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통찰하는 여행자_백종옥(미술생태연구소장) | |
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통찰하는 여행자 - 백종옥(미술생태연구소장)
소녀는 서 있고 고양이는 앉아 있다. 우주복을 입은 그들의 얼굴은 서로 닮았다. 소녀의 등에는 태엽이 돌아가고 고양이의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다. 그들은 그렇게 어딘가를 바라본다. 누구일까?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의 주변엔 크고 작은 선인장들이 자란다. 신성한 우주나무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선인장들에서 한창 둥그런 별들이 태어나는 중이다. 그 별들 중 하나에는 우주복 차림의 작은 요정이 조그마한 아기 동물을 팔로 감싼 채 앉아 있다. 그리고 키 낮은 선인장에서 태어난 조각배에 또 다른 요정이 기대어 쉬고 있다. 이곳은 어디일까? 미지의 행성일까? 초현실적인 꿈이나 환상의 세계일까? 분명한 것은 선인장 숲 안에 있는 소녀와 고양이가 낯선 곳을 여행하는 존재들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다. 그들은 '여행자'다.
*여행자의 시대 지난 10년 동안 최순임 작가의 작업을 관통해 온 핵심적인 주제는 '여행자'라고 생각한다. 그가 추구하는 여행자의 이미지는 작업 초기인 2012~2014년에 처음 등장했다. 단초는 고양이였다. 2012년에 그는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는데, 그때 선보인 작품들이 흙으로 빚은 고양이 조각상이었다. 우연히 길에서 발견한 유기고양이와 함께 생활하면서 작가는 고양이에게 다양한 감정을 투영하여 작업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2014년 개인전에서는 고양이와 더불어 소녀 이미지가 회화와 조각 작업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고양이를 안은 소녀는 작가의 자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 고양이와 함께 여행 가방을 끌고 있는 소녀가 여행자로 지칭되었다. 왜 작가는 고양이를 안은 소녀를 여행자라고 명명했을까? 그 이유는 작가가 '광주'라는 한 도시 안에서 태어나 계속 살아가는 삶에 대해 권태를 느껴 늘 새로운 자극과 변화를 갈망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작가의 욕망과 꿈을 대변해주는 인물이 바로 여행자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여행자로서 소녀와 반려동물인 고양이의 이미지가 초반엔 소박한 현실감을 주다가 점차 삶이라는 여정을 함께 하는 존재로 은유성을 띠게 되고 나아가 다양한 소재들과 함께 동화(童話)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쪽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몇 차례의 개인전에서 독특한 외양을 지닌 여행자들을 중심으로 동화적 환상성이 매우 강하게 표출되었다. 즉 이 시기의 작품들 속에 '동심(童心)으로 꿈과 환상을 추구하는 여행자'라는 개념이 명확히 자리잡았다. 이런 동화적인 요소는 작가가 대학 졸업 무렵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어린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 2018년 하반기부터 2021년까지는 그의 건강 문제로 다소 침체된 시기였다. 2018년 10월에 암 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2020년까지 투병을 위해 요양병원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그는 상처입은 여행자인 자신의 모습을 주제로 치유의 드로잉에 몰두했고 이를 두 차례나 전시했다. 그리고 건강이 조금 회복되자 2021년에는 전통 동양화와 민화의 소재들을 차용해 새로운 환상여행을 표현한 회화를 선보였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작가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향후 작업의 방향성을 여러모로 고민하고 모색하는 중이다.
*개성, 혼합과 조화, 결합과 분리 새로운 작업의 방향성을 세우려면 우선 지난 작업의 성과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전체적으로 작업의 흐름을 보았을 때 가장 주목할 만한 시기는 역시 2015~2018년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최순임 작가만의 독자적인 작품들이 여러 점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주복을 입은 소녀와 고양이가 있는 「선인장 숲」을 비롯해 「꿈」, 「여행자」, 「여행자의 노래」 등으로 불리는 조각 작품들이 대표적이라고 할 만하다. '여행자 조각상'으로 집약되는 이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 특징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 특징은 '개성적인 캐릭터'이다. 여행자 조각상들이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개성 넘치는 캐릭터 이미지를 지녔다는 말이다. 이런 캐릭터 작업들은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보면 팝아트 계열로 분류될 수 있다. 1960년대 미국 팝아트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물었고, 일본 네오팝(Neo Pop Art) 작가들은 1990년대부터 순수미술, 디자인, 만화, 애니메이션, 전통미술 등을 융합한 작업으로 대중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동시대미술 전반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같은 동시대미술의 분위기 속에서 특히 나라 요시토모처럼 독특한 캐릭터를 내세우는 작업 방식이 하나의 장르처럼 자리잡았다. 최순임 작가의 작업도 이런 흐름에 속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여행자 캐릭터는 하나가 아니고 다양하다. 그들은 모두 여행자로 불리지만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우주복을 입고 여행을 하거나, 한정된 시간 동안 돌아가는 태엽을 등에 부착한 채 부자유하게 살아가는가 하면, 혹처럼 자라난 지구와 고양이, 꽃, 물고기 등으로 장식된 환상적인 머리를 지니고 자유를 꿈꾸기도 하는 등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사회적 제약과 자연스러운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인간으로서 작가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여러 성향이 서로 다르게 형상화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특징은 '표현의 혼합과 조화'이다. 여행자 조각상들에는 표현 형식 면에서 다양한 요소가 뒤섞여 있으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이다. 여행자 조각상들은 캐릭터 이미지와 밝고 따뜻한 색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견 가벼운 일러스트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회화적 표현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고 도자 기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중량감과 밀도감도 충분히 느껴진다. 이는 전통적인 조각이 지닌 무거움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그리고 여행자 조각상들을 보면 장식미와 단순미가 혼재하는데, 과도하게 장식적이거나 너무 무미건조하지 않은 수준에서 조화를 이룬다. 또한 여행자 조각상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들도 과하게 드러나거나 감추어지지 않은 선에서 함축성과 상징성을 띠고 형상화되었다. 이런 함축성과 상징성이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각 여행자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을 하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여러 표현 요소들이 적절히 혼합되고 조화를 이룬 여행자 조각상들에게서 결과적으로 최순임 작가만의 개성이 선명히 드러난다. 세 번째 특징은 '자유로운 결합과 분리'이다. 여행자 조각상들이 하나하나 캐릭터로서 의미가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캐릭터들이 만나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17년작 「대면」을 살펴보자. 이 설치작품에는 그물망 같은 실들과 작은 평면 회화가 배치된 벽면을 배경으로 두 여행자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뒷짐을 지고 당당한 표정을 한 좌측의 여행자는 자유로운 인간을 의미하고, 태엽을 등에 달고 어두운 보안경을 쓴 우측의 여행자는 자유롭지 못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 두 여행자는 함께 실로 연결되어 있는데 특히 우측 여행자의 몸에 실이 감겨 있어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임을 짐작하게 된다. 이 설치 작품에서는 상이한 성격의 두 여행자가 작가의 양면성을 대조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역할하지만 두 여행자는 각각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완결된 작품이기 때문에 따로따로 전시되어도 무방하고 다른 평면, 입체 작품들과 조합되어도 재미있는 맥락을 형성하리라고 본다. 이런 식의 자유로운 결합과 분리를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은 2015년작 「선인장 숲」이다. 서두에 묘사한 대로 이 설치 작품은 「선인장 숲」과 「지구별 여행자」(우주복을 입은 소녀와 고양이)가 결합된 것인데, 소녀와 고양이만 따로 놓고 보아도 완결성이 있고, 선인장들만 전시되어도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두 작품이 만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생성되고 작품의 의미는 중층적으로 확장된다. 이렇게 두 작품이 합해진 「선인장 숲」은 무엇보다도 앞에 서술한 중요한 특징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최순임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이런 연유로 이 작품이 그동안 여러 전시회에 초대되어 주목을 받았고 이번 무안군오승우미술관의 개인전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선인장 숲」이 지닌 미학적 특성을 조금 더 깊이 음미해 보자.
*초현실적인 선인장 숲 2014년 개인전에 함께 등장한 소녀와 고양이는 2015년 개인전에서 우주복을 입은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선인장들의 이미지는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에 서식하는 에키놉시스(Echinopsis) 선인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1200살이 넘은 초대형 선인장들을 보고 그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여 작품의 소재로 취했다. 소녀와 고양이, 이국적인 선인장의 조합은 '낯선 지구별의 선인장 숲을 방문한 여행자'라는 이야기로 발전하였다. 이 설치 작품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SF만화 주인공 같은 소녀와 고양이의 이미지 그리고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선인장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고온의 가마를 거치며 우러나온 흙과 유약의 온화한 색감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점들 외에 가장 중요한 특성은 선인장들의 초현실적인 이미지라고 본다. 이 선인장들은 현실의 선인장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마치 신화의 한 장면처럼 선인장에서 별과 배가 태어나고 그곳에 요정이 함께 노닌다. 이렇게 이질적인 사물들의 낯선 만남을 통해 시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풍부하게 형성된다. 어떤 사물들을 맥락이 전혀 다른 곳에 두어서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표현 기법을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고 하는데 이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방식이다. 물론 이런 표현 기법은 작가의 동화적 상상력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선인장 숲」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감성적으로 환기시킨다는 점이다. 관객들은 별들이 태어나는 선인장들과 그 사이에 있는 작고 연약한 소녀와 고양이를 보면서 직감하게 된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우주 대자연 속에서 유한한 생명체인 인간과 동식물은 서로 의지하며 동행해야 하는 존재임을!
*또다시 새로운 여행으로 최순임 작가의 작품엔 푸근한 기운이 감돈다. 삶에 대한 고뇌와 불안까지도 그의 작품 안에선 결국 낙관적인 느낌으로 수렴된다. 이는 작가의 내면에 깃든 어린아이 같은 심성이 작품에 진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 어린아이 같은 심성, 즉 '동심'이란 단순히 순진무구한 마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살아가면서 외부의 다양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성정을 지키며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으로 그의 예술적 상상력이 피어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의 예술적 상상력이 펼쳐 놓은 세상에서 주인공은 여행자다. 작가의 분신으로서 여행자는 사랑과 자유와 환상을 추구하며 낯선 세계를 찾아 나선다. 이는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넘어 궁극적으로 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통찰하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정제된 모습의 다양한 여행자들이 탄생했다. 최순임 작가는 그들을 깊이 응시하며 또다시 새로운 세계로 가는 여행을 꿈꾼다. ● -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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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투영한 최순임의 낭만주의_LE JARDIN :정원 | |
정원에 투영한 최순임의 낭만주의 “LE JARDIN :정원”
Garden의 어원은 GARD 울타리 + EDEN 에덴동산 이다. 인위의 울타리 속 자연의 유토피아는 행복감을 얻는 돌봄과 보살핌의 기술을 통해 정원으로 구현된다. 공격적이거나 비우호적인 척박한 외부와 차단된 고요와 안식의 장소에서 감성의 본질을 성찰할 수 있다. 자신만의 미감으로 정신적 가치와 멋을 향유하며 비로소 조용한 기쁨과 정신의 평온이 정원에 완성된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의 확실성을 통해 오히려 삶과 행동의 원동력을 이끌어내는 생명의 가치를 창조한다. 그러므로 정원은 생명의 순환성과 자연을 품은 생태적 사유 공간으로써의 의미가 있다.
끝없는 갈망으로 인해 외부로만 향했던 시선들을 다시금 내 안으로 환원시킨다, 고단한 일상의 삶 속에서도 영혼의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해 쉼 없이 돌보고 가꾸어 온 나 자신의 깊은 그곳에‘또 하나의 정원’이 있다. 작가내면의 창작의 샘이자 정서와 감성을 이루는 모두를 정원에서 발견한다.
심연의 정원‘LE JARDIN’의 공간개념과 의미에 집중하게 된다. 삶 속에서 가꿔온 인간관, 자연관, 우주관이 담긴 웅장하면서도 작고 고요한 공간이다. 분수 위에서 작고 부드러운 물줄기가 쉼 없이 솟아 흐르고, 무수히 많은 반딧불이가 모여 우주까지 닿을 빛을 품어 안고, 땅속 씨알에서는 온 힘으로 꽃을 피워내는 건강한 에너지로 가득하다. 영롱하게 빛나는 정원은 언뜻 아름답기만 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 이면에 불안과 상처, 고통 등이 공존함을 알 수 있다. 아름다움이 상처를 통해 더욱 빛나듯, 모든 상반된 가치, 속성은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우주의 비밀과 경이, 기쁨과 환희를 심연의 정원‘LE JARDIN’에서 길어 올려 흙 위에, 종이 위에, 허공에, 매만지고 춤추고 뿌려낸 모두는 삶의 드로잉이 된다. 정원을 통해 내면과 마주하면서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어디로 부터 오는지 인식이 명징해진다. 2023. 4. 5. Bona soon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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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임의 환상여행_박남희(미술비평, 홍익대 대학원 교수) | |
최순임의 환상여행 박남희(미술비평, 홍익대 대학원 교수)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들을 잘라내고, 우리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이렇게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미지 않고도 삶에 생동감과 일관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보푸라기로 가득한 현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카리브해에서 첫날밤을 맞아 침대에 누워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여행을 돌이켜보자니 [바깥 덤불에서는 귀뚜라미 소리와 누군가 발을 끌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현재의 혼란은 뒤로 물러나고 어떤 사건들이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한다는 점에서 기대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 알랭드 보통(Alain de Botton), 『여행의 기술(The Art of Travel)』
‘본 보야지(Von Vayage)’, ‘여행자의 노래’ 등의 단어와 친근한 최순임의 예술은 알랭드 보통의 말처럼 ‘일상과 기대’가 ‘생략과 압축’하여 도달한 예술적 상상력의 세계라 할 수 있다. 2012년 첫 개인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녀, 고양이, 선인장, 오르골, 말이 함께 하는 작가의 평면과 입체 작업들은 현실과 상상이 하나의 순도 높은 서사로 드러나곤 한다. 이들 작업을 마주하며 놀란 것은 평면이나 입체 또는 드로잉 모두 각각의 밀도와 완성도가 한결같이 높다는 점이다. 예술가가 작업의 밀도와 완성도를 지녔다는 것은 재능이고 축복이다. 본연의 예술 의지와 열정이 고스란히 유기적 조형성으로 이어진 테라코타와 캔버스 평면들은 섬세한 집중력과 예민한 수고로움이 축적된 결과로 밀도와 완성도를 담보한다. 사회에서 지난한 일들이 펼쳐지고, 불편한 진실이 폭로되고, 코로나19같은 전염병이 세계를 장악한 팬데믹에도 작가는 묵묵히 자신의 내적 세계로 향하며 스스로의 밀도 높은 작업에 천착해 있다. 이는 초월적 정신성이나 사회와의 단절이 아니라, 자신이 기대하는 세계에 대한 내적 집중이라 해야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작업은 내면의 기대를 일구는 심리적 독백이나 환상적 자아도(自我圖)로서의 세계로 읽힌다.
최근 그의 작업은 산수, 탑, 꽃, 달항아리 등 전통의 소재들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환상적 자아도’의 의미망을 원형적 전통서사 혹은 민화적 이미지로 확장해간다. 그간 집중했던 내면의 일상과 환상에 전통의 소재가 더해지면서 깊고 넓은 사유의 유영이 표출되어 지금까지 작업 세계가 종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산수유람〉은 전통적 소재와의 만남과 동양적 사유의 유입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명제이다. 고양이와 소녀, 말, 오르골의 동화적 세계를 드러냈던 평면이나 입체가 산수 배경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작가의 작업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의 관계를 사유하는 ‘환상여행도’로 나아간 것이다. 표현형식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지만 내용적 재구조화를 수반한 이같은 변화는 자신의 신체적 변이와 정신적 사유가 응축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누구나 현재보다 나은, 고통이 없는 유토피아를 욕망하지만, 아픔이나 고통은 삶에서 눈물로 빚은 진주와 같은 선물을 잉태시킨다.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고 치료의 순간을 인내하는 동안 작가의 마음 속 진주가 단단하게 빛을 내었을 것이다. 이 모든 순간이 모여 자연이 되고, 자신은 자연이 우주가 되는 순환 속의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붓을 놓을 수 없었을 게다. 기력이 쇠약해진 순간 솟구치는 예술에의 욕망은 그의 부드럽고 강렬한 완성도 높은 드로잉으로 이어졌고 이는 별도의 평면과 입체로 완성되기도 했다. 그의 작업들은 실제로 삶에서의 환상의 여행이자,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존재들의 어울림이 커다란 윤곽을 이루고 있다. 어쩌면 작가의 여행은 자신이 “일상 속으로 자연을 끌어들이고 그것과 친해질 실마리를 찾으려 한” 행위의 실천적 주제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남루한 삶속에도 나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의 단편일 수도 있다. 노자는 자연은 누군가의 도움없이 스스로 생기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 칭했다. 그 신비로움은 들여다볼수록 경이롭고 신성하다. 그런 자연과 대화하고 생명 있는 모든 것들과의 조화로운 삶이 모리에겐 소중한 여행이고, 사유의 뜰이 된다.” (작가노트, 유토피아를 꿈꾸는 여행자-Mori)
여행이라는 주제가 지속되는 가운데, <청화백자 꿈> <백자 달항아리> <청자 산수유람> <목마 산수유람> <봉황 산수유람> 등의 근작들에서 강렬한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거나, 기존에 드러나지 않은 봉황, 작약, 탑, 달 등이 등장한다. 화면을 채웠던 고양이, 말, 오르골, 소녀가 현실 속 존재와 연동되는 소재들이었다면, 봉황, 작약, 달, 탑 등은 신화적 또는 민화적 대상들로 최근 작업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기존 평면에의 소재들이 왜곡이나 변형이 크지 않았던 것에 비해, 형태나 크기의 변형이나 의인화까지 이어지며 의미의 진폭이 커진다. 예컨대 <청화백자 꿈>은 진한 검청색 바탕에 흰색 고양이와 청화백자가 화면 전면에 등장하는데, 백자의 표면은 소나무와 기와가 삼단으로 이어진 탑 혹은 절집과 흰 달, 소나무로 보이는 이미지로 드러난다. 거기에 밝은 푸른빛의 꽃송이와 가지는 조형적으로 흐드러지듯 안착하며 화면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를 빤히 쳐다보는 고양이는 고깔모를 쓰고 있다. 단정한 ‘기명절지’와 ‘영모도’가 선택적으로 간결하고도 현대적으로 재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산수유람>이라는 제명의 작업은 온화하고 부드럽게 드러나는 산이나, 수직으로 낙하는 폭포 등의 전통 산수화의 구조를 간략화한 소박함을 지니고 있다. 4폭으로 나뉜 구조의 작업에서는 전통 한국화의 형식과 수묵의 방식을 캔버스위에 흑색과 금색 두 가지 색채를 중심으로 평안하게 그려낸다. 기존의 필치나 묘사에서 완벽히 달라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구조화된 자연과 소재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이다. <백자 달항아리>의 경우 삼층탑과 소나무, 버드나무 아래 호랑이를 탄 소녀와 고양이가 항아리 전체 표면을 채운다. 이렇듯 작가의 화면은 서사와 모티프가 다양화되거나 전통 이미지들과 자연스럽게 융합하고 있다. 즉 자신의 평면이 점점 전통의 원형적 형태와 신화적 서사를 수용하면서 기존의 질서로 있었던 소녀와 고양이, 말 등은 보다 생기(生氣)가 더해진다.
이 같은 생기는 다른 한편으로 입체 작업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감지된다. 한 작가에게서 입체와 평면을 자유롭게 넘나듦을 보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다. 2017년 제작된 말을 타고 날아오르는 포즈의 테라코타, 지구모양의 둥근 혹을 머리 위에 붙인 <여행자>, 물 속 생명체를 머리에 붙여 수중여행을 하는 <여행자의 노래>등 평면에서 등장했던 인물이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현현된 것이다. 사람의 감각 중 가장 우월하다는 시각과 이를 구현해내는 손의 역할은 완벽히 일치하진 않지만 서로를 성장시키는 카운트파트너이다. 그의 예술 여행의 길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리고, 만들고, 사색하고, 고양이와 대화하고,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는 일상은 눈과 손의 조응처럼, 기대와 실행의 수행적 삶 그대로 의미심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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