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수묵채색의 현대적 구성_서기문 미술평론

수묵채색의 현대적 구성

 

서기문 미술평론

 

 

사실 그의 화면에는, 서로 섞이기 힘든 첨예한 요소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극과 극의 상반되는 두 요소가 충돌없이 조화로운 화면을 이루어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현대회화들 역시 지속적으로 이들 둘의 화해를 시도해오고 있지만 치졸한 화면만을 양산해내고 있는 게 대부분의 현실이다. 먹과 아크릴, 자연과 추상, 구상과 비구상, 전통과 모더니즘 등 전혀 이질적인 두 요소가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는 어떤 거부감도 없이 서로 사이좋게 함께 잘 섞여 녹아있다. 둘은 변증법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걸 경계하는 균형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듯 보인다. 모더니즘은 낡음을 새로움으로 조율하고, 전통은 새로움 그 자체를 이념화하는 기이한 현상을 제어하면서 상호 상보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극과 극의 요소를 상생의 관계로 돌려놓는 구성의 연금술이야말로 그의 회화의 매력이며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화면 가득 과감하게 노란색으로 덧칠하여 모노크롬회화가 느껴지는 풍경에서조차 그는 어김없이 그 노란 색면이 나무나 숲이라는 최소한의 암시만은 꼭 남기고 있다. 나아가 그는, 나무의 가지들과 잎들을 색면 덩어리로 처리하면서도 오밀조밀한 집들만큼은 반드시 수묵담채로써 사실적 묘사를 가한다. 사실성은 회화의 가독성으로 이어지면서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음’ 으로 ‘편안함’ 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렵지 않게 읽히는 작품내용 못지않게 그가 특별히 취하고 있는 ‘나무와 시골집’ 이라는 소재 또한 그의 회화가 지향하는 편안함이나 따뜻함과 무관하지 않다. 수직감을 주는 나무와 수평을 잡아주는 시골집들은 화면의 균형을 잡아주는 구성적 근거자 장치이면서, 한편 내용미학의 차원에서는 일종의 향수기호 같은 것이다. 고향집 풍경이 연상 되는 그의 작품은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을 위로하기에 충분하다. 일부러 의도하였다기보다는 그것은, 작가 자신의 절실한 필요에서 나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광주에서 작가생활을 시작하면서 맞닥뜨렸던 도시의 차가움과 삭막함은 그로 하여 자연스럽게 고향마을에 대한 그리움을 키우게 했을 터다. 광주에 정박한 그의 외로운 배는 파스텔 톤의 바이올렛이나 옐로우, 그린, 레드, 화이트 등 사계절 숲의 색면에 고향마을의 집들을 감싸 안듯 포근하게 올려놓고서야 다소 안도하며 새 출항의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회화에서 온기가, 힘이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같은 진정성 즉, 리얼리티가 있기 때문이리라.

 

 

명징한 색채의 세례, 그 이상의 현실경과 현대성의 모색_김상철(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

  명징한 색채의 세례, 그 이상의 현실경과 현대성의 모색

 

                                             김상철(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

 

  현대미술의 외연은 이미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장르간의 융합은 물론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매체를 통한 새로운 형식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다양성은 분명 현대미술이 지니고 있는 속성이자 특징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한국화의 상황과 입장은 자못 곤궁한 것이 사실이다. 전통으로서의 정체성과 현대회화라는 시대성에 대한 요구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오랜 역사적 발전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완정한 조형체계를 지니고 있는 전통회화가 여하히 현대라는 새로운 시공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여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에 질문과 답에 다름 아닌 것이다. 현대라고 하지만 지난 20세기와 오늘의 21세기가 지니고 있는 조건은 사뭇 다른 것이다. 과거의 세기가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권위적인 위상을 지닌 주도 세력에 의한 수직적이고 독점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새로운 세기는 그야말로 다양성을 전제로 한 상호의존적이고 수평적인 새로운 환경에 놓여있다 할 것이다. 이는 그간 전통회화로서의 한국화가 추구하고 지향했던 이른바 현대미술로서의 조건과 상황이 일변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작가 이승대의 작업은 바로 전통회화가 처한 현실적 상황과 새로운 시공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전제로 살펴 볼 때 분명한 현실적 좌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한지에 채색이라는 전통적 매제를 취하고 있다. 일단 물질적인 양태와 조형의 얼개는 전통을 원용한 것임이 여실하다. 명료한 원색들의 경쾌한 화면은 물리적인 명도의 맑음에 더하여 특유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색채 심미는 동양회화 안료가 지니고 있는 수용성의 특성을 십분 살려 구축해낸 것이다. 한지를 세 번 배접 한 후 수묵을 바탕에 칠하고 다시 채색을 반복하여 중첩하여 색채를 쌓아감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지는 작업 방식은 시간과 노동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한다. 이는 단순히 색채의 덧칠하기가 아니라 한지와 수용성 안료라는 물성을 살려 번지고 스며드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특유의 깊이를 지닌 안정적인 색감을 확보해 가는 특유의 조형 방법이다. 특히 바탕에 수묵을 칠하는 것은 바로 안정감 있고 침착하며 깊이 있는 색채의 심미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구축된 화면의 색면들은 단순한 배경으로 작용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조형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자 작가의 작업 전반을 대변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것은 육안(肉眼)에 의지하여 시각적인 시각에 호소하는 서구적 방법론이 아니라, 심안(心眼)에 의착하여 감성에 의탁하는 동양적 가치관의 발현이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화면에 더해지는 사물들은 서정적인 풍광들이다. 개괄적이고 함축적인 이미지로 가공되어진 전원의 풍경들은 평면적 전개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화면의 질서를 이뤄내고 있다. 이미 구축되어진 침착하고 깊이 있는 색면에 무수한 필촉들이 점의 흔적으로 더해져 이루어내는 전원의 풍광은 분명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마치 피안(彼岸)의 그것처럼 맑고 경쾌하다. 작가는 치열한 삶의 이야기들은 특유의 맑고 정갈한 색채의 세례를 통해 그렇게 이상의 서정으로 표출해낸 것이다. 사계절을 수평 구도의 안정적인 화면이라는 일관된 형식으로 수용함으로써 그 변화의 양태를 강조하고 대비시킴으로써 여운을 증폭시키는 조형적 설정 역시 흥미로운 것이다. 작가의 화면에는 구도도 그러하거니와 내용을 구축하는 방법 역시 평면성을 지향함이 여실하다. 이는 작가의 관심이 대상에 대한 객관적 묘사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빌어 자신의 독특한 심미체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바로 한지를 비롯한 수용성 안료를 통해 표출되는 안정적이고 깊이 있는 색채로 대변되는 심미의 세계라 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고 견인하는 핵심적인 가치는 분명 전통적인 것이다. 이는 재료는 물론이거니와 소재와 표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업 전반에 걸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의 근저를 보다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것은 단순한 답습의 구태가 아니라 치열한 모색의 열정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오늘의 세기는 주도적인 선진 문화에 의한 획일적인 경향을 거부하고 있다. 특히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사고의 재정립과 새로운 가치관의 모색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어쩌면 전통회화가 지니고 있는 덕목들에 대한 재점검과 재발견을 필요로 하고 있다. 다양성을 전제로 한 상황에서 차별성의 확보는 바로 현대라는 새로운 세기가 필요로 하는 가치이자 요구이다. 작가가 굳이 두터운 한지에 수묵을 더하고 채색을 중첩하는 수고를 통해 구축해 낸 침잠되고 깊이 있는 특유의 색감을 작업의 근저로 삼고 있음은 전통적 가치에 대한 확신의 발로일 것이다. 더불어 객관의 번다한 조건에서 벗어나 색채 자체를 의미 있는 공간으로 제시함은 이러한 확신의 구체적 실천인 셈이다. 현상에 주목하고 서사에 장점을 보이는 서구적 조형에 비하여 사유와 관조를 통한 함축과 절제, 그리고 서정의 온유함을 취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분명 작가의 작업은 그 무게중심을 전통적인 가치에 두고 조심스럽고 은근하지만 부단하고 치열하게 자신이 속한 현대라는 시공을 가늠해 보고 있다 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점진적인 모색이지만, 어쩌면 그러한 본질에 대한 확신과 실천은 그의 작업의 내일을 담보해주는 가장 유력한 덕목일 것이다. 더욱이 오늘의 현실은 다양성을 전제로 한 차별성의 확보가 관건인 개방된 시대이다. 작가가 주목하고 집착하고 있는 내용들은 바로 동양적 사유와 표현의 요체에 해당하는 것들로 작가는 이제 그 출발점에서 보다 먼 곳을 내다보고 있는 셈이다. 자신의 사유를 보다 심화시켜 개별화하고 구체화하고, 보다 풍부한 요소들을 두루 수용하여 그 외연을 확장시키는 것은 작가가 당면한 과제라 여겨진다. 전통에 대한 건강한 의식과 치열한 작업의 열정에 비추어 보아 이는 결코 난망한 일은 아닐 것이다. 작가의 분발과 성취를 기대해 본다.   


사실 그의 화면에는, 서로 섞이기 힘든 첨예한 요소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서기문
평론

사실 그의 화면에는, 서로 섞이기 힘든 첨예한 요소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극과 극의 상반되는 두 요소가 충돌없이 조화로운 화면을 이루어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현대회화들 역시 지속적으로 이들 둘의 화해를 시도해오고 있지만 치졸한 화면만을 양산해내고 있는 게 대부분의 현실이다. 먹과 아크릴, 자연과 추상, 구상과 비구상, 전통과 모더니즘 등 전혀 이질적인 두 요소가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는 어떤 거부감도 없이 서로 사이좋게 함께 잘 섞여 녹아있다. 둘은 변증법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걸 경계하는 균형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듯 보인다. 모더니즘은 낡음을 새로움으로 조율하고, 전통은 새로움 그 자체를 이념화하는 기이한 현상을 제어하면서 상호 상보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극과 극의 요소를 상생의 관계로 돌려놓는 구성의 연금술이야말로 그의 회화의 매력이며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화면 가득 과감하게 노란색으로 덧칠하여 모노크롬회화가 느껴지는 풍경에서조차 그는 어김없이 그 노란색면이 나무나 숲이라는 최소한의 암시만은 꼭 남기고 있다. 나아가 그는, 나무의 가지들과 잎들을 색면 덩어리로 처리하면서도 오밀조밀한 집들만큼은 반드시 수묵담채로써 사실적 묘사를 가한다. 사실성은 회화의 가독성으로 이어지면서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음’으로 ‘편안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렵지 않게 읽히는 작품내용 못지않게 그가 특별히 취하고 있는 ‘나무와 시골집’아라는 소재 또한 그의 회화가 지향하는 편안함이나 따뜻함과 무관하지 않다. 수직감을 주는 나무와 수평을 잡아주는 시골집들은 화면의 균형을 잡아주는 구성적 근거자 장치이면서, 한편 내용미학의 차원에서는 일종의 향수기호같은 것이다. 고향집 풍경이 연상되는 그의 작품은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을 위로하기에 충분하다. 일부러 의도하였다기보다는 그것은, 작가 자신의 절실한 필요에서 나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광주에서 작가생활을 시작하면서 맞닥뜨렸던 도시의 차가움과 삭막함은 그로 하여 자연스럽게 고향마을에 대한 그리움을 키우게 했을 터다. 광주에 정박한 그의 외로운 배는 파스텔 톤의 바이올렛이나 옐로우, 그린, 레드, 화이트 등 사계절 숲의 색면에 고향마을의 집들을 감싸 안듯 포근하게 올려놓고서야 다소 안도하며 새 출항의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회화에서 온기가, 힘이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같은 진성성 즉, 리얼리티가 있기 때문이리라.  (중략분) 

서기문/미술평론
직조적 공간에 일군 수묵의 변용-김옥조

직조적 공간에 일군 수묵의 변용
 
그는 상당히 지적인 그림에 심취한 듯 싶다. 면과 선의 교차로 화면을 구획한다. 한 화면 속에 다면·다공간을 시도한 의도에는 분명 유기적 근거를 설정해 놓았을 것이다. 구상과 비구상이 혼재되고 이것을 연결하는 접점의 요소들이 나열되거나 중복되어 나타난다. 현대인의 감수성을 물씬 풍기면서도 전통적 묵향의 깊이도 동시에 스며 있어서다.
한국화가 이승대의 근작 소감이다. 그의 근작 첫 인상은 우선 일부분 목판(화) 느낌이 난다. 평면의 찍힘과 소멸법에 의한 틈새의 흔적들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중학교 때 연진회에 입문, 지난 20여년동안 붓과 씨름해 왔다. 한국화단의 신예작가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한국화대전을 비롯한 주요 공모전을 휩쓸며 일찌기 주목받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실험적 태도 역시 찬사를 받아온 터이다.
이번에 마련한 그의 개인전은 사실상 3번째다. 이번에도 한층 더 비상하는 붓질과 그로인해 낳은 노작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승대의 작업을 기억하고 기대해온 화단 안팎에 잔잔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신작들을 쏟아낸 것이다. 
그의 작업은 초기부터 개성 강한 화음을 들려주었다. 습작기를 거쳐 온 `회색도시-공존' 시리즈의 진화과정 선상에 있다. 가시적 이미지나 풍경은 조금 달라졌다고 봐야한다. 하지만 대상과 소재를 크게 바꾸거나 색감의 변주를 도모하기 보다 내밀하고 근접한 시각의 성찰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만큼 참신함으로 무장했다. 이 대목에서 그가 화판 앞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한 일면을 감지할 수 있다. 정적 흐르는 화면 속에 숨소리를 불어 넣듯 수평적 무게감과 수직적 속도감을 버무렸다.
이번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들도 `집'과 `나무'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 이전 작품에서도 꾸준히 등장한 대상이자 소재이다. 나무는 정지된 화면 속, 즉 삼라만상의 공간에서 서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소생, 성장하는 생명체로 통한다. 또한 화면 분할에 능숙한 그의 그림 속에서 시선을 이끌어 주는 길잡이이기도하다. 근경에 부각하여 세우거나 화면 한 가운데 샛노란 웃음을 뿜어내며 자리잡고 있으면서 수직적 상승감을 주며 면분할의 기준선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앞세운 나무들 아래 낮게 엎드린 `집'은 사람의 온기가 전해진다. 이승대는 집을 유기체로 해석하고 있다. 집이란 곧 사람의 흔적으로 다가오기 때문. 집과 집이 서로 어깨를 걸고 이어져 공동체를 이루는 따뜻한 인간의 마을을 연상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작가 자신의 이상과 현실이 내재된 공간일 것이다.
또 이들 나무와 집은 이승대 그림의 구도나 구성을 읽어내는 재미를 북돋는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는 화면 구성에 있어서 수직과 수평의 직조적 연출력을 지녔다. 이는 수묵과 채색을 막론하고 정형화된 틀 속에서 이뤄지던 한국화 작업의 바탕이 규격에서부터 변형으로의 진화를 시도한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여기에 수직 면분할과 수평적 공간개념을 혼합시켜 면과 면, 공간과 공간의 조합을 이루고 있다.
나무와 집들로 채워진 공간은 달랑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고, 그 공간들을 이어가는 또 다른 지대는 전혀 다른 비구상의 세계를 철저히 지켜나가는 독창적 화법을 일구어 간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를 복잡하게 풀거나 욕심을 밀어넣은 것 같지도 않다. 가능한 한 기존의 정형을 깨뜨려 형식과 이미지뿐만 아니라 느낌의 전복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이승대의 작업은 수묵의 현대적 변용으로 요약된다. 먼저 배접된 화선지 위에 먹칠을 거듭하고 다시 그 위에 채색을 덧칠해 색감을 자아낸다. 특히 보랏빛 파스텔톤은 그동안 수묵에서 보기 힘든 그만의 성과물이다.
이처럼 기존의 기법과 구도, 형식을 극복하려는 실험성이 이승대만의 것은 아니다. 이미 앞서간 선배들과 뒤따르는 후배들에게도 과제로 남은 까닭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형식의 전복은 물론 개념적 화면의 실체를 실증적 화풍으로 확산시켜가면서도 지켜야할 것은 꼭 지키는 고집을 보여준다. 수직과 수평, 직선과 사선의 반복은 각각의 작품 모두에서 확인됨으로 하여 일견 이승대 그림의 공식화된 구성으로 식상함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래서 였을까. 그는 화면 하단에 여백을 충분히 살려 놓았다. 좌측에 수직사면의 분할된 비구상 화면과 남은 면의 상단에 집과 나무, 숲이 존재하고 그 아래에 여백을 두었다. 회화에서 여백은 흔이 없는 것(無)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지만 채워질 것(有)으로 이해된다. 이승대 역시 표현되지 않은 공간에 작가의 생각을 담았을 터이다. 이 공간은 곧 사색의 공간이요, 시선을 모아주는 시점인 셈이다.
언뜻 보면 극도로 단출하고 상징화한 기호들이 허공에 떠도는 듯 보인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빈 화면을 마주하고 많은 시간 생각을 다듬어 내뿜듯 먹색의 깊이를 탐닉한 뒷모습을 살짝 보는듯 하다.
물론 눈 덮힌 노송숲의 고적한 이미지는 매우 서정적 멜로디로 가득하다. 운치와 재기 발랄한 소품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이승대의 열정이 흐르는 화필은 대작에서 더욱 뜨겁다. 이런 힘은 또한 그가 멀리 길게 남길 예술족적을 내다보는 가늠자여서 더욱 반갑다.

김옥조(미술평론·호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