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우무길 조각에 내재된 ‘유토피아적 공간’과 그 의미-김종길
아아,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오, 멋진 신세계여!
- 우무길 조각에 내재된 ‘유토피아적 공간’과 그 의미


김종길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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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무길의 예술세계는 조각적 조형에 대한 쉼 없는 탐구이자 동시에 ‘멋진 신세계’의 구축이며 동경이다. 변화무쌍하나 일관된 조형탐구가 그의 조각론의 근본이라면, 멋진 신세계는 그의 조각이 닿고자 하는 이상향일 수 있다. 그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탈현실주의에 가까운 형이상학적 해바라기일 수 있고, 현실에 존재하나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런 그의 미학적 지향에 대해 무엇이라 단정하고 결론을 짓더라도, 그가 어떤 한 세계를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그리고 그 세계가 현실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는 한,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어떤 몽상의 단편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조각을 시작했을 때부터 단지 깎거나 붙여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조각의 기본개념보다는 조각의 내부, 조각의 심부적 공간(深部的 空間)에 대해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것은 평면에 대응하는 조형의 3차원적 공간과 달리 3차원을 형성하는 그 안쪽 공간에 대한 상상일 터이다. 그래서 그는 덩어리(mass)가 아닌 덩어리 내부의 ‘빈 공간’을 사유했고, 더 나아가 그 빈 공간을 관통하는 ‘구멍(hall)’을 실험했다. 하여, 그의 초기작들은 마치 이론물리학자들이 펼쳐 보이는 우주공간과 무척 닮았다. 그는 그런 조각적 공간에 인간의 삶을 덧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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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의 내부로 들어가, 그 내부의 무한공간을 현실로 당겨서 인간의 삶과 직조하려는 그의 조형적 사유는 인류가 수 천 년을 지탱하고 쌓아 온 ‘도시-공간’들과 닮아있다. 고대도시에서 중세도시 그리고 근대도시에서 현대도시로의 진화는 건축적 공간을 구조화하는 인간의 공간상상을 가장 극명하게 노출한다. 유목과 정주, 침략과 방어, 소통과 불통, 사원과 마을, 고립과 공동체의 반목 내지는 충돌이 끊이지 않고 피어올랐던 탈주와 통섭의 공간들. 우무길이 지속해 온 예술세계는 그래서 정적이지 않고 상호 융합적이며, 박동하듯 솟구치는 혼합공간이다. 그러나 그의 조각적 공간들을 도시-공간들처럼 진화론적 공간으로 부르기에는 많은 모순이 내재한다. 
그가 그동안 추구했고 그래서 우리에게 드러내 놓았던 조각으로서의 공간들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행되는 역사적 층위공간이 아닌 문득 어딘가에서 출현한 공간들이다. 그 어딘가는 지금은 사라진 역사적인 도시들의 어떤 흔적일수 있고, 지금 여기의 첨단도시일수도 있다. 어디에서 솟았든 그 세계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순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맞붙고, 미래와 먼 과거가 회통하는 방식으로 그의 공간은 창출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종교합의 공간들에서 그는 인간이 상실했고 파괴한 ‘유토피아’의 실체를 발굴하려 한다. 그리고 그 유토피아는 그의 조각이 구축하려는 멋진 신세계의 행복한 조형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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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발표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서기 2545년의 미래를 그야말로 ‘멋지게’ 보여준다. 여자는 극심한 신열과 산통으로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고 지금처럼 사교육에 열 올리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은 인공수정으로 태어나 유리병에서 보육되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은 20세기 인류의 경쟁사회나 위험사회도 겪지 않는다. 지능의 우열로 지위를 결정하니까. 뿐인가, 첨단과학으로 개인은 할당된 역할만 자동수행하면 되고, 고민이나 불안은 신경안정제 한방이면 해소된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폭풍우(Tempest)』5막 1장에서 여주인공 미란다는 “아아,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오, 멋진 신세계여!”라 외쳤다. 구세대의 정치적 투쟁 따위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희망의 외침인데, 헉슬리가 인용한 이 구호는 그러나 희망을 더 큰 희망으로 키우지 않고 비관으로 돌려놓는다. 과학이 지배하는 사회는 사실 휴머니즘이 거세된 디스토피아의 세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멋진 신세계, 그 세계의 슬픔은 옛 문명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국가의 국민이 - 그래서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문명국의 국민들은 옛 문명의 국민을 야만인이라 불렀다 - 이러한 문명국에서 살 수 없어 자살하고 마는 스토리의 결말에 있다. 
우무길의 ‘멋진 신세계’는 무엇일까? 그동안 그가 보여준 작품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의 한국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1970년~80년대의 새마을 운동과 90년대 이후의 신도시 개발을 떠올린다. 20세기 한국사회를 추동했던 도시화의 윤리에는 옛 것이란 부정되거나 폐기되어야 할 관습 따위로 정의되었다. 그러므로 1백년 아니 5백년의 고택이든 기억이든 그 무엇이든 ‘새마을’의 근대화를 위해선 부서지고 지워지고 파괴되어야 했다. 그런데 파괴된 자리에 들어선 것은 유토피아적 새마을이 아니라 뿌리 없이 부유할 수밖에 없는 유령도시의 그림자였다. 우무길은 그토록 강력하게, 저돌적으로 이 사회가 꿈꾸는 ‘유토피아적 새마을’에 대해 속으로 궁구했다. 또한, 한순간에 세워지고 사라지고 몰락하는 유령도시가 아닌 진정으로 꿈꿀 수 있는 희망세계로의 유토피아는 무엇인지도 찾아 헤맸다. 그 사유의 끝에서 그는 희망도 절망도 하나고, 슬픔도 기쁨도 하나인 그 자신의 멋진 신세계를 떠올렸다. 헉슬리보다 앞서가지 않고, 조지 오웰보다 늦게 가지 않는 그의 도시는 ‘공작도시(工作都市)’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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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도시는 우무길이 이번 전시의 표제 “유토피아”를 향해 달려 온 근대도시의 전형이다. 그 도시는 화가 손상기의 ‘공작도시’들처럼 불온하고 불쾌하며, 불통의 침묵이 떠도는 미완의 도시들이다. 어딘가는 공사 중이고, 어딘가는 개발 중이며, 그래서 철거와 집짓기가 끊임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들은 사람 사는 세상이고 그만큼의 완결성을 유지한다. 우무길의 조형세계가 출발하는 지점은 바로 거기일 터. 그는 미완의 도시들을 다시 불러들여 덧붙이고 채색하여 하나의 완전한 도시를 재현한다. 미완에서 완결로 가는 다양한 시도와 구축, 변형, 구성의 과정적 조각세계는 지금 그가 가장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유토피아적 공간들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 작품들은 최근까지 전개되었던 거대 공작도시의 풍경들과 사뭇 다르다. 무정형 공간들로 짜인 옛 도시들처럼 가장 인간학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던 이전의 작품들이 이제 ‘하나의 질서’를 획득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 질서란 앞서 언급했던 조각의 심부적 공간들이 태생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던 일종의 트라우마의 굴절이 점차로 독립적 공간을 구획하면서 나타나는 병리적 증상일터인데, 가장 복잡하면서도 단일한 질서를 엿보이는 벌집구조와 다르지 않다. 물론 작품들은 각기 유기적인 집단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표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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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리적 증상과 공간의 유기적 집단성과 개별성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그가 이번에 보여주는 작품들은 초기부터 간간히 등장했던 미래도시 혹은 미래건축의 이미지들과 닮았다. 좌우 위아래 그리드의 촘촘한 밀도에 의지해 큰 공간에서 작은 공간으로, 안에서 밖으로 다시 밖에서 안으로 집적된 공간들은 무언가 못나고 어지럽고 혼란스럽게 보였던 것들을 일순간에 정렬시키고 있다. 외부의 타격으로부터 혹은 외부의 발신으로부터 내부의 안전망이, 수신기호들이 무방비로 들통 났던 공작도시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런 도시들일수록 사실은 인간의 결속력과 공동체적 연대가 탄탄할 수밖에 없다. 그가 상상의 크기를 최대한으로 확장해 제작한 공작도시들은 그래서 카오스적 질서와 더불어 공감의 미학을 타전했던 것이다.
우무길의 유토피아가 생성되기 시작했던 것은 아마도 그 즈음이 아닐까 한다. 그는 그 공간들에서 ‘불온’, ‘불쾌’, ‘불통’, ‘혼란’, ‘무방비’와 같은 부정적 요소들을 제거하여 어떤 질서를 거기에 편재시켰다. 난해하고 해독 불가능한 판관의 법질서 따위가 아니라 다만, 희망의 신세계를 위해서. 그런데 그런 희망적 상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오히려 그런 요소들의 트라우마에 의해 공간들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작품들은 완전한 그리드에서 약간씩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드를 위한 첫 씨줄과 날줄이 ‘하나의 질서’라면 그 질서가 반복되면서 나타나는 약간의 차이들의 편차가 곧 ‘병리적 증상’들이다. 그리고 그 병리적 증상들은 인간이 인간을 초월하거나 완전히, 아니 완벽하게 탈주할 수 없음을 증거 한다. 다시 말해 그의 유토피아는 초월공간으로서의 ‘없는 곳’이 아니라 이 현실의 밖에 존재하는 ‘바깥 공간’인 셈이다.
조각의 심부를 뒤집어 깐 바깥 공간은 조각의 내부혁명이다. 세계의 심부를 뒤집어 깐 바깥 공간은 현실의 내부혁명이다. 우무길은 쉬지 않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뒤집어 깠다. 그는 그 자신의 내부에서, 조각의 내부에서 새로운 신세계를 현실화하기 위해 내부혁명을 쉬지 않았다. ‘공작도시’의 집단성과 ‘유토피아’의 개별성이 유기적으로 네트워크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내부혁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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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나무가 수천수만의 가지를 틔워 올리듯 어떤 예술가의 작품들은 그 나무의 뿌리에 이르렀을 때에야 본성을 발견하게 된다. 우무길의 경우가 적절한 사례라고는 할 수 없으나 수 년 단위로 밀어 올리는 작품들의 면면에서 나는 그 본성의 힘찬 미학을 발견하곤 한다. 한 작품을 위해 수백 수천의 드로잉을, 그것도 자료조사와 연구를 병행하며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과정들이 결국 어제의 작품을 오늘 뒤집어 까는 혁명의 씨알들이리라.  
         
                                   

공작도시, 세계를 짓는 놀이-고충환
공작도시, 세계를 짓는 놀이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우무길의 근작을 전작과 비교해보면 외관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일정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차이로 치자면 집을 소재로 하던 것에서 도시를 소재로 하는 것에로 변화한 것이 눈에 띠고, 이에 따른 스케일이 덩달아 커진 점이 눈에 띤다. 그러면서도 집과 도시는 그 의미가 상통하는 부분이 있는데, 말하자면 집이 개인과 함께 가족사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해준다면, 도시는 개인과 가족의 집합체인 사회의 아이덴티티를, 이를테면 한 시대를 관류하는 지식체계며 가치체계인 패러다임(미셀 푸코라면 에피스테메라고 했을 것이다)을 대변해준다. 집과 도시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체성의 집이다. 작은 정체성과 큰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고립된 정체성과 관계적 정체성이 일정한 차이를 매개로 서로 물려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집은 그저 집이 아니고, 도시는 그저 도시가 아니다. 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이 생성되는 원천이며, 한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지나는 홀이다. 작가가 집이나 도시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감각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상은 영락없는 집이며 도시지만, 정작 이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은 것은 그 형상이 암시하는 의미,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의미, 곧 아이덴티티와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아이덴티티와 패러다임의 상호작용성이며 상호내포성이다. 이와 함께  근작에서의 소재가 집에서 도시로 옮겨온 만큼 그 정체성과 관련하여 특히 관계적 성질이 강화된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말하자면 소재의 면에서나 의미론적 측면에서 상호간 이질적인 차이를 싸안으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도시생태의 일면이 부각된다. 

가전제품을 구입하면, 이동 중 부주의로 인한 예기치 못한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스티로폼으로 만든 틀이 가전제품과 함께 딸려온다. 작가는 이 스티로폼 틀을 덧붙여나가는 방식으로 무한 증식되는 도시, 중첩되고 변주되는 도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중첩되고 포개지면서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거대 도시 이미지를 축조해낸다. 
주지하다시피 스티로폼 틀은 가전제품의 종류에 따라서 그 크기나 형태가 결정되며, 따라서 가전제품만큼이나 다양한 크기나 형태가 가능해진다. 한편으로 스티로폼 틀과 가전제품 그리고 도시의 건축물은 일종의 형태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개는 반듯한 기하학적 형태를 기본형으로 하여 이를 일정한 형식으로 변주해낸 것들이다. 아마도 기능주의(기능이 형태를, 디자인을 결정한다는)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기능주의 건축은 동선을 최소화한 것이란 점에서 편의성은 높이 살만 하지만, 그 와중에 도시 풍경을 획일적이고 무미건조한 것으로 바꿔놓은 것도 사실이다. 기능주의에 나타난 획일성은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서 자본주의 욕망에 복무하고, 제도의 기획(심플하게 하고, 패턴화하라는 것이야말로 제도의 지상과제다)에 부합한다는 딜레마가 부각되는 점도 사실이다. 
도시를 소재로 한 작가의 기획은 어쩌면 이런 기능주의 도시에 나타난 획일화의 경향성을 깨트려 그 사이로 틈을 내고 숨통을 트는 기획, 도시생태를 실천하는 기획일 것이다. 그리고 그 도시생태는 무엇보다도 흡사 살아 숨 쉬는 생명체와도 같은 유기적인 도시, 외관상의 반복 속에 차이를 인정하고 싸안는 도시, 그 차이에 의해 살만해지는 도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분절되지 않고 유기적인 전체로 상호작용하는 도시에 맞춰져 있을 것이다. 

실제 제작과정을 보면, 작가는 우선 합판과 나무를 이용해 구조물을 견딜 지지대를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다양한 형태의 스티로폼 틀을 자르고 붙여나가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유기적인 전체 형상을 축조하는데, 그 형상은 마치 부감법(매의 시점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으로 본 도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접착제로는 수성 실리콘을 사용하는데, 실리콘은 접착기능도 하지만, 이와 함께 스티로폼 표면 위에 덧발라 비정형의 마티에르 효과를 연출하기도 한다. 이렇게 원하는 형태가 조성되고 나면, 그 위에 아크릴로 채색을 하는데, 스티로폼 틀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자리 선을 따라 선을 긋기도 하고, 그 틀의 안쪽, 이를테면 각종 크고 작은 평면 위에 선을 그려 넣는 등 주로 선에 의한 변주가 두드러져 보인다. 그리고 대개는 흑과 백이 대비되는 화면을 연출하기도 하고(이렇듯 대비되는 화면은 말할 것도 없이 도시의 양면성을, 삶의 이중성을 상징한다), 특정의 주조색이 강조되는 단색조 화면을 연출하기도 하고(이렇듯 모노톤이 강조된 도시 이미지는 흔히 회색도시가 그렇듯 상대적으로 정적이고 금욕적인 인상을 준다), 이따금씩 부분적으로 원색을 적용해 무미건조한 도시 이미지에 리드미컬한 생기를 더한다(무미건조한 회색도시의 이미지를 깨는). 이와 함께 부분적으로 스티로폼 틀과 함께 각종 철망(그 표면에 자잘한 구멍들이 나있거나, 격자구조의 철망)으로 된 오브제를 차용해 전체 형상 속에 세팅하기도 하는데, 무슨 도심 속에 심겨진 환풍구 같다(그 자체가 삭막한 도시에 숨통을 튼다는 작가의 기획에 부합하는 오브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형태의 가장자리를 선으로 가두고 그 속을 각종 색채로 채워 넣은 화면으로 평면성을 강조하는 한편, 이렇게 조성된 각종 크고 작은 평면들이 어우러진 저부조 형식의 입체 구조물을 부각하는 방식이, 특히 원색의 색면들이 어우러진 화면이 한눈에도 팝아트와의 친근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도시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일상성을 떠올리게 하고(엄밀하게는 팝아트가 도시 자체보다는 그 삶의 방식이랄 수 있는 대중문화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와 구별된다), 무엇보다도 흡사 일러스트를 연상시키는 경쾌한 화면이 팝아트와의 상호영향관계를 암시한다. 
역시 팝아트와 무관하지 않은 경우로서, 일종의 정크아트에 대한 공감이 확인된다. 이를테면 작가가 주요 재료로서 차용하고 있는 스티로폼 틀은 말할 것도 없이 폐기된 산업 쓰레기이며(산업 쓰레기의 소재적 가능성에 주목한 사람들은 팝아트 이전에 신사실주의자들이 먼저다. 그들은 이렇듯 폐기된 산업 쓰레기에서 고도의 물질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리얼리티를 발견한다),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철망조각이나, 다른 작업에서 차용하고 있는 각종 플라스틱 소재의 용기들(다양한 형태의 패트병)이나, 심지어는 컴퓨터자판기 역시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 
해서,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작업은 도시가 뱉어낸 산업 쓰레기를 추슬러 또 다른 거대도시를 축조해낸, 일견 쓰레기도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팝아트를 연상시키는 경쾌한 도시 이미지의 이면에 작가는 이처럼 문명화된 사회의 그림자를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도시에 대한 작가의 해석은 이중적인데, 이는 단순히 리사이클링의 차원을(산업 쓰레기를 재생한다는) 넘어, 도시의 진정한 생리는 도시의 표면이 아닌 이면에, 그림자에, 폐기된 산업 쓰레기에 주목할 때에야 비로소 드러나질 수 있는 것임을 주지시킨다는 점에서 그 실천논리가 도시생태학에 맞닿아있다. 이렇듯 작가가 축조한 도시는 우선은 경쾌해 보이고, 그리고 정작 그 도시는 쓰레기더미 위에 축성된 것이란 점에서 암울하게 읽힌다. 
근작에선 일반적인 조형적 접근과 함께, 특히 공작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리고 공작성의 감각 자체는 (자기만의) 세계를 짓는 일과 관련이 깊다. 이를테면 작가는 세계를 만들고, 자르고, 붙이고 하는 놀이에 빠져있는 무슨 공작소년 같다. 그 천진한 눈으로, 손으로, 마음으로 도시를 짓고, 지구를 짓고, 우주를 짓고, 세계를 짓고, 나를 짓고, 존재를 짓는다. 집도, 도시도 종래에는 정체성의 집이다. 집을 짓고, 도시를 짓는 작가의 놀이는 결국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혹은 자신이 몸담을 세계)를 짓는 놀이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정체성의 놀이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