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신화적이고 우화적인 상상력으로서의 삶_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김근배의 조각]
신화적이고 우화적인 상상력으로서의 삶 

-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김근배의 조각에는 정장을 차려 입은 사내의 몸통 위로 마치 달팽이와도 같은, 나선형으로 돌돌 말린 고깔과도 같은 기묘하게 생긴 머리를 이고 있는 특이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목구비가 생략된 그 머리는 현대인이 앓고 있는 질병인 집단무의식과 맹목적 주체 그리고 익명적 주체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 그 생긴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도 한다. 일상 속에서 마주칠 법한 보통 사내의 모습을 닮은 그는 아마도 작가 자신의 자소상일 것이다. 작가는 조각 속에서 작가 자신을 대변하면서, 동시에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사회 속에서의 소외된 삶을 사는 보통사람들의 초상을 대변하고 있다. 
그의 삶은 비록 비극적이지만, 작가는 이를 희극적으로 각색한다. 마치 웃음 속에 삶에 대한 풍자를 숨기고 있는 블랙코미디처럼 비극적인 삶을 희화화한 것이다. 여기서 비극은 삶의 실제로서 나타나고, 희극은 그 삶에 대한 작가의 해석으로 나타난다. 이로부터 삶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나 신뢰가 전해져 온다. 비판보다는 풍자에, 풍자보다는 해학에 가까운 삶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그대로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웃음의 형태로 현상한다. 이로써 캐릭터의 익명적인 머리는 몽상적인 머리로 전이되고, 보통사람의 초상은 그 속에 웃음과 유머 그리고 여유가 배여 있는 꿈꾸는 자의 초상으로 변화된다. 달팽이처럼 생긴 그 머리는 사실 이처럼 지난한 삶을 견디게 해주는 꿈의 계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한다. 그는 주어진 삶에 정박하지 못한 채 삶의 궤도인 길 위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 그는 뭔가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고, 그저 막연하게 서성거리고 있는 것도 같다. 보기에 따라서 그는 인명인지 지명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장차 도래할 어떤 날인지도 모를 고도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속 주인공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에게서는 일방적으로 주어진 삶을 낯설어 하며 대면해야 하는 존재의 당혹스러움과 부조리한 삶에 대한 인식이 느껴진다. 
그는 이처럼 길 위에 서성거리고 서 있거나, 어딘가를 향해 이동 중이다. 즉 그는 자동차나 비행기 그리고 배를 타고 여행 중이며, 때로는 낙하산을 타고 이제 막 하늘로부터 땅 위로 착륙하려 하고 있다. 이 이동수단들은 말할 것도 없이 삶의 메타포에 해당하는 것들로서, 그 가운데 특히 배는 망망대해의 바다 위에 저 홀로 떠 있는 부표와도 같은 고독한 존재를 상징한다. 작가의 조각 속에서 이 이동수단들은 그 자체가 목적 지향적이기보다는, 이동이라는 과정 자체, 이동이 갖는 의미 자체를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재차 삶의 속성을 목적보다는 과정으로 보는 삶의 메타포를 강화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실제로 작가는 이사와 이주, 여행과 여정과 같은 이동을 암시하는 개념들로써 자신의 작업을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근작에서는 대장정이라는 개념으로써 그 주제에다가 일관성을 부여하고 강화한다. 이 주제와 더불어 작가는 삶의 속성을 정주보다는 끊임없는 이동과 유목에 바쳐진 것으로 보고, 이를 조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처럼 어딘가를 향해 떠나는 주체, 길 위의 주체, 여정 중인 주체에 내장돼 있는 유목적인 삶은 작가의 작업으로 하여금 자기정체성을 찾아서 방황하는 주인공을 소재로 한 한편의 로드무비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특히 질 들뢰즈의 노매디즘 즉 유목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흥미로운 점은 들뢰즈가 비록 유목주의를 주창했지만, 정작 자신은 평생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장을 거의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목주의란 말로써 들뢰즈가 의미한 것이 단순한 현상적인 차원에서의 유목을 넘어서는, 정신적이고 의식적인 차원에서의 유목이었음을 말해준다. 정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식에 대한 부정의 철학, 통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식에 대한 회의와 의심의 철학을 위한 실천논리로서의 기능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삶의 실천논리로서의 유목에 얼마나 철저했던가에 대해서는 상식과 합리, 정론과 통설에 지배되는 지식인의 삶에 끝내 안주하지 못한 채 마침내는 노년의 삶을 자살로서 마감한 것에서도 극명해진다. 의미론적인 유목, 의식적인 유목을 위해 정론에 안주하지 않는 비평적이고 비판적인 삶을 실천해 보인 것이다. 이처럼 유목은 단순한 현상적인 차원을 넘어 삶의 실천논리로서 작동할 때에야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얻게 된다. 
김근배의 조각에 나타난 주체는 이처럼 꿈꾸는 듯한 몽상적 주체, 부조리한 삶을 대면한 실존적 주체, 그리고 의식의 자유로운 경계에 그 맥이 닿아 있는 유목적 주체로 나타난다. 이 모든 주체가 다중적으로 중첩돼 있는 것이다. 그 주체의 유목적인 삶에는 어김없이 동반자가 있다. 전작에서는 물고기가 그리고 근작에서는 코끼리가 있다. 
여기서 물고기와 코끼리는 구원이나 해탈과 같은 종교적인 도상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또 다른 인격체, 분신, 그림자, 타자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자체 작가의 무의식적 욕망 혹은 이상을 반영하고 있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코끼리는 때때로 그 크기가 사람보다도 작고 심지어는 나뭇잎을 타고 여행하는 형태로도 나타나는데, 이처럼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상황이 유아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사람과 동물, 심지어는 사람과 사물이 어떠한 위계도 없이 서로 어우러진 것에서는 우화적이고 신화적인 상상력마저 느껴진다. 이로써 작가는 아마도 상식과 합리에 바탕을 둔 통설을 벗어나서 타자간의 연대와 조화를 이상적인 삶의 한 형태로서 꿈꾸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조각에는 자동차, 비행기, 배와 같은 이동수단과 함께 길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 길은 대개는 순환하는 고리의 형태로 나타난다. 시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진 길 위에서 사람과 동물, 자동차와 사물들이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그 길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진 삶의 속성을 말해준다. 즉 작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해 떠나가고 있지만, 그 길은 언제나 그를 출발점에로 되돌려 놓는다. 말하자면 그 길은 자기 반성적인 계기와, 자기 존재에 대한 간단없는 물음의 과정을 암시하는 은유처럼 읽힌다. 
이외에도 김근배의 조각에는 가방과 집이 자주 등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가방과 집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방이 마치 빌라나 거실과 같은 구조물로 짜여져 있는가 하면, 집 또한 가방처럼 이동할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속에는 사람과 동물, 가구와 사물, 자동차와 배, 그리고 심지어는 길마저 들어 있다. 이는 그대로 세상의 풍경을, 삶의 풍경을 축약해 놓은 것 같다. 이렇듯 작가의 작업에서는 집마저도 정주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가방과 마찬가지로 유목적인 삶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조각 속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달팽이관처럼 생긴 머리로서 몽상가를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이 코끼리와 함께 길을 떠나고 있다. 배와 자동차 그리고 비행기가 운동수단으로서 동원되는가 하면, 때로는 나뭇잎과 체스 판이 그들을 실어 나르기도 한다. 길 위에는 주인공과 함께 코끼리, 자동차, 비행기, 집, 가구, 가방, TV가 어딘가를 향해 종종걸음치고 있다. 신화적이고 우화적인 삶, 작가의 욕망과 이상이 투사된 삶, 작가의 상상력이 복원해낸 삶 속에서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어우러져 서로 화해한다. 그 정경이 마치 유아의 눈에 비친 삶의 우의, 삶의 축소판처럼 읽힌다.
서사와 매체의 동행_이선영(미술평론가)
서사와 매체의 동행

- 이선영(미술평론가)

 김근배의 조각은 단일한 기념비성 보다는 서사narrative의 과정을 드러내는 작은 무대들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문학적이고 회화적 특성이 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주인공들과 무대장치는 다양한 재료들이 사용된 복잡한 형태들이 조립된 형식이다. 그러나 무대 세트는 오브제나 기성품으로 채워지기 보다는, 브론즈나 대리석 같은 고전적인 조각의 재료를 활용하여 주물이나 조각의 방식으로 가공된다. 그의 작품에서 청동 같은 금속은 주로 길이나 레일, 이동수단 같이 무대장치의 골조를 이루는 기계적인 사물을 재현하는데 활용되고, 대리석 같은 돌은 인물이나 동물 등 무대 장치 안에 배치된 주인공들을 재현하는데 활용되곤 한다. 재료와 대상은 적절하게 짝지어지지만, 재료가 내용을 위한 투명한 매개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차들은 주물의 흔적이나 고색창연한 표면이 두드러지며, 대리석 조각들에도 색이 입혀져 있는 등, 재료의 불투명성opacity이 존재한다. 
내용적으로 김근배의 작품은 모종의 이야기를 지향하고 있지만, 조형예술이 가지는 정지라는 속성이 야기하는 애매함이 남아있다. 그의 작품에서 서사는 매체와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공간적 예술인 조각에 서사라는 시간성을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방식은 선조성을 가지는 길과 이동이라는 개념과 이미지의 도입이다. 그의 작품에는 토끼가 여러 교통수단을 타고 이동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타난다. 최근의 작품에는 토끼 대신 말이 등장하기도 한다. 마법의 빗자루부터 똥차, 달구지부터 트럭, 돛단배부터 전철에 이르는 여러 교통수단에 실린 토끼는 웅크린 채 이리저리 실려 다니는 수동적인 자연적 대상부터, 양복을 입은 문명인의 은유까지 다양한 면모를 가진다. 이러한 이동은 누추한 살림살이가 드러나는 초라한 광경부터, 미지로의 여행이라는 부푼 꿈에 충전된 감정의 편차를 내포한다. 
이동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는 가방이다. 작품 [가방 속의 여행](2006)처럼, 가방이 열리면서 펼쳐지는 풍경 안에 사물이나 동물, 인물 등이 배치된다. 가방 안에는 레일로 형상화된 길도 담겨있다. 가방은 이동에 대한 이미지가 공시적으로 집약된 일종의 축소모델인 것이다. 인물이나 동물 대신에 환경이 이동하기도 한다. 흰 대리석 구름이 박혀 있는 금속 통과 거기에 매달린 날개달린 양복쟁이, 또는 동물은 관객이 통을 돌림과 동시에 하늘을 나는 환영을 창출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제작된 작품 제목에 많이 붙은 [대장정], [여정]이라는 단어는 그의 작품에서 차지하는 길의 위상을 예시한다. 길은 보통 금속 레일의 형태로 가시화되면서 개곡선에서 폐곡선에 이르는 다양한 도형을 연출한다. 지하철 노선처럼 추상적으로 배치된 길부터 불규칙한 도형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길 사이사이에는 자동차, 집, 빌딩, 사람, 코끼리, 나무, 잎 등,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모티브들이 박혀있다. 
길 위에 놓인 사물과 생물이 그 순서와 조합의 방식에 따라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길이 펼쳐지는 양상에 따라 작가가 할 이야기와 관객이 해석할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가령 꼬인 길은 재미있게 보이기도 하고 골치 아프게 보이기도 한다. 쭉 뻗은 길은 시원해보이기도 하고 권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길은 나무 같은 기념비적 형태 위에 얹혀있는가 하면 타원부터 별모양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접혀있다. 길은 [회전도시](2007), [여정](2008)처럼 회전그네나 롤러코스터 형태로 변주되며, 작품 [5번째 생일](2006)처럼 나선형으로 상승되는 레일이자 화려한 샹들리에로 변화하기도 한다. 길과 길 위에 놓인 것들은 거대한 토끼가 가지고 노는 털 뭉치, 또는 포크나 젓가락에 들린 면발이나 양념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대장정이나 여정은 운명을 결정짓는 무심한 주사위 놀이나 먹고사는 문제가 그렇듯이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문제로, 인생에 대한 또 다른 은유를 낳는다. 
김근배의 작품에서 정착의 이미지는 도시와 자연 풍경에서 두드러진다. 작품 [달콤한 도시](2007)는 바구니 위에 얹힌 뭉치 사이사이에 사물과 사람이 박혀있다. 여기서 문명은 질서보다는 뒤죽박죽된 양상이다. 원통형 대리석으로 빌딩 숲이나 스카이라인 연출한 작품 [도시]는 각 빌딩 위에 계단, 집, 새, 의자 같은 형상을 배치하여 도시 풍경에 온기를 부여한다. 마천루 사이를 종횡으로 활보하는 인간은 매우 익명적이다. 그들은 모두 양복을 입고 얼굴은 동일한 무늬로 환원되어 표정을 읽을 수 없다. 공중에서 그들은 날개로 날고 있거나 낙하선을 타고 내려오는 중이다. 지상에서는 홀로 버스를 기다리거나 집단으로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가기도 한다. 기하학으로 환원된 도시 풍경 속에서 익명의 인간은 체스판 위에 던져진 신세이다. 한편 김근배의 작품에서 자연은 대리석으로 만든 거대한 풀잎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코끼리나, 양복쟁이들을 충분히 감싸 안을 정도로 넉넉하다. 
대리석 덩어리 위에 코끼리 세 마리가 돋아나는 작품 [여정](2006)은 자연의 판이 가지는 다산성을 표현함과 동시에, 서사의 또 다른 측면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서사는 묘사 보다는 작업과정의 흔적들에서 발생한다. 김근배의 작품에서 시각성과 서사성은 긴밀히 작용한다. 굳이 서사적인 작품이 아니어도 시각적인 것에는 의미가, 의미에는 이미지가 잠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볼프강 켐프는 논문 [서사]에서 서사의 원칙으로 변환, 욕망, 결여의 개념을 든다. 이를 통해 서사는 단순한 삶이 아니라, 고양되고 집중된 일생을 다룬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김근배의 작품에 적용시켜보자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변환transformation인 서사는 길 위에서 진행되는 연속적인 기술방식으로 나타난다. 또한 서사는 하나의 목표, 다시 말해서 주인공들이 얻을 수 있거나 그렇지 못하는 가치의 대상을 성취하려는 주인공에 관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끝없이 여행 중인 주인공들은 그들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추구해야만 하는 과정을 은유한다. 
욕망은 정지해 있는 체계의 균형을 깨고 의미를 발생시키는 원동력이다. 마지막으로 결여란 가치를 얻기 위한 동기를 부여한다. 하나의 결여가 충족되면 또 다른 결여가 발생하며, 이는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필연적인 이유가 된다. 김근배의 작품에 나타나는 서사성은 미술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오랜 논점을 다시금 불러일으킨다. 레싱은 [라오쿤 또는 회화와 시 사이의 경계에 대하여](1766)에서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조각이란 실체들을 공간 속에 배열하는 예술이라고 주장하였다. 조각은 공간적 예술이기에 시처럼 시간을 매체로 하는 예술형식과는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각 예술작품은 동시적인 구성을 통해서 행위의 한 순간만을 재현할 수 있으므로, 가장 함축적인 순간, 즉 전후의 상황을 가장 잘 암시해주는 한 순간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근배는 길이나 이동이라는 주제를 통해 한 작품에 여러 시점을 공존하게 한다. 
레싱이 언급했듯이 단일한 순간은 어느 정도는 확장 된다. 순간은 기억과 기대 사이에 놓인 문맥에 의해 보충되는 것이다. 동시성은 항상 연속성을 포함한다. 서사적 구성은 관람자를 위해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김근배의 작품에서 이동하는 이미지들은 시간의 추이에 의해 성립되는 관계를 보여준다. 길 위, 또는 그 사이사이에 흩어져 있는 오브제 형태의 조각들은 일종의 기호sign이다. 그러나 그 기호들은 시공간상의 통일성이나 논리적 서술의 요건들을 충족시키지는 않는다. 선들은 끊기고 꼬이며, 오브제 조각들이 출현하는 순서나 빈도도 임의적이다. 이러한 불연속성과 분열성으로 이야기는 논리적 연쇄를 가지기 보다는 곧잘 시적 함축성을 가지게 된다. 기호들은 여러 작품에서 다시 등장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작품 속 주인공의 익명성 역시 비슷한 위상을 가진다. 그의 작품 속 서사의 주인공들은 얼굴이 패턴화 되어 있거나 동물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인다. 
자세도 몇 가지로 단순화되어 있고, 그들이 입고 있는 양복은 마치 유니폼처럼 개체로서의 속성을 지워버린다. 뻣뻣하게 서있거나 웅크리고 있으면서, 무슨 꿍꿍이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몸짓은 심신의 일치를 꾀하는 고전적 조각의 구조적 투명성과 거리가 있다. 또한 작가는 다양한 색채의 구사를 통해 작품의 표면을 강조한다. 구조에서 표면으로의 이동은 명확한 메시지보다는 물성의 표면에서 매순간 발생하는 새로운 의미에 주목하게 한다. 그것은 주제가 아닌 매체의 문제이다. 따라서 김근배의 작품에서 서사의 측면만을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야기를 전개하기에 더 손쉬울 수도 있는 오브제나 기성품을 사용하지 않고 조각의 문법에 충실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보여주는 기술로서의 미술의 힘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위해서 매체적 특성에 대한 숙지와 활용은 필요조건이 된다. 매체를 간과하고 주제에만 치중할 때 조각은 문학이나 회화의 아류에 머물기 때문이다. 
김근배의 작품에서 매체는 모방과 환영을 위한 투명한 수단이 아니다. 가령 브론즈로 된 트럭이 자동차의 흉내 이상의 매력적인 사물이 되는 것은 조각가의 솜씨가 드러난 표면의 풍부한 물성 때문이다. 조각가로서 오랫동안 훈련해 왔던 돌과 금속에 대한 특정한 기교는 작품이 단순히 일화적 요소로 축소될 수 없도록 하는 요인이다. 현대의 비평가 중에서 미술의 매체적 특성을 누구보다 강조한 그린버그는, 마찬가지로 레싱의 논의로부터 시작되는 [더 새로운 라오쿤을 향하여](1940)에서, 독립적인 직업과 원리, 기술로서의 예술,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아닌 절대적으로 자율적인 예술의 개념을 피력했다. 여기에서 작품의 주제는 매체 뒷전으로 밀린다. 그린버그가 미술을 무엇보다도 매체의 문제로 보는 것은, 모든 예술은 보편적으로 이념이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경험의 요소들을 더 직접적인 감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매체의 표현능력을 확대시키는 것은 곧 물질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문학 대신에 음악은 순수주의를 위한 더 훌륭한 모델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김근배의 길(레일)들은 선율처럼 흘러가고, 사이사이의 사물들은 음표처럼 배치되어 있는 듯하다. 그의 작품은 음악적, 즉 추상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조형예술은 문학에 비해 매체를 고립시키는 것이 더 쉬우므로, 결과적으로 현대미술은 문학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순수성을 얻었다는 것이 그린버그의 평가이다. 순수주의의 관점에서 조형예술은 연결 지어 생각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단지 느껴야 할 것들이 있을 뿐이다.  예술작품의 순수하게 조형적인 혹은 추상적인 성질, 즉 매체적 특징의 강조는 소통을 위한 효용성 보다는 시각예술의 순수하게 조형적인 가치가 전면에 나타나게 한다. 김근배의 작품에서 조각의 물질성은 때때로 단선적으로 흐르는 서사를 단절시키고, 결정된 의미나 주제로부터 벗어난다. 그것은 단순히 메시지 전달을 넘어서 관객에게 시적 울림을 주기 위함이다. 물론 김근배는 매체적 순수성에만 사로잡혀 형식주의로 매몰되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은 매체의 물성과 서사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균형을 잡으려는 지점에서 개성을 발한다. 

유목과 정주, 바람과 땅의 소리를 듣는다 - 김근배의 조각에 깃든 슬픈 여정의 소리들
유목과 정주, 바람과 땅의 소리를 듣는다
- 김근배의 조각에 깃든 슬픈 여정의 소리들

김종길(평론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날라이흐에는 돌궐 제2카간국의 명장이자 재상이었던 톤유쿡의 비문이 천년의 세월을 품고 서있다. 유목민으로서 제국을 건설하고 호령했던 그 지난한 역사의 기록과 함께 다음과 같은 유훈을 새겨놓고 있다. 모란미술관,『2002몽골현대미술전-유목민의 서사시』카다록, 2002,p.84.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톤유쿡의 비문은 칸의 제국을 완성하려던 정치적 야망과 그들 내부에 맥놀이치며 요동하는 유목민의 피를 대변하고 있다. 그들은 쉬지 않고 달렸으며, 카라코룸(和林)이라는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한없이 확장하여 유럽과 아시아를 초토화했다. 오직 말달리는 것 외에 결코 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제국은 결국 유목에서 정주의 문명으로 유혹받는 순간 나락의 길을 가야 했다. 톤유쿡의 비문(碑文)은 그래서 비명(悲鳴)이다. 제국의 몰락과 멸망을 본 순간 그는 성을 쌓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그들에게 멈춤은 죽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유목의 제국이 끝을 다하고 인류는 500년의 역사동안 정주의 문명을 도약시키기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20세기 말의 인류는 새로운 유목에 직면하고 있다. 
정주의 역사가 고도의 네트워크 문명으로 진입한 20세기는 슬픈 강제적 디아스포라의 이민을 기억하고는 있지만, 강대국 스스로의 욕망과 제국주의적 식민화 정책으로 인한 변종된 ‘세계화’전략으로 점차 국가간의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있으며, 탈식민화와 국제적 글로벌네트워크의 만만찮은 대응에도 불구하고 세기말에 급속도로 확산된 인터넷의 영향으로 우리는 완전히 회색인화 되고 있다. 이제 지구는 땅의 표면을 확장하려던 전쟁의 역사에서 익명의 가상현실을 무기로 한 넷(net)의 전쟁을 지켜보고 있다. 그 경계는 여러 계곡의 물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강물의 흐름과 같고, 이동의 흔적은 체취 없는 증거물처럼 둥둥 떠다니는 부표와 같다. 
마샬 맥루한은 지구를 하나의 촌락으로 규정했으나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지리적 심리적 거리감은 거의 없으며, 미래에 대한 전망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되는 현실 속에서 이미 체감되어 버린다. 붓과 펜, 종이, 타자기, 유선전화, 자동차 등이 정주문화에 적합한 것이었다면, 컴퓨터, 팩시밀리, 휴대전화, 개인용단말기(PDA) 등은 유목과 유사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유동성(mobility)의 증대는 인류가 다시금 유목적 삶의 양식 속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Ibid.15.
나와 당신, 우리 모두는 가상현실(Virtual Space)속의 유목민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땅 위의 동선이 항상 내가 살아가는 집을 중심점으로 타원을 그리며 불규칙한 파동을 그리고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가상공간을 향한 시선과 정신의 지느러미는 끊임없이 그 중심점을 벗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계 없는 경계를 지향하는 국가간의 글로벌 정책은 실제 간의 이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언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서로가 쌓아 놓은 고유한 문화와 문명, 학문의 영역을 넘나들며 지적 욕구를 습합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일견 그것은 국제화가 가져 온 두 가지의 부산물이다. 하나는 탈 경계에서 오는 자기 정체성의 모순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정체성의 모순을 극복하고 만나게 되는 평등 가치론의 인류애이다. 넷의 세계는 넷의 유목성이 스스로 경계가 될 것인가 아닌가하는 불투명한 선에 의지되어 있는 듯 보이며, 현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분명한 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차와 한계를 극복하고 넘나들고 있다. 어쨌든 경계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에 의해서 비롯되고, 우리는 늘 그 경계와 차이에서 ‘타자’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근배의 조각은 그러한 ‘타자’가 된 자신이 낯선 경계의 지점에서 슬픈 여정을 지속해야만 했던 자기 역사적 기록물로 존재한다. 그 역사는 결혼과 동시에 행복을 안겨줄 동산과 부동산을 처분해 이 땅을 벗어나면서 시작되었다.

타자의 자화상 - 순례자의 표상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스(Narcisse)와 피그말리온(Pigmalion)에 대한 이야기는 스스로가 타자가 된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을 타자화 하는 두 가지 예로 불 수 있다. 나르시스 신화에 보면, 한 청년이 맑은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졌으나 육체적인 실체를 얻을 수 없자 연모에 애타서 죽게 된다. 이와는 달리, 대리석으로 소녀상을 조각한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작품에 연정을 느끼고 소녀상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줄 것을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간청하여 결국 피그말리온은 이 아름다운 피조물과 결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신화의 메타포는 인간이 자신의 정신적인 이미지를 물질적인 도상(icon)에 투사하려는 뿌리 깊은 갈망이다. 허버트 리드,『조각이란 무엇인가』, 이희숙 역, (열화당, 1984), p.36. 
 나르시스에서 물에 비친 모습은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벗어난 또 다른 자아의 욕망체이다. 그러나 피그말리온의 피조물은 창조주로서의 피그말리온과 생명부여의 아프로디테라는 신과 인간의 성스런 결합의 모순과 그로 인해 태어난 갈라테아와 결혼하게 되는 인간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되묻는다. 그 혼란스런 정체성의 극대화는 일종의 신격화-보편화된 믿음의 구현물-를 낳게 되는데, 그것의 근원은 뷜렌도르프의 비너스이다. 주지하듯 뷜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조각물이기 이전에 지모신(地母神)으로 숭배되던 신이었으며, 그녀의 얼굴은 익명화되어 있다. 물론 선사인들의 솜씨가 빼어나지 못한 점도 있겠으나, 성적 정체성의 극대화는 오히려 거대한 가슴과 음부, 풍만한 배와 엉덩이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녀를 믿는 모든 선사인들의 편재된 타자이다. 그러한 타자들의 보편화된 믿음의 구현물이 그녀인 셈이다. 김근배의 자화상은 뷜렌도르프의 얼굴처럼 익명화되어 있다. 반듯하게 차려입은 서구식 양복과 큼지막한 구두가 현대인임을 중명하고는 있으나 그 내부의 발가벗은 육체는 혼란스런 인간의 구현체일 뿐이다. 이제 그 의미는 아름다움의 표상인 비너스도 아니며,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나르시스는 더더욱 아니다. 피그말리온과 유사하나 그는 그의 대리석 조각을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 모습은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다. 
허버트 리드는 인간이 자신의 형상(image)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이 곧 자신에 대한‘심상(idea)'을 외부세계에 표출해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형상은 간단히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는 없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극히 부분적인 이미지를 얻을 뿐이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이 한번에 한 방향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근배의 조각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인 자화상은 분명한 자신의 형상임에도, 즉 자신에 대한 심상을 외부세계에 표출해 보는 것이지만, 그 인물은 한 방향만을 보는 우리 모습과는 다르다. 뷜렌도르프의 얼굴이 익명화 혹은 투명화 되어 김근배의 인물 조각상의 두상은 그의 언급대로라면 스프링을 닮아서 이쪽저쪽으로 통통 튀어 다니는 사람들, 혹은 그렇게 이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시각적으로 보여 지는 인물상의 두상은 투명인간의 붕대를 연상시킨다. 그 붕대를 풀면 얼굴은 투명해지고 우리의 시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있듯 그의 조각도 우리의 시각 안에 있으나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익명화 ․ 투명화 된 인물의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그의 인물상은 다양한 인물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한얀 배를 타고 유유히 현실을 벗어나 은밀하며 신령스런 어딘가로 떠나가는 순례자, 삼륜차에 온갖 잡동사니 살림살이를 싣고 싸구려 월세방을 전전하는 유학생, 배낭을 메고 낙하산을 타는 모험가, 봇짐 같은 물건들을 지게에 한 아름 짊어진 아버지, 찢겨지고 떨어져 나간 날개를 어깨에 나사로 고정한 퇴락한 천사, 몇 개의 보따리를 꾸린 채 길가의 어느 지점에서 잠시 비를 피하는 떠돌이, 그토록 버리고자 했던 자기 자신과 삶의 꾸러미들을 상찬하듯 차려 놓고 멍하니 우리를 응시하는 그 자신 등 작가 자신이 겪어야 했던 삶의 현장과 예술가적 이상-지향을 꿈꾸는 소망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정한 테두리에 안주하고픈 자신의 의지와 반대로, 테두리에서 밀려나 월세집을 떠돌아야 했던 이태리의 유학생활이 녹아있다. 오래전 작가의 조상들이 정주문화를 받아들이고 정착지에 가계를 꾸려 갔던 것처럼 그 자신도 익숙해진 ‘정주’의 생활을 결국 낯선 땅에 여정을 푼 순간 여정의 보따리를 풀지 못하는 ‘유목’의 생활로 삶을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 
인물의 유형은 몇 가지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공통적으로‘이동하는 자’,‘떠나는 자’이지만, 그가/그들이 가고 있는 길은 전혀 다른 길이다. 먼저 자동차와 배를 이용해 이삿짐을 싣고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이다. 그는 두꺼운 정장을 차려입고 TV와 옷, 우산, 보따리, 물고기, 책, 숟가락, 가방 등을 들고 나섰다. 그는 이것들과 항상 함께 이동한다. 결코 놓거나 버리거나 잃어버리는 경우가 없다. 심한 바람에 그와 물건들이 바람 속으로 유영하듯 흩어질 때에도 모든 것은 자동차와 연결되어 있다. 어느 때는 삼륜차에 실어서 가고, 어느 때는 1인승 스포츠카에 실어서 가기도 한다. 부자여서가 아니라 서둘러서 옮겨야 하는 숨가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도 없을 때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거나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도심에 가방과 우산, 보따리와 숟가락, 책을 던져 놓고 자신도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늘 무겁고 답답한 정장을 입고 있다. 그가 자신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유학생활이 끝날 즈음이다. 이때 그는 증기선에 올라타 먼 여행을 떠나고 있다. 짐은 여행객처럼 각 객실에 나눠져 이동이 끝난 자리에서 쉼을 쉬는 듯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떠나는 자’는 자신을 속박하던 삶의 보따리로부터 벗어나고 오로지 홀로이 길을 나서는 순례자가 된다. 가만히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침묵하고 있는 그는 작은 배에 의탁하여 먼 길을 가고 있다. 그와 동행하는 것은 코끼리이다. 그리고 그가 버리고 간, 놓아버린 물건들은 거대한 기둥위에 기념화 되어 서 있다. 집과 자동차, 책과 악기, 나무는 주인을 상실한 채, 등대(表式)처럼 솟아올라 있다. 그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순례(pilgrimage)는 깊은 신앙심의 고양(高揚)과 소원성취, 속죄효과를 기대하는데 있다. 그의 작품군을 일별해 볼 때 순례의 성향은 지극히 불교적이다. 순례에 동행하는 것은 흰 코끼리이기 때문이다. 흰 코끼리에 대한 불교의 전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여래의 협시로 유명한 보살인 보현보살은 흰 코끼리를 탄 모양과 연화대에 앉은 모양으로 형상화된다. 특히 흰 코끼리에 탄 모양이 많이 그려졌는데, 그 모습은 6개의 어금니가 있는 코끼리 등에 앉아서 손을 합장하고 있다. 또한 석가탄생의 비화에 의하면, 정반왕과 결혼한지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던 마야부인이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자를 잉태했다고 한다. 그리고 협존자(脇尊者) 중부 인도 출생. '협(脇)'은  파르슈바(P嚆r飽va)의 의역, 존자(尊者)는 존칭이다. 파사(波奢) 등으로 음역(音譯)한다. (禪宗)에서는 불타의 법계(法系) 제10조(祖)로서 존경·숭배한다. 500여 를 모아 세우(世友)와 함께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편찬(제4결집)에 중심적 역할을 한 학승이었으며, 이 저서 가운데 그의 설법이 포함되어 있다. 노년에 이르러 출가하였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깨달음을 얻으려고 옆구리[脇]를 땅에 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즉 자지도 않고 수행을 쌓았다는 데서 이 호칭이 생겼다고 한다.
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협존자는 중부 인도 사람인데, 그의 아버지가 꾼 태몽에 의하면 한 마리의 흰 코끼리 등 위에 보배 좌석이 있고, 좌석 위에는 밝은 구슬 하나가 놓였는데 광채가 문으로 들어와 사방으로 비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뒤에 복타밀다 존자를 만나 곁에서 시봉을 하는데 잠시도 자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겨드랑이를 자리에 대는 일이 없으므로 협존자라 부르게 되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처음 화씨국(華氏國)에 이르러 어느 나무 밑에서 쉬다가 오른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가 금빛으로 변하면 성인이 이 모임으로 들어오리라.”
이 말을 마치자 땅이 금빛으로 변하면서 부나야사(富那夜奢)라는 장자의 아들이 합장하고 그 앞에 섰다. 존자가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야사가 대답했다.
“내 마음은 가는 곳이 없습니다.”
“너는 어디에 머무는가?”
“내 마음은 그침도 없습니다.”
“너는 머무름도 없다는 말이냐?”
“모든 부처님들도 그러하십니다.”
“너는 모든 부처가 아니다.”
“모든 부처라 해도 존귀한 자는 아닙니다.”
존자가 이어서 게송을 말했다.
 
“이 땅이 금빛으로 변하니
  성인이 이르러
  보리수 밑에 앉아서 
  깨달음의 꽃을 피울 것이다.” 야사도 게송을 말했다.
“스승께서 금빛 땅에 앉아
항상 진실한 이치를 말씀하여
빛을 돌이켜 비추도록 해서
나를 삼매에 들게 하시네.”
존자가 그의 뜻을 알고 곧 제자로 삼고, 또 구족계를 주었다. 그리고 다시 분부했다. “여래의 정법안장을 그대에게 전하니, 그대는 잘 지니라.” 그리고는 이어 게송을 말했다.
“참 본체는 스스로 이러-해서 참다우니
참다움으로써 진리를 말한다
참되게 참법을 깨달으면
행할 것도 그칠 것도 없다.”  

 
협보살의 협(脇)의 의미가 옆구리를 뜻하는 것은 늙어 출가 했기에 하루라도 빨기 깨달음을 얻고자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았다는데서 유래한다. 이처럼 흰 코끼리는 깨달음과 광명의 상징으로 등장하며, 때로는 깨달음으로 향하는 침묵의 여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순례자로서 ‘떠나는 자’는 협존자와 야사의 대화처럼 그 내부에 환한 꽃의 향기만이 있을 뿐이다. 그에게 물어보라. 

“너는 어디로 가는가?”
“내 마음은 물고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너는 어디에 머무르는가?”
“내 마음은 풀잎과 낙엽위에서 흩어집니다.”
“너는 머무름도 없다는 말이냐?”
“모든 집이 그러합니다.”
“너는 모든 집이 아니다.”
“모든 집이라 해도 존귀한 곳은 아닙니다.”

존자와 ‘떠나는 자’즉 그와의 대화는 이렇게 진행된다. 그는 사실 아무런 대답과 의문을 갖지 않고 작은 배에 올랐을 뿐이다. 그 무게는 흰 코끼리의 무게와 같다. 가볍거나 혹은 무겁거나 이다.
 
가볍게 넘실거리다 도착한 집, 떠오르는 향기 
그와 동반하는 흰 코끼리는 서로를 판가름 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는 그 자신이다. 그리고 그의 편재로 드러나는 새로운 조각물들이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다. 그것들은 그를 실어 나르는 도구들인데 작은 배, 낙엽, 자동차, 낙하산 등이 그것이다. 지극히 시간의 여정을 품고 있는 이 도구들은 그와 만나 모종의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의미를 확대하고 있다. 
배는 그 혼자 타고 가는 배, 코끼리만 타고 가는 배가 있는데 이 배에는 노가 없다. 흐르는 물에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다. 코끼리와 그가 함께 배에 오르는 경우 둘은 서로를 마주보지 않는다. 둘은 결코 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 배 머리에 서 있는 것은(다가올 미래) 그 자신이며, 배가 지나간 자리(과거)는 코끼리가 서 있다. 이 배에는 세 개의 노가 있으며, 물결에 반사된 모습에는 배만 있다. 물에 비친 배는 아무도 있지 않다. 배는 배로서 홀로 흘러가고 있다. 이 둘의 관계는 때로 수평을 가기도 하는데, <시소>라는 작품은 둘의 관계를 극명하게 성찰한다. 빌딩 꼭대기에서 시소를 타고 있는 그와 코끼리, 코끼리는 그의 마음인 물고기를 코로 물고 있다. 여기에서 둘은 평행을 유지한다. 
그가 없는 자리, 혹은 장소는 두 개의 오브제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하나는 가방이며, 하나는 집이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 했던 것들은 이삿짐 보따리들인데, 차에 한가득 실고 다니던 잡동사니였다. 그러나 그의 가방은 잘 정돈된 보따리와 같다. 손잡이가 달리 가방 안에는 그동안 갖고 다니던 책과 우산, 숟가락과 TV와 옷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이제 어디든 이것만 들고 가면 끝이다. 짐을 꾸리고 풀어야 했던 삶이 순간 정리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가방은 늘 주인이 손을 내밀어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갈 때까지 귀퉁이에서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집은 여정의 끝이자 시작이다. 작은 배로 가볍게 넘실거리다 도착한 집은 적막하다. 도착한 그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잘 정돈된 책상과 탁자, 옷과 TV, 그리고 분신인 코끼리가 있을 뿐이다. 치지직 거리며 TV가 켜진 거실에서는 물 흘러가는 소리가 나는 듯 하다. 그가 방에서 꺼내어 좀 더 크게 제작한 TV에는 넘쳐나는 물고기 떼와 코끼리 떼로 터질 지경이기 때문이다. 흔적도 없이 다시 떠나간 그의 자리에는 물의 향기가 떠오르고 있을 뿐이다. 
김근배의 조각은 ‘그’가 되어 스스로 체험한 여정의 흔적, 상처, 기억, 그리고 깊은 성찰이 집적되어 있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톤유쿡의 고뇌가 500년의 세월을 건너와 전하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21세기의 현장에서 굳이 넷이라는 가상의 현실뿐만 아니라 실제의 현실에서도 유목적 삶을 시작해야 하는지 모른다. 
옛날 옛적 한 태국 왕이 신성한 영물로 간주되는 ‘흰 코끼리(white elephant)'를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태국 왕은 흰 코끼리가 결코 선물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흰 코끼리가 태국 궁중 서열상 자신보다 더 높은 지존의‘신성 코끼리’로 모셔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죽일 수도 쫓아 낼 수도 없는 코끼리는 왕의 골칫거리 였다. 이 때문에 영어 단어 white elephant는 아예 ‘골칫거리’라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한국경제신문. “한 장관의‘흰 코끼리’”. 2001.6.12.
 
김근배의 작품에 등장하는 코끼리도 자신의 내적 갈등이 심화될 때는 오히려 가볍움이 아니라 그러한 무거움으로 변할 수 있다. 8년여의 세월을 이민하고 돌아 온 그에게 이제는 유목 그 자체가 화두는 아닐 것이다. 그가 세월을 통해 깨달았듯이 세계는 그 자신과 무관하게 움직이며, 유목하게 만든다. 아주 먼 세월을 되돌아가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의 유품이 있는 현장에서 선보이게 될 그의 작품들의 의미는 그래서 그가 안고 가야할 작은 화두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작품은 세상과 만나는 통로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