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화려하고 슬픈 그리움의 세계 -장정란
         화려하고 슬픈 그리움의 세계 

                                                     장정란(미술사. 문학박사)


 황선화의 그림은 우선 화려한 색채가 시선을 끈다. 붉은빛으로 펼쳐지는 화면바탕이나 노랑이나 검정톤으로 보여지는 그림의 주조색들은 마치 색채의 향연이라도 벌인듯 하다. 
눈이 아프도록 붉게 그려진 능소화는 못이룬 사랑의 신화를 담고 있는 꽃처럼 화려하지만 애닯게 보여진다. 그러나 단순히 강렬한 색채가 아닌 아픈 사랑의 기억을 머금고 있듯 붉은색의 농도는 깊이 있는 색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한번에 칠해진 것이 아니라 전통 동양화의 채색기법처럼  여러번 색을 쌓아 올려서 목표한 색감을 드러나게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황선화의 이번 전시주제는 “遊적 情景”이다. 遊는 莊子의 逍遙遊 개념에서 도입한 것이지만 황선화에게 遊는 사랑에 대한 다양한 탐색의 방식으로 해석되고 전환되어 나타나고 있는것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장자의 정신적 자유를 상징하는 소요유와 황선화가 추구하는 사랑의 정경은 아주 다른 경계일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의 그림에서 사랑의 단계를 열정-집착-몰입-갈등-초월로 탐구하면서 이런 과정을 遊의 경지로 인식하고 있다.

황선화 그림의 메인 소재는 능소화와 나비인데 모두 작가의 정신적이며 감성적인  상징이다. 우선 능소화가 메인인 작품들은 인식의 遊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사랑에 대한 인식단계를 탐구한 것이다. 능소화가 화면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형식의 작품들이다. 능소화는 못이룬 사랑을 의미하는 꽃이다. 능소화는 사랑을 받았으나 곧 잊혀진 여인이 상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붉게 피어났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 내도록 더욱 활짝 꽃잎을 펼친 모양으로 화려하게 피어 난다고 한다.
황선화의 그림에서도 능소화는 아주 화려하고 만개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붉은색의 능소화는 지나치게 화려하여 오히려 슬픈 감정을 던져 준다. 화면바탕은 흩어진 꽃잎들을 빼곡히 그려넣고 있다. 꽃잎 하나 하나가 상대방의 음성이며 손짓까지도 기억해 두려는듯 하다. 화면에 한치의 공백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치밀하고 꼼꼼하게 강렬한 색조의 꽃잎들로 채워 넣었다.
사랑의 인식이 그리움과 애닯픔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화면에서는 그 감정들을 아련한 기억이 아닌 폭발하듯 산화되는 상징들로 표현한 것이 황선화의 독특한 감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수 있겠다. 즉 그리움은 화산이 분출하듯 거침없이 방출되고 있다.

두 번째 형식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은유의 遊라는 제목을 가진 그림들이다. 나비가 메인 소재인데 만남과 이별의 두 가지 방식으로 탐색되고 있다. 우선 은유의 遊-만남이라는 그림들은 능소화와 나비의 만남, 나비와 나비의 만남을 그리고 있다. 
서로 만나서 사랑이 이루어진 환희의 정감들을 표현하고 있는데 인식의 遊 시리즈 작품들 보다는 다소 침착해진 색채들이 주목된다. 만남의 환희를 표현 하였으나 색채의 무게보다는 두 마리 나비주위를 환하게 빛을 밝혀주는 조형방식으로 새로운 화면경영을 하고 있다. 
대상을 배치하며 화면구성을 하는것이 아니라 두 마리 나비의 생명체가 발산하는 광채로 화면이 구성되고 있다. 서로 만나 교감하는 장면인데 두 마리 나비 주위는 타오르는 불꽃 잔영처럼 주황빛으로 처리하면서 새로운 화면 공간을 만들고 있다. 작가의 치밀한 화면경영의 의도를 읽을수 있는 부분이다.
여러 마리의 나비들이 다양한 색채를 드러내며 화면 중앙에 일렬로 배치된 그림들도 있는데 이것은 만남의 환희에서 증폭되는 무한대의 열정의 상징일 것이다

그러나 은유의 遊-이별의 작품들에서 나비는 흩어지고 있다. 중앙에 능소화를 배치하고 소용돌이 처럼 돌면서 꽃에서 멀어지는 나비들이나, 높은 창공을 향해서 멀리 흩어져 가는 나비들을 그린 작품들이 그것이다. 바탕색은 검정색으로 바뀌고 하늘은 번개치고 비가 내린듯 어둡고 우울하게 표현되고 있다. 화면경영 에서는 공백이 많이 생기는데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방식이다. 이별의 상념을 공백으로 처리한 것인데 아프고도 쓸쓸한 감정을 지워버리듯, 한톤의 검정색으로 처리함으로서 더욱 비장한 전달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세 번째 형식으로는 초월의 遊 라는 제목을 한 그림들이다. 두 마리의 나비가 서로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거나 능소화 화관을 머리에 쓴 소녀가 등장하는 작품들이다.
사랑의 만남과 이별을 통하여 그 불안한 환희와 고통을 초월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나비 두 마리가 서로 바라보고 있는 그림은 서로의 존재성을 인정하고자 하는 상징일 것이다. 불꽃같은 사랑의 집착은 서로에게 화상의 흔적을 남길 뿐이다. 그리움은 서로 바라보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작가의 심경이 나비 두 마리가 우주 한 복판에서 서로 바라보는 도상으로 구현되고 있다.  
능소화 화관을 쓴 소녀나 능소화 꽃나무 아래 조용히 누워있는 누드여인은 모두 작가의 또다른 상징이다. 비교적 침작한 색감으로 등장하는 소녀나 여인그림은 사랑의 복잡한 감정들을 초월하여, 비로서 자신의 본연의 모습에서 새로운 세계를 찾고자 하는 도상으로 해석된다. 

이상의 작품들로 볼 때 황선화의 그림세계는 사랑에 대한 깊은 탐구와 통찰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아프도록 눈부신 색감이나 분출하듯 그려지는 능소화 꽃잎들은 사랑에 대한 강렬한 여운으로 감상자들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그림은 작가의 인생에 대한 내밀한 감정이나 경험의 객관화된 발언 이라고도 할수 있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작가의 삶과 사랑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볼수 있는 그림들이다. 장자의 정신적 한가로움의 추구와 세속적 잣대로 구속 할수 없는 인간의 무한한 자유의지인 遊의 세계를, 황선화는 사랑의 세계로 새롭게 변환시키고 있다. 상대에 대한 인식이나 은유나 초월적 감성은 한편 그 순간만은 무한한 자유의 공기처럼 황홀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그리움이나 이별의 슬픔도 황선화의 遊적 화면에서는 화려한 흔적으로 새겨진다. 이런 방식은 사랑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회화적 해석으로 감상자들에게 황선화의 그림은 또 다른 매혹을 선사하고 있다.

황선화의 예술세계-박옥생
황선화 평론
황선화의 예술세계:
능소화와 나비의 화생(化生) 담(談)


長江 박옥생, 미술평론가, 한원미술관 큐레이터

주황색 능소화가 화면 가득 피어있다. 찬란한 능소화에는 나비가 날아오른다. 황선화의 작품에는 이러한 능소화와 나비의 극적인 만남이 있다. 오랜 시간을 능소화에 천착해 온 작가의 작품세계에는 인류의 역사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꽃과 나비라는 상징의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 
나무를 타고 올라 땅을 향해 꽃을 머리처럼 풀어놓은 능소화의 피어남은 궁궐 속 여인이 죽어 꽃이 되었다는 신화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러한 능소화가 가진 풍부한 문학성에는 넝쿨처럼 자라나는 줄기의 강인한 생명력과, 능소화의 여린 꽃잎을 타고 흐르는 숨 막히는 그리움이 존재한다. 따라서 작가의 작품은 꽃의 유한성과 신화성이 더해짐에 따라 비극적인 연극성을 드러낸다. 마치 무대 위 배우의 연기를 보는 듯, 능소화와 나비는 절절한 인간 삶의 편린처럼 진한 살 냄새를 뿜어낸다.
사실, 황선화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삶의 내용들이 꽃과 나비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주제로 형상화됨으로써 동일시되고 있다. 불(사랑, 꽃)을 향해 달려가는 나비와, 시들 줄 알면서도 화려하게 타오르는 꽃에는 작가의 삶의 표정이 섬세하게 이입되고 있다. 치밀하게 계획되고 탄탄하게 구성된 화면 속에는 정화된 정신성과 현실을 초극한 순도 높은 사고의 단계가 감지된다. 이러한 작가의 화면은 엄정한 균형미가 느껴진다. 균형 잡힌 미적체험의 바탕에는 한지의 따뜻한 물성(物性)과, 체온(體溫)과 교감하는 종이 특유의 감성이 작용하고 있다. 그 위에 올려 진 전통 채색 안료는, 재료 자체의 천연성분이 세계의 본질과 숨 쉬는 자연의 생명을 담고 있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은 인간의 삶이 녹아든 자연의 모습처럼 풍부한 생명력으로 살아나고 있다.
작가는 만남과 이별, 생성과 소멸 그리고 재생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낸다. 이를 통해 세계의 관찰과 관조 그리고 그것을 뛰어 넘는 초월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동양 고전에서 말하는 예술창작의 정신적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창작과 상상력은 이미지(은유)의 형상화를 위한 몰입의 과정과,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잊고(忘己, 坐忘) 그 이후에 만나는 초월된 정신적 자유와 휴식을 위한 카타르시스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니체(Nietzsche)는 예술창작에는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디오니소스적 도취가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듯이, 오롯한 미적 대상으로서의 나비는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기 위한 죽음과 비극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황선화의 작품에는 높은 단계의 정신성과 자유를 향하여 필연적인 자기 분열과 해체 그리고 소멸을 담고 있다. 이러한 소멸은 정제된 스스로의 반성과 삶의 다짐과 겸손이 내재되어 있다. 화면 곳곳에 침투된 삶의 성찰과 화면 가득히 번져 나가는 스스로 빛나는 주황빛의 세계를 통해 우리는 극적이고 짜릿한 자기 정화, 정신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작가의 작품에서의 승화된 정신은 삶도 죽음도 없는 경지에로의 편입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며,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짐으로써 느끼는 정신의 자유로움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향하는데 있어 황선화의 능소화와 나비는 유기적인 일체의 관계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이 하나이고 하나가 둘인 것, 분리와 화합과 일체가 작용하고 있다. 이는 우주와 객체가 하나,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합일(合一)과 종교성이 간취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작가가 근자에 보여주는 세계의 관상(觀想)과 나비의 분열과 초월 이후에 다시 만나는 꽃을 인 아이의 등장과 같은 작품에서, 깨달음과 같은 정신의 초월성과 다시 관조하는 인간으로의 사랑이 드러나고 있다. 이는 작가가 깨달은 삶의 의미, 상처의 치유와 승화 그리고 그리기의 가치에 관한 토로와 고백일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화생(化生)이라 하여, 인연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갑자기 변화하여 태어나는 것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미타 극락에서의 연꽃에서 태어난다는 연화화생(蓮花化生)이다. 작가의 근작(近作)은 화생과도 같다. 화생은 객체에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인데, 자신의 현실을 초월하고 비로소 정신의 자유를 깨닫는 것과 스스로가 내재한 고유한 가치를 자각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사실, 왕부지(王夫之, 淸)와 같은 철학가는 잠재된 것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 화생이라고 하듯이, 작가가 바라보는 객체의 내재된 본성이 꽃으로 나비로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황선화의 회화세계에서 초월 이후, 깨달음 이후의 세계는 그 무엇으로도 이야기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스펙트럼은 한지에 안료가 번지고 견고하게 자리하는 것처럼 넓고 깊을 수 있다.
작가의 회화는 전통 화훼화에서 출발하고 있다. 화훼는 그 표현의 아름다움에서 장식의 기능과 여성의 삶과 인간 상징의 의미를 두고 오래도록 사랑받아 왔다. 황선화의 능소화 그림에는 전통 회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상징과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 의미들은 생명으로 되살아나 마치 잔잔한 파도나 산처럼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하여 끊임없이 교감(交感)하고 있다. (2012.3)    

능소화와 나비의 사랑을 통한 초월의 여정_안영길(철학박사, 미술평론)
능소화와 나비의 사랑을 통한 초월의 여정


안영길(철학박사, 미술평론)

  작가 황선화의 아이콘과도 같은 능소화와 나비에는 다양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작가 자신의 삶의 역정을 상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능소화와 나비의 만남은 사랑과 이별을 비롯한 개인적 역사성을 행복한 교감으로 승화시켜 다양한 색깔의 감성적 표현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궁궐이나 사대부 집안의 담장에 심었던 능소화는 임금이나 임에 대한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붉은 꽃으로 아래나 옆을 보지 않고 임을 향해 오롯하게 솟아오르는 고고한 특성 때문에 유가의 에토스적 덕목을 지니고 있다. 또 파토스적 열정으로 붉게 피었다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아름다운 꽃송이 채로 떨어져 인연법을 마무리하는 싹싹함의 인과율도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의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하는 나비와 함께 대립과 갈등이 없는 유토피아를 향한 초월의 여정에 나서고 있다.
  작가의 영혼이 유유자적하며 쉴 수 있는 여정의 목적지는 장자가 말하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유토피아이기도 하고, 오성과 감성의 자유로운 유희가 펼쳐지는 ‘유어예(游於藝)’의 세계이기도 하다. 작가 황선화가 근래 그려내고 있는  <능소화와 나비의 사랑>이라는 주제는 우리의 영혼을 자유해방으로 인도하는 초월의 여정이며, 작가의 영혼이 투사된 나비의 사랑은 작품세계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 나비의 어원이 날아다니는 빛 → 날빛 →나비로서 영혼을 상징하는 것처럼 정신과 영혼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프쉬케(psyche)도 나비로 상징된다. 작가 황선화는 자신의 몸을 상징하는 꽃과 영혼을 상징하는 나비의 조합을 통해 영혼의 자유해방과 함께 자신이 꿈꾸는 미의 이데아를 향한 초월의 여정, 즉 유유자적할 수 있는 소요유(逍遙遊)의 경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나비처럼 훨훨 날며 유유히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소요유의 경계는 인식을 초월한 궁극적 미의 세계라고 할 수 있으며, 와유(臥遊)를 통한 창신(暢神)이나 아무런 걸림 없는 무애(無碍)의 경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없는 물화(物化)의 경지에서 노닐 수 있고, 사랑과 이별, 죽음과 삶 같은 연기(緣起)의 집착이 사라지고 색(色)과 공(空)이 어우러진 화엄의 세계에서 꽃비를 맞으며 행복하게 유유자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월의 여정을 이끄는 매개체인 사랑, 즉 에로스는 어떤 의미일까? 작가에게 사랑은 모든 고통과 행복의 근원이다. 작가가 추구하는 초월의 여정 끝에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유유자적할 수 있는 절대 자유가 자리 잡고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탄생한 날 벌어진 신들의 잔치에서 초대받지 못한 빈곤의 여신 페니아가 풍요의 신 포로스가 만취한 상태를 이용하여 동침해서 낳은 것이 에로스다. 이처럼 결핍과 풍요의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중간자의 특성을 지닌 에로스는 근본적으로 결핍을 안고 태어난 불완전한 존재지만 풍요로운 것, 즉 더 나아가서는 정신적 미의 극치를 찾아 나아가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다. 에로스는 미의 여신이 탄생한 날 잉태되었기 때문에 사랑을 유발하는 계기는 바로 미라고 할 수 있다. 이 계기는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신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거치는데, 사랑의 속성은 무언가 결핍된 것을 충만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것을 동경하며 나아가는 동인(動因)이다. 따라서 작가가 나비로 표현한 에로스는 미를 향수하려고 하는 정신의 강렬한 파토스적 충동이며 일종의 광기(mania)이다. 정신은 이 에로스에 인도되어 감각적 형태의 미로부터 출발하여 보다 높은 차원의 미를 추구하며 차례로 존재의 단계를 상승시켜 마침내 이데아 그 자체의 미를 관조함과 동시에 진리의 실재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데에 도달하는데, 이것이 바로 초월의 여정의 종착지인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의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유유자적, 마주보기 등의 주제로 창작한 <능소화와 나비의 사랑> 시리즈에는 사랑을 향해 떠난 초월의 여정에서 만나는 다양한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화관을 쓴 소녀나 자유로운 나비의 영혼의 머리결을 지닌 성숙한 여인의 이미지는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한 작가의 분신이나 자화상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근래 새롭게 캐릭터로 등장하는 고양이는 사랑과 인정을 구걸하지 않는 자존심, 주변의 새로운 만남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 어느 곳에도 결코 얽매이지 않은 채 고독을 즐길 줄 아는 특별한 존재로 작가 자신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울러 고양이와 나비의 조합은 예로부터 건강과 장수를 상징하는 길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가 황선화가 추구하고 있는 초월의 여정은 단순히 감각과 감정의 파토스만이 아니라 의지와 이성의 에토스 작용도 수반하는 균형을 취하고 있다. ‘물화’와 초월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유(遊)’의 경계는 유유자적하며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최고의 쾌 - 엑스타시스(ekstasis, 脫我, 沒我)에 도달하는데, 예찬이 ‘오로지 스스로 즐긴 뿐이다(聊以自娛)’라 말한 것처럼 이러한 체험은 예술가의 창조적 계기로 전환된다. 작가 황선화도 이러한 초월의 여정에 동참하며 자신만의 절실하면서도 은밀한 사랑의 감정을 승화시켜 꽃과 나비의 만남 등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무의식 속에서 피어난 이러한 에로스적 동경은 작품 창작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꽃과 나비에 대한 감정이입과 감성적 일체화를 통해 물아일체나 해탈 또는 자유로운 영혼의 해방감을 만끽하며 카타르시스의 상태에 도달하기도 한다. 다양한 색깔과 몸짓의 나비는 작가의 내적 감정과 영혼의 파장과 진동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색채와 현대적 조형감각을 통한 자유로운 구성은 초월을 거치며 한층 승화된 절대자유와 대립과 갈등을 극복한 화해를 이룩하기 위한 자기치유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능소화와 나비의 만남을 통한 사랑에 대한 메시지는 작가의 인생에 대한 성찰과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작가에게 나비는 인연에 따른 운명에 순응하면서 맑고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관조 속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작가는 이러한 심미적 승화와 초월의 여정을 통해 순수한 영혼의 욕구를 긍정하면서 주체와 객체, 대립과 갈등, 부분과 전체 등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 즉 장자의 물화(物化)에 해당하는 정신의 자유로운 해방을 느끼며 자기치유에 해당하는 카타르시스를 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작가 황선화가 작품 속에서 지향하는 유유자적할 수 있는 ‘유(遊)’의 세계는 자신이 추구하는 초월의 여정 속에서 만나는 사랑의 승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