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NOTE
2018-01-08 작가노트-MESSIAMNESIA (messiah + amnesia) 메시엠니시아 (메시아기억상실증)
MESSIAMNESIA (messiah + amnesia) 메시엠니시아 (메시아기억상실증) 

 우리는 모두 관심사들을 가지고 있다. 돈에 대한 관심, 사랑에 대한 관심, 먹는 것에 대한 관심 등으로 나름대로의 관심거리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중요한 것도 있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도 있다. 나는 이것들이 나의 실존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말했던, -(지금 생각해도 무시무시한)- '한계상황(Grenzsituation)'인 불가피적인 벽에 부딪히게 되었고, 나의 실존이라 믿었던 모든 관심들은 산산 조각나 버렸다. 그 벽을 마주하고 나의 한계를 심각하게 의식할 수 있었고, 절망했다.
실존이 나 자신이기 위해 선택하고 결단했던 자유, 그것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난파하고 전혀 헛수고라는 것을 알자, 자유의 결단과 선택에 의하여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구제의 손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계상황에 부딪쳐 난파하는 실존만이 초월자와 대면할 수 있다.’ 내가 만난 그리스도 예수는 다른 모든 관심들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는 절대적인 관심, 즉 틸리히가 말하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이 되었고, 그 경험들이 내 작품의 주된 모티프(motif)가 되었다. 내가 만난 그리스도 예수는 나의 죄로 인하여 심판당하고, 조롱당하고, 학대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린 비천의 모습이었다. 땅 위에서의 그분의 생에는 종의 비천한 모습 이었기에 그러한 그리스도의 상을 동시대인들은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께서 모순의 징표이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나의 작품은 기억복합체로서 작동하며 유년시절 어머니가 들려주셨던 성경의 이야기와 실존의 한계상황에서 만났던 그리스도 예수의 기억을 캔버스로 불러낸다. 사실 한국사회에서도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지금 자신이 선 자리에서 그 분을 사유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근대화나 세계화 같은 국가-사회의 의제를 위해 과거는 깨끗하게 정리되어야 한다는 현대사회의 강박은 너무 많은 일들을 이미 지나간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나는 이 정리된 역사의 뒤꼍을 포착한다. ‘억압된 것의 귀환’을 시도하는 것이다. 사진이나 영상을 자르고 붙여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듯, 나의 작품은 친숙하지만 낯선 이야기, 우리가 알고 있지만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를 전한다. 
내 작품에서 뭇 사람들의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연약하고 고통에 신음하는 모습인데 비해 그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추악하고, 희극적이고, 외설스러우며 대범한 모습의 사람들이다. 또 허세가 넘친다. 그것은 나에게 프로이트가 말하는 운하임리히(unheimlich), 즉 <두려운 낯설음 Das Unheimliche>으로 다가오는 자화상이자 내가 실존하는 현실의 모습이다. 
과거엔 종교화를 통해 종교를 보았다면 현대인은 종교화를 통해 현실을 본다고 생각한다. 가장 친숙한 것(하나님)이 아주 잊어버릴 정도로 억압되었을 때,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로 되돌아온다. 21세기의 실존존재가 궁경(predicament), 즉 무의미, 의혹, 불안, 소외에 처해 있는 이유는 믿음의 부재, 믿음의 허상이나 혹은 믿음이라는 이름의 부조리가 아닐까. 교회는 있으나 구원이 없고, 신자는 있으나 믿음이 왜곡되어 있는 오늘의 현실을 성찰해야 할 과제가 본인의 작업을 통해 천명되어지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