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조각으로 나타난 영혼의 진화, 이행균의 조각_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 |
사실주의 조각으로 나타난 영혼의 진화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무사유. 이 말의 표면적인 의미는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생각을 결여한다는 수동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비운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실천하고 암시하는 것이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소크라테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공자), 그리고 자기 자신을 비우는 행위(불교) 등을 내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불교에서의 자신을 비우는 행위는 진아(진정한 자기)를 획득하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로서 행해진다. 그렇다면 진아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비워야할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화된 나, 제도화된 나, 인공적인 지식의 산물인 도덕과 윤리와 관습에 길들여지고 종속된 나로서, 진정한 나를 옥죄고 속박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휴머니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마저 재고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인간적이란 말이 사회화되고 제도화되고 관습화된 도덕적 인간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사회화되기 이전의 나, 제도화되기 이전의 나, 관습화되기 이전의 자연적 인간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이행균은 반가사유상(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우리 식 버전인)의 포즈를 닮은 인체조각으로써, 그리고 마치 스톤헨지의 거석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두상조각으로써 이러한 주제를 실현한다. 그런데 인체조각에는 머리가 없고, 두상조각은 그 속이 파내어져 있다. 이로써 자기를 비워내는 무사유의 실천논리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각각 인체의 사실주의조각과 두상의 양식화되고 추상화된 조각을 대비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로부터는 진정한 사유, 진정한 지식(지혜), 진정한 나에 대한 명상의 계기가 느껴진다.
윤회. 이 말 속에는 변화하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다. 즉 모든 존재는 그 자체 고정불변의 개체가 아니라, 변화하고 변질되며, 썩고 부패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순환한다. 특히 존재를 이루는 이질적인 계기들이 서로 고리를 이뤄 물고 물리며, 이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분되지도 않고 그 계기들을 나눌 수도 없다. 이행균은 거대한 축을 중심으로 해서 천천히 움직이며 돌아가는 해골과 아기 조각으로써 윤회하는 존재의 비밀을 형상화한다. 이때 축은 거대한 유두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그 자체 생명의 샘과 존재의 근원을 암시하며,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거대한 자궁(모태)을 암시한다. 이처럼 생명의 근원을 축으로 하여 해골과 아기가 서로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해골과 아기는 애당초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하지만, 전체 조각이 돌아가면서 그 각각의 상이 하나로 겹쳐지게 된다. 해골과 아기가 겹치고, 순환하며, 나아가 동격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해골은 죽음을, 아기는 삶을 암시한다. 이처럼 의식의 지층에서 구분돼 보이는 이질적인 두 계기가 무의식의 지층에서는 서로 만나게 된다. 프로이드는 의식보다 무의식을 더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그리고 무의식의 지층에서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 교차한다고 보았다. 한편, 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스(삶)와 타나토스(죽음)가 서로 단절된 것에서 인간의 한계를 보았으며, 이처럼 단절된 불연속성의 끈을 잇고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에서 그 한계를 극복하고 전인적 인간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이는 그대로 윤회에 대한 동양적 사유와 통하는 것이며, 윤회를 주제로 한 이행균의 조각에 나타난 존재론적 인식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윤회, 상생. 윤회로 나타난 주제의식이 다른 조각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작가는 거대한 화강암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속을 파낸 한 쌍의 조각을 만든다. 그 형태는 마치 각각 음과 양으로 대비되는 태극문양을 떠올리게 한다. 서사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윤회의 주제의식을 음과 양의 상호관계성 혹은 상호작용성에 바탕을 둔 태극의 상징적 형태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음은 존재의 원리를 의미하며, 양은 그 원리가 드러나게 돕는 존재의 형상을 의미한다. 결국 음이 없는 양은 무의미하고, 양이 없는 음은 인식될 수가 없다. 주제에 나타난 상생의 의미는 이처럼 존재의 이원론적인 비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삶과 죽음이 물고 물리는 윤회에의 공감을 표명하는 것으로, 이질적인 계기들을 봉합하고 존재의 처음 상태(전인적 인간, 진아, 일자)를 회복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작가는 그 속을 파낸 조각의 빈 공간에다가 물을 채워 넣는데, 이것이 마치 수조처럼 보인다. 사실 물이야말로 온갖 이질적인 계기들을 자기 속에 포섭하여 흐르게 하는 윤회, 상생, 순환의 형상화, 그 진정한 화해와 치유의 계기가 아닌가 싶다. 작가는 이 수조 속에다가 일종의 나비 모양의 모형을 띄운다. 그 속을 파낸 겉돌 조각을 봉합해 만든 모형을 물에 띄운 것으로서, 부력을 이용한 수상조각을 실현한 것이다. 물에 뜨는 돌, 중력을 배반하는 돌, 마치 나뭇잎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돌로 나타난 이 모형은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재고하게 만든다. 이와 함께 작가는 자체 내에 동력을 도입함으로써 일종의 키네틱조각을 실현한다. 동력의 차용과, 같은 극끼리 서로 밀어내는 자석의 차용에 의한 움직이는 조각을 통해서 작가는 유희적 요소를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조각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생명의 고리. 작가는 연이어진 고리를 매개로 하여 거대한 손의 형상과, 그 고리 중 하나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아기를 연결시킨다. 아기는 고리에 연결돼 있고, 고리는 손에 연결돼 있다. 아기는 존재를 암시하며, 고리는 존재의 유전자 형질을 결정하는 DNA의 사슬을 암시한다. 그리고 손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는 신적 존재(혹은 의식보다 결정적인 무의식)를 연상케 한다. 이로써 윤회, 순환, 상생으로 나타난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에다가 생물학적 사실이 덧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 생물학적 사슬은 보이지 않는 신의 손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로써 작가는 인간복제와 유전자공학으로 나타난 세속적인 지식을 풍자하는 한편, 존재론적 사실이 과학적 사실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행균은 이렇듯 생명의 고리라는 주제의식을 서술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하는가 하면, 이를 퍼포먼스의 형식으로써 변주하기도 한다. 거대한 화강암 원석의 표면에다가 착암기를 이용해 구멍을 뚫고, 쉐루야(일종의 지렛대)를 이용해 원석을 낱개의 조각조각들로 쪼갠다. 그리고 이렇게 쪼개어진 조각들을 지게차를 이용해 들어올려 재구성하는 방법으로써 일종의 공간구성 혹은 공간조형 작업을 전개하는 것이다. 전시 당일 현장에서 선보이는 이 작업에서의 부분으로서의 조각돌 하나하나는 생명의 계기들을 암시하며, 이를 재구성하는 행위와 과정은 그 계기들이 어우러져 진정한 생명을 잉태시키는 상생의 원리를 추상화한 것이다. 이 작업은 사실주의 조각으로 나타난 작가의 다른 작업들과는 사뭇 다른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작업은 그 자체 부분 부분들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전체 형상을 추출해내는 공간구성으로(생리적으로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 그리고 현장성과 일회성이 강조되기 마련인 퍼포먼스(전통적인 조각과는 그 생리가 다른)로까지 조각의 범주를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진화. 이행균은 근작들을 관통하는 대주제를 ‘영혼의 진화’라고 일컫는다. 무사유, 윤회, 상생, 생명의 고리로 나타난 소주제들을 영혼의 진화라는 큰 틀 안에 아우른 것이다. 적어도 작가의 주제의식 속에서의 진화된 영혼이란 사회화되고 제도화되고 문명화된 인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회화되기 이전의 인간, 제도화되기 이전의 인간, 문명화되기 이전의 인간을 겨냥하며, 이로써 존재론적 인간과 전인적 인간의 회복을 꿈꾼다. 더불어 영혼의 진화는 결코 생물학적 사실과 과학적 사실로 나타난 세속적인 지식으로는 거머쥘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지식을 비워낼 때에야 비로소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사실주의조각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는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묘사와 서사, 그리고 그 서사를 함축해낸 상징적인 문법으로써 이러한 존재론적 인식을 설득력 있게 전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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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발견, 따듯한 리얼리티의 조형- 이행균의 조각언어_김종길 | 미술평론가 | |
삶의 발견, 따듯한 리얼리티의 조형- 이행균의 조각언어
김종길 | 미술평론가
조각가를 ‘장인’이라 부르는 것은 이제 현재성이 없다. 탁월한 기능인 이상의 의미로 이해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의미는 연륜과 그 시간성에서 발산되는 우수한 예술성을 동시에 갖는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대 하나의 ‘경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1세기, 기계문명의 진화가 고속화되는 시대에 장인의 가치는 그래서 더 중요하고 필요한게 아닌가 한다. 전덕제와 이행균의 작업을 보면서 떠 오른 것은 솔직히, 장인의 손맛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필자의 인식이 구태연하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돌만을 고집한 채 수십년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들의 작품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조형을 완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작업장 자체가 거대한 자궁과 같기 때문이다. 돌 조각은 노동이다. 노동을 말하지 않고 돌 조각을 이해하기 힘들다. 돌의 노동은 몸으로부터 온다. 몸의 노동은 전신성을 요구한다. 즉 온 몸의 감각을 동원해야만 하나의 돌을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몸각을 말함이다. 몸각의 신경계를 최대한 확장하여 돌과 하나의 상상태로 연결하는 것, 바로 거기서 돌의 연금술이 탄생한다 할 것이다.
이행균의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은 주제들고 스크럼을 짜듯 꽉 짜여 있었다. 우주, 인간, 순환 그리고 시간의 문제들이 미학적 의미로 무장해 등장한 작품들은 항후 조각가 연구에서 거론될 수 있는 작품들로 보인다. 돌의 선별에서 매스의 형성까지 어느 것 하나 제 손을 거치지 않는 작업 방법은 전덕제의 경우처럼 지난한 노동의 연속이다. 특히나 돌의 경우 떨어져 나간 파편만큼 시간의 겹이 쌓이는 것이기에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보여준 거대한 돌 퍼포먼스와 공간을 압도하는 작품들은 그가 한국 조각계에 던지는 작은 화두였다. 이런 일련의 활동과 작업에서 그는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기도 했다. 여타의 예술이 그러하듯 미학과 철학이 앞서면 대중이 외면한다. 반면, 지나치게 대중적인 것도 대중은 원하지 않는다. 조각가 이행균이 세상과의 접점을 시도하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그가 최근 조각한 작품들은 어렵지 않다. 재질의 마티에르를 표현하는 방식과 조형의 형식도 쉬운 언어를 택하고 있다. 시각적으로 쉽다는 것은 형상의 사실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작품의 향취가 고루하지 않고 보편적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들에서 이행균은 전덕제와 같이 일상에서 조형을 길어 올렸다. 전덕제가 인형에 주목했다면 이행균은 친근한 식물성이다. 매끈하게 다듬은 가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조각품이 되고 있다. 이렇게 만든 작품들의 낱낱은 호감을 갖게 되고, 어느 새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아련한 과거의 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과거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여기, 그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작품에서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이행균의 따뜻한 시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번 작품들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두 작가 모두 단일성의 작품이 아닌 일종의 ‘상황조각’을 연출하고 있단 점이다. 하나의 작품에서 완결점을 찾는 것이 근대조각의 특징이라면, 최근 조각의 흐름은 서사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상황’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변별된다. 전덕제와 이행균의 이번 작품들은 작고 아담한 일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일상은 수채화 같기도 한 풍경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어른이 되어 상실해버린 순수의 표피가 거기에 있고, 또한 달리 보면, 어른의 세상을 동경하는 아이들의 욕망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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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삶, 사유의 조각가(장석원 / 미술평론가, 전남대 교수) | |
돌과 삶, 사유의 조각가 장석원 / 미술평론가, 전남대 교수
20여년 간 돌을 다뤄온 조각가, 그는 어느 사이에 돌처럼 육중하고 든든한 존재가 되었다. 최근 그가 서울과 부산에서 보인 대리석과 브론즈, 대래석과 화강암을 결합하여 재작한 ‘가족’, ‘결혼 이야기’, ‘독서하는 소녀’등의 작품은 갤러리 공간이 요구하는 대중성과 상업성을 감지케 하는 것이지만 그는 여전히 조각을 자신 만의 뚝심으로 밀어가고 있다. 이 전의 개인전을 통하여 그는 조각 작품으로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여 주었다.
2003년도의 ‘두개의 나’ 같은 작품은 단단하기 그지 없는 오석으로 제작된 나-두발로 선 채로 사색하는 인물과 해부학적으로 묘사되어 거꾸로 선 인물을 그리고 있다. 그 두 개의 인물은 같은 ‘나’이고 분리할 수 없으면서도 모순되고 있다. 그가 조각으로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문체와 사색이 담겨 있다. 2006년도의 작품 ‘무사유’ 시리이지는 그 사색의 여지를 더 진전시킨다. 목 잘린 반가사유상 또는 생각하는 사람처럼 육중하게 자리잡은 남자의 건장한 신체라든지, 두뇌 공간이 텅 비워진 채 추상화된 얼굴의 형태 등은 곧 그의 조각이 매스나 조형성 또는 시각적 차원을 넘어 ‘사유’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에로 이동하는 단서를 보인다. 근작 ‘생명-도시’에서는 달걀 형태의 깨진 틈 사이로 LED광을 내뿜는 도시의 모습이 들여다 보인다. 그것은 도시이고 돌이며 개념이다. 그는 돌로서의 형태적 일류젼을 넘어 사물과 개념으로 바뀌는 실험을 계속한다. 2005년도 작 ‘부유하는 섬’역시 내부에 전류로서 자석이 작동케 해 물 위의 돌이 계속 부유하도록 고안했다. 그는 돌을 사용하지만 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행균은 아직도 자신의 조각을 실험하고 있다. 돌과 브론즈를 조합하여 ‘독서하는 여인’을 만든 경우 역시 브론즈라는 재료로서 묘사할 수 있는 인물의 소조적 스킬을 최대한 살리면서 동시에 돌의 투박하고 묵직한 재료적 느낌을 가미시킨다. 물론 이러한 작품은 대중들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이 실려 있다. 그의 삶에 있어서 조각은 현실이었다. 끊임없이 작업을 이어 가야 했고, 그것이 예술의 참된 의미였다. 작업에 부여되어야 할 노동과 기술과 사유는 작품의 형성 과정에서 필요조건이면서 동시에 일관성을 저해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과 그 진실을 전달하는 감동의 힘, 그것이 아직 미약하게 실험적이다. 어느 날 그 부분이 화산처럼 폭발하게 될 때, 그는 사유와 기술과 노동은 하나의 섬광처럼 그 자신과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게 될 것이다.
20년의 세월속에서 그는 강관욱, 전뢰진, 김영원 등 굵직한 스승들을 만나면서 조각가로서의 입지를 다져왔다. 그의 작품속에는 스승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영향이 단편적으로 박혀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신 만의 예술을 추구한다. 단단하게 더 단단하게, 성실하게 더 성실하게 나아간다. 그러나 더 겸허하게 더 솔직하게 문제의 본질에 부딪치기를 희망한다.
그는 돌 판에 가족을 부조 형태로 새겨 넣었다. 한번 새겨진 형상은 돌 그 자체처럼 영원히 그 자리에 남게 될 것이다. 돌은 그 단단함과 지속성으로 불변을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이 영원히 그 자리에 살아남을 것처럼…. 돌의 언어와 그 사이에 담기게 될 감각과 사유는 전혀 다른 것으로 남기 마련이다. 우리들은 그것들 사이의 조합과 불화합 사이에서 무엇을 얻게 될까? 그 미묘한 관계와 차이 속에서 예술을 느끼게 될까?
순수는 더 이상 제일의 예술 명제는 아니다. 그러나 예술은 말해야 한다. 순수를 비롯하여 삶과 우리의 시대를…. 이제 우리 모두는 말해야 한다. 조각에 대하여 또는 예술에 대하여 그리고 그 작품을 만드는 작가와 그 가족들에 대하여도. 그 소리가 들리건 들리지 않건 그것이 우리들 시대를 흐르는 예술적 기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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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과 기술 세련미로 세우는 사실주의 탑, 이행균 작품전_신항섭 (미술평론가) | |
힘과 기술 세련미로 세우는 사실주의 탑
다른 장르와 달리 조각은 근기가 필요하다. 일테면 불에 달구고 두드려 물에 담그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더욱 강한 쇠가 되듯이 조각가는 오랜 시간의 단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천부적인 재주가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먼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노력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행균은 타고난 일꾼이다. 그러기에 조각은 그에게 일상사일 따름이다. 한마디로 그는 예술가연하지 않는다. 작업에 대한 예술작품으로서의 평가여부는 일단 자신의 손을 떠난 이후의 문제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오직 정해진 일과에 충실하는 것으로써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 적어도 그의 작품에서는 예술가로서의 자기과시를 감지할 수 없다. 오직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견실한 작업이 결과할 뿐이다. 그러한 결과에 순응한다. 그는 인체의 형태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을 피한다. 순수한 누드 작품이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물론 순수한 누드도 작업도 간혹 등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인체는 내용을 담는 수단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인체의 순수미는 그에게 매력적인 제재가 아니다. 형식보다는 내용을 우선하는 조형적인 접근방식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체는 정확한 해부학에 근거하여 치밀하게 묘사된다. 사실적인 묘사력에 관한 한 더 이상 주문할 것이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손의 기술을 보다 적극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작업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근 작업은 어떤 형식을 취하든지 사실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이는 사실적인 형태묘사야말로 조각의 본질적인 힘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깔려 있다. 실제로 그의 조각에서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사실적인 테크닉을 논외하고는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성립될 수 없다. 그가 한국조각계에 자리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치열한 장인정신에 의해 구현되는 정밀한 사실적인 테크닉에 있다. 스스로가 한국 사실주의 조각의 한 영역을 개척한 강관욱의 ‘수제자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대목에서 확고한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 사실적인 묘사력은 단순히 기능적인 완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 정밀해질수록 형태미는 세련되기 마련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이미 단순한 손의 기능성을 뛰어넘는 세련미가 감지되고 있다. 기능적인 경계를 넘어서 조형적인 아름다움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세련된 미적 감각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 가운데 ‘애증의 덫(남>여)’ ‘애증의 덫(남>여)’ ‘두개의 나’ ‘사유체계의 부정’은 두 명의 인체를 병치시킨다든지, 나무 돌 따위의 이종 소재를 끌어들이는 식의 복합구조를 통해 인물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중적인 성격 또는 복합적인 사고기능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복잡한 심리적인 세계를 탐색하는 작업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인체의 내면을 탐조한다. 신체의 동세 및 얼굴표정 따위의 외부적인 형상은 내면세계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주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형식의 작업은 정신과 감정이 인체를 사역한다는 논리를 따른다. 즉, 내면과 연결되지 않는 외적인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해 가는 과정인 셈이다. 정신과 감정에 의해 지배되는 인체의 원리를 파악함으로써 조형적인 필연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喜’ ‘怒’ ‘愛’ ‘樂’(희노애락) 연작은 이와 같은 그의 시각을 명쾌하게 반영하고 있다. 감정이 지시하는 인간의 얼굴표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슬플 ‘哀’를 사랑 ‘愛’애로 바꾼 것은 재미있는 발상이다. 이처럼 조각도 회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감정세계를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하다. 이들 감정표현에 중점을 둔 작품들은 실제공간을 점유하는 입체적인 존재로서의 강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극렬한 감정표현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시각적인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설득력이 강하다. 그런가하면 초상작품 형식을 따르는 ‘S씨 가족’ ‘우리 가족’ ‘꺼비’는 그가 새롭게 관심을 갖는 제재이다. 이들 작업은 자연스러운 표정 및 모습에서 회화적인 세부묘사에 필적하고 있다. 어느 면에서는 일루전에 의탁하는 회화와는 달리 보다 실제적인 형태를 가짐으로써 훨씬 호소력이 짙다. 하지만 돌로 초상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완성도가 높아야 한다. 초상조각으로 표현영역을 넓혀갈 수 있는 것도 세부를 극명하게 묘사할 수 있는 테크닉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그는 회화만이 아니라 조각도 초상으로서의 형식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기념조각의 형식으로 제작되는 전통적인 초상작업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경직된 양식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해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사실성이 강조되는 자연스러운 표정 및 자태를 지향하는 초상조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가족’과 ‘시쉬포스’는 부조인데 그가 새롭게 관심을 갖는 분야이다. 우리의 경우 기념조각의 한 부분으로서만 취급되고 있을 뿐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로댕의 지옥문에서 볼 수 있듯이 부조작업의 가치와 효용성은 실용적인 면에서도 적용할 소지가 많은 것이다. 그는 일단 초상조각으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한편 그는 이번 작품전 준비를 하면서 ‘쓰레기통’이라는 명제의 추상작업을 병행하게 됐다. ‘怒’ ‘愛’ ‘애증의 덫’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 즉 대리석조각들을 철사로 만든 원통 및 구체 모양의 통에 담아놓은 것이다. 이는 환경친화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독립된 추상작업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한다. 단순한 아이디어지만 사실조각과의 연관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특기할 일이다. 인체의 형태를 단순화하거나 변형 왜곡하는 감각도 예사롭지 않다. 아름다운 비례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쪽 방향으로 관심을 집중하면 독자적인 조형성을 성립시킬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에게는 재능도 많고 주어진 과제도 많다. 하지만 아직 시간도 많고 힘을 충분히 축적하고 있으므로 점차 다양한 관점에서 예술적인 재능을 꽃피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신항섭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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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이행균_민형기(조각가) | |
내가 아는 이행균 - 민형기(조각가)
– 첫 만남에 대한 아련한 추억 대학 졸업 후 나는 줄곧 남는 시간들을 작업 공간이 마땅치 않아 모교 대학 빈 실기장을 자주 이용하곤 하였다. 낙도에 첫 발령을 받고 겨울방학을 맞아 작업을 하러 대학에 들렀는데 예비생인 듯한 모습의 젊은 청년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검은 점퍼차림에 웃음기를 약간 머금은 첫 인상, 물어보니 군복무를 마치고 예비 입학한 학생이라는 것이었다. 늦게라도 만난 것을 인연이라 생각하며 작업을 독려해주고, 졸업한 선배 입장으로서 작업방향이나 방법 등에 대해 나름대로 주섬주섬 소개해 준 적이 있다. 늦깎이로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 입학한 초년생에 다름 아닌 그와의 첫 만남이 작업실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신라 기마형 인물 토기”를 똑같이 재현한 것을 보고 사뭇 놀랐다.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기마형 인물토기를 공간을 비워가며 장신구까지도 디테일하게 테라코타 기법으로 제작한 것을 보고 손재주가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 후 여름방학을 맞아 제 1회 한국 구상조각전 공모 작품 제작을 위해 학교를 찾았을 때 그는 더 성숙해 가고 있었다. 조각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면서 돌조각과 공모전을 준비하기도 하였으며, 대학 2, 3학년 때부터 한국 자생조각을 꿈꾸어 오신 조각가 강관욱 교수님의 영향으로 석조에 일찍이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투각이 공존한 복잡한 작품들을 제작하는 모습을 볼 때, ‘아! 돌도 참 잘 다루는구나’ 하는 공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가 돌을 잘 다루는 것은 타고난 면도 있었지만, 사실은 재학하는 4년 내내 학과 작업실을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같이 나와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가는 그의 꾸준한 성실함과, 아둔할 정도로 타협을 모르는 작업에 대한 그의 열정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눈보라를 맞으며 2미터가 넘는 돌을 밤늦게까지 쪼는 그의 모습은 돌을 향한 인간노동의 숭고함과 그의 미래적 작가됨을 일찌감치 예견케 하였다. 학과 작업실만 가면 그가 있다는 믿음은 많은 학우와 주변인들로 하여금 작업실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한 의미를 심어주었고 작업사랑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그렇게 그는 졸업을 앞두고도 교직 발령보다는 작업에 열중하는 신념으로 작가의 길을 모색하는 남다른 꿈을 키우고 있었다.
– 졸업 후 그의 서울생활 졸업 후 그는 서울로 올라가 어렵게 생활하면서 작업과 홍익대 대학원 준비를 병행하는 힘겨운 삶을 시작하였다. 주물공장 생활, 돌공장 생활 등 어차피 삶은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인 그로서는 전전긍긍하며 어려운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오직 조각을 해야겠다는 일념하나로 참고 감내하면서 서울 생활을 꾸려나갔다. 이처럼 강한 의지를 가진 그라 할지라도 작업이 인생에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라는 버거운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어느 해 추운 겨울에 그를 찾았다. 경기도 벽골제 부근에 허름한 시골집을 얻어 그동안 주물공장에서 배웠던 기술을 응용해 주물 브론즈를 만들어 보려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솥단지 같은 로에 쇳물을 끓인 흔적과 기포가 듬성한 주물형상을 보고 있노라니 참 어설퍼 보였다. 그 어설픔은 훗날 브론즈도 돌이구나 라는 확신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튼 그에게는 척박하기만한 땅. 서울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그의 삶을 보고 있노라니 연민의 시선으로 다가왔다. 한 시대의 지인으로서 미래 인적자원으로 커왔던 교육자로서의 꿈을 버리고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창작열을 불태우기 위해 많은 날들을 노력했던 것은 그가 가진 예술가에 대한 집념이 남달랐기에 가능했음을 짐작케 하였다.
– 청첩장에 그려진 그와 한 여인의 캐리커처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어느 날 그로부터 결혼을 한다는 연락이 왔다. 청첩장에 그려진 그와 캐리커처화된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예식 사회를 보면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멀리 서울에서 광주까지 제자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신 대학원 전뢰진 선생님과 대학시절 석조각을 전수해주신 강관욱 교수님이 동시에 참석해 주셨다. 전뢰진 선생님은 강선생님의 대학시절 은사님이시기도 했는데, 3대를 이은 조각가가 한자리에 모이는 의미 있는 장이기도 했다.
이사는 조각가가 겪어야 하는 과정중의 하나라 여겨진다. 우리 은사님도 그러셨고, 그 역시 작업여건에 따라 이곳저곳을 긍긍하며 여러 차례 거처를 옮겨야 했다. 지금은 경기도 광주 땅에 작업실과 안집을 지어 초등학생 다원이와 준석이, 그리고 캐리커처화된 여인 이렇게 네 식구가 오손도손 살고 있다. 마당에는 그가 직접 만든 그네와 미끄럼틀, 스프링으로 만든 재미난 흔들 목마 등 동네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자상한 아빠로서의 한 단면을 단박에 느끼게 한다. 그동안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온 그에게도 적지 않은 고민과 고통이 뒤따랐을 텐데 그는 어려운 조건들을 먼발치에서 삭여내는 자생능력 또한 탁월하게 지녔다.
– 어느 날 알고 보니 그의 고향이 곧 내 고향이었다 전라도하고도 남도의 끝자락쯤, 끝으로 내려오면 평지에 아름다운 남한의 금강산(월출산)이 우뚝 솟은 땅 영암, 신령스런 바위의 정기를 타고난 덕택에 그는 돌 다루는 재주가 뛰어났던 것일까? 영암하고도 산중에 자리한 금정이라는 곳은 내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며 꿈을 키웠던 가난하면서도 소박한 땅이다. 그의 선친들도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지금도 일가친척들이 현존하고 있기에 그와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아주 어릴 적 금정에서 태어나 살다가 광주로 이사를 해 고향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형들과 친지, 부모님을 통해 그에게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 그의 작품세계와 일상사 그는 다른 조각가와는 달리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각과 관련된 다양한 방면에서 쌓은 경험들을 자신의 작업세계에 매체로 끌어들여 활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돌을 다루는 솜씨는 탁월하다.
제1회 개인전에서 보여준 돌조각들은 상당한 열정과 과감한 조각가의 뚝심을 보여준 좋은 예가 되었다. 더군다나 고향인 광주에까지 끌고 내려와 선․ 후배나 동료, 동문들에게 선보여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2회와 3회 전시를 거치면서 더욱 기법들이 다양해졌으며, 4회 전시는 돌의 종류에 따른 물성(物性) 파악을 통해 거의 원숙미에 가까운 솜씨를 발휘하였다. 그의 여러 작품들 가운데 특히, 오석으로 제작한 “두개의 나”라는 작품은 찰흙으로도 표현이 어려운 기법들을 돌중에 가장 단단하다는 오석에 물광과 정발 및 굵은 터치를 적절하게 처리하여 완성도 높게 제작한점은 일련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 한다.
그리고 “AD2000년”은 푸른색 돌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손을 표현한 것인데 지문선과 손금, 핏줄의 섬세한 표현으로 가히 생동감을 주는 수작이라 여겨진다. 또한 로마조각에서 볼 수 있는 기법처럼 서로 다른 성질의 세 종류 돌을 접목하여 표현한“희(喜)”라는 작품은 ‘마치 돌을 흙 주무르듯하다’는 말을 웃고 있는 노인의 표정을 통해 듣는 것 같았다.
– 이번에 5회 개인전을 연다. 또 기대하며 그의 작품을 보고 싶다. 되뇌임속에 맴도는 “윤회와 무사유”라는 주제를 가진 대작들이 주류를 이룬다. 작가는 지금까지의 작업을 통해서 얻은 체득된 경험과 영감들을 한층 더 걸러내 내면의 카타르시스를 시도한다고 보여 진다.
작업은 늘상 자신의 이력이며 삶의 자욱처럼, 이번 작품들도 그가 지금까지 삶에 눈뜨고 깨닫는 과정에서 얻어진 농축된 사유의 궤적과도 같다 하겠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무사유”란 곧 사유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인간존재의 이유가 아닐까?
그저 이 순간이 버거워도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삶과 “인간사랑”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 화두를 던지는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를 통해 지금까지 그가 쌓아온 작품성이 중견의 반열에 녹아 세월의 흔적을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며, 동료 조각가이자 선배로서 진심어린 애정을 담아 작품전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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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균 작품비평_최정선 미술사학자 | |
이행균 작품비평
최정선 미술사학자
저마다의 색깔을 지닌 자연처럼 믿는 이들은 모두에게 수호천사가 있다고들 말한다. 작가 이행균이 종교에 입문하면서 동행을 시작한 이는 대천사 라파엘이다. 성서 속에서 토비아와 먼 길 여행을 함께했고, 그를 지켜주고 안내마혀 치유의 메신저가 되었던 라파엘, 이 전시는 대천사 라파엘과 이행균이 일상에서 지치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다. 작가들이 좀처럼 하지 않는 조각 퍼포먼스는 자신과 감상자를 세속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정화시키는 행위이다. 그의 수고스러움이 고스란히 배인 작품들을 신에게 봉헌하는 일종의 의식인 것이다. 일찍이 조각을 위해 돌 공장, 주물 공장에서 노동의 품도 아끼지 않았던 작가 이행균에게 작업실은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신성한 노동의 현장이며 성실하게 일과를 시작하고 마치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는 거친 돌을 깍고 다듬을 때 하느님이 주신 자연에 정 맛을 더하면서 인간과 예술의 만남을 제안한다. 서로 다른 결과 색을 지닌 돌과 돌, 부드러운 대리석과 차가운 브론즈가 만나는 것이다. 작품에서 이질적인 재료들의 만남이 낯설지 않은 것은 그의 기술적인 능력과 노고의 산물이겠지만 이것은 작가의 심성으로 다음어지고 마음결이 자아낸 흔적이기도 한다. 그는 사람의 마음결에 선함을 더하고자 그의 작업 세계에 가족과 종료를 하나로 엮어낸다. 그리하여 자신의 돌이 사람들에게 선한 마음을 선물하고 쉽고 편하고 부드럽게 만날 수 있는 대상이 되기를 기대한다. 바로 이 전시는 그가 선택한 믿음 안에서 소망하고 이루고 싶은 사랑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믿음 가시관을 쓰고 고통스러워하는 예수는 모든 시름을 놓고 몸을 뉘었다. 가톨릭과의 만남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가는 우리에게 십자가에 재현된 예수 형상만으로 부활을 꿈꾸게 하지 않는다. 예수의 형상 아래 감도는 빛을 통해 죽음의 그림자를 생명 에너지로 변환시키고 있다. 비로소 우리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 인성과 신성을 지닌 예수의 본질을 목도하는 것이다. 진정 마음으로 바라면 손은 간절함을 낳는다. 살결이 묻어있는 부부의 기도하는 손은 간절함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행균은 그 간절함을 작품<성 가정>에서 돌에 하나하나 새긴 정 자국과 시간으로 완성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골고다의 길>로 이어간다. 작가는 단호하게 목숨 값을 치르면서도 지켜낸 순교정신을 고요하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지닌 인물들고 표현해 놓았다. 성인의 손은 하늘빛으로부터 연유한 이 모든 사실들을 조용히 우리들이게 일러준다.
소망 라파엘. 이행균의 세레명이다. 가톨릭으로 새로 태어난 작가는 천사를 소망한다. 그는 시간을 들여 돌을 깎아 아들의 장난감 말을 만들어준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그 수고를 모르면서 대천사의 소명을 이루고자 고민하는 아기천사이기도 하다. 때로 이 천사는 세월의 갈피가 놓은 좌대 위에 턱을 괴고, 쿠션처럼 푹신한 대리석 돌 위에서 소망을 꿈꾼다. 또한 작가의 종교적 자화상이 된 천사만큼이나 그에게 여성은 예술적 감성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랑스런 존재이다. 은은한 오로로 핑크 옷을 입은 소녀와 여인은 서로 다른 돌의 질감과 색을 효과적으로 살려냄으로써 어울림의 미학을 담아냈다. 그리고 연풍(軟風)에 흔들리는 머릿결을 지닌 여성응 아르누보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절로 서정적인 연가(戀歌)를 부르게 만드는 그의 오랜 연인이 되었다.
사랑 순결한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복된 소식에 그대로 응답하였다. 마치 벌이 꽃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녀는 날 때부터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어머니가 되었다. 한곳을 바라보거나 서로를 응시하며 눈빛과 마음을 나누는 모자, 연인들, 그리고 가족의 사랑은 구태여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행균의 작품에서 사족 없는 담백한 사랑을 본다. 그것은 그의 조각이 추구하는 간결한 선과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며 돌의 본질에 충실하려는 조형적인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돌과 사랑에 빠진 작가 이행균의 작업이 마침내 종교적 감성으로 다시 태어난 첫 전시이다. 함께 갈 수는 있어도 대신 갈 수 없는 돌과의 동행에서 작가는 하느님의 숨결이 온기로 남은 작품들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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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결이 전하는 소녀이야기_연구 기획 인재희 | |
돌의 결이 전하는 소녀이야기 연구 기획 인재희
차가운 대리석 돌에서 수줍은 듯 하얀 여인들이 봄바람 맞으며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아름답다… 따뜻하다…… 저절로 미소가 나온다… 가슴이 충만해진다
이 행균 작가는 20년 동안 돌 작업을 해 온 조각가이다. 광주 사태와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던 80년대 대학생 시절, 작품이란 사회에 공헌하고 민중을 대변해야 하며 힘들어 하는 노동자의 진솔한 삶을 표현해야 한다는 민중미술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다 점차 모든 사회문제는 인간 정신 의지의 문제이고 그 해결은 영혼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면서 인간 내면의 세계를 진지하게 작품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때 나온 작품이 2003년도 발표된 두 개의 나, 영혼의 진화, 생명의 고리, 윤회 등을 다룬 작품이다. 2m 짜리 큰 돌을 깨어서 상상했던 것들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면 그 즐거움은 짜릿함을 넘어 전율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그는 천상 조각가다… 우리에게 주는 그의 메시지는 강했다 .2003년도 ‘두개의 나’ 는 두 발로 서서 사색하는 인물과 해부학 적으로 묘사된 거꾸로 선 인물을 묘사했다. 두 개의 인물은 같은 나이고 분리 할 수 없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2006년도 무 사유 시리즈는 목 잘린 반가 사유상, 두뇌 공간이 텅 비어있는 추상화된 얼굴 형태, 육중하게 자리 잡고 생각에 잠겨있는 남자의 신체는 생각을 비우는 능동적인 실천의지야 말로 인간 존재의 진정한 회복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 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의식이란 것을 20세기에 꼭 고집할 필요가 있는가? 보는 관객이 없었다면 내가 과연 조각을 했을 것인가 ? 이런 물음 속에서 작가는 내면의 사유 의식표현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관객과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혼의 진화를 위해 자신을 토해내듯 작품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우리들의 내면으로 들어와 우리 영혼을 흔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가족이었다. “가족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완벽한 발명품이라 여긴다. 가정의 화목은 세상을 구하고 가정의 평화가 세상의 발전에 가장 중요하다.“ 이행균 .2001 가족‘작품을 보면 이제 그의 작품은 어렵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가족을 떠올리는 따뜻한 시선으로 끌어내서 시각적으로 편안하다.
특히 최근 작품에서 돋보이는 작업은 여인의 조각이다. “아름다움이야 말로 모든 예술의 궁극적 원리이며, 모든 예술이 지향하는 최고의 목표다”라고 말한 괴테의 말을 실현시키기라도 할 듯이 그는 완벽한 아름다운 여인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돌에도 결이 있다. 정질이 지나갈 때 결을 거스리면 돌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깨진다. 결대로 쪼았을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2012. 6 이 행균
그의 작품에서는 이미 단순한 손의 기능성을 뛰어 넘는 세련미가 느껴진다. 한국 사실주의 조각가의 한 영역을 개척한 강관욱의 수제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구현되는 사질적인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 정밀한 기술은 형태미를 세련되게 하고 이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의 선을 그대로 빠져들게 한다. 2007년 화랑 미술제를 통해 발표한 대리석과 브론즈를 조합하여 만든 여인 시리즈와 결혼이야기는 관객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희고 부드러운 대리석으로 지그시 감은 눈과 가녀림 손끝, 날리는 머리카락을 묘사하고 , 단단한 브론즈로 얇고 매끈한 다리를 만들어 안정된 형태미를 유지해 주고 있다. 소녀들이 들고 있는 꽃과 바이 올린 등을 보면 그 정교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지금 우리시대, 우리 곁에 와 있는 국민 조각가이다. 스스로도 조각계의 조용필이 되고 싶다고 당당히 말할 만큼 재미있고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조각을 실험하고 있다. 생명-도시에서는 달걀형태의 깨진 틈 사아로 LED광을 내뿜는 도시가 있다. < 부유하는 섬>은 내부에 전류로서의 자석이 작동케 하여 물 위에 계속 돌이 부유하게 했다. 세종 문화회관 앞과 성남 율동공원에서 돌 작업 과정을 일반인에게 보여 주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최근엔 돌과 유리를 조합하여 따뜻한 가족이야기와 어린왕자이야기를 동화처럼 엮어내는 작품을 구상 중이다. 항상 새로움을 찾아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힘들고 지친 영혼들을 위로하고 깨워 주고있는 진정한 예술가다 . 지금도 그는 우리의 영혼을 진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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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Criti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