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일자로부터 순환하는 ‘변형의 공간’_김성호(미술평론가)
일자로부터 순환하는 ‘변형의 공간’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작가 전용환의 작업은 알루미늄 재료를 드로잉처럼 자유롭게 다룬 ‘회화적 조각’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그의 작업은 대략 두 가지의 연작으로 진행되어 왔는데 하나는 ‘트랜스포밍 사이클스(Transforming Cylcles)’이고 또 하나는 ‘공간-하나로부터(Space-From the one)’이다. 두 연작의 제목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듯이, 그의 작업은 ‘변형, 순환’의 조각 형식과 더불어 ‘하나로부터 시작해서 순환하는 공간 변주’라는 내용을 함유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I. 순환 속 변형 - 트랜스포밍 사이클스(Transforming Cycles)
이 연작은 트랜스포밍(transforming)과 사이클스(cycles)라고 하는 키워드의 결합을 통해서 ‘사이클 변형하기’, ‘변형적 순환’, ‘변형 순환’과 같은 의미를 우리에게 전한다. 여기서 사이클은 ‘주기, 주파수, 회로’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전용환의 작품에서는 ‘순환(循環)’이라는 의미를 표방한다. 대개 순환이란 “주기적으로 자꾸 되풀이하여 돎, 또는 그런 과정”을 가리킨다. 즉 순환은 ‘반복과 실행’이라는 뜻을 함유하는 용어라고 하겠다. 이것은 ‘사계절의 순환’과 같은 용어의 쓰임새처럼, ‘하나의 고리 안에서 일정한 변화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일’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돌출적 변화와 변혁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런데 작가 전용환은 ‘변형(환, 혁)하기, 변형(환, 혁)적’이라는 의미를 지칭하는 ‘트랜스포밍’이라는 동명사를 사용해서, 태생적으로 ‘잔잔한 순환의 과정’을 흩뜨린다. 여기에는 하나의 고리가 지닌 궤도를 이탈하는 복수의 고리를 상정한다. 즉 트랜스포밍은 우리에게 주류가 지향하는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튕겨 나오는 비주류의 탈주 혹은 다수의 암묵적 동의를 배신하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실험 정신과 실천 등을 상기하게 만든다.  
유념할 것은 전용환의 작품에서 궤도를 탈주하는 복수의 고리는 결국 하나의 고리 안에 다시 모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트랜스포밍 사이클스의 의미를 더욱 더 정확히 표현하면 ‘탈주를 감행하는 복수의 고리를 품은 하나의 고리’라고 하겠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메타포(metaphor)이다. 순환이라고 하는 거시적인 하나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미시적인 트랜스포밍의 과정, 그 자체가 작가 전용환의 작업인 까닭이다. 
이제, 트랜스포밍 사이클스 연작을 꼼꼼하게 살펴보자. 
이 연작은 가볍고도 유연한 알루미늄 선재(線材)를 사용해서 얼키설키 뒤엉킨 형상을 만들어, 볼륨(volume)을 키우면서도 매스(mass)를 덜어낸 가벼운 조각이자, 부드러운 조각이라 할 만하다. 외견상, 마치 커다란 실타래에서 풀려 나오다 엉킨 형국처럼 보이는 이 연작은 실제로는 작가 전용환이 거시적이고도 일정한 조형적 규칙을 처음부터 마련하고 그 바탕 위에서 미시적인 변주를 실행한 것이다. 즉 조각 중심부는 일정한 순환 운동을 보여주는 조형과 색의 패턴으로 정렬하고, 조각 주변부는 이러한 순환적 패턴을 이지러뜨리고 튕겨 나가는 선묘들의 자유로운 탈주를 구성한 것이다. 
조각 중심부의 화려한 색상의 스펙트럼과 같은 순차적인 배열과 맞물려 군데군데 눈에 띄는 저마다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화살표의 형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들은 ‘개별체들의 운동이란 근본적으로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연결되고 이어지는 순환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웅변한다. 즉 전용환의 트랜스포밍 사이클스 연작은 순환이라고 하는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을 깨트리고 튕겨 나가는 개별체들의 ‘잔망한 반항적 움직임’을 용인하고 지켜보면서, 그들을 끝내 내치지 않고 그들의 탈주의 움직임을 다시 ‘거대한 순환의 품 안’에 껴안는 작업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트랜스포밍 사이클스 연작은 ‘거시적 순환 속 미시적 변형’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성찰하는 조형 실험이라 하겠다. 

II. 구조의 변주 – 일원론적 해체 
일견 그의 조각은 뒤엉킨 실타래의 이미지처럼 보인다. 볼륨과 매스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조각의 문법을 깨트린 해체주의적 조각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이 부조이든 환조이든 해체주의적 양상은 동일하다.
유념할 것은 그의 해체주의적 조각이 하나의 구조로부터 견인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작가 노트에서 자신의 ‘트랜스포밍 사이클스’ 연작이 “단백질 구조를 모티브로 조형화한 작품”이라고 기술하고 있듯이, 그 하나의 구조란 ‘단백질 구조’와 같은 것이다. 단백질이란 “세포를 구성하고 생체 내 물질대사의 촉매 작용을 하며 생명 현상을 유지하는 물질로서 탄수화물, 지방과 함께 사람의 3대 영양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 단백질은 여러 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펩타이드 결합(peptide bond)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전용환의 트랜스포밍 사이클스 연작은 엄밀히 말하면, ’단백질 구조를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단백질 구조를 모티프로 자신의 조각을 구조화시킨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단백질 구조란 어떠한 형상인가? 단백질을 만드는 ’펩타이드 결합‘이란, 축합 아마이드 결합(amide linkage)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20종의 아미노산이 개별 축들을 연결하여 만들어진 폴리펩타이드(polypeptide)라 불리는 사슬 구조를 칭한다. 사실 폴리펩타이드와 단백질은 같은 말이지만, 보통 분자량이 크면 단백질이라 불리고 분자량이 비교적 작으면 폴리펩타이드로 불린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단백질 구조란 단순히 말해 ‘사슬 구조로부터 출발하여 연쇄적으로 변형된 구조’라 하겠다.    
단백질의 무수한 종류는 아미노산의 배열 순서에 따라 1, 2, 3, 4차의 구조를 통해 형성된다. 이러한 점층적 구조를 언어로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아미노산이 펩타이드 결합으로 연결되어 폴리펩타이드를 구성하는 사슬 모양(1차 구조) → 아미노산 사이의 작용으로 나선형(α 나선 구조) 또는 병풍(ß 병풍 구조)처럼 접히는 모양(2차 구조) → 2차 구조의 폴리펩타이드가 구부러지거나 접혀서 랜덤 코일(random coil)과 같은 입체 구조를 형성한 모양(3차 구조) → 입체 구조를 형성한 폴리펩타이드가 2개 이상 모여 복합체를 형성한 모양(4차 구조).” 
이처럼 단백질의 구조가 드러내는 점층적 양상은 흥미롭게도 작가 전용환의 ‘트랜스포밍 사이클스’ 연작의 창작 과정을 닮아 있다. 선재가 또 다른 선재와 이어짐(1차원) → 선들이 정렬을 이루면서 하나의 면을 형성(2차원) →면들이 구겨지거나 접히면서 만드는 부조나 환조의 입체(3차원) → 입체의 구조를 탈주하는 선들이 해체적 양상을 선보이면서도 이내 입체의 운동성 안으로 내포되는 구조(3차원 변형)로 마무리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3차원 변형’을 “공간 안의 물체나 이미지의 변형, 이동, 크기 변화, 회전” 등을 가리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의 작업은 ‘실제적 움직임(mouvement réel)’을 끌어들이는 키네틱 아트는 아니지만, 정지된 상태로 운동성을 내포한 ‘잠재적 움직임(mouvement virtuel)’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히 ‘3차원 변형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마치 ‘점 →  선 → 면 → 입체’로 확장하는 조형 예술의 기초 요소와 매체의 의미론을 곱씹게 만든다.
전용환의 트랜스포밍 사이클스 연작은 자유분방한 해체주의적 조각처럼 보이는 형상을 지니면서도 흔히 사슬 구조라 칭해지는 ‘하나’의 단백질 구조로부터 출발하고 그 ‘하나’ 안에 모든 것을 포섭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원론적 해체주의 조각’이라고 할 만하다. 더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이원론을 허물어뜨리는 해체주의 조각’이기보다 하나의 구조 안에서 벌이는 ‘끊임없는 구조적 변주의 조각이자, 일원론적 해체주의 조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III. 공간 – 하나로부터(Space - From the one) 
작가 전용환의 또 다른 연작인 ‘공간-하나로부터(Space - From the one)’는 ‘트랜스포밍 사이클스’ 연작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연작에서는 트랜스포밍 사이클스 연작에서의 조형 미학과 사뭇 달라 보이는 사과의 형상이 주목을 끌고 있다는 점이다. 추상 대 구상이라는 대비적 조형이 이러한 연작의 일관적인 주제 의식에 대한 가독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 두 연작은 ‘한 몸의 다른 표정’이라고 평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한 몸이라니? ‘트랜스포밍 사이클스’ 연작이 점 → 선 → 면 → 입체와 같은 조형 요소의 전개와 유사한 하나의 구조(1 → 2 → 3 → 4차로 점층적 변주를 실행하는 하나의 단백질 구조)를 통해서 발현된다면, ‘공간-하나로부터’ 연작은 평면과 입체, 안과 밖, 처음과 끝이 연결되는 ‘뫼비우스 띠(Möbius strip)’와 같은 하나의 구조를 통해서 실현된다. ‘단백질 구조’와 ‘뫼비우스 띠 구조’와 같은 ‘하나’로부터 야기되는 다양성의 표정인 셈이다. 
여기서 ‘하나’라는 일자(一者)의 미학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전개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계승한 플로티노스(Plotinos)의 철학과 같은 일자로부터 기원하는 유출론처럼 그것은 무(無)로부터의 생성이 아닌 유(有)로부터의 생성이되, 필히 ‘근원적 하나’인 ‘일자’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전용환의 ‘공간-하나로부터’ 연작에서 등장하는 사과는 일자에 관한 하나의 메타포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 속 사과는 마치 아담 이후로 인간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던 기독교 신화의 선악과처럼 보이지 않는가? 죄악의 시작이자 인간사의 시작을 알린 선악과는 ‘하나’에 관한 메타포이다. 야훼라는 일자에 대항하면서 생긴 인간의 죄악, 그것은 선악과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사과는 신화의 시대를 여는 인간사에 있어 ‘하나에 관한 메타포’가 된다. 
전용환의 작품에서 이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일자의 미학’은 내용상으로는 사과와 같은 메타포 혹은 상징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조형적으로는 ‘평면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다음처럼 기술한다: “공간-하나로부터라는 주제는 하나의 평면인 공간을 입체화시켜 뫼비우스의 띠처럼 겉과 속이 따로 구분 없이 연결되는 개념을 이용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상으로 표현한 작업이다.” 여기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상’이란 ‘사과’와 같은 구상적 이미지로 대별되지만, 그 외에도 한 평면으로부터 입체로 전환되는 추상적 형식을 포함한다. 
구상이든 추상이든 선재로 용접해 이어붙인 것처럼 보이는 작업은 실제로 ‘하나’의 평면으로부터 오려내어진 것이다. 풀어 말해, 사과와 같은 구상 혹은 불특정의 추상으로 만들어진 그의 3차원 조각은 하나의 2차원 평면이 자신의 몸을 변주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인 셈이다. 따라서 전용환의 3차원 조각은 마치 뫼비우스 띠처럼 ‘2차원 다양체(two dimensions manifold)’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앞서 그의 ‘트랜스포밍 사이클스’ 연작을 ‘3차원 변형’, 즉 “공간 안의 물체나 이미지의 변형, 이동, 크기 변화, 회전”을 품은 조각이라 정리한 바 있다. 그런데 2차원 다양체라니? 다양체가 무엇인가? “집합체 또는 의공간(擬空間, pseudo-space)이라고도 지칭되는 다양체는 기하학적인 유추를 통하여 4차원 이상의 공간을 연구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다양체는 점, 직선, 평면, 원, 삼각형, 입체, 구(球)와 같은 기하학적 도형의 집합을 1개의 공간으로 보았을 때의 공간을 말한다.” 즉 곡면이 가진 위상적 성질을 추상해서 다양체의 개념을 형성하는데, ‘곡선’은 1차원 다양체, ‘공간 속 곡면이나 평면’은 2차원 다양체라 부른다. 그것은 평면을 한번 비틀어 앞면과 뒷면을 연결하여 하나의 면과 하나의 모서리만을 갖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전용환의 ‘공간 – 하나로부터’ 연작의 제목처럼 ‘하나의 평면으로부터 지속하는 공간’이자, ‘앞면과 뒷면의 구분이 없는 공간 속 평면’인 것이다. 

IV. 접힘과 펼침 – 바로크 주름으로부터  
작가 전용환의 ‘공간 – 하나로부터’ 연작은 그의 말대로 “실제로 건축을 행하는 견고하고 구축적인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이 연작은 세 개의 실수의 조합(x, y, z)으로 표기되는 3차원 조각이 명확함에도, 2차원 다양체의 개념을 실현하는 3차원 조각이다. 따라서 그가 언급하는 ‘구축’은 구조주의적 사유의 결과물을 지칭하기보다 탈구조적 사유를 실천하는 사유의 과정 자체라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구상이든, 추상이든 하나의 평면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작업은 그의 말처럼 “구체적으로 원재료의 표면적을 계산하여 만들고자 하는 입체 작품의 표면적을 계산해 일치시키는 원리”를 준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공간 – 하나로부터’ 연작은 “표면적의 계산 값에 재료를 플라스마로 자연스럽게 절단, 조각내어 안과 밖의 조각을 각기 다른 만들고자 하는 형태에 용접해 형태를 만들어낸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에서 볼록의 선형 이미지가 오려 내어진 판 위에는 자연스럽게 투과체의 오목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이처럼 덜어낸 것과 남겨진 것이 쌍(雙)을 이룬 채 병치되고 있는 그의 공간 – 하나로부터’ 연작은, 볼록과 오목, 포지티브와 네거티브와 같은 대립의 요소들을 하나 안에 한꺼번에 끌어안는다. 즉 하나의 평면 공간으로부터 자라난 포지티브와 네거티브의 두 개의 ‘평면/공간’이 공존하는 ‘2차원 다양체’이자, 변화와 움직임을 내포한 ‘3차원 변형’인 것이다. ‘2차원 다양체’의 개념을 품은 전용환의 조각은 앞면이자 뒷면이며 평면이자 공간인 뫼비우스 띠와 같은 ‘하나의 평면으로부터 지속되는 공간’ 개념을 실천한다. 
전용환의 작업에서 하나의 평면으로부터 시작된 공간은 앞/뒤 그리고 시작/끝의 구분이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다. 뫼비우스 띠 혹은 2차원 다양체, 3차원 변형이란 것 말고 그의 작업을 들여다볼 또 다른 키워드는 무엇인가? 
우리는 전용환의 ‘공간 – 하나로부터’ 연작을 ‘바로크의 공간’이란 키워드로 읽고자 한다. ‘바로크의 공간’이란 하나의 평면이 공간 속에서 ‘접힘/펼침/다시 접힘’의 운동을 연쇄적으로 일으키는 곳이다 들뢰즈(G. Deleuze)는 이러한 바로크의 공간을 주름들(plis)의 연쇄적 운동으로 풀이한 바 있다.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성당인 피어첸하일리겐 성당(Vierzehnheiligen Pilgrim's Church)의 건축적 공간은 이러한 주름이라는 메타포를 현실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 성당에는 밀쳐진 커튼의 굴곡처럼 무수한 변곡이 연쇄한다. 성당 내부의 제단실, 회중석, 좌우 익랑이 서로의 공간을 잠식하면서 공유하면서 생기는 변곡의 접점은 ‘주름 접기'(plier)와 주름 펼치기(deplier)와 같은 상반된 운동을 함께 끌어안는다.  
전용환의 작품 또한 이러한 주름의 세계가 자리한다. 눈에 드러나지 않은 주름 밑의 세계가 실재이듯이, 전용환의 작품 속 쉽게 드러나지 않은 오목과 네거티브의 공간 역시 조각의 몸체를 이루는 실재의 세계를 구성한다. 들뢰즈의 주름이라는 메타포가 ‘사건의 계열화와 그것의 재배열’을 통해서 비로소 잠재적 공간으로부터 현실화되어 나타나듯이, 전용환의 작업에서, 하나의 평면으로부터 잉태한 포지티브와 네거티브의 평면/공간, 즉, 2차원 다양체, 혹은 3차원 변형이라는 개념은 ‘사건의 계열화(하나의 포지티브 평면을 오리고 네거티브 평면을 남기기)와 그것의 재배열(요철 공간의 병치와 재구성)’을 통해서 작품화된다. 

V. 에필로그 
작가 전용환의 작품은 현재까지 ‘트랜스포밍 사이클스’와 ‘공간 – 하나로부터’라는 연작을 통해서 순환 속 변형과 구조의 변주를 실험한다. 그것은 하나의 평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이내 접힘과 펼침, 계열화와 재배열과 같은 주름의 공간 미학을 점차 실험하는 중이다. 
이러한 복잡다기한 과정은 조각 창작에서 결코 용이한 것은 아니다. 철판을 정밀하게 절단하는 작업에는 정확한 계산을 필요로 한다. “원재료의 표면적을 계산하여 만들고자 하는 입체 작품을 표면적을 계산해 일치시키는 원리”를 작동시키는 까닭이다. 더욱이 그의 작업은 “표면적의 계산 값에 재료를 플라스마로 자연스럽게 절단 조각내어 안과 밖의 조각을 각기 다른 만들고자 하는 형태에 용접해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기에 하나의 평면으로부터 네거티브와 포지티브로 분리된 작품을 교집합의 형태로 교차시키는 작업을 위한 정확한 데생력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분리와 결합으로 형상이 만들어진 후에는 조각의 표면 전체를 도색하지 않고 선택적인 면만을 부분적으로 우레탄 도장을 하는 공정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재료의 고유한 질감을 살리고 또 한편으로는 인공적인 색감으로 도포해서 상호 대비의 미학을 선보인다. 이러한 모든 과정에는 작가의 지난한 노동에 가까운 창작이 요청된다. 
작가 전용환은 “아름다워야 하고, 호기심을 유발해야 하고, 수학적이어야 한다”는 자신의 작업이 당면한 과제를 오늘도 자기 스스로에게 제안하고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수학적 개념과 미적 감각 그리고 흥미로움까지 겸비한 그의 작업이 지금까지 탐구했던 조형 미학을 중심으로 한 채, 또 어떠한 방식으로 펼쳐져 나갈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수학적 정교함과 완벽의 조형미를 도모하는 작가 전용환의 조각 안에, 예측불허의 예술적 상상력이 언제나 꿈틀대는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