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쇠로 만든 나무_보석나무

쇠로 만든 나무

 

느티나무 옆에 둥지 틀기

 DMZ를 품고 있는 강원도 양구 산촌에서 태어난 나는 시골과 자연을 좋아한다. 주변의 산과 물은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고 고향집 앞에 있던 대장간과 제방 옆 서낭나무에 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등학교부터 고향을 떠나 춘천에서 생활했고 사회생활의 첫발은 1989년 경기도 이천에서 시작 되었다. 미술교사로 근무하며 작업실을 찾던 중 여주시 북내면 석우리에 150살 가까이 된 느티나무와 연못이 있는 공간과 인연을 맺었다. 25년 동안 작업을 했으며 지금은 그곳과 멀지않은 산중턱에 새로운 둥지를 틀어 작업한지 7년이 흘렀다.

 

철의 기억

 자르고 달구고 두드리고 용접하며 만들어지는 금속의 물질감은 빛과 반응하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금속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의 기억들 때문일 것이다. 70년대 초 고철은 귀한 몸이었고 특히 비철금속인 신주(탄피의 주성분)는 맑은쇠라고 하며 몇 배나 더 비쌌다.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땅속에서 캐거나 줍던 탄피의 누렇고 푸르슴한 금속성이 어린 눈에 아름다워 보였던 것 같다. 고향집 앞에는 대장간이 있었고 대장장이 아저씨의 일하는 모습은 무척 흥미로워 보였다. 쇠를 가지고 뚝딱거리면 호미나 낫이 만들어졌다. 특히 나무자루를 박을 때 피어나는 메케한 연기는 어두운 대장간 안을 환상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철조의 시작

 초기작업은 인간과 자연 환경에 관한 관심이 표현되었다. “동행목”은 연필을 깍듯 조각되어 서있는 나무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아이의 모습이 거꾸로 자리 잡고 있는 작품이다. 파괴된 환경 뒤에 위협 받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 뒤 현대적인 작업에 목말라하던 나는 석우리에 작업실을 마련하면서 용접기를 존비하고 대장간 시설을 만들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철조가 시작되었다. 몇 년을 거쳐 다양한 실험을 하였고 10여년 근무했던 교직을 떠나면서 전업 작가의 고단한 생이 시작되었다.

 

하나에 관한 명상

 찌그러진 공업용 앨보와 파이프들이 한선으로 연결되어 구성된 “하나의 관한 명상” 철조작품이 만들어졌다. 철과 스테인레스를 이용했는데 스테인레스를 거친 터치로 마감한 작품은 금속의 물질감이 형태와 잘 어우러져 성공적이었다. 식물, 동물과 같은 모든 생명체는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생성됨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2001예술의 전당에서의 대규모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몇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스테인레스 판재를 주로 이용한 선화랑에서의 개인전이 끝나고 고향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 1기 입주 작가로 선정되어 일 년 간 활동 하게 된다. 단순한 추상작업 안에 내 자신이 없음을 인식하면서 반성과 함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고향에서 나를 찾기

 이천집과 여주작업실,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을 왕래 하며 일 년을 보내면서 나 자신을 객관화 시키며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박수근 미술관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여주 석우리 작업실에서의 일상적인 모습이 떠올랐고 연못에 떨어져 가득 담겨있는 나뭇잎이 보였다. 그때부터 평범한 나뭇잎이 비범해 보이기 시작했고 스테인레스로 나뭇잎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뒤 금속으로 만들어진 나뭇잎들이 모여 물방울이 되었고 물고기, 새, 말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일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여러 가지 상상들이 작품으로 만들어 졌다.

 

차가운 스테인레스에 새긴 무늬

 모든 생명체는 무늬를 지닌다. 식물은 껍질, 이파리에 각종 무늬가 새겨져 있고 동물을 대표하는 인간은 저마다의 지문과 손금을 타고난다. 레이져나 프라즈마로 자른 여러 종류의 나뭇잎형태 스테인레스 강판을 불에 달구어 망치로 두드려 무늬를 새긴다. 대장간에서 전통적으로 했던 열간 단조이며 망치로 전달되는 나의 감각은 금속에 새겨지며 지울 수 없는 무늬로 남는다. 불과 망치를 만난 차가운 스테인레스는 연성으로 변하면서 물성이 확장되고 빛에 반응하는 다양한 색감을 품은 따스한 느낌으로 변한다.  “대지의 틈새” “나무연못” “나무물고기” “웃는 말” “나무새”작품들이 등장했다. 연못은 소우주였고 연못과 나무의 관계에 관한 사색과 성찰의 결과물들이었다.

 

동화 만들기

 나무연못을 주제로 한 나무물고기라는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연못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나무물고기로 탄생하여 더 큰 세상으로 나와 여행을 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다시 고향인 연못과 나무로 찾아가는 내용이다. 지금은 잠시 뜸들이고 있는 시기이며 조만간 완성할 생각이다.

 

반복과 차이 그리고 레이어드

 수십 수백개의 단위체는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 반복과 차이를 보여준다. 이것들은 알곤용접으로 하나하나 연결되어 큰 하나가 된다. 물위에 떠 있는 것처럼 납작한 단위체들이 중층구조로 겹쳐진 듯 뚫려 있는 입체가 되어 다층적 공간을 만들어 내기도한다. 자연의 원초적 에너지를 더욱 깊게 담아내고자했던 작품들이 “중첩된 풍경”이다.

 

나뭇잎 전구

 오래전부터 시작된 과학자들의 환경문제에 관한 경고는 지구온난화라는 현실로 다가왔고 기후변화는 인류의 생존을 위한 가장 큰 숙제가 되었다. 나무를 관찰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어느 날 아침, 산책길에서 둥글고 거대한 느티나무의 이파리들 틈새에서 새어나오는 강하고 투명한 흰색 아침햇살을 보았다. 그 후 작품에 빛을 담아볼 생각을 하니 전구가 떠올랐다. 나뭇잎 속에 나무 모양을 하고 나뭇잎을 지탱하고 있는 잎맥의 형태를 프라즈마를 이용해 뚫어버리니 새로운 나뭇잎이 만들어졌고 그것들이 모여 나뭇잎전구가 탄생했다. 나뭇잎전구에 LED를 설치하니 잎맥의 틈새에서 아름다운 빛이 새어 나왔다. 어린아이가 그린 나무그림처럼 생긴 희망의 빛이었다.  나뭇잎은 태어나고 숨 쉬며 살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자연의 순환을 상징하며 전구는 인간이 만든 위대한 과학의 대표적 결정체이다. 나뭇잎전구의 전기 빛이 잎맥 틈새를 통해 나오면서 자연의 빛으로 바뀌어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밝혀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기 시작했다.

 

보석나무의 시작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작업실 뒤쪽 작은 다리를 건너면 바로 산속으로 들어간다. 참나무, 밤나무와 잣나무  숲을 지나면 소나무 숲 터널이 펼쳐진다. 땀 흘리는 작업 뒤에 숲속을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하다보면 건강한 나무의 에너지가 온몸에 전달된다. 연못에 떨어진 나뭇잎에서 시작된 금속으로 상상의 나무 만들기 작업을 한지 벌써 16년이 흘렀다. 작품 내부에 빛이 들어가는 "나무전구"작업 이후에 기하학적인 역삼각형의 " 나무나무나무 "작업을 하게 되었다.  각지고 직선적인  추상형태에 나뭇잎이 투각되어 물방울 기둥으로 서 있는 작품이다.

그즈음 정원이  아름다운 갤러리에 초대받아 작품을 출품했고 전시 기간 중 다이아몬드 관련 행사가 열려 참가하게 되었다. 그 뒤 보석의 본질에 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보석나무"가 시작 되었다. 환경문제로 야기된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촌이 신음하고  있다. 자연의 가치는 인류의 생존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해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마어마한 시간의  응축으로 탄생되는 보석들은 세상의 빛을 만나면서 존재를 뽐내며 사랑을 받는다.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생명체가 지구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이유는  나무가 끊임없이 걸러내는 공기의 존재 때문이다. 공기만큼이나 소중한 생명의 나무를 보석의 이미지로 표현 한다. 내가 만들고 있는 나무는 물과 빛으로 성장하며 우리를 지켜주는 "보석나무"이다.

 

 밝고 건강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보석나무가 세상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기대해본다. 

 

 

 2023. 7.  조각가 강신영

연못 속에 담겨진 소우주_고충환

평론

 

연못 속에 담겨진 소우주

- 고충환 (2009)

 

조각가 강신영의 작업실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고, 그 주변을 군소 나무들이 감싸고 있는데, 그 나무들 중에는 한눈에도 수종이 오래된 아름드리 느티나무도 있다. 연못에는 느티나무도, 하늘도 다 들어와 있어서 그 자체가 마치 하나의 자족적인 세계며, 소우주 같다.

 

그 작은 세계 속엔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물 위에 부유하거나 물 속에 가라앉아 있는데, 나무가 자신의 생리를 스스로 조절하면서 떨쳐낸 죽은 나뭇가지며, 나뭇잎들이다. 그 물속엔 이렇게 나무로부터 떨어져 나온 나뭇잎들과, 그 생긴 모양새가 나뭇잎처럼 유선형으로 생긴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다. 죽은 나뭇잎이 살아있는 물고기를 닮았다. 살아있는 물고기들은 물속에서 유유자적하며 거침이 없다. 죽은 나뭇잎들은 물고기들의 유유자적이 부럽고, 저들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마침, 근처에 죽은 나뭇가지도 있는 터여서, 나뭇잎들은 그 나뭇가지를 몸통 삼아 하나둘씩 들러붙어 물고기 형상을 만든다. 나무이면서, 동시에 물고기이기도 한, 나무고기가 된 것이다. 이제, 그 나무고기들도 물고기들처럼 물속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고향이 그립다. 하지만, 물 밖에서는 물속에서와는 다르게 다리가 있어야 걸을 수가 있다. 그래서 또 다시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덧붙여 다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나무고기들은 물속에서도 유유자적할 수가 있고, 물 밖에서도 걸어 다닐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나와 보니, 엄마(느티나무)가 그립다. 하지만 엄마의 키가 너무 높아서 가 닿을 수가 없다. 그래서 비교적 큰 나뭇잎을 몸통에 붙여 날개를 만들어보았지만, 잎맥만 앙상한 그 나뭇잎 날개로는 바람의 힘을 받을 수도 날 수도 없다. 그리고 이 과정 전부를 지켜보던 엄마가 잎살이 멀쩡한 나뭇잎 몇 장을 떨어트려 주고, 마침내 나무고기는 그 나뭇잎으로 날개의 구멍을 막아,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무슨 동화 같은 이 이야기는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다. 아마도 평소 자연을 지척에 두고 작업을 해오면서 자연스레 떠오른 발상에다가 살을 덧붙여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닌데, 현재상황을 빌미로 자신의 유년시절의 추억을 되살려낸 것이다. 현재가 과거를 되불러내는 단서와 계기로서 작용한 것이며, 현재 속에 오롯이 보존되고 있었던 과거를 되불러낸 것이다. 자연이 작가의 현재와 과거의 단절되어졌던 끈을 연결시켜준 매개로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지척에 있다고 해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다고 해서 자연 이야기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의식이다. 의식이 없으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한다. 의식은 그 자체 목적 지향적이어서 자신이 겨냥하는 것을 보고, 다른 것을 간과하고 배제하는 경향성이 있다. 의식마저도, 아니, 의식이야말로 경제적인 법칙을 적용받는다고나 할까.

 

여하튼, 작가의 근작의 핵심은 자연 속에서 세계를 보고, 우주를 보고, 자신을 보고, 존재를 본다는 점에서 자연과 문명과의 관계를 재고하게 하고, 자연의 본성에 눈뜨게 한다. 그리고 그 자연을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과의 단절되어졌던 끈을 이어주고 복원시켜주는 계기로서 인식한다는 점에서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을 엿보게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근작을 특징짓는 핵심은 남다른 발상에 있는데, 실제서사와 허구적 서사를, 경험에서 유래한 현실인식과 상상력을 씨실과 날실 삼아 긴밀하게 직조해내는 특유의 이야기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상상력을 현실인식과는 배치되는, 현실성을 결여한 순수한 허구로 볼 일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현실인식이 경험에 바탕을 둔 것만큼이나, 상상력 역시 현실경험이 없다면 나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작가는 현재의 자연(혹은 자연의식)을 매개로 해서 과거의 자연을 되불러내고, 유년시절의 추억을 되불러내고, 그렇게 과거 속의 자연과 더불어 추억을 만들었던 이야기를 되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유년의 이야기는 어른의 이야기와 다르다. 유년의 이야기가 물 흐르듯 거침이 없다면, 어른의 이야기는 한정적이고 닫혀있다. 어른의 이야기가 논리적이어서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라면, 유년의 이야기는 그 논리의 한계를 넘어서 큰 이야기를 꾸며낸다. 신화, 설화, 우화, 동화, 전설, 민담이 모두 이 큰 이야기에 속하고, 유년의 이야기는 이런 큰 이야기에 연이어져 있다. 그 이야기가 논리를 뛰어넘는 것인 만큼, 논리로 싸안을 수 없는 비전을 열어놓는다. 초현실주의와 비엔나환상파, 그리고 남미의 매직리얼리즘이 이 이야기의 계보에 속한다. 마술로 읽어낸 리얼리즘이며, 현실 속에 깃들여 있는 마술 같은 순간들을 발견하고 캐내는 것이다.

 

이런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해 작가는 문명(혹은 문명화된 의식)에 가려지고, 왜곡되고, 축소된 자연의 본성을 드러내고, 그 본성이 품고 있는 위대한 모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모성에의 지향성은 각각 순환사상(시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진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가 사가 순환하고, 물과 땅이 순환하고, 물과 하늘이 순환하고, 나무와 물고기가 순환하는)과 생명사상(자연에 영이 깃들여 있다는 믿음과 신념으로부터 유래한 물활론, 범신론, 샤머니즘, 토템으로 나타난), 그리고 무엇보다도 존재론적 원형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그리움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그리움은 순환사상과 생명사상을 싸안는, 이보다는 더 큰 개념이다. 그리움은 언제나 부재하는 것을 그리워한다. 현대인이 상실한 것들, 억압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그래서 불가능한 것들, 자연(동물성과 식물성, 야성과 야생을 싸안는), 고향(지정학적 개념과는 상관없는, 의식적 층위에서의 문제와 관련된), 원형(존재가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어떤 뿌리의식)을 그리워한다. 작가의 조각은 어쩌면 잊혀졌을 지도 모를, 이 큰 그리움에 대면하게 한다.

 

작가는 이런 스펙터클한 서사며, 존재론적 이야기를 스테인리스스틸을 소재로 한 일련의 조각으로 풀어낸다. 그 의식이 자연의 본성을 향하는 것인 만큼 가급적 자연을 닮게 만든다. 이를테면 나뭇잎의 경우, 소재를 나뭇잎 형태로 자른 연후에, 이를 높은 온도의 불에 달궈 해머로 두드리는 방법으로 자연스런 흔적과 형태를 얻는, 단조기법(일명 방짜기법)을 취한다. 가녀린 선조의 경우, 그 유기적인 형태가 마음에 드는 실제의 나뭇가지를 골라서, 보고, 본 그대로를 만든다.

그리고 그 단면이 잘려져 나간 나무둥치 형태의 경우, 실제의 나무둥치를 속(틀) 삼아 그 위에 소재를 덧대어 나가는 방식으로 형태를 만든 연후에, 그 속의 나무를 태워 없애는 방식을 취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자연에 흡사한 형태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처럼 실제를 모방한다고 해서 형태 역시 실제 그대로 나와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 소재가 작가의 조각에서처럼 스테인리스스틸이라면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감각의 문제며, 기술적인 난이도와 이를 실현하는 능력의 문제다.

 

스테인리스스틸을 소재로 한 작가의 조각은 지금까지의 스테인리스스틸 조각에 대한 선입견을 재고하게끔 한다. 이를테면 대개는 심플하고 추상적인 구조의 표면에 번쩍거리는 광택과, 그 표면에 비친 반영상으로 특징되는 표현의 한계를 재고하게 하고, 유별난 강도로 인해 기술적으로 어려웠던 단조기법을 적용하고 실현해 보임으로써, 특히 구상적, 형상적, 서사적 표현 가능성을 확장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작가 강신영의 작품 모티브는 연못으로부터 기인한다

이홍원 (여주시립 아트뮤지엄 '려' 학예실장)

 

작가 강신영의 작품 모티브는 연못으로부터 기인한다. 연못에 부유하는 나뭇잎들과 연못 주변에 모여든 새들과 나뭇잎의 모습에 작가 자신의 철학을 투영한다.

식물체인 나뭇잎은 새가되고 싶고, 동물체인 새는 나무가 되고 싶어하는 서로의 동경은 마치 인간의 삶과도 닮아 있다고 작가는 통찰한다. 그러한 사고는 하나하나의 나뭇잎이 모이고 이어져서 한 마리 새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모든 생명체는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줄기로 통합된다”는 작가의 철학은 “휴얼”과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統攝)”이론의 환원주의와 맥을 같이한다. 또한 동양의 합일사상과도 맞닿는다.

 

2018 여주박물관 야외조각기획전 서문 중에서

그의 최근작들은 시간에 관한 성찰이 돋보인다

최형순 (제주도립 김창렬미술관장)

 

“그의 최근작들은 시간에 관한 성찰이 돋보인다.물고기나 나뭇가지 특히 나뭇잎 형상의 제작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의 과정이다. 천개이상의 나뭇잎을 만드는 행위는 단순한 되풀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새한 차이들이 개입한다.두드리는 횟수와 힘의 강약에 의한 형태의 불일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동은 그것에 선행하는 가치가 있다. 제작의 고통을 끝까지 밀고나가 그 과정을 여과없이 즐기는 것, 획일성에 대한 부정이 바로 그것이다.부정의 정신은 습관적인 것, 일시적인 것을 부인하는데서 생겨난다. 부정이 없다면 새로움은 있을 수 없다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강신영의 작업은 모두 보고있으면서도 사실을 보지못한 것을 직관에 의해 보고 그것에 형태를 부여할 때 느끼는 감정까지도 작업에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연못을 조각한다는 것은 풍경을 조각한다는 것처럼 터무니 없어 보인다. 강신영의 작업은 상식을 간단히 뛰어넘어 저 먼 새로운 세계를 포착한다. 그것이 거꾸로 놓인 나뭇가지 사이로 물고기가 노니는 이유다. 게다가 쉽지않은 재료인 스테인레스를 주무르듯 단조하여 형태를 만든다. 마음대로 자르고 휘고 두드린다. 물에 떠 있는 나뭇잎은 그렇게 무리지어 끊임없이 반복된다. 차이없는 반복이 없음을 그의 작품은 시위하듯 보여주고 있다.

 

2007 박수근미술관 입주작가 개인전 “대지의 틈새전” 서문중에서

<그림 에세이>철에 생명의 서사를 담다_이재언 평론가

<그림 에세이>철에 생명의 서사를 담다

 

이재언 미술평론가

 

농업이 약한 선진국은 없다더니, 농사도 기술력이다. 작물의 파종에서부터 재배, 수확에 이르기까지 기술 아닌 게 없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은데도 쌀 생산성은 최상위권이라 한다. 오랜 세월 인프라 확충에도 많은 힘을 쏟았지만, 특히 품종 개발과 육종에 공들여 온 덕이다. 물론 우리 농부들의 근면성도 한몫한다. 곡식의 낟알 하나도 거저 만들어지지 않는다. 과학기술이 들어 있고, 또한 농군의 발소리를 듣고 생명이 반응한 것이다. 강신영의 조각은 씨앗 같기도 하고 발아 중인 새싹 같기도 하다. 그런데 육안으로 보던 모습이 아닌 것 같다. 표면과 내부가 좀 복잡해 보인다. 하긴 생명이 어디 그리 단순한 것이겠는가. 생명의 조화롭고도 치열한 섭리를 담은 것이다가, 아래로 내려가면 촘촘한 결들이 얽혀 있다.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 염기서열, 숫자, 위치 등의 정보를 압축해 둔 게놈지도의 비유가 아닐까. 보통의 스테인리스 스틸 작업과 달리 따뜻함이 느껴진다. 셀 하나하나의 단조(鍛造). 생명을 노래하는 불꽃의 담금질.

 

문화일보,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