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자유로움 아래 빚어진 삶의 투영, 그 미적 가치-홍경한 | |
거침없는 자유로움 아래 빚어진 삶의 투영, 그 미적 가치 -작가 이미선 작업에 대한 소론 글 l 홍경한(미술평론가) 1. 의식consciousness과 무의식unconsciously은 언제나 미완전한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철학적 사고이다. 이것은 비결정적이고 유동적이며 정신적 현상으로 정의될 뿐만 아니라 우리식으론 유보(留保)의 관념이며 개념상 가감(加減)의 보류(保留)를 의미한다. 작가 이미선의 작품들에선 바로 그 더하거나 빼는 것, 순간의 지연과 흐름이 목도된다. 그의 추상회화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삶과 지근거리에 있는 무형을 근거로 배제하고 첨가하는 행위, 현실에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이상성이 동시에 드러난다. 이는 형식상 다분히 비인위적이며, 의식과 무의식이 합일의 프로세스를 거쳐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부유한다. 이를 일상적 언어로 변환하자면, 궁극적으로 현실과 탈현실,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며 실존을 거푸집으로 한 시공의 내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망을 훑는 것, 그것이 오늘날 그의 작품들에서 읽을 수 있는 특징이랄 수 있다. 작가 이미선에게 있어서 역시 예술의 중요성은 외적인 것, 드러나는 것 자체에 있지 않다. 그는 타인의 시선에 멈춰진 잔상이 어떻게 남든, 동시대 횡행하고 있는 물질적 매개로써 부응할 수 있던 없던 미적요소를 저울질하는 주변 요소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본질적인 것 외, 그 많은 부수적인 것들이 적어도 예술의 완성도를 기준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고찰할 때 이미선이 수없이(정말 셀 수 없이) 생산한 그 많은 드로잉과 회화작품들 속 거친 조형요소들은 그의 작업이 지향하는 근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가리키는 나침반으로 부족함이 없다. 그의 작업은 그리는 ‘행위’를 외삽하면서, 미국 여성 작가인 헬렌 프랑켄텔러(Helen Frankenthaler)나 프랑스 앵포르멜 작가인 조르쥬 마티외(Georges Mathieu)의 작품들처럼 그림 자체와 작가 간 호환성과 기록의 권역을 되찾고 이를 통해 내재된 자의식을 반영하는 순차적 결과물이라 해도 그르지 않다. 한 인간으로서 살며 살아가는 짧고도 긴 여정 속에서 겪는 하나하나의 사건에 관한 편리(片利)와 내적 욕망 등이 비형상적 추상으로 치환되고, 이는 다시 재료 구분 없는 자신만의 무대에서 발현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가시적인 조형요소와 숨겨진 의미라는 내재성을 지시하며, 다시 그 의미들을 잠재된 무의식 아래 끄집어내어 재차 ‘행위’로 되짚는 양상을 내보인다. 여기서 행위란 일차적으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선과 색깔, 재료, 기호 뒤에 숨겨져 있는 작가 심상의 구현(쉽게 말해 현존하지 않는 감각이나 감정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며, 보다 내적으론 자신의 존재감을 위협해온 다양한 일상을 반추시키는 ‘관계’를 모태로 한 자의식의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자의식은 삶의 애중이자 갈등의 변주 밑에서 잉태되며, 인간 심리 저변에 내려앉은 불안과 외로움, 초조함에서의 이탈을 배경으로 생성된다. 물론 그건 평범한 삶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작가 개인의 현실마저 포박하고, 여성성에 관한 시선, 굴곡진 삶의 여정과 그 속에서 움튼 아픔과 절망을 비롯한 기타 말 할 수 없는 이야기들과 문득문득 스치는 유년의 기억들마저 연계한다. 이것이 그의 예술행위를 규정짓는 이차적 행위의 얼개라고 볼 수 있다. 2. 억세고 강한 여운의 필선 및 다소 어두운 계열 혹은 무채색과 상징 아래 침잠시켜놓은 이미선의 자의식에 대한 실마리를 좇다보면 흡사 무엇을 찾는 것도 아니고 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떠올라 눈을 감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모래알처럼 촘촘한 것들의 정체는 욕망이자, 작가의 현 삶의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필자는 그의 작업에서 흡사 다락방에 켜켜이 쌓인 오랜 세월의 흔적(痕迹)처럼 전달할 수 없는 애틋함, 그 애틋함을 통한 희망의 갈구(渴求)라는 메시지로 귀결되는 듯한 여운을 전달 받는다. 어쩌면 개인의 사사이나 보편성을 띨 수도 있기에 무언가 울컥하는 공감이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인간은 누구나 하나 둘 그런 유사한 응어리 혹은 단상들을 지니고 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를 작거나 큰 화면에 공기처럼 빨아들이고 다시 밖으로 내뿜는 과정을 통해 자신 속에 들어 있던 모든 것을 쏟아 놓는다. 그가 자주 활용하는 스며든 얼룩(soak stain), 스테인 페인팅(stain painting) 등을 통해 찰나의 감성 혹은 불현 듯 스치는 그 무언가를 비계획적으로 표출한다. 종국에는 무언가에 대한 변화(變化)와 탈바꿈이라는 거친 숨결이 흩뿌려지길 원하듯 그렇게 자신만의 역사(歷史)를 만들어 간다. 역사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그의 그림이 단순한 조형언어로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을 기록하는 이미지의 채록이자 삶의 반영이라는 큰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바로 실존(實存)에 대한 개념이다. 실제로 그는 그림을 그리며 실존에 대해 파악하려 하고 그것을 고민한다. 지난하고 고난스러운 인생이라는 여정, 과거와 현재를 아우른 채 다양한 세상사의 번민들을 들춰내어 정면으로 부딪히며 실존을 획득하려 한다. 따라서 이미선의 그림들은 보여주기 위한 표현덩어리가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 존재성과 의미를 인지토록 하는 매우 충실한 매개임에 분명하다. 또한 내면과 마주하는 통로이자 거울이고, 반면 속박의 흔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언가에 얽매이는 속박의 개연성이 있다하여 우울함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분방한, 그러면서 틀 없는 조형원리에서 체감되듯 그의 그림들은 작가 자신에게 존재하거나 했던 다양한 감정들을 결코 두려움 없이 드러낸다. 어느 경우엔 말로 쉽게 피력할 수 없는/없었던 척박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당찬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간혹 어떤 선택을 하던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줄 알며, 때론 흔들릴지언정 곧 제 자리를 찾아가는 긍정의 존재가 배어 있음을 그의 그림에서 발견하곤 한다. 3. 오늘날 이미선에게 그림이란 그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자각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목도하려는 감춰진(그러나 늘 분출하려는 욕망이 강한) 의지의 표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각적으로 언뜻 이해하기 힘든 모든 것들이 실은 ‘나’를 은유하는 고유한 상징이며, 그의 정신과 가슴에 끊임없이 쌓여지는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무대라고도 할 수 있다. 진솔하면서 때론 아픔과 슬픔까지 공감토록 하는 작가 내면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창, 일종의 항거할 수 없는 업(業)의 대리라 해도 과장은 아니다. 특히 이미선은 그러한 의미의 구현을 특정한 재료나 장르별 규정에 제한 없는 자유로운 전개를 통해 거침없이 드러내는 데 이 또한 이미선 작업의 이해에 중요한 지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는 어떤 획일적인 매체에 국한되는 양상이란 없으며, 캔버스, 종이, 잡지 등의 기본적인 매체에서부터 공예 등에 이르는 비규정적인 볼드를 나타내고, 그건 드러냄 자체로 언급되는 주어의 하부에 귀속되고 만다. 작품의 제작행위와 결과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뿐 ‘이것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고정화된 통념과 보편적 정의를 달가워하지 않는 셈이다. 그건 그만큼 자유의지가 크다는 것의 방증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기 서술된 내용들과 그의 그림들이 지닌 여러 특징들을 정리해보자. 딱히 구분성을 갖지는 않으나 이해를 위해 몇몇으로 분류하자면 이렇다. ▷그의 작품들은 모색이라는 철학적 프로세스를 배경으로 한 억압된 에너지의 시각화라는 것 ▷내적으론 고정적 관념의 탈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스스로의 자아에 매스를 가하는 것이면서 외적으론 시공을 관통해온 기억의 편린과 현재성이 고뇌와 당대 부여된 인간으로서의 외적 갈등, 항거할 수 없는 상태에서 빚어진 예술적 욕망 및 힘겨운 삶 등이 복잡하게 오버랩된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라는 것에 있다. ▷나아가 그의 회화에는 그 자문을 전달하고 확대하려는 한 개체의 순수한 욕망과 희망에 관한 귀납적 스토리가 이입되어 있으며, 추상화 된 화면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자신을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든 경험 등이 무의식을 타고 증거 되는 것이라는 점, ▷시련을 기회로 만든 이들만이 알고 있는 사연 또는 까닭이 공통요소로 녹아있다는 것을 특징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알고리즘이 바로 그의 작품들에 부여된 의미의 발원처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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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비정형-이제하 | |
서정적 비정형 -이미선의 그림들- 잡다한 경향, 잡다한 주장의 이런저런 그림들 속에서 이미선의 작품을 마주쳤을 때의 즐거움과 안도감을 나는 기억한다. 즐겁다는 것은 아마도 그림들이 어디서 본 듯하지도 앞을 막지도 않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고 안도가 되었다는 것은 이른바 우리 것, 우리 토양의 냄새를 거기서 맡은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이 서로 이반하는 듯한 자웅동체의 역동과 정적은 필자가 그림을 대하는 기초적인 바로미터기도 하지만 아마 모든 예술이나 인생살이에서도 무의식적으로 함께 적용하고 있는 룰일지도 모른다. 그림이란 없다 - 흔적이 있을 뿐이다. 인생이란 없다 - 흔적이 있을 뿐이다...그런 소리일 것이다. 일본에서 유입돼 간신히 토착화를 거친 인상파, 야수파 이래 어떤 새로운 경향들이 그동안 그런 정도의 육화과정이나마 치러내고 있는지를 필자는 점검한 바가 없고 적임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문외한의 입장을 빌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뭇 긍정적인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늘 깨닫는다. 60년대의 앵포르멜은 고사하고 추상은? 오브제는? 설치는? 미니멀은? 하고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정착감이 오지를 않는 것이다. 국전에 입선 밖에 못하던 박수근의 작품들이 아직도 창창한 생명력을 지속하고 있다는 은유를 구태여 들먹일 필요가 있는 것일까. 이미선의 작품이 그 어는 경향에 속하는지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필자가 이미선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그 미묘하고 본능적인 열외감 때문일지 모른다. 일종 아웃사이드적인 반발과 반항이 작품의 내재율을 따라 역동감을 얻으면서 토질적인 것으로 귀착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형상은 이루어지는 듯하다가 비정형으로 돌아가고 색감은 덧입혀지는 듯하다가 회청색이거나 잿빛 혹은 흙빛으로 가라앉는다. 서정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뇌와 논리로서가 아니라 무의식이거나 심리적인 질서와 동기를 따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극도로 절제된 무화과정이 따지자면 그녀 작품의 신선감을 지속시키는 효소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008. 7 이 제 하 (작가) |
ARTIST Criti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