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정봉기의 조각들, 꽃과 여인의 부드러움 혹은 아름다움_김종근(미술평론가)
꽃과 여인의 부드러움 혹은 아름다움 - 정봉기의 조각들
- 김종근(미술평론가)


“나는 춤추는 조각가이다, 춤을 춘다는 것은 나의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늘 춤을 추고 있으며 춤에 취해 생활한다.” 작가의 이 고백은 “예술가는 한 방울 한 방울 바위에 파고드는 물처럼 느리고 조용한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했던 조각가 로댕은 궁극적으로 예술가들이 생각하고 보는 아름다움은 모든 곳에 있다고 한 것과 일치한다. 그가 말한 모든 곳이란 아름다움이란 인간과 자연에 널리 퍼져 있음을 말하며 그 아름다움을 찾는일은 곧 영혼의 자유로움을 위한 행위 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조각가 정봉기는 그 모든 곳에 있는 아름다움을 그의 작업에 화두로 삼고 있는 듯 보인다.

인간과 자연에 관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춤추는 조각가 정봉기.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이태리 까라라 아카데미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충주에서 열정적인 돌 작업을 하고 있는 그는 수차례의 개인전을 통해 지속적으로 아름다움에 관한 탐색 작업을 보여 왔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에게 아름다움의 예술적 원천은 넓게 인간과 자연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소녀 혹은 여인과 꽃이다. 화가나 조각가에게 여인 혹은 소녀와 꽃이란 모티브가 보편적인 것이어서 아주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대상을 어떻게 표현 하는 가에 따라 모티브는 전혀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그 모티브 속에서 정봉기가 추구하는 것은 정겹고 귀여운 그러면서 때로는 익살스런 인상을 주는 소녀들을 묘사한다. 그렇다고 작가는 단지 익살스런 표정만을 붙잡아 두지 않는다. 길을 걷는 청순한 표정의 제스처, 예쁜 척 세련된 아름다움을 우아한 자태로 머리를 매만지는 지극히 여성적인 포오즈의 여인도 적지 않다. 꽃을 한 묶음 안고 있는 화사한 표정의 여인, 손을 한곳에 모으고 다소 촌스런 형태의 소녀, 목욕 후 몸을 감싸는 쑥스러운 그 모습들은 한 결 같이 포옹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그 풍경들은 우리의 가족 혹은 주변에서 쉽게 발견하는 형상들이다. 그러나 비록 이들의 모습이 다양하나 공통점은 소박하면서 약간은 앙증맞은 소녀들의 순수함이 있다. 즉 꽃과 어우러진 소녀, 단순하게 아름다운 꽃봉오리들이 터지듯 순수한 생명의 기운이 그가 즐겨 제작하는 하얀 대리석이나 투박하고 거친 한국의 화강암 돌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의 이런 작업에 흐름을 살펴보면, 2003년 소녀 시리즈를 시작으로 2005년에서 2007년 까지 꽃 시리즈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후 작가는 2008년에 들어서면서 여인과 꽃을 하나로 일체화 시키는 자신만의 고유한 형식을 만들어 낸다.
이런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 초기부터 그의 작품에는 돌 속에 청순한 소녀의 미를 부여하려는 내면의 여성적인 것에 대한 부드러움의 미에 대한 의지를 읽게 한다. 그 여성성은 대부분 화려하기 보다는 고요함으로, 분방하기보다는 평온함을 담고 있는 여인들로 “꽃”이라는 주제와 결합 되면서 새로운 여성미와 아름다운 형식을 창조하게 된다.

정봉기 작업에서 우리가 작가의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열정을 어렵지 않게 공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감상 할 때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밝은 거리를 산책하는 소녀처럼, 아름다운 꽃밭에 온 기분으로 꽃을 한 묶음 안은 여인의 환희의 표정과 행복감을 감상하거나 체험해야 할 것이다. 예술가에게 조각의 의미는 형태를 통하여 영혼의 울림과 가치에 대한 작가적 감성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찾아내어 투명한 영감의 세계를 보여주는 일이다. 이렇게 정봉기의 작품은 작가가 향유하고자 하는 감성을 소녀와 꽃이란 모티브로 정갈하게 다듬어 내면세계의 은은한 떨림의 세계로 우리들을 기쁜 마음으로 초대한다. 특히 꽃과 소녀가 하나가 되어 어우러진 그 행복한 표정은 마치 우리가 행복한 것처럼 따뜻한 감정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정봉기의 조각은 풍경일 때는 그 속에서 산책을 하고 싶어지는 그림, 여체를 그린 그림일 때는 그들을 껴안고 싶어지는 그림을 좋아한다. 고 한 르느아르처럼 여인들의 아름다운 탐미적 감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이런 탐미적 형식과 여인의 부드러운 감성을 가능케 한 배경과 영향에는 스승 조각가 윤영자에서부터 조각의 기본이라고 할 인체 묘사의 표현법을 철저하게 가리켜 온 카라라의 유학 생활로 보인다.

한국의 구상 조각을 이끌어온 많은 조각가들이 “에꼴 드 카라라” 즉, 카라라 학파라 부를 만큼 그들은 하나같이 인체 표현에 뛰어난 테크닉과 감성을 보여주었다. 그러기에 정봉기의 대리석에서 느껴지는 맑은 소녀와 여인의 향기, 거기다 꽃향기와 더불어 여인의 아름다움을 절대적인 단계로 격상 시키는 역량은 전적으로 그의 열정에 덕분이다. 다만 그의 작품에 지나친 탐미성이 보다 독특한 형식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단조로운 형식으로 남아 있는듯한 인상은 한번 쯤 새겨 볼 만하다. 페르난도 보테로의 회화와 조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인기와 예술성을 평가 받는 것은 쉬운 언어로 펑퍼짐한 인체 표현의 독특한 양식, 유머와 위트가 곁들인 스토리 , 감각적인 형태의 부드러움 때문이다.

그래서 정봉기에게 보테로의 예술세계는 하나의 등대 같은 이정표로 새겨두는 것도 무익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의 이미지를 끌어내는 인체에 대한 부드러운 접근 , 여성적인 감정의 섬세함 , 그 감정을 빚어내는 은근한 기교. 영혼의 자유로움을 위해 춤을 추는 정봉기의 돌을 향한 손 힘이 살아있지 않는가?
자연주의 철학을 지향하는 탐미적인 조형세계_신항섭(미술평론가)
정봉기의 자연석 조각
자연주의 철학을 지향하는 탐미적인 조형세계
- 신항섭(미술평론가)

일반적으로 돌조각은 채석장에서 채취한 대리석이나 화강석 그리고 오석이 이용된다. 수억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를 바위산에 깊이 숨어 있다가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돌의 역사는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더구나 그 돌덩이를 떼어내고, 깎아내고, 다듬어서 형태를 부여하는 돌조각의 스토리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캄캄한 어둠의 세상에서 나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형성이라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야말로 감격적이고 경이로운 일이다.
정봉기는 돌로 작업하는 조각가이다. 순정한 돌조각가인 것이다. 지구가 현재의 지각을 형성하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껏 캄캄한 침묵 속에 갇혀 있었던 돌에 인체의 형상을 부여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일을 한다. 그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는 돌은 처음 돌이라는 재질로 굳어졌을 때부터 어둠으로부터 탈출하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조각가를 만나는 행운과 조우했을 리 없다. 그는 어둠으로부터 탈출하겠다는 돌의 열망에 감응하여 인체라는 형상으로 재탄생시킨다. 그러고 보면 그가 선택해 인물형상을 부여받는 돌은 기적의 주인공인 셈이다. 
돌조각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 역시 초기에는 채석장에서 구입한 대리석이나 화강석 또는 오석을 이용했다. 채석장에서 캐낸 품질 좋은, 또는 자신이 구상하는 작품에 적합한 돌을 선별해 작업했다. 돌은 어떤 형태로든지 하자가 있기 마련이어서 이를 피해 돌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리석일지라도 크기가 커지면 완벽한 균질의 품질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는 품질 좋은 돌만을 선택하는 방식을 지양, 채석장에서 가공하고 남겨지는 자투리 돌을 이용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적어도 갈라지는 염려가 없다면 어떤 돌이라도 괜찮다는 입장이었다. 돌의 모양이나 크기 그리고 재질이 무엇이든지 거기에 맞는 형상을 찾아내면 된다는 식이다.
2000년대 중반 이탈리아 까라라 국립아카데미 유학시절 대리석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다양한 재질 및 색깔을 가진 대리석의 물성을 공부하고 익히면서 돌에 대해 좀더 심층적인 이해가 가능해졌다. 그러고 나서 돌과 조각에 대한 철학적인 사고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 어떤 형태 및 재질의 돌이든지 조각가의 재능이나 철학적인 이해를 통해 전혀 다른 의미의 돌로 재탄생한다. 바꾸어 말해 그는 어떤 돌이든 간에 신성이 깃들이지 않은 돌은 없다는 범신론적인 시각으로 세상과 마주했다. 어느 돌이나 고유의 가치와 용도가 있게 마련이고, 이를 찾아내는 것은 순전히 조각가에게 주어진 미적 감각이자 소명이다. 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 오로지 용도만을 전제로 돌을 선택해서는 돌조각로서의 진정성을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근래에는 이와 같은 돌에 대한 자신의 신뢰와 진정성을 구체화시키기라도 하듯 채석작의 돌이 아닌 자연석을 이용하고 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거나, 개울 속에 박혀 있거나 또는 땅 속에 묻혀있던 돌멩이를 이용한다. 특별한 목적의 작품이 아니면 애써 채석장을 기웃거릴 일도 없이 가까운 곳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을 찾아나선다. 이는 조각에 대한 이제까지의 지식이나 관념의 벽을 허무는 일이다. 인위적으로 가공하지 않은, 자연이 내어준 돌에서 형상을 찾아낸다는 발상이야말로 자연과의 합작의 단초가 된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돌에 조형적인 기술을 이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그 어떤 형상에 대한 기대는 자연주의 철학을 실천하는 일이다. 자연에 이미 존재하는 돌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그로부터 구체적인 인물 형상을 찾아내는 과정이 그의 돌조각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자 진실이며 철학이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근래 작업은 대다수가 높이 50cm를 넘지 않는 소품에 국한한다. 물론 대작의 경우에도 자연석을 이용하는 일이 더러 있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대체로 그 자신의 신체적인 힘으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크기와 무게를 넘지 않는 규격에 자족한다. 이처럼 제한적인 크기에 순응하는 자연석 조각은 그 자신에게는 새로운 조형적인 개념 및 이념의 실현이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다는 것은 이미 조각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돌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이는 자연과의 합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이 주로 자연석을 가져다가 쓰는 그의 작품은 채석장의 돌과는 달리 하나하나가 고유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오랜 시간 자연에 노출된 채 햇빛과 바람과 눈과 얼음 그리고 흙이나 부엽토 등의 자연현상에 의한 풍화작용을 그치는 동안, 이런저런 물이 배어들어 고유의 색깔을 갖게 된다. 또한 수마로 인해 각이 없어진 몽돌과 같은 모양의 원석은 그 돌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을 환기시킨다. 자연석이기 전에 오랜 세월 자연의 섭리에 의해 그 모양이 서서히 바뀌면서 몽돌과 같은 형태가 되기에 그렇다.
예술행위 가운데서도 가장 원초적인 재료 및 기법으로 작업하는 돌조각이야말로 인위성의 개입을 최소화한 원시적인 예술이나 다름없다. 원시조각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물인 돌이나 나무를 그대로 활용했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자연미라는 원형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재료적인 순수성을 살려 작업하려는 태도는 자연주의 철학과 상통한다. 자연석을 이용한 작품은 돌 자체의 본래적인 형태가 인물 형상과 만났을 때 그 돌이 가지고 있던 자연미가 보다 더 확연히 드러난다. 돌 자체로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자연미가 조형행위의 개입으로 인해 더욱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돌을 찾아내고 그 돌의 형상에 맞는 인체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이미 예술행위이다. 이때 자신의 작업에 적합한 돌을 찾아내는 과정은 자연과의 교감을 의미한다. 우연히 지나치다가 예술가적인 본능으로 조각의 재료임을 단박에 알아채는 수도 있다. 조각에 적합한 돌을 찾는 일은 의식적인 행위이고, 이를 통해 선택된 돌은 이미 그의 심미적인 관점을 통과하는 일이다. 이렇게 선택된 돌을 가져다 놓고 이러저리 살피며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그 돌에 딱 맞는 형상, 즉 인물상을 구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구상했던 형상을 곧바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돌에서 어떤 형상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의 자연석 조각은 환조와 부조 두 종류로 나뉘는데, 돌의 모양에 따라 결정된다. 가령 등 그런 형태의 자연석은 환조가 될 가능성이 높고, 납작한 모양의 자연석이면 부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그 형태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가운데 인물형상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는 자연과의 합작이라는 방식인 셈인데, 이러한 작가적인 태도는 자연주의 철학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는 작업을 구상하기 전에 자연석 하나를 놓고 요리저리 뜯어보며 자신의 손에까지 이르게 된 시간 및 공간적인 역사를 상상한다. 우연이 아니라 어떤 필연에 의해 즉, 인연에 의해 맺어진 관계임을 의식하면서 그 자연석에게 새겨지는 형상을 떠올리게 된다. 자연석과의 정신 및 감정의 교감을 통해 조형적인 영감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절차는 일종의 의식과 같은 것이어서 이 과정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자연에게서 받은 돌 하나에 이미 아주 오래넞ㄴ에 점지된 운명적인 형상을 찾아주려는 의식인 셈이다.

그가 만든 자연석 조각 하나하나를 찬찬히 뜯어보면 즉흥적인 형상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뇌와 고뇌를 거듭하면서 짜낸, 혹은 순간적인 영감에 의한 최적의 형상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돌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음각의 선으로만 형상을 새기는 회화적인 기법을 응용하기도 한다. 이런 작품의 경우에는 자연석이 가지고 있는 그 형태적인 아름다움에 손을 댈 수 없다는 겸허함과 자연미에 대한 순명의 감정이 깔려 있다. 이러한 작가적인 태도야말로 자연주의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명확한 입장 표명이다.
자연석 작업은 여인상과 소녀상과 미륵상이라는 세 가지의 제재로 작업한다. 여인상은 마리아상, 선덕여왕상 등 일련의 역사적인 인물상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미륵상은 아기미륵상, 동자미륵상, 소녀미륵상, 소년미륵상, 여인미륵상 등으로 세분화된다. 이 가운데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상은 석가모니가 열반한 이후에 오는, 내세에 중생을 구제한다는 보살의 형상화이다. 이미 적지 않은 불교유적 및 현존 미륵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륵은 일테면 미래불이어서, 조각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상의 여지가 많다. 기존의 불교조각에서 구현한 미륵상이 있기는 하지만, 누구도 본 일이 없는 마음속의 존재이기에 작가적인 상상의 공간이 넓다.
정작 그 자신은 카톨릭 신자임에도 미륵불상에 유독 관심이 깊은 것은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보물 제96호 석조여래불상>과 무관하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이 미륵불상이 그의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가 자연석을 다루면서 불현 듯 튀어나오게 되었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10여 미터에 달하는 입상인 이 미륵불의 간결하고 단아한 모습에서 그 자신이 추구하는 미륵불의 지향점을 찾게 된 것이지 싶다.
그의 미륵불은 자연에서 만들어진 본래의 형태를 가능한한 그대로 유지한 채 환조와 부조 그리고 음각형식으로 제작된다. 2020년 <아기미륵>의 경우, 길쭉한 돌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얕게 파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로서의 자애로운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그 자애로움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현현임은 말한 나위도 없다. 자연적인 돌의 형태에 숨겨져 있던 미륵불이 수줍은 듯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팔다리가 없이 몸통과 두상이 전부인, 지극히 간소한 형태미를 가진 이 작품은 자연주의 철학의 상징성을 고루 구비하고 있다.

자연석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형상을 찾아들어가는 그의 조형방식은 궁극적으로 탐미적인 시선을 따라가는데 집중된다. 여인이나 소녀, 즉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작품은 일단 시각적으로 아름답다. 여기에서 말하는 여성의 아룸다움이란 이른바 미녀라는 개념, 즉 수려한 이목구비의 여성이라는 의미와는 좀 다르다. 일테면 자연미와도 일치하는 개념으로써, 순수한 형태미이면서도 그 자신의 미적인 감각에 의해 재해석된 조형미를 말한다.
비정형의 미가 있듯이 정확한 베례를 가진 미라기보다는 어딘가는 비뚤어지거나 모자란 듯 싶은 가운데서도 전체상으로 볼 때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우아한 미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전형적인 미인상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탐미적인 시각을 충족시키는 조형미를 탐색한다. 여기에는 세부를 장악하는 순도 높은 기술적인 세련미가 수반되고 있다. 거기에다 타고난 미적 감각과 선한 천성 그리고 지극한 아름다움을 탐하는 예술가로서의 열정이 함께 빚어낸 아룸다움인 것이다.
자연석 작품의 경우 피부를 연마하지 않는 것도 이와 연관성이 있다. 정으로 수없이 쪼아 매끄럽게 보이도록 함으로써 그 세부에 정착된 질감과 양감이 지어내는 아룸다움을 간파하는 것은 탐미의 즐거움이다. 실제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정 자국에는 그늘이 스민다. 정 자국에 의한 아주 미세한 요철이 피부를 형성하고, 거기에 음영이 깃들이면서 미묘한 표정이 생기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탐미적인 시각을 유혹하는 심미표현이다. 달리 보면 그 음영이 깃든 피부의 표정이야말로 작가가 탐색해낸 조형미의 핵심일 수도 있다. 실제로 여인상이나 소녀상 등 일련의 작품들은 연마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 피부가 곱게 느껴진다. 매끄럽다거나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이미지의 순정한 아름다움이다.
그의 자연석 조각은 등신대의 비례보다 크기가 작다. 작은 크기는 실제의 크기보다는 귀엽다는 느낌이 든다. 두상이든 흉상이든 또는 전신상이든 작은 크기의 돌로 만들어지기에 한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이처럼 작은 크기의 그의 돌조각은 심미표현에 유리하다. 더구나 기술을 집약시킬 수 있어 감정의 흐름까지 놓치니 않고 표현할 수 있다. 어쩌면 자연석 돌조각은 그 자신의 섬세한 감정선을 고스란히 담아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모른다. 눈에 보이는 사실 너머의 내면세계를 투영시키려는 것이다. 작품과 마주하면서 무언가 시각적인 이미지 안쪽을 들여다보려 고심한다면, 그가 작품 속에 숨겨놓은 미세한 감정의 떨림을 감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정봉기의 조각_연극 배우 마리아 테레사 텔라라
정봉기의 조각
조각가 정봉기는 몇 해 전에 우리 작업실에 손님으로 왔었다. 이곳은 조각가들이 대리석 산업의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조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여기서 정봉기는 매일매일 거대한 덩어리들을 찍어내고 남은 대리석 조각들과 굴러다니는 조각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작업을 한다. 선택되지 않은 대리석 이지만 예술가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볼 줄 아는 조각가에게는 소중한 재료인 것이다. 정봉기는 산업 기계가 공격적으로 훝고 지나간 아직은 무형의 그 물체를 바라보고 매만진다. 그리고 자신의 조각적 연장을 이용하여 아무도 건들이지 않은 자연의 분명성과 사람에 의해 인공적으로 여기 저기 잘라지는 우연성 사이에 생겨나는 사잇길을 따라 간다.그의 손을 통해 어린 소녀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최근의 작품에서처럼 가날푼 꽃 봉우리들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어떤 작품에선 정봉기의 관심은 생성과정, 형상화 과정의 순간을 포착하여 출발점이 명확하고 신선한 흔적이 계속 남아 있도록 하는데 있다. 순간에 불과한 그 생명의 운동 단계들을 단단한 돌 속에 그때 그때 고정 시키는것 . 기계가 물질에 가한 파계성 으로부터 정봉기는 늘 익살스런 몸짓과 태도를 창조해 낸다. 익살은 그의 정형숫자인 것처럼 보이는 반면 비극은 그의 조각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어쩌면 비극도 존재하는데 결국은 그의 고단수적 유희에 밀려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선택되지 않은 돌들이 예술 작품과 생명이 되는 순간을 향한 정봉기의 지칠줄 모르는 작업 여정을 한 단계 한 단계 좇아 가는건 우리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는 하나의 선물이다. 받을때 마다 우리를 놀래키고 즐겁게 해주는 선물 말이다.
전 :연극 배우 마리아 테레사 텔라라
정봉기의 조각들, 돌 속의 부드러움 혹은 아름다움_김종근 (미술평론가)
돌 속의 부드러움 혹은 아름다움 - 정봉기의 조각들


“예술가는 한 방울 한 방울 바위에 파고드는 물처럼 느리고 조용한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했던 조각가 로댕은 아름다움은 모든 곳에 있다고도 했다. 그가 말한 모든 곳이란 아름다움이란 인간과 자연으로 우리들 이웃과 가까이 있음을 말한다.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조각가 정봉기는 그 모든 곳에 있는 아름다움을 그의 작업에 화두로 삼고 있다. 돌 속에 인간과 자연에 관한 아름다움을 새기며 노래하는 작가 정봉기. 그는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이태리 까라라 아카데미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충주에서 열정적인 돌 작업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그는 수차례의 개인전을 통해 지속적으로 여인의 아름다움에 관한 탐색 작업을 보여 왔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에게 아름다움의 예술적 원천은 넓게 인간과 자연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처녀 혹은 여인과 꽃이다. 화가나 조각가에게 여인과 꽃이란 모티브가 보편적인 것이어서 아주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대상을 어떻게 표현 하는 가에 따라 모티브는 전혀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그 모티브 속에서 정봉기가 추구하는 것은 정겹고 귀여운 그러면서 때로는 익살스런 인상을 주는 처녀들을 묘사한다. 그렇다고 작가는 단지 익살스런 표정만을 붙잡아 두지 않는다. 길을 걷는 청순한 표정의 제스처가 있는가하면, 예쁜 척 세련된 아름다움을 우아한 자태로 머리를 매만지는 지극히 여성적인 포즈의 여인도 있다. 꽃을 한 묶음 안고 있는 행복한 표정의 여인, 손을 한곳에 모으고 촌스런 자세를 보이는 소녀 등 그 모습들은 한결같이 포옹하고 싶을 정도로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그 여인들의  차림은 우리의 누나이거나 동생이거나 쉽게 발견하는 친근감을 주고 있다. 비록 이들의 모습이 다양하나 공통점은 소박하면서 약간은 앙증맞은 소녀들의 순수함과 친근감이 있다. 즉 꽃과 어우러진 소녀, 단순하게 아름다운 꽃봉오리들이 터지듯 순수한 생명의 기운이 하얀 대리석이나 화강암의 돌 속에서 너무나도 가깝게 되살아난다는 점이다.   

그의 이런 작업에 흐름을 살펴보면, 2003년에는 소녀 시리즈를 시작으로, 2005년에서 2007년 까지 꽃 시리즈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후 작가는 2008년에 들어서면서 여인과 꽃을 하나로 일체화 시키는  자신만의 고유한 형식을 만들어 내 현재에 이른다. 이런 성향으로 볼 때 작업 초기부터 그는 돌 속에 청순한 소녀의 미를 부여하려는 내면의 여자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운 미에 대한 표현의지를 읽게 한다. 그 여성성은 대부분 화려하기 보다는 고요함으로, 분방하기 보다는 평온함을 지닌 여인들로   “꽃”이라는 주제와 결합 되면서 정봉기만의 여성미와 아름다운 형식을 창조하게 된다. 정봉기 작업에서 우리가 작가의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열정을 어렵지 않게 공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감상 할 때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밝은 거리를 산책하는 소녀처럼, 아름다운 꽃밭에 온 기분으로 꽃을 한 묶음 안은 여인의 환희의 표정과 행복감을 감상하거나 체험해야 한다. 조각가의 의무는 형태를 통하여 영혼의 울림과 가치에 대한 작가적 감성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찾아내어 투명한 영감의 세계를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작가는 그러한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성실한 작가이다. 그의 어느 작품을 보더라도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성을 이렇게 매력적인 모티브로 정갈하게 다듬어 내면의 은은한 떨림으로 우리들을 초대하는 작가도 흔치 않다. 특히 꽃과 소녀가 하나가 되어 어우러진 그 행복한 표정은 마치 우리가 행복한 것처럼 벅찬 감정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정봉기의 조각은 '풍경일 때는 그 속에서 산책을 하고 싶어지는 그림, 여체를 그린 그림일 때는 그들을 껴안고 싶어지는 그림을 좋아한다.' 고 한 르느아르처럼 여인들의 아름다운 탐미적 감성을 그대로 닮아 있다.  

그가 이런 탐미적 형식과 여인의 부드러운 감성을 가능케 한 배경과 영향에는 대학시절과 조각의 기본이라고 할 인체 묘사의 표현법을 철저하게 배워온 카라라의 유학 생활 때문 일 것이다. 한국의 구상 조각을 이끌어온 많은 조각가들이 “ 에꼴 드 카라라 ” 즉 카라라 학파라 부를 만큼 그들은 하나같이 인체 표현에 뛰어난 테크닉과 감성을 보여 준 점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러기에 정봉기의 대리석에서 느껴지는 맑은 소녀와 여인의 향기, 거기다 꽃향기와 더불어 여인의 아름다움을 절대적인 단계로 격상 시키는 역량이야말로 그가 지닌 한국 구상조각의 비전이다. 간혹 지나친 탐미성이 보다 독특한 형식의 구축에 있어 단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탄탄한 구상력과 표현력에 비추어 볼 때 능히 그러한 과제를 넘을 수 있는 기대 할 만한 작가이다. 페르난도 보테로의 회화와 조각이 폭발적인 인기와 예술성을 평가 받는 것은 쉬운 언어로 펑퍼짐한 인체 표현의 독특한 양식, 유머와 위트가 곁들인 스토리, 감각적인 형태의 부드러움 때문이다. 아마도 정봉기에게 보테로의 예술세계는 하나의 등대 같은 이정표로 새겨두는 것도 무익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의 이미지를 끌어내는 인체에 대한 부드러운 접근, 여성적인 감정의 섬세함, 그 감정을 빚어내는 은근한 기교 등이 정봉기의 작품에 담겨 있어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것이다.

김종근 (미술평론가. 아트 앤 컬렉터 발행인)

정봉기의 조각_삐에로죠르지오 발로끼, 까라라 국립 미술 아카데미 조각과 교수
정봉기의조각
정봉기 의 조각이
내게 제공한 이 경이로운 기회를 빌려 나는 이 소개의 글이 무엇보다도
내가 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존경과 우정의 증언 이였으면 하고...,
그다음으로는 정봉기의 작업에 대해 보내는 깊은 찬사의 표시이기를 바라는 바이다.

정봉기는 이미 여러해 전부터 세련대고 우아한 작품을 조각하는데 전념을 하는 수준 높은 조각가이자 심오하고 정교한 예술가로서, 대리석의 현대조각에서는 보기 힘든 한 주류의 여정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몇 해  전 정봉기를 알게 된 이래, 그동안 까라라의 가장 흥미로운 조각가들만을 초대해서 작업하도록 하는 테라사의 작업실에서 나는 “그의 곁에서” 작업할 기회를 여러 번 가졌다. 주의 깊고 성실한 이 예술가 바로 옆에서 작업하는 건 내게 큰 즐거움 이였는데, 그 는 서적 형상에 집중하면서도 또한 형상 내포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연구로 끊임없이 우리를 놀레키기 때문 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꽃과 소녀들” 이라고 이름 붙여진 일련의 작업들을 보면, 주체의 심미적 자기 성찰이 섬세하게 다듬어진 대리석에서 확연히 드러나 있다. 그가 주는 색깔의 변화(또는 표면의 바이레이션)에서 오는 아주 미세한 떨림 하나로, 순수하고 아름답기만 한듯 한 그 소녀들이 돌연 두려움을 불러 일르키는 소녀들로 돌변하고 그래서 차분하게 생각하게끔 함으로써, 정봉기는 소녀성에 대한 복합적인 시를 짓는데 성공한다. 반면 “꽃”이란 주제의 새로운 작업들에서는 대리석을 다루는 그의 기술적 엄격함이 모든 형식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가면서 극단적 음악성을 지닌 작업들을 창조해 낸다. 작곡이 서정이 감상의 기쁨에 열리고 완벽한 자유와 기쁨 속에서 살아본 하나의 조각의 현명하고도 해탈한 관념성이 열리고 있다. 그뿐 아니라 정봉기의 작업에는 아주 세밀한 주의력 과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다가가야 한다. 그의 작품들을 감상 하려면 아주 사랑스러우면서도 은근히 걱정시키는 일련의 소녀들을 관찰하듯, 그리고 대리석에 반사된 하얗고도 푸른 까라라의 하늘의 햋빛에 봉우리가 열리는 꽃밭을 감상하듯이 해야 한다
조각가로서 정봉기에 대한 나의 찬미와 인간 정봉기에 대한 나의 우정과 존경 덕분에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이글을 썼다.
삐에로죠르지오 발로끼, 까라라 국립 미술 아카데미 조각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