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기억의 저편 (Beyond Imagination)_서길헌 (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기억의 저편 (Beyond Imagination)

 

서길헌 (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채성숙의 작품들은 창문에 드리워진 반투명의 휘장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처럼 아스라하다. 거기에 비치는 미지의 형체는 끊임없이 가물거린다. 불명확하게 스크린에 비치는 이미지들은 오히려 그럼으로써 또 다른 대상을 드러낸다. 스크린 너머로 흔들리는 또 다른 가시성은 무엇일까. 대상을 가로막고 윤곽만을 비춰내는 스크린은 실체를 가리는 것인가. 거기에 비치는 불명확한 대상이 드러내는 가시성은 무엇일까. 스크린을 통해 보이는 이미지는 실재와는 다르면서도 또 다른 전체의 징후를 보여주는 듯하다. 작가는 스크린을 통해 그 너머의 세상을 전혀 다르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스크린은 무엇일까.

 

작가가 내다보는 세계는 촘촘하고 섬세한 세포들이 고불고불한 주름을 이루는 피부로 뒤덮여 있다. 마치 그물망을 통해 흐릿하게 포착된 세계를 연상시키며, 뜨개질처럼 오랜 시간을 공들인 붓질로 짜낸 시선의 겹눈이자 그곳으로 내다보이는 세계의 질감이다. 그것은 올이 성긴 그물로 잡아 올린 투과율이 흐릿한 바깥세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물은 무엇인가를 걸러서 건져 올리는 망이다. 이 과정에서 그물코보다 작은 것들은 모두 그물망을 빠져나간다. 그러한 것들은 애초에 다음을 기약하며 놓아주는 것들이다. 그물의 쓰임새는 이처럼 필요 이상의 것들을 걸러내고 남은 것을 취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물망에 남는 것이 작가가 포착해 내고자 하는 세계의 잔영일 터이다.

 

화면에 직조하는 시선의 그물망으로 필요 없는 요소들을 걸러내고 자신이 보는 세계의 실루엣만을 비춰내는 그녀의 스크린은 구불구불한 선과 부유하는 색채의 겹침으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막이다. 촘촘한 스크린을 꾸며내는 그물코와 같은 선들은 실재의 그림자를 색깔의 잔여물로 걸러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때로 스크린은 무수한 격자들의 망으로 짜이는 수평과 수직의 구조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강물이나 시간의 흐름과 같은 수평적 구조와 도시의 마천루들이나 빽빽한 숲이 이루는 듯한 수직적 구조의 풍경들은 그물코의 밀도에 따라 형상을 걸러내고 남은 아스라한 실루엣이나, 날실과 씨실의 선을 따라 엉겨 있는 흔적으로만 남겨진다. 마치 거미줄처럼 잘 보이지 않는 끈으로 먹잇감을 잡아내듯이, 그물망은 최소한의 주름선만으로 대상의 자취를 전체적으로 포착해 낸다.

 

작가의 그림에서 그물망은 이렇게 체로 걸러내듯이 이미지의 스크린을 마치 모눈종이처럼 꾸며낸다. 이로써 스크린은 작가에게 그 너머의 가시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 이때의 가시성은 스크린의 모호한 투과성을 통해 저쪽의 모호한 명료함을 이쪽의 분명한 불명료함으로 탈바꿈시킨다. 흐릿한 투과성은 외형의 허상을 걸러내고 남는 잔상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가 되찾고자 하는 세상의 인상이자, 자신의 삶에서 거쳐온 다양한 환경의 풍경에 공존하는 정신적 풍경이다. 그림의 부분적 요철을 이루는 오브제로 바탕에 사용된 양털은 이러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가시성을 촉각적으로 구체화한다. 올록볼록한 화면의 요철은 스크린의 평면에 돋아있는 물성의 싹으로서 또 다른 실재임을 물질적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화면 깊이 스며드는 빛과 열기는 이미지의 가시성을 물리적 질감으로 변용하고, 여기에 깃드는 따스함을 통해 가시성은 시각과 촉각이 교차하는 공감각적 물성으로 현실화한다.

 

이는 보는 방식에 따라 밋밋한 공간에 그칠 수도 있는, 눈앞에 막막하게 펼쳐진 모종의 풍경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인 특정 감각 그대로 거기에 드리워지는 감정의 결로써 비춰내는 특별한 스크린이다. 그러한 결은 한올 한올 짜이는 양털의 섬유질 텍스추어처럼, 여인의 뜨개질과 같은 무아지경의 운필을 연상시킨다. 여인의 뜨개실은 미궁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아리아드네의 실꾸리처럼 미로의 복잡한 길에서 시선을 하나로 이어주는 세계의 전망에 대한 실마리이자 길잡이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집중적인 수공 작업에 들이는 시간을 통해 거기에 서리서리 접혀서 생성되어 장대하게 불어나는 공간을 축적한다. 기억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길게 접혀서 보관되어 이어지고 드디어 언젠가는 길게 펼쳐진다.

 

작가의 공들인 운필 작업은 이러한 시간의 견딤이자 분절된 시간을 하나의 연속된 줄로 이어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시간은 공간 속에 주름이 잡힌 채 저장된다. 공간화된 시간이 다시 풀어지며 의식 속에 하나로 이어진 공간이 무한한 펼쳐짐의 시간으로 되살아난다. 화면에는 자연스럽게 한국적 정서나 감성이 밑바탕에 깔려 있으면서도, 이를테면 작가가 한때 영국과 튀르키예 등지에서 이국의 삶을 사는 동안 거쳐왔던 다른 문명에 깃들어 있던 정신적인 풍광의 속살이 투영된다. 작가는 영국 스포드 도자기나 튀르키예의 옛 건축물 내부 타일의 블루 계열의 색조를 좋아한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물, 북서부 호수지방, 하이랜드의 양떼, 이스탄불의 고도 시가지와 드넓게 펼쳐진 초원, 에게해의 노을, 카파토키아의 동굴 벽화, 히타이트 문명이 빚은 자기의 문양 등.

 

각별한 무언의 감각들로서 작가의 아스라한 빛으로 재구성되는 다양한 풍경들은 이 모든 겉모습을 걸러내고 아스라하고 흐릿한 빛의 무심한 스크린으로 화한다. 이렇게 작가가 보여주는 세계는 모든 풍경을 체로 걸러내어 그 너머의 가시성을 드러내는 흐릿하게 열린 창문이다. 하나의 통일된 감각적 경험을 만들어 내며, 보는 이에게 새로운 시공의 경험을 제공하고, 단순하게 가로놓여진 화면이 아니라, 작가가 보고 접촉한 세계의 생생한 촉수를 독특한 방식으로 펼쳐내는 특정한 필터이다. 이렇게 열린 창문은 종국에 시간과 공간을 엮어낸 실타래처럼, 보는 이에게 깊은 몰입감을 통해 그 너머의 감춰진 세계를 마주하게 한다.

 

근래의 작업에서 보이는 비교적 구체적인 형상을 띠는 이미지들은 스크린의 행간으로 다시 한번 잠겨 들어가 생겨나는 또 다른 미지의 이미지로 통합된다. 이처럼 작가에게 이미지의 가시성은 이미지의 외형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외형을 지우고 감춤으로써 드러나는 외형의 다른 느낌이다. 모호한 명료함을 분명한 불명료함으로 바꾸는 일,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일, 그것이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불명료한 가시성이다.

 

즉, 작가가 수공의 운필 작업으로 짜낸 스크린은 실재를 다르게 보여주는 그물망이자 그 자체로 또 다른 실재이다.

자연의 기운을 포착하는 선_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자연의 기운을 포착하는 선

-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작가의 화면은 가늘고 구불거리는 선들이 캔버스 밑변에서부터 일정한 굵기로 차오르다가 서서히 상단에서는 잦아드는 조밀한 선의 촘촘한 궤적이다. 물결처럼 흔들리고 유동하는 선의 구불거리는 맛이 그림의 내용을 대신하고 선의 촉각적인 떨림이 흡사 수면의 파동이나 물결의 자취, 바람의 이동이나 빛의 파장과도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동시에 작가는 선의 교차, 겹침으로 작은 면들을 무수히 산개시키는데, 사각형의 화면 안에서 그림의 시작과 끝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그 주어진 화면의 조건을 부단히 의식하는 선의 흐름으로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셀 수 없는 선들이 출렁거리며 그 흔들림, 떨림이 작가의 감정, 마음을 투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래서 캔버스의 화면은 오로지 선으로만 이루어진 추상적인 화면이자 동시에 부단히 외부세계의 풍경을 환영처럼 떠올려주기도 하고 작가 자신의 내밀한 감정의 형상화로도 보인다. 선으로만 이루어진 이 그림은 우리의 인생이 공간과 시간이라는 날줄과 씨줄로 직조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인식시키는데, 이는 다분히 모더니즘적인 회화 인식이다.

 

화면은 몇 개의 중층적인 요인을 한 몸 안에 거느리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가는 선과 혹은 동양화의 준법을 연상시키는 선의 굴곡진 놀림으로 형성된다. 본래 수묵화의 준법이란 자연의 절대적 체험을 표현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대상의 원칙적인 형태’를 파악하여 붓으로 옮기는 것, 이른바 기운생동의 가시화다. 그리고 이는 문인화의 특성과도 맞물린다. 그림이란 문인 화가들의 내적 자아가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인식과 맞물려 개별 화가의 필치, 세련된 붓질 즉 화가의 손이 매우 중요시되면서 가능해진 것이 이른바 준법인 셈이다. 작가의 작품은 역시 본인의 마음의 결, 심리적 흐름을 반영하는 차원에서의 선, 이른바 준법의 새로운 번안으로 보이는 그 선들이 물결같이 충만하고 안개처럼 자욱하다. 더불어 그것은 색실로 짜인 정교한 태피스트리와도 같은 효과를 발산한다. 

 

동양화의 준법과 태피스트리, 모더니즘 추상회화가 서로 얽혀 이룬 그림! 여기서 핵심은 준법으로서의 선의 새로운 가능성, 마음의 굴곡과 여운, 정서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선, 자연의 기운을 생생히 포착하는, 바로 그 선에 있을 것이다.

 

작가는 매우 얇은 선들을 빼곡히 채워가면서 화면 전체를 장악했다. 온통 선으로만 충만한 화면은 풋풋하면서도 온화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양모 직물이 자연스러운 흐름과 촉각을 자극하는 오브제로 활용되기도 한다. 양모의 개입은 손으로/붓으로 그어 나간 선과 함께 얽혀서 환영의 맛과 실재감을 동시에 충족시켜 준다. 그려진 선과 실제 선이 공존하고 그려진 그림과 오브제가 함께 하는 화면은 자연풍경에서 가져온 기운과 시간의 흐름을 생생히 반영한다. 

 

한편 미묘한 흔들림을 동반한 선으로 채워진 화면 중간중간에 원형, 사각형의 덩어리들이 평면 위에서 솟아올라 섬이나 돌처럼 놓여 있다. 잔잔한, 선으로 가득 채워진 화면에 이 부조로 튀어 올라와 존재하는 물질은 선의 흐름, 색의 흐름에 특정한 상황성을 안겨준다. 마치 위에서 내려다본 물가 풍경이자 그 안에 놓인 몇 개의 징검다리나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 인간 삶의 흔적인 생활공간(건물) 등을 암시하고 있다. 그로 인해 자연스레 풍경의 환영이 형성되거나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해 특정 풍경으로 이입하게 한다. 아울러 잔잔하고 평면적인 화면의 살/피부에 은연중 솟아올라 부푼 덩어리는 선의 일률적인 흐름에 관여하고 그 선과 얽히면서 방향, 흐름에 미묘한 기운과 변화를 주고 있다. 동시에 얇은 선과 대조적으로 두툼한 물성이 바닥에서 자연스레 솟아올라 이룬 이 묘한 형태감은 평면적인 화면에 공간감, 깊이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는 특정 자연풍경을 통해 받은 인상과 감흥을 색채와 선으로만 환원시키는 추상화 전략, 그리고 그 자연에 내재하는 기운을 운율적인 선의 파동으로 시각화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정적인 화면을 상당히 유동적이고 생동적인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는 흐름을 연출한다. 이 흐름은 특정 풍경을 연상시켜주기도 하고 작가의 내밀한 감정의 순간을 이미지화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구상적이면서도 추상적인 화면이 공존한다. 

 

작가의 선은 구체적인 특정 형상을 지시하지 않으며 다만 방향을 달리하면서, 유사한 색조끼리 어울려 모종의 커다란 흐름을 만든다. 그 선들의 틈은 자연스레 작은 면들을 무수히 파종한다. 동시에 간격이 다른 선들, 불규칙적으로 그어 나간 선의 궤적이 만든 흐름의 형태는 자연계의 현상과 닮아있다. 청색과 붉은색 위주의 단색으로 물든 화면은 얼핏 노을 진 하늘, 단풍이 가득한 산, 계곡물에 투영된 바닥, 출렁이는 푸른 바다나 밤하늘의 별자리, 은하의 흐름, 또는 오래된 나무의 등걸, 산과 하늘이 공존하는 풍경 등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잠기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선과 면으로만 이루어진 지극히 추상적인 그림이다. 미묘한 선의 흐름과 저마다 다른 굵기, 그리고 그 선들이 불가피하게 만든 면들이 어우러져 있는 형국은 마치 자연 스스로가 만든 여러 자취를 자연스레 연상시키는 동시에 그 아름다움을 조심스레 따라가 보는 작가의 시선과 마음의 경로 또한 흥미롭게 보여준다. 


선과 색의 연속적인 율동감의 환영_오마 우란치멕, 큐레이터 겸 미술평론가(버클리 캘리포니아 주립대 미술사 박사)

선과 색의 연속적인 율동감의 환영

 - 오마 우란치멕, 큐레이터 겸 미술평론가  (버클리 캘리포니아 주립대 미술사 박사)

 

작가가 선에 집착하고 선을 겹겹이 쌓는 방식을 씀으로써 작품 속 색채의 스펙트럼을 고양하고 다양화한다. 뿐만 아니라 그 기법은 작품 속에 두터운 질감과 삼차원의 세계가 나타나게 하고 그리하여 우아하면서도 정지되지 않은, 연속적인 율동감의 환영을 보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 선들은 베 짜기와 태피스트리(tapestry)가 연상되어 이 작품들이 섬세한 여성의 손길이 만든 작품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한다.

 

전반적으로 율동적이고 질서 정연한 구도 속에 물감을 과감하게 흩날린 듯한 기법은  그것이 없었다면 지나치게 획일적이 될 뻔한 구도에 돌발적인 의외성(意外性)을 부여하였다. 두 종류의 추상 기법이 다양하게 조합되어 재미를 더한다.

색채, 질감 그리고 빛의 교감_인희 아이리스 문 (뉴욕활동 큐레이터)

색채, 질감 그리고 빛의 교감

- 인희 아이리스 문 (뉴욕활동 큐레이터)

 

채성숙 작가는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 보다는 캔버스 위의 전체적 분위기의 완성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그래서 색채가 그의 기분과 감응(센스빌리티)을 표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정말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채색된 표면 위를 덮은, 빛의 조각인 게 아닐까. 계속 변화하는, 흐트러진 빛으로 둘러싸인 것 같은 느낌이 있고, 이것은 양모 직물의 효과인, 신비스럽게 부드럽고 따뜻하게 친밀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캔버스에 양모를 사용함으로써 독특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채색화 위에 엷은 양털 직물의 장막은 물결 같은 파장을 만들어 그 아래의 회화적 요소를 부드럽게 감춘다. 이 얇은 직물은 빛을 반사하여 부드러운 흐릿함을 가져, 마치 꿈 속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손으로 한올 한올 짠, 한 폭의 이름다운 태피스트리를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 왔다. 

 

엷은 안개가 낀 늦은 봄날 아침 같은 느낌의 부드러운 장막을 가졌다.                                


시적 형태의 공간 속 경치- 채성숙 작가의 회화_쉬언춘 (중국 수도사범대 교수, 미술평론가)

시적 형태의 공간 속 경치 - 채성숙 작가의 회화

- 쉬언춘 (중국 수도사범대 교수, 미술 평론가)

 

한국 여성화가 채성숙은 성숙한 회화 인지 능력으로 개성이 뚜렷한 회화 스타일과 시각적 효과를 창출하였다. 예술 작품들은 본질적인 것과 규율적인 것에 더욱 근접했다는 평을 받는다.

 

채성숙 화가가 그림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물질 세계의 풍경과 현상이 아니라 영혼의 이미지와 정신적인 흔적들이며 더욱 순수하고 내면적인 예술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화가는 여성의 시각에서 이 세상을 관찰하고 표현한다. 동적인 작품이든 정적인 작품이든 모두 부드러운 분위기와 따뜻한 기운을 엿볼 수 있다. 화면에 대한 터치감 역시 밝고 참신하여 자연의 무한한 매력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채성숙 화가의 회화는 주제가 내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붓 끝에서 만들어지는 추상적인 기호들에서 짙은 인문적인 숨결이 느껴진다. 이는 자연 경관의 재현이 아니라 화가의 주관적인 표현이고 자유이다. 작품마다 특유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이는 삼차원을 초월한 그리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법칙을 초월한 새로운 접근이고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은 사람과 세계가 하나로 어우러져 영혼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범속을 초월한 순수미와 영원을 예시하고 있다.

 

채성숙 화가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누구나 모두 영혼의 안식처를 찾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작품의 추상적인 형식과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자아를 찾을 수 있다. 화가의 시간적 공간적 접근 방식과 공간 경치를 표현하는 방식은 현대인의 정신적 갈망과 심미적 요구에 더욱 근접해있다.

 

채성숙 화가의 작품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위로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