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형의 행복론, 풍요의 꿈을 좇는 일상의 행진-김윤섭 | |
김소형의 행복론, 풍요의 꿈을 좇는 일상의 행진 글_김윤섭(미술평론가,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행복이란 무엇일까? 김소형의 작품은 ‘행복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눈에 보이거나 직접 손에 잡히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보통은 마음을 비우면 행복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속이 빈 상자’를 가지고 태어나서 채우고 비우길 반복하는 것일까, 아니면 ‘꽉 찬 상자’였기에 조금씩 덜어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일까? 과연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는 사람의 욕심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김소형은 그림을 통해 행복의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한다. 오늘날 현대인은 넘치도록 풍요로운 무한의 세계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늘 부족함으로 목말라 한다. 이런 행복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흔히 행복은 겉으론 보이지 않아 ‘행복함을 느끼는 감정의 상태’로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을 그런 ‘감정을 느끼는 상태’로만 얻을 수 있을까. 김소형 작가는 의외로 행복을 찾는 간단한 방법을 제시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죽음으로 이르기까지의 삶 중에서 인간은 인간들과 얽혀 모든 이야기들을 전개한다. 인간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결국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서로가 의지하며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행복이 찾아온다. 그들의 이야기, 즉 인간의 모습들을 그려보고 싶어서 우리의 모습을 작은 인형으로 제작하여 오브제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늘 풍요롭고 행복하길 바란다.” 김소형 작가가 말하는 행복은 ‘서로 의지하며 하나가 되기 위해 더불어 사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실제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군중(群衆)’―일일이 손으로 만든 작은 인형들―이다. 특히 ‘인간들이 살아가는 공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 안에서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한 사람이 다니면 작은 흔적이 남지만, 많은 사람이 다니면 길이 된다는 말이 있다. 김소형 작가 역시 개인의 흔적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진 생동감 넘치는 정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래서일까, 김소형의 그림에선 적어도 많은 이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극심한 외로움을 느낀다는 ‘군중 속의 고독’은 찾아볼 수 없다. 김소형 그림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요소는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목적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외롭거나 불안한 감정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여도 좋다. 삶을 제대로 살려면 간혹 지성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로는 머리보다 발이 더 앞설 수도 있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행동과 실천이 중요하단 것을 보여준다. 프랑스 계몽가 루소의 “강물의 흐름에 따라 부드럽게 즐겁게 배를 저어라. 이것이 곧 삶이다. 산다는 것은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일이다.”라는 말처럼, 김소형은 감정보다 ‘어떤 행위’에 주목하고 있다. 잰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행진’하는 김소형의 사람들, 그들은 마치 ‘행복은 마냥 편안하고 만족스러움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힘들고 불편한 부정적인 측면을 감수하는 과정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또한 배고픈 이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맛있는 음식을 먹는 상상보다, 그 음식을 얻기 위한 고된 노동을 감내할 때 더욱 값지다”는 기본적인 삶의 지혜를 전하는 듯하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경주를 시작한다. 그렇다고 죽기 위해 태어났다면 얼마나 허망할까? 결국 죽음은 한 순간이지만, 삶은 많은 순간이다. 일상적인 삶은 매 순간의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소형이 포착한 행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욱 애절하면서도 동시에 더욱 숭고해 보이는 것은 아닐까. 김소형은 작품 <가는 길> 혹은 <행진>의 군중을 통해, 무수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법정 스님 역시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다정한 친구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한 통화, 그 목소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늘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행복은 크고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다.”라고 했지 않은가. 김소형의 작품도 생을 다해 떨어지는 낙엽도 어여쁘듯, 일상의 매 순간은 죽어가는 과정보다, 행복한 삶을 엮어가는 씨줄과 날줄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소형의 최근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모티브는 마치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부유하는 사람들’의 형상이다. 그렇다고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은 아니다. 점점이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나무가 되기도 하고, 산이 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자연을 참으로 좋아한다. 자연의 아름답고 경이로운 모습을 보면 행복해진다. 아무런 욕심 없는 자연 속에서‘무(無)’로 돌아가는 동안 행복은 찾아오듯이, 우리 모두가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물고기 형상에 빗댄 구성의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왔을까? 작가의 고향은 울산의 바닷가이다. 고향에 대한 기억 속에서 물고기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때문에 김소형의 작품 <어릴 적에>, <꿈의 사다리>, <하나가 모여> 등을 더욱 편하게 이해하려면 먼저 물고기의 상징성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동서양에서 물고기 도상(圖像)의 상징성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 동양의 불교에선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아 목어(木魚)로 만들어 수행자에게 ‘불면면학(不眠勉學)’의 본으로 삼았다. 서양의 기독교 역시 물고기의 형상은 아주 오랫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상징하고 있다. 한편으로 아프리카 일부에서는 물고기가 부와 풍요, 그리고 치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한 ‘생명의 물을 주는 존재’로 여기는 부족도 있었다 한다. 우리 민족 역시 민화에 자주 등장시켰는데, 튀어 오르는 물고기 그림으로 입신출세를 표현하거나, 배가 부른 물고기 형상으로 풍요를 상징했다. 김소형 작가의 물고기 모티브는 종교적인 측면보단 ‘일상 속에서의 풍요로움을 통한 행복’을 염원하는 것에 가깝다. 작품 <하나가 모여> 한 점엔 두터운 마티에르의 물감 층을 올려 표현한 사람들은 무려 수천 명이 넘게 등장한다. 하나 같이 ‘어떤 희망’을 좇듯 위를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 <꿈의 사다리>나 <어릴 적에> 작품 역시 제각각 다른 감정을 대변하듯, 색색의 사람들은 서로의 몸을 맞대어 거대한 나무를 만들고 있다. 헤르만 헤세는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 그것이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무수히 작은 사람들을 등장시킨 김소형의 작품 역시 진정한 행복이란 ‘풍요의 꿈을 좇는 일상의 행진’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되묻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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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띠에르, 시간, 그리고 흔적의 여행_유선태 (미술평론가) | |
마띠에르, 시간, 그리고 흔적의 여행 - 유선태 (미술평론가) 김소형의 초기 작품들에는 사실적인 형상의 표현과 더불어 방법론적인 추구를 엿보게 한다. 근래 그가 보여주는 일련의 작업들은 과거의 섬유라는 재료와 테크닉적인 한계성을 탈피하고 다양한 오브제나 마띠에르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관심있게 주목해야 할 점은 작품을 구성하는 내용이 일층 개념적이고 감성적이기도 하며, 주관적인 내면의 의식이나 상황이 표현의 주체를 이루어가고 있다는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자신의 조형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새로운 예술적인 경험에 대한 강한 갈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가 김소형에게 있어서 예술의 의미는 시간이라는 비정형성에 자기 자신을 각인하는 행위이며, 삶이라는 현실의 거울에 자신을 투영하고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의 작업에서는 은밀하면서도 속삭이듯 웅얼거리는듯한 공명들이, 묵시적인 응시와 같은 짙은 관조가, 그리고 치열하면서도 격정적인 내면의 이야기들을 감지할 수 있다. 다양한 재료에 대한 물성적인 실험과 추구, 마모되고 낡은 오브제의 도입, 날카롭고 거칠게 표현된 마띠에르의 질감, 자연스러운 금속 녹물의 배어남, 부조되거나 긁혀진 상징적인 형상들은 작가의 내면을 토로하게 하는 표현수단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그가 사용하는 마티에르나 오브제는 단순히 물질적인 유희나 감각적인 우연성을 유발하는 종속적인 도구나 표현수단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삶의 마디마디에 묻혀져버린 어린시절의 기억들에 대한 회상, 비밀스럽게 숨겨진 시간 속에서의 여행, 지워지고 상실되어버린 것들에 대한 흔적찾기, 작가로서의 삶과 현실사이의 불균형으로부터 오는 고뇌와 격렬한 몸짓들의 직설적인 표현들인 것이다. 그것은 내면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인간의 진실한 얼굴표정과도 같고, 시간들이 녹아있고 삶의 흔적들이 배어있는 인간의 표피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서는 인간적인 감성이 묻어 나오고 가식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확연히 드러난다. 방법론적인 추구나 반복적인 작업으로부터 오는 타성적인 안주에 빠지기 쉬운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고집스럽게 지켜가고 있는 작가도 흔하지 않다. 작가 김소형은 그러한 작가들 중에 하나이다. 작가들에게 있어서 안주를 거부하고 관념적인 낡은 틀을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은 당연한 태도이다. 그러나 일생을 두고 이러한 살아있는 정신을 간직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작가다운 작가, 살아있는 정신을 지닌 작가가 되기가 어렵다. 김소형의 첫 전시회는 이러한 작가정신의 시작을 의미하며 첫 시험무대이기도 하다. 나는 그가 첫 전시회를 준비하였던 마음으로 작가로서의 길을 가주었으면 하는 강한 바램을 갖고 있다. 이러한 바램 때문에 작가로서의 김소형에 대한 기대도 그만큼 크며, 우리는 이 작가에 대하여 채찍질보다는 용기를 그리고 관념적인 잣대가 아닌 너그러운 시각으로 그의 작품을 보아야 하리라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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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더불어서 더 고독한 사람들-고충환 | |
김소형의 작업 사람들과 더불어서 더 고독한 사람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천 조각, 폐목과 녹슨 경첩, 부식된 철판, 빛바랜 회벽을 연상시키는 질박한 마티에르가 페인팅과 어우러진 김소형의 초기 작업은 그저 잡다한 오브제들을 그러모아 놓은, 감각적인, 그리고 회화적인 형식실험처럼 보였다. 하나같이 시간을 머금은, 존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오브제들이다. 이처럼 시간을 머금고 존재의 흔적을 간직한 오브제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희한하게도 어떤 풍경을 불러일으킨다. 그 풍경은 어떤 외재적인 풍경이라기보다는 시간의 저편에서 건져 올린 시간풍경이며, 작가의 내면에 가라앉은 내면풍경이며, 기억으로 되살려낸 기억풍경이다. 아득한 향수를 자아내는 그리운 풍경이다. 생생한 것들이며 실재하는 것들이 시간의 풍화로 산화하고 부식되고 녹아내린, 존재가 흔적으로 화해지고 정서적 질감으로 환원된, 그런 정서의 앙금이며 감성의 침전물 같다고나 할까.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이 시간의 화신들을 내 안의 형상 아니면 내면의 풍경 그리고 기억의 흔적이라고 부른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존재에서 부재로, 유에서 무로 건너가는 것들, 기억에서마저 아득해진 것들이 남긴 흔적을 부여잡는다. 그 행위는 시간과 더불어서 시간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들을 애도하는 일종의 기념비적 제의랄 만하다. 그리고 작가는 격자 패턴을 그린다. 추상처럼 보이지만 추상이 아니다. 사람들 저마다에게 할당된 방을, 집을, 공간을, 건물을, 도시를, 우주를 그린 것이다. 비록 그림에 사람은 없지만, 격자가 사람들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숨어있는, 아니면 꿈을 꾸는 고독한 모나드들을 그린 것이다. 한갓 단자들, 원자들, 모나드들로 축소된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 것이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숨어 있던 방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나와 웅크리고 앉아있거나 서성거린다. 줌아웃 기법으로 시점을 뒤로 빼보면 마치 원거리에서 포착한 도시 이미지와도 같은 무수한 격자들이며 모나드들 속에 그 사람들마저 묻힌다. 그렇게 작가는 격자 패턴을 매개로 도시 이미지를 그리고, 거대한 도시의 한 부속으로 매몰된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다. 이처럼 적어도 외관상 작가의 전작에서 사람들은 등장하지가 않는다. 그는 다만 흔적이 불러일으키는 감성의 침전물로 그리고 도시의 모나드들로 암시될 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도 전면화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근작에선 사람들이 그림의 표면 위로 전면화한다. 잠재적인 사람들이 수면 위로 나온다는 점에서, (삶의 혹은 존재의) 풍경에서 사람들로 이행하는 것에서 전작과 근작은 하나로 통하면서 구별된다. 소재 상으로 사람과 사람들(군상)을 테마로 한 것인데, 이는 크게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뉜다. 천으로 만든 사람들과 물감튜브를 짜서 그린 사람들이다.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실상 그 크기는 사람이 무색할 정도로 작다. 각각 새끼손가락 한마디를 채 넘지가 않는다(더러 이보다 좀 더 큰 것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이처럼 비록 그 크기는 작지만 정교한 사람들이 한눈에도 노동집약적인 작업임을 알겠다. 형형색색의 사람들 중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채로운 사람들이 어슷비슷하지만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실재 그대로이다. 반복의 연속 같지만 사실은 같은 날이 하나도 없는 일상(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 그대로이다. 이처럼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사람들이 저마다의 차이와 다름을, 그리고 삶의 다양한 질에 해당하는 희로애락을 주지시킨다. 살다보면 빨간색처럼 화려한 날도 있고 노란색처럼 화사한 날도 있다. 줄무늬 패턴처럼 맵시 있는 날도 있고 체크무늬처럼 심심한(다운된? 침착한?) 날도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허허로운 화면과 어우러져서 풍경의 한 요소를 이루기도 하고, 나무를 타 오르기도 하고, 무슨 새나 되는 것처럼 나무의 잎과 꽃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풍경을 이룬다. 인상적인 것은 나뭇잎과 꽃 대신 나뭇가지에 점경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인데, 수목에서 뻗어나간 나뭇가지들이 실핏줄을 연상시키고, 얼기설기 엮여있는 관계망을 연상시키고,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돌고 돌아 나와 네가 만나지는 인연의 망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일일이 천으로 정교하게 만든 사람들의 풍경이 시각적(알록달록한 색깔들에 연유한)이고 촉각적(텍스추어 곧 질감에 의한)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이처럼 천으로 만든 사람들과 함께 물감 튜브를 짜서 사람들을 그린다. 다채로운 색깔들을 동원해 다채로운 사람들을 그린다. 천 인형도 그렇지만, 튜브로 짜서 그린 사람들 역시 이목구비를 다 갖추고 있는 것이, 더욱이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저마다 표정이 살아있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고 사실적인 묘사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작가의 그림은 재현적인 그림은 아니다. 다만 색색의 물감을 짜서 몸통과 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머리에 이목구비를 약식으로 그려 넣은 것뿐인데도 생생하다. 아마도 알록달록한 색깔 탓이 클 것이다. 물론 더러 얼굴이 생략된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마저도 이목구비를 그려 넣은 얼굴과 어우러져서 오히려 생생함을 더한다. 그렇게 저마다 생생한 사람들이 빼곡하다. 사람들로 빼곡한 군중을 그린 것이고, 알록달록한 색깔들이 촘촘한 패턴을 그린 것이다. 가까이서 보면 사람들이 보이고, 멀리 떨어져서 보면 군중이 보이고 패턴이 보인다. 그렇게 사람들은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패턴 속에 묻힌다. 바로 군중 속의 고독을 그린 것이다. 군중은 보편적이고 익명적인 존재다. 개별적 존재가 보편적 존재 속으로 사라지고 유명한(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는) 개체가 무명한 존재 속에 묻힌다. 양가성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별성을 보존하고 싶고(알록달록한 색깔들에서처럼 저마다의 색깔을 잃고 싶지가 않고), 동시에 익명적인 존재 뒤에 숨고 싶다. 모순이고 이율배반이다. 그렇지만 어쩌랴. 류시화 시인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다. 나와 네가 부닥칠 만큼 살을 맞대고 있으면 살가워져야 하는데, 그래야 마땅한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그리움은 거리가 있어야한다. 거리가 없어지면 그리움도 없어진다. 너무 가까우면 거리가 그립고 그리움이 그립다. 거리를 그리워하고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고독도 마찬가지. 고독은 거리가 있어야하고 그리움이 있어야한다. 그렇게 나는 네가 곁에 없어서 고독하고 네가 곁에 있어도 고독하다. 이처럼 작가는 사람들로 빼곡한 그림들을 매개로 군중 속의 고독을 그린다. 개별적인 존재와 익명적인 존재(군중)와의 이율배반적인 관계를 그리고, 자기를 보존하면서 상실하는 욕망의 이중성 내지 양가성을 그린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군중 속으로 숨는다고 했고 패턴 뒤에 묻힌다고 했다. 패턴 뒤에 묻힌다? 작가의 그림은 사람들을 그린 것이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사람들보다는 알록달록한 색깔들이 먼저 보이고 색깔들이 어우러진 패턴이 두드러져 보인다. 나비파 화가이면서 이론가이기도 한 모리스 드니는 그림이란 어떤 소재를 그린 것이기 이전에 노란색이나 파란색으로 색칠해진 평면이라고 했다. 그 말은 재현적인 회화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있고, 본격적인 추상미술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고,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주의를 뒷받침하는 전언을 포함하고 있다.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건 그림의 내용보다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이다. 작가의 그림은 알록달록한 색깔들의 패턴이 먼저 보이고, 그리고 사람들이 보인다. 작가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주의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내용 쪽으로 이행해간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대한, 형식주의에 대한 이중적인 관계를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관계에 대한 인식이 작가의 그림을 확장시킬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작가가 지나쳐온 지점들, 이를테면 내면풍경과 모나드로 축소된 사람들 그리고 군중과 더불어서 자기를 보존하면서 상실한 현대인에게서 보듯 작가의 관심은 시종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고, 그 초점이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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