것은 소재 및 대상과 마주했을 때 느낀 감정의 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일정한 시간을 두고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는 일반적인 유채화 작업과는 전혀 다른 접근방식이다. 물감이 마를 새 없이 튜브에서 나온 순정한 물감의 색깔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입장이다. 일테면 물감을 팔레트에서 섞는 혼색과정마저 생략하겠다는, 가장 순도 높은 채색기법인지 모른다. 

  작품을 보면 여러 가지 색깔의 물감의 덩어리가 뒤엉키는 가운데 서서히 형상을 드러내는 모양새다. 어찌 보면 유채물감이 가지고 있는 기름성분과 찰진 진흙과 같은 물성의 존재감이 강조됨으로써 상대적으로 형상에의 의지는 미약해 보일 지경이다. 따라서 유채물감의 물성과 신체적인 힘을 사역하는 감정만이 표현의 주체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앵포르멜과 유사한 속성을 보여주지만, 그의 작업은 대상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앵포르멜 미학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대다수의 작품은 소재 및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형태를 의식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부분적으로 보면 무엇인지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추상적인 이미지로 채워지고 있기에 그렇다. 작품 전체상을 통해서나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형태묘사보다는 작업하는 순간의 감정표현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느 작품이거나 재현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적조작에 의한 비현실적인 풍경이 아니라 현실에서 취재된 이미지라는 얘기다. 

  현실적인 풍경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재현적인 형식이 분명하다. 국내외 여행지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인상 깊었던 풍경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를 말해준다. 실재하는 대상물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재현성과 연결되는 듯싶지만, 표현기법이나 그 결과물을 보면 표현주의적인 성향으로 기운다. 실제로 마주했던 풍경에서 느끼는 미적 감흥 및 감동을 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관적인 해석을 강화하고 있다. 

  그동안 개별적인 형식을 위한 특정의 조형언어를 만드는 일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전체상에서 그만의 조형적인 특징이 드러나고, 그럼으로써 개별적인 형식이 만들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작업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여러 형태의 감정변화를 가감 없이 그대로 붓이나 나이프가 아닌 손으로 캔버스에 정착시키는 방식에 매료되었을 따름이다. 무엇보다 대상에 대한 첫인상과 그로부터 오는 미적 감흥 및 감동 그리고 표현욕구 등을 물리적인 힘으로 표출하는데 의미를 두었다. 표현행위의 순수성, 즉 잘 그리겠다는 생각을 버린 채 직설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에 도달하는 작업방식을 즐기고 있었음이 역력하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계산되지 않은 자발성, 즉흥성, 직관성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순도 높은 표현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작업방식으로는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통한 개별적인 형식을 만들어가기란 용이하지 않다. 신체적인 힘과 격정적인 제스처 그리고 감각적인 터치만으로는 개별적인 조형언어를 성립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형식을 위해서는 형태의 변형이나 왜곡을 통해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이제는 표현행위 자체를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가 됐고, 여러 면에서 여유가 생기면서 개별적인 형식을 의식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자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최근 작업에서는 개별적인 형식미에 대한 관심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증표는 전체적인 이미지의 간결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최근에는 개별적인 형식의 의식한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신체적인 힘에 의한 격렬한 운동성을 절제함으로써 역동성이 현저히 약화되는 대신에 전체적인 이미지가 좀 더 명확하게 보이게 된 것이다. 호흡이 느려지고 신체적인 힘이 억제되는가 하면 속도감도 느슨해지면서 이전보다 한결 부드럽고 여유롭고 순화된 화면으로 변화하고 있다. 동시에 난비하는 듯싶던 운동성이 약화됨으로써 형태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묘사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여전히 신체적인 힘이 주도하는 가운데, 호흡이 길어짐에 따라 구체적인 형태에 대한 감각도 적극성을 띄는 형국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렇듯이 최근 작업에서 드러나는, 단순하고 간명한 구도를 특징으로 하는 일련의 새로운 작업은 개별적인 형식의 가능성이 높여주고 있다. 신체적인 힘과 속도감을 앞세웠던 이전의 작업방식과 비교하면 호흡을 조절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따라서 터치에도 여유가 생기고 느슨해지는가 하면 형태해석 또한 보다 선명해지고 있다. 물론 세부를 보면 여전히 추상성이 강하지만 전체상에서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그 의도를 읽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형태미가 명확히 읽혀진다. 

  한동안 신체적인 제스처와 그로 인한 거칠고 힘찬 운동성 및 율동 그리고 질감표현에만 집중함으로써 개별적인 형식 자체를 의식할 겨를이 없었다. 작업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표현기법이 익어가고 호흡을 조절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그 자신만의 조형어법과 형식에 시선을 돌리기에 이른 것이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업이 추구하는 중심적인 표현방식은 그대로 지켜진다. 힘찬 신체적인 힘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질감표현을 중시하는 조형적인 패턴은 여전하다.  

작품 연구 - 표현과 해석 ‘아방가르드와 키치'
알렉산드리아니즘을 극복하고자 탄생한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는 부르주아 사회와 분리되고 보헤미아로 이주한다. 아방가르드는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외부세계와 단절된, ‘형식을 위한 형식’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방식은  “발전하는 과정 중의 문화에는 다소 무관심”한 대중에게서 자연히 멀어졌으며, 아방가르드를 향유하는 지배계급에 의해서도 버려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한 원인들의 한 가지로 저자는 ‘키치’를 이유로 든다.
 키치는 “특정 문화만이 제공할 수 있는 기분 전환을 갈망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생겨난 대용 문화” 라고 설명된다. 키치는 예술의 즐거움에 이르는 지름길을 제공하며, 결과를 모방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방가르드에 비해 대중이 혹하기 쉽다고 이야기하며, 아방가르드의 존속이 위협받고 있다고 말한다.
소감
글쓴이의 키치를 아방가르드와 배치시키며 경계의 대상으로 삼고 키치를 부정하는 입장을 보며 저자가 왜 그토록 현 사태에 위협을 느꼈을까 했다. 당시는 아방가르드를 주로 향유하는 층이 부르주아이고 진정한 예술 혹은 고급 예술 (아방가르드)은 소수만 누릴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 아방가르드의 보존을 호소하는 저자는 저급 예술과 고급 예술을 분리된 상태를 원하는 것으로 보였다. 키치의 대중화를 힐난하는 내용에서 예술의 대중화 자체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다.
왠지 그런 저자의 감정에 동감했다. 나도 그 당시 기득권에 속해 있다면 대중과 나의 위치의 분리를, 위계가 있는 구분을 원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옳고 키치가 나쁘다라고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러한 심리가 글에 느껴져서 저자의 입장과 태도에 공감한다. 
어쨌거나, 지금 입장에서(지금이야 당시에서 시간이 많이 흘러 관용을 가지고 바라보는 거겠지만) 보면 키치가 사회변화에 적응되어 발전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모양새로 변할 수 밖에 없던 게 아닐까. 자본주의에 맞게 쉽고 가볍고 순환이 잘 되게끔. 

격정적인 터치와 순색의 절묘한 조화-신항섭 미술평론가
격정적인 터치와 순색의 절묘한 조화
신항섭│미술평론가 
유채화, 즉 오일물감을 사용하는 그림은 특유의 색감 및 질감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진득한 색채이미지에서는 농염하고 중후하며 깊이가 느껴진다. 어쩌면 인상파 시절의 그림들은 유채가 가지고 있는 색채의 아름다움, 그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고흐의 작품을 보면 지금도 반짝이는 보석처럼 맑고 선명한 유채의 아름다움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순색의 조합을 통해 인상파 그림처럼 유채화의 아름다움을 극명히 보여준 예가 일찍이 있었던가?
신홍직의 최근 작업은 인상파가 구현했던 순색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순색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최근 작업은 마치 순색의 물감에 홀린 듯 어느 작품이나 빛나는 보석처럼 현란한 원색일색이다. 다채로운 색상의 조합이어서 짐짓 화려하지만 왠지 결코 난하지 않다. 다만 유채 물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거듭 일깨워줄 따름이다.
이렇듯이 순색을 사용하는 그의 그림은 생동하는 기운을 발산한다. 생동하는 기운이란 생명의 빛과 파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현란한 원색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시각적인 자극은 감정의 비등을 유인한다. 물감의 순색은 그처럼 강한 생명의 에너지를 내포한다. 그의 작품에서 발산하는 생동감은 단지 순색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채로운 색채들이 상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시선을 자극하고 환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생명의 빛이 발산하는 파동은 이렇듯이 강렬한 원색적인 색채이미지에 의해 일깨워진다. 그의 그림이 발산하는 생동감은 발랄하면서도 경쾌하며 맑다. 색채는 밝고 맑은 빛에 의해 그 진가를 발휘하기 마련이다. 순색의 그림은 밝은 빛을 받았을 때 더욱 강렬한 기운을 뿜어낸다. 미적 감수성은 시각적인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까닭이다. 특히 색채에 의한 시각적인 자극은 곧바로 감정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순색의 물감을 사용하는 그림이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위적인 물감은 자연의 색깔보다도 선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가 순색의 물감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것도 선도 높은 색채이미지를 통해 그 자신의 표현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에 기인한다. 그 표현감정은 높은 회화적인 이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자신이 꿈꾸는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보다 적극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하는데 원색적인 색채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무언가 억제되어 있던 잠재적인 욕망을 해소시키는 미적인 쾌감이 자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억제된 감정의 후련한 배출을 유도한다. 이러한 느낌은 순색이야말로 직설적인 감정표현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선도 높은 물감 그 자체에서 발산하는 에너지는 감정의 고양을 부추긴다. 감정의 고양이야말로 그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 아닐까.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 즐겁고 에너지가 샘솟고 행복해지는 그런 감정의 상승을 유도하는 까닭이다.
더구나 그 원색들은 요동치듯 강렬한 동적인 이미지를 지닌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듯 거침없이 내닫는 붓과 속도감을 수반한 나이프 터치가 한데 어우러져 현란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순색과 숨 가쁘게 전개되는 속도감 넘치는 붓의 제스처가 한데 어우러져 강렬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이다.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현란한 색채 및 역동적인 붓의 제스처가 만들어내는 기운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듯싶은 시각적인 압박감에 사로잡힌다. 그만큼 강렬한 시각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선이 요동치고 원색적인 색채가 그에 화답하는 형태로 전개되는 그의 최근 작업은 열정의 산물이다. 
속도감이 실린 필치는 오랜 기간 단련된 치밀한 형태묘사를 통해 나오는 것이다. 치밀한 형태묘사 및 정확한 비례감각을 터득하지 않고서는 속도감이 실린 필치를 구사할 수 없다. 견고한 형태미를 보여주는 인물화는 그의 능숙한 소묘 솜씨를 뒷받침한다. 정확한 비례를 기반으로 하는 인물화는 능숙한 인체소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렇듯이 인체소묘를 통해 단련된 형태묘사력이 속도감과 만났을 때 그 능력은 배가된다. 그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달음에 끝낸 듯싶으리만치 일관된 속도감을 유지하는 터치는 오로지 숙련된 조형감각의 소산일 따름이다.          
속도감 넘치는 필치는 이전의 작업 연장선상에 있다. 이전에도 격정적으로 반응하는 필치를 구사해왔었다. 다만 최근 작업에서는 그 필치가 한층 발랄하고 경쾌하게 그리고 속도감 넘치게 느껴지는 것은 원색과의 만남과 무관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붓보다는 나이프를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하는데도 연유한다. 
이렇듯이 원색과 나이프의 표현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렇다. 화가의 작업이 변화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어떤 동기가 있게 마련인데, 그의 경우에는 유럽 여행이 결정적인 동기가 됐다. 풍광이 전혀 다른 유럽의 고풍스러운 고도와 그 곳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옛 건축물은 물론이려니와 일반 거주용 아파트에서 직선과 평면적인 구조가 지닌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처럼 색다른 풍광을 표현하는 데는 강렬한 원색과 함께 나이프가 보다 효과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이프를 사용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튜브에서 나오는 물감 그 자체, 즉 순색을 쓰게 되었고 낭만적인 이국정서를 표현하는 데는 원색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원색적인 이미지는 고색으로 점철하는 유럽의 고도와는 사뭇 다르지만 회화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실제로 그의 그림을 보면 눈으로 보는 유럽의 이미지와는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낭만적인 유럽의 이미지에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그의 최근 작업은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한 자연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새로운 경이로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세상에 대한 긍정의 시각이 그처럼 화려한 원색과 명쾌하고 경쾌한 터치를 수반하게 된 것이 아닐까. 순색의 두터운 질감은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오는 환희의 감정을 여과 없이 온전히 드러낸다. 특히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힘차고 명료한 나이프 터치는 다름 아닌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이다. 애매하거나 모호한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는 그의 작품은 그만큼 시각적인 호소력이 강하다. 그의 그림에서 삶의 에너지를 감지, 감득하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노마드’적 사유, 표현의 자유로움과 체험의 다채로움-옥영식
‘노마드’적 사유, 표현의 자유로움과 체험의 다채로움
-신홍직의 ‘유럽풍경’연작 

(옥영식/미술평론
I. 신홍직의 최근작인 일련의 ‘유럽풍경’은 노마드적 사유의 산물로 보인다. 유목민의 삶처럼 하나의 틀 속에 갇혀 정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주하려는, 벗어나려는 시공간적인 이동욕망을 실현하는 노마드(nomade)적 사유를 작품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노마드적 삶의 패턴은 이미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정보를 동시에 편재적으로 공유하는 ‘이동성’(mobility)에 의해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다만 신홍직은 디지털적이라기 보다 아날로그적이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몸으로써 이동하는 삶의 현장체험에서 비롯하는 노마드적 사유의 작품행위이다. 
따라서, 그가 택한 ‘유럽여행’은 ‘이곳’에서 풀리지 않는 모종의 궁금증을 지니고 떠난 물음의 기간이며, 그런 나머지 ‘저곳’에서 해답을 얻었고, 마음이 열리면서 정신과 표현의 자유와 해방을 경험한 셈이다. 매슬로우(Abraham H. Maslow)가 ‘존재의 심리학’에서 말한 일종의 ‘절정체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절정체험(peak experience)이란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 최고로 고양된 만족과 환희의 순간이며, 깊은 몰입과 황홀감, 경이, 외경, 시공간 초월을 수반하게 된다. 그러한 계기는 사랑의 느낌, 신비로움과 무한, 미적 지각, 창조적 순간, 지적 통찰, 대자연의 아름다움 등에 매료될 때 일어난다고 한다. 
2010년 3월 이후, 그간 3차례에 걸친 ‘유럽여행’은 그에게는 ‘시각적 절정체험’의 기회였으며, 작품에 있어서도 변화와 변모를 가져온 계기가 된 것이다. 마치 폴 클레(Paul klee)가 튀니시아 여행으로 ‘빛과 색채’에 대한 놀랄만한 발견의 체험을 하고 난 뒤, ‘색채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으며, 비로소 나는 화가이다’라고 한 것과 다름없겠다. 

II. 그의 첫 여정은 2010년 3월, 서유럽으로부터 동유럽에 이르며, 주로 미술관을 탐방하여 주요 작품들을 만난 것이다. 특히 감명을 받았던 것은 파리의 오랑주리미술관에서 마주친 ‘카임 슈틴’(Chaim Soutine 1893-1943)과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 1883-1955)의 작품, 그리고 퐁피두센터에서 있은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Freud 1922-2011)의 대회고전 관람이다. 이들의 작품이 공유하고 있는 점은 인간의 삶과 조건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진실, 가공되지 않은 ‘날것’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그 적나라한 ‘표현의 자율성’과 ‘야생적 감성’에 있다. 그는 이들을 통하여 인간이 지닌 잠재된 무한한 표현성과 또 다른 회화의 가능성의 여지를 보았다고 한다. 특히 대상에 대한 규제되지 않는 개방된 시선, 그리는 행위에 대한 자유로운 유연성을 감촉한 것 같다. 그 다음으로 동유럽의 체코, 문명화로부터 유리된 중세마을 ‘체스키 크롬로프’에서는 유구한 세월과 함께 형성된 인간적 삶의 결과 정감이 환기하는 편안함과 화평을 느꼈다고 한다.
두 번째 여정은 2012년 10월, 남프랑스의 아를르에서 모나코를 거쳐 이탈리아 북서부 해안에 있는 ‘친퀘테레’의 ‘베르나차’와 ‘베니스’에 이른다. 특히 지중해와 맞닿아 있는 절벽위에 조성된 어촌마을 ‘베르나차’의 무구한 풍광은 색채와 형상의 다채로움에 대한 풍요로운 체험을 가져오게 했다. 세 번째 여정은 2013년 10월말, 발칸지역의 ‘크로아티아’의 중세의 유적이 보존된 아드리아 해안마을 ‘두브로브니크’와 국립공원 ‘플리트비체’를 방문한 것이다. 특히 지중해와 아드리아해의 해안마을이 지닌 아기자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그러면서도 무한하게 열려진 천연의 풍광은 그로 하여금 ‘이곳’과 다른 ‘풍경의 발견’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작품의 행로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III. 그의 ‘유럽풍경’연작은 스쳐지나가는 일과성의 현장스케치와 같은 것이 아니다. 감명 깊게 가슴에 담아 두었던 ‘저곳’에서의 풍경체험을, 돌아와서 연작의 형식으로 되새김질하면서 회화적으로 다시 ‘이곳’에서 재구성/재해석한 풍경이 되고 있다. 마치 현장의 풍경에서 발견하고 체험한 것과 다를 바 없는 ‘감흥’과 ‘표현의욕’을 유지하고 몰입하여 작품화한 점이 주목된다고 하겠다. 
그래서인지, ‘유럽풍경’들은 전과 달리, 마치 그리는 순간이 ‘절정체험의 순간’이듯이 자유스럽다. 흡사 매슬로우가 절정체험자들의 특성으로 들고 있는 성향들을 그의 작품에서 엿보는 것 같다. 예컨대, 그 성향이란 더욱 자발적이고 표현적이며, 천진난만하고, 기교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편하게, 더욱 자연스러워서 단순하며, 망설이지 않고, 평범하고, 다정하며, 꾸밈없고, 즉각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작품 또한 전반적으로 생생(生生)한 기운이 화폭에 충만하여 생동하고 있다. 그래서 맑고 밝으며 경쾌하다. 물기를 머금은 순색의 유채들은 조화를 이루어 빛을 발하고 있으며, 순발력 있는 여러 필치들의 어울림은 ‘감흥’(感興)에 실려 춤추듯이 거침없는 대범함과 함께 유연하고 섬세하며 자유롭다. 일체의 구속에서 풀려나온 듯, 자율적인 생명력의 발로에 다름없는 표출의 몸짓과 호흡이 있다. 따라서 모처럼 붓과 손과 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이른바 사람의 기운이 흐르는 필치의 화폭을 마주하게 된다면 과언일까. 

IV. 그가 다룬 작품을 풍경지별로 나누어 보면, ①남프랑스(오베르, 에즈) ②베니스 ③융프라우 ④체스키 크롬로프 ⑤친퀘테레(베르나차, 마나롤라, 포르트피노, 코르닐리아) ⑥두브로브니크 ⑦플리트비체 ⑧벽(파리, 체코, 베니스, 친퀘테레 등)이다. 이 가운데서 특히 연작으로 많이 다루고 회화적/조형적으로 천착하여 괄목할 만큼의 성과를 보여준 것은 단연 친퀘테레의 ‘베르나차’ ‘마나롤라’(color village)를 들 수 있고, 다음으로 ‘두브로브니크’와 여러 곳에서 취재한 ‘벽’을 소재로 다룬 것이라고 하겠다. 
‘벽’연작은 여행지에서 만난 인상 깊은 건물(카페, 뮤지엄, 가게, 주택 등)의 외벽의 특정한 부분을 클로즈업하여 평면적으로 회화화시킨 것이다. 벽의 구조와 색은 물론, 창문들의 생김새, 출입구의 표정, 서성이거나 지나가는 인물, 앉아 있는 이들의 차림새와 동작, 창가의 인물, 무심한 주변의 소품들(나부끼는 빨래, 나무)을 적확하게 명쾌한 필치로 화폭에 형상화/조형화하여 전개한다. 특히 벽면을 넓게 ‘색면화’하여 연접하는 각각 다른 ‘창문들’과 대화하듯 색채로 구성한 화면은 풍부한 회화성을 얻고 있다. 두텁고 농밀하게 자리 잡은 색면위를 스치듯이 겹쳐지나가는 필적들의 미묘한 어울림이 생성시키는 질감들은 ‘저곳’의 인간적인 삶의 호흡과 결을 지니고 정겹게 한다. 이처럼 일련의 ‘벽’연작은 그의 ‘유럽풍경’의 기본적인 형상구조로서 파악되며, 이후 ‘베르나차’ ‘color village’(마나롤라) ‘두브로브니크’에 와서 회화적/조형적으로 구성미를 지니고 통합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V. 그가 인상 깊게 포착한 ‘체스키 크롬로프’와 ‘두브로브니크’는 중세시대의 마을로서, 자연적인 지형과 함께하는 각양각색의 개성을 지닌 건물들이다. 조감적인 시선으로 볼 때, 특색을 지닌 지붕과 모양, 다른 규모, 골목이 어우러져 그 자체로 훌륭한 ‘회화적/조형적 풍경’이 될 수 있다. 더불어 ‘강’과 ‘바다’와 함께 열린 시야로 다가서는 풍광이라면 가히 또 다른 ‘풍경의 발견’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만나게 되는 지중해변의 어촌마을 ‘친퀘테레’(Cinque Terre, 다섯개의 마을이라는 뜻)는 회화적 표현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으리라. 전체적으로 이들 마을은 해안의 바위 절벽위에 다닥다닥 붙여 지은 크고 작은 집들로 정겹게 형성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이들 집 하나하나가 파스텔톤의 각가지 색으로 단장되어 지중해의 짙푸른 쪽빛 물색과 어울려 마치 ‘동화적 풍경’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그는 이 이국의 그림과 같은 ‘회화적 풍경’을 마주하고, 그동안 갈무리해왔던 표현의 욕구를 스스럼없이 표출하고 있다. ‘이곳’에서 체험하지 못했던, 이전과 다른 색채와 형태의 다양한 변화와 조형적 구성을 빌려서, 대범한 동세와 섬세한 필치가 경쾌한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큰 화면에 그려지고 있다. 윤기 있는 유채색필(油彩色筆)로 난만하게 그린 마을은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어 흡사 무리지어 핀 꽃들의 ‘화원’(花園)과 같다. 또 깊고 짙푸른 물빛은 이들을 넓게 포용하여 생생함을 배가한다. 그리고 조감적인 원경의 풍경 속에 함께하는 점경의 인물, 배, 파도의 움직임은 마치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빛’을 머금고 일체화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생명체로 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친퀘테레’의 ‘베르나차’와 ‘color village’는 그의 ‘유럽풍경’의 회화적인 성취의 대단원이 되어 주고 있으며, 또 다른 가능성을 예감할 수 있는 면모들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