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한진섭의 행복한 조각_고종희(한양여자대학교 교수, 미술사가)
한진섭의 행복한 조각

고종희(한양여자대학교 교수, 미술사가)


I. 조각가 한진섭
예술가는 뭔가 특별하고, 괴이하다는 생각. 수염이나 머리를 기르거나, 낮에는 자고 밤에는 작업을 하거나, 말술을 먹는 등의 기행은 16세기 매너리즘 작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한진섭은 이런 자유분방한 예술가 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아침에 작업장으로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한다. 그에게 작업장은 직장이다. 일주일 중 쉬는 날은 일요일 하루뿐, 하루쯤 집에서 빈둥거릴 법도 한데 평생 단 하루도 이유 없이 작업장에 가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세계 9대 미스터리 중 하나다.
그의 옷차림은 너무나 평범하다. 면바지에 셔츠, 머리 스타일도 늘 짧고 단정하다.
한진섭에게 세계의 중심은 작업장이 있는 안성이다. 매일 가는 것도 모자라 어쩌다 지방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상경할 때면 고속도로가 막힌다는 핑계로 안성 작업장 쪽으로 돌아오곤 한다.
그는 조각 이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음악도, 영화도, 소설도, 잘 모른다. 그러니 조각가 이외의 사람들과는 만나면 대화거리가 별로 없다. 하지만 조각 이야기라면 밤을 새도 모자랄 것이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조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작업장은 외국 작가들이 심포지엄 등의 행사로 한국을 방문하면 들르는 답사코스다. 외국인들이 그의 작업장을 보고 나면 깜짝 놀란다고 한다. 세계 어느 유명 작가도 그만한 작업장을 가지고 있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진섭이 선택한 것은 세상의 그 많은 것들 중에서 단 하나, 바로 조각.
겉모습은 평범한 이 작가, 알고 보면 괴상하다.

작업장은 천국의 놀이터
한진섭이 작업장에 열심히 가는 이유는 그곳에 가면 즐겁기 때문이다. 작업장은 그에게 천국의 놀이터다. 조각은 날마다 호기심이 샘솟는 장난감이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조각이라는 장난감 만들기다. 어떤 작가는 철학처럼 심오한 개념 미술을 하고, 어떤 작가는 설명을 들어야 알 수 있을 것 같은 추상미술을 하지만 한진섭은 보는 순간 웃음보가 탁 터지는 쉽고, 재미있는 작품을 만든다. 성경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였고, 진리는 늘 단순하다.
영화 <르누아르>에서 화가는 말한다.
“애들처럼 그리는 게 내 평생의 목표였어. 천진난만하게, 아무 생각 없이”
피카소는 또 얼마나 아이처럼 작품을 가지고 놀았던가. 그가 생산해 낸 엄청난 양의 도자기, 드로잉, 판화, 회화는 즐기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얼마 전 러시아 여행 중에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한 광장에서 거리의 악사가 신나게 연주를 하는데 주위에 몰려든 많은 관광객들 중에서 4살 쯤 되어 보이는 아이 혼자서만 가운데로 나와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아이는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멜로디에 몸을 맡겼다.
한진섭 역시 아이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것 같다. 어른이 아이처럼 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남을 의식하지 말아야 하고, 가면을 벗어야 한다. 하지만 일단 그 세계에 들어가면 자유롭고, 흥미진진하며, 무엇이든 가능한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진다. 한진섭 만의 네버랜드다.

7년 만에 여는 이번 개인전에서는 특별히 전시를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동안 만들어온 작품들이다. 주제는 크게 인체와 동물로 나눌 수 있으나 이번 전시에서는 숫자가 새로운 주제로 떠올랐다. 날마다 작업장에 가서 돌을 깨는 이 작가, 도대체 뭘 하며 노는지 궁금하다.  

II. 한진섭의 작품세계

깨는 석조에서 “붙이는 석조”로

이번 개인전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붙이는 석조”의 등장이다.
조소란 조각과 소조를 합친 말이다. 소조는 흙과 같은 재료를 붙여서 만드는 것이고, 조각은 돌이나 나무 등의 덩어리를 깎아 만드는 기법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시도한 “붙이는 석조”는 기존의 석조와 무엇이 다른가?
외관상으로는 작품의 표면을 돌 조각들을 붙여 만들었다는 점에서 모자이크 기법과 유사해보인다. 모자이크는 기원전 로마시대에 등장하여 건물의 바닥이나 벽 장식으로 각광받았고, 중세 내내 가장 중요한 회화기법이었다.
한진섭의 “붙이는 석조”는 그러나 회화적 장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석조 기법의 하나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원시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석조란 원석을 깨서 만드는 것이었다. 한진섭의 “붙이는 석조”는 특수재질로 모형을 만든 후 표면에 돌을 깨서 만든 조각들을 붙이고 그 사이를 메지로 메꾸는 방식이다. 여기서 메지는 일반 모자이크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작품의 재질 느낌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기법을 사용하면 무게와 크기에 제한을 받지 않는 대형 조각이 가능해진다. (사진 1: 52. 봄 나들이).

한진섭은 이번 전시에서 “붙이는 석조” 기법을 이용하여 다양한 벤치 조각을 선보이고 있다. 그중 첫 작품 (사진 2: 55. 행복하여라 2014) 숫자를 형상화 하여 만든 대형 벤치다. 재질의 느낌이 모자이크와 흡사하지만 이 기법을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점과 이 같은 대형 조각을 실내에서 설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작품 이후 한진섭은 “붙이는 석조” 작업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기법이 노련해지고 발전하여 작품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도판 3, 4: 51, <5, My God>, 파일번호 3441: 부분도 함께 실어주세요)는 돌 대신 헐어낸 고택의 기와를 깨서 붙인 것으로 숫자 5를 형상화 한 대형 테이블 조각이다. 숫자 5는 조형적으로 완벽할 뿐만 아니라 형태가 매우 아름답다. 기와는 흙으로 빚은 것으로서 흙이 오래되면 돌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돌과 같은 성질을 가진다.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한땀 한땀의 정성이 그야말로 르네상스 시대 플랑드로 회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정교하고 정성이 가득하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한진섭의 작품이 정감을 느끼게 하는 비결은 역시 손맛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들 벤치조각은 관객에게 속삭이는 듯 하다.
“어서 와서 앉으라고, 피곤한 다리를 좀 쉬라고”
전시장에는 흔히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이 있지만 한진섭의 조각은 관객이 작품에 앉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들이 많다. Fine Art에 디자인의 실용성을 도입함으로써 눈으로 감상하는 작품에서 사용 가능한 작품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의 소재가 된 숫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현대인은 잠시도 숫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돈, 전화번호, 주소, 지하철, 버스 노선, 자동차 번호판 모두 숫자로 이루어 졌듯이 숫자는 현대인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기호이자 약속이다. 숫자는 그러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그 의미를 모르는 이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러니 숫자의 노예가 될 필요는 없으며, 숫자를 초월할수록 인생도 자유로와 질 수 있다. 한진섭 작품의 저변에 깔려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하겠다.
숫자를 새로운 의미와 조형적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붙이는 조각”을 실험하였고, 그 결과는 예기치 않은 형태들의 탄생이다. “붙이는 조각”은 기존의 깨는 석조보다 세배 이상의 작업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마도 모든 조각가들이 선뜻 시도하기는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진섭의 성실함과 집요함, 그리고 축적된 석조 기술이라면 앞으로 이 기법은 조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미술에서 혁신이란 전혀 새로운 것의 발견이 아니라 기존의 것에 하나를 보태거나 새롭게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많았다.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만 있어도 혁신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붙이는 석조” 역시 기법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석조에 적용한 것은 혁신적이다.

동물조각

동물은 한진섭의 주요 관심사다. 처음 동물 조각을 하게 된 동기는 해태제과의 상징인 해태상을 만들면서였다. 기업의 상징물로서의 해태를 만들 때에는 표현의 제한이라는 한계가 있어 답답함도 있었지만 그로 인해 동물이라는 주제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큰 성과였다.  
그의 동물들은 참으로 잘 만들었다. 앞, 뒤, 좌, 우, 상, 하를 돌아가며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작품을 관찰하고 음미하다 보면 작가의 장난기와 정교한 석조기법을 새록새록 발견하게 된다. 그의 조각은 보는 재미가 있다.
지금까지 만든 동물들을 보면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말, 닭, 개, 돼지 등이 있다. 바로 12지상이다. 왜 이런 동물을 만들었는가라고 물으니 쥐띠에는 쥐를 만들고, 소띠에는 소를, 호랑이띠에는 호랑이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해의 동물을 만들었다고 했다. 해가 바뀌다 보니 다양한 종류의 동물 조각들이 자연스럽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의 동물조각은 세월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작가들 중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가는 과정에 의미를 두기도 한다. 조형요소 외에도 시간을 하나의 중요한 창작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한진섭의 동물들이 나오는데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농부가 터를 놀리지 않고 농사를 짓듯이 작업을 한 결과이다. 한진섭은 시간의 미학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을 만들어냈다.

그의 동물들은 F1에 나올 법한 경기용 차를 운전하기도 하고(사진 5: 22, <F1>, 파일럿이 되어 비행기를 몰기도 한다. 젊은 날의 로망인 베스파 오토바이 뒤에서 소가 흐뭇하게 앉아있는가 하면(사진 6: 20. <VESPA 나들이>, 비행기 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있는 생쥐 파일럿도 있다. 언젠가 한진섭은 실제 크기와 동일한 4미터가 넘는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통돌로 만든 적도 있다. 주문을 받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냥 거대한 화강석을 구해서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한다. 앞뒤 재지 않고 앞만 보고 정진한 이들 작품들이 바로 한진섭이 만들어낸 네버랜드의 주인공들이다.
그의 동물들은 따뜻한 온기와 해학이 있으나 지위 고하나 서열이 없다. 말이 명품차를 모는가 하면, 동물의 왕 호랑이는 바깥세상이 궁금하여 담벼락에 매달려서 스타일을 구기고 있다(사진 7: 28, <세상이 다 보이네>). 힘센 하마는 귀염둥이나 털털한 아저씨로 변신해 있기도 하다. 작품 속 동물들은 의인화이기도 하지만 동물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의 산물이기도 하다. 들꽃, 숲 속의 나무, 푸른창공, 그 아래서 살아가는 수많은 곤충과 동물, 그리고 인간. 우주의 생명체 중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진섭은 참 따뜻한 사람이다. 그라면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을 비롯한 우주의 생명체까지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작품에 따스함이 넘치는 이유다. 물론 얼음보다 차갑고, 칼날처럼 날카로울 때도 많지만.


움직임

그가 대리석으로 만든 헬리콥터는 프로펠라는 물론 기체도 빙빙 돌아간다. 돌덩어리를 돌아가게 하려면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는 움직임(movement)에 관심이 많다. (사진 8: 1, <씽씽나들이(1)>)처럼 조각 자체의 형태에서 움직임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움직이는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모터를 사용한 분수대를 만들어서 움직이는 조각을 선보이기도 한다.
돌이라는 정지된 재료를 움직이게 만들고픈 욕망은 조각가들의 본능이자, 오랜 과제였다. 조각을 의미하는 스타투아(Statua)라는 말은 원래는 정지해 있다는 의미이다. 이집트인들은 인체조각에서 겨우 한 발을 앞으로 내딛게 만드는데 천년 이상이 걸렸고 이후 조각가들은 정지된 대리석 조각에 어떻게든 움직임을 주고자 다양한 시도를 하였으며, 그 절정은 바로크 시대의 거장 베르니니가 이루어냈다. 그는 <아폴로와 다프네>에서 회화로도 표현하기 힘든 인간의 표정과 살갗, 머리카락은 물론 남녀가 뛰는 모습을 대리석으로 완벽하게 구현했다. 베르니니 이후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석조 테크닉에서 그를 뛰어넘지 못했다.
조각의 역사적 문제들은 한 개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 40년 넘게 석조를 해온 한진섭역시 언제부터인가 대리석을 공중에 띄워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헬리콥터를 타는 토끼(사진 9: 13, <떳다 떳다 비행기>)의 경우 대리석이라는 재료 자체의 무게도 있지만, 돌덩어리를 허공에 매달 수 는 없으니, 땅에서 지지대로 떠받쳐야 하는데 좌대이기도 한 지지대가 둔탁하면 공중에 떠있는 효과가 줄어든다. 이 작품의 좌대가 가늘고 긴 이유다. 좌대 속은 작품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구멍을 뚫고 철근을 박아 힘을 보강했다. 아름다운 인체 속에 뼈가 숨어 있듯이 그의 날아가는 헬리콥터 속에는 보이지 않는 철근들이 버티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한진섭은 공중을 날고 있는 많은 화강석 조각들을 만들어서 야외에 설치한 바 있다.

세 덩어리의 미학, 채움과 비움(Pieno e Vuoto)

코를 벌름거리며 함박 웃음을 짓고 있는 부부같기도 하고, 모자(母子) 같기도 한 말 한 쌍이 있다(사진 10: 23, <속삭임>). 인간의 웃는 모습은 눈과 입을 보고 알 수 있는데 이 말들은 벌어진 입과 벌름거리는 코, 봉긋 솟아오른 두 귀에서 웃음이 느껴진다. 형태는 매우 단순하여 직사각형 블록에 구멍을 내니 몸통과 다리가 되었고, 그 위에 사각을 쭉 세워 목과 머리를 만들었으며, 입과 코는 머리 앞쪽을 돌출시켜 만들었다. 물론 뒤쪽에 댕기머리를 연상시키는 말의 갈기도 잊지 않았다.
한진섭의 거의 모든 작품은 다리, 몸통, 머리의 세 덩어리를 넘지 않는다. 극도의 단순화된 “세 덩어리의 미학”이다. 물론 이들 세 덩어리는 붙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돌이다. 그의 세 덩어리 조각은 조형적 단순함 속에서도 재미를 제공한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 드넓은 공원에 30 미터 정도의 높이로 큼지막하게 만들어놓으면 관람객들이 그 속에서 참 재미나게 놀 수 있겠다.
분홍 고양이(사진 11: 27, <고양의 외출>)는 아예 몸통과 머리의 두 덩어리로 이루어졌다. 반원형의 돌에 구멍을 파내어 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머리와 꼬리를 만들었다. 머리는 하늘을 향해 치켜 올렸고, 동그란 꼬리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단순한 형태를 통해 단숨에 활처럼 구부러진 고양이의 특징을 보여준 솜씨는 경탄할 만 하다. 고놈, 완성되고 보니 귀여운 표정이며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한진섭 조각에서 채움과 비움(pieno e buoto)은 절대적인 조형 원리다. 피에노는 채움을 부오토는 비움을 말한다. 사실 조각에서 피에노, 부오토가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작품의 좌대는 색상으로나 형태상으로나 본체와 딱 들어맞는다. 좌대라기보다는 작품의 일부라고 해야할 것이다. 잠시 후 고양이는 이 흔들거릴 것만 같은 좌대를 딛고 힘차게 도약할 것만 같다.
한진섭의 작품에서 좌대는 작품을 받치는 부속물이라기보다는 작품의 일부로 간주된다. 유니콘의 경우 좌대에 고리 같은 것이 있는데 말을 묶어두는 고리란다. 이 유니콘은 그를 묶어두던 고리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았다. 이 고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큰 돌이 필요했음은 물론, 구멍을 내고 갈아나가는 정교한 작업을 해야만 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제작 시간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유머, 그 프리미티브한 조형미

안경을 쓴 이 여인(사진 12: 6, <가득한 사랑>(2))은 보자마자 웃음이 절로 난다. 눈도 코도 삐뚤어졌고, 못생겼지만 사람은 좋아 보인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와 짝을 이루면 좋을 네모난 얼굴의 이 남성 두상(사진 13, 5, <가득한 사랑(1)>은 빙긋이 웃고 있는데 넉넉하고 투박한 미소가 왠지 백제의 걸작 서산 마애삼존 불상을 보고 있는 듯하다. 한진섭의 조각은 백제 불상의 은근하고 순박한 멋과 통하는 데가 있다.
최근에 제작한 두상은 하나의 덩어리에 얼굴을 세 개(사진 14: 4, <세 얼굴>) 만들었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들을 보면 대체로 좌우 대칭과 기하학적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 작품은 그간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다. 이 작품에서 세 개의 두상을 모두 보려면 작품을 이리 저리 돌아가며 숨은그림찾기 놀이를 해야 한다. 각각의 두상은 찌그러지고, 뭉개졌으며, 모습이 괴기스럽다. 두상은 꼭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개념을 벗어난 점이 좋고, 한진섭 특유의 질서정연함과 완벽한 마무리에서 벗어나 아무렇게나 주물러 만든 듯하여 정감이 간다. 동물들을 통해 현실과 동화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더니 이제는 인물상에서도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드는, 신화 속 메두사처럼 머리가 여러 개 달린 멀티플 두상이 탄생되었다.

빵 하고 웃음보가 터지는 작품이 또 하나 있다. 볼일 보는 여인상이다. 엉덩이를 내리고 쭈그리고 앉아 힘을 주는 여인의 표정, 영락없는 일상의 모습이다. 장난끼가 발동한 작가는 좌대 위에 거울 조각들을 붙여놓았다. 이유는 설명 안 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유머다. 찰떡보다 부드러운 여인의 엉덩이를 꼭 한번 만저보기를 권한다.  
한진섭이 만들어 낸 인물들은 한결같이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웃음을 자아낸다. 작가 안에 숨겨진 유머와 해학이 그의 인물상들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결과다. 유머는 근엄한 사람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억지웃음을 주려 안달하다 못해 발악을 하고 있는 TV의 개그 프로그램에 진정한 웃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듯 하여 기분 좋다.

한진섭 작품의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 특징은 기하학적이고 간결한 조형미다. 그의 조각의 역사적 뿌리는 이집트, 중세와 같은 프리미티브한 미술이다. 그는 이상하리만큼 단 한번도 고전주의 조각에는 가까이 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반듯하게 앉아 있는 이 여인 좌상(사진15: 10, <태초의 여인>)은 옆에서 보면 완전 ㄴ자이다. 그녀가 앉아 있는 대 역시 ㄴ자인데 작품의 비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물론 작가 특유의 피에노와 부오토 즉 비움과 채움의 조형원리는 물론이고, 다리, 몸통, 머리로 나누는 “세 덩어리의 미학”도 빠지지 않았다. 나는 이 조각을 보면서 엄숙하면서도 본질적인 이집트의 여인좌상이 떠올랐다. 한진섭의 작품에서는 그러나 얼굴의 이목구비가 생략되었으며 이집트 조각의 엄격함은 어느새 부드러운 곡선으로 바뀌었다. 사실 이 여인상은 의자의 기능도 있어서 관람자가 앉을 수 있다. “비우니 채워지더라.” 작가가 즐겨 쓰는 말이다. 작품 역시 비우니 사람이 와서 앉더라고 했다.
(사진 16: 15, <일편단심(1)>)는 단순함의 미학이 낳은 결실이다. 마치 이집트 부조의 옆면을 연상시키는 얼굴의 윤곽은 그러나 하늘을 향해 있다. 오로지 반원형과 원통으로 이루어진 두상이다. 그 단순함을 살짝 빗겨가게 만드는 것은 검은색 좌대이다. (사진 17: 11, 일편단심(2)) 역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형태는 전혀 달라졌다. 눈코 입을 둥근 얼굴 위에 부조 기법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좌대까지 같은 재료인 화강석으로 만들었는데 섬세한 이 작가 다조로움이 맘에 걸렸던지 단추를 달아 밋밋함을 보완했다.
상상력의 끝은 어디인가?

III. 한진섭 조각의 의미
 
역사적인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을 나는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당대의 미술계에 새로운 것을 제시했는가?
둘째, 작가 스스로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는가?

한진섭은 인체 중심의 구상작가로 출발했다. 첫 개인전에서 양감이 풍부한 사실적 인체 조각을 선보인 이래 인체는 지금까지 그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그는 특유의 방식으로 일관성 있게 인체를 단순화 하는가 하면, 인체를 가지고 기하학적 패턴을 만들어내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 확장시키는 작업을 즐긴다(사진 18: 54, <하나되어>). 그의 조각 형태는 앞서 언급했듯이 다양하다. 그것은 한국적 전통과 서구적 전통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용광로에서 녹은 철이 전혀 새로운 형태로 태어나듯이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국, 내외 다른 작가에서 그 유사성을 찾아 볼 수 없는 한진섭 스타일이다.

현대미술은 설치, 영상, 비디오, 개념미술이 주를 이룬다. 전통적 방법을 하는 작가들은 왠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며, 대학에서는 점점 더 전통조각을 다루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누구나 다 비엔날레 작품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김영원 교수의 말대로 조각의 맛은 누가 뭐래도 재료의 아름다움을 무시할 수 없다. 손끝으로 만들어내는 전통적인 조각을 하는 작가 층이 많을수록 우리 미술계의 수준도 서구의 문화강국들처럼 깊고, 다양하며 탄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의 역사는 깊고, 영역은 무한하니 조각의 장르도 이제 선택을 요구한다. 한진섭은 전통적인 석조에서 출발하여 45년간 외길을 걸어 왔다. 그가 선택한 작업 방식은 수천년 전에도 존재했던 망치와 정을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전통적인 방식이다.  
한진섭은 작품을 직접 만든다. 명작은 작가의 손끝에서 나오며, 작품의 진가는 디테일이 좌우한다. 역사적인 거장 티치아노, 라파엘로, 루벤스의 작품을 보더라도 작가가 직접 그린 작품과 제자들의 손을 빌린 작품은 천지 차이가 있다.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변수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작가가 직접 제작할 때 비로소 걸작이 탄생한다. 한진섭은 작가이기 이전에 가장 깐깐한 장인(匠人)이다.
한진섭은 작품에 기교가 들어나는 것을 경계한다. 하지만 그는 석조의 베테랑이자 성실함이라는 DNA를 뼛속까지 타고 난 사람이다. 이 것은 때로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되돌아온다. 그의 작품은 종종 너무나 완벽하게 마무리 되는 것이다. 거칠어 보이는 작품이 있다면 아마도 작가의 의도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이점 한진섭의 장점이자 한계라고 생각한다. 미켈란젤로가 미완성에서 진정한 작품의 의미와 절대적 가치를 찾아냈듯이, 다듬어진 거침이 아니라 진정으로 놓아 버릴 때 또 다른 차원의 작품 세계가 열리지 않을까.
한진섭이 지금까지 매번의 개인전에서 새로운 작품세계를 선보였듯이 앞으로도 창조의 도전을 멈추지 않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