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 날다 | |
그녀 날다. - 김영민(전시기획자)
1.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말라가는 오아시스 같은 <바그다드 카페>에 남편에게 버림받은 육중한 독일 여인이 도착하면서 시작하는 아름다운 영화가 있다. 1993년 영화 <바그다드 카페>이다. 그녀의 이름은 자스민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을 집에서 쫓아낸 카페 주인의 이름은 브랜다이다. 자스민의 행복해지려는 노력과 늘 머금고 있는 미소 그리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견하고 가꾸어나가는 태도는 황량한 사막의 초라한 카페를 낙원으로 바꾼다. 이 영화는 사막 같은 황량한 삶에서 인간의 진심과 선의가 마술처럼 모든 것을 바꾼다고 말한다. 이완숙의 여인을 처음 보았을 때, 자스민을 떠올렸다. 육중한 몸매, 간혹 쓰고 나오는 중절모, 앙증맞은 핸드백 무엇보다도 구름 속에서 유영하듯 나는 일상적이지만 마술 같은 이완숙의 여인을 보면서, 영화의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과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예술은 간혹 마술일 때가 있다. 건조하고 팍팍한 삶에 간혹 내리는 단비같이 혹은 스쳐 지나가는 미소처럼, 작지만 삶의 궤도를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하는 계기를 예술이 제공할 때가 있다. 거친 삶에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자기 삶을 바꾸게 하는 힘이 예술에는 있다. 그래서 예술은 종종 마술이다. 이완숙의 여인은 우리를 위로하고 삶을 지속하게 하는 마술로써의 예술이라는 차원에서 매우 유효하다. 꿈 같지만, 일상적이고 일상적이지만 몽환적인 이완숙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소소하지만 가치 있는 일상들과 자기 자신이 자기 삶을 바꿔나가는 긍정적인 주체임을 부지불식간에 생각하게 한다. 예술은 인간이 관계의 주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도구이다.
아!! 인생. 이라는 생각이 찰라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고나 할까?
2 구름 위를 날고 있는 그녀의 시선은 수평선 너머의 먼 곳이다. 간혹 구름 위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서서 망원경을 통해서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은 세상의 끝 혹은 그 언저리쯤일 것이다. 구름은 그녀의 대지이며, 그 대지 위에 그녀의 분신 같은 새도 쉬고 핸드백도 쉬고 있다. 날아가고 있는 그녀도 딱히 가고자 하는 곳은 없어 보인다.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은 그녀의 시선뿐이며 그래서 그녀는 날지만 한가해 보이고 행위라기보다 무위로 느껴진다. 구름은 그녀의 거처이자 유토피아이고, 그녀의 삶은 꿈과 중첩되어있고 그곳에 집도 나무도 동무도 있고 그들의 일상(예컨대 잘 차려입고 닭을 타고 결혼식의 하객으로 간다거나)이 이어지는 곳이 ‘구름’이다. 그래서 구름은 그녀의 대지이다. 구름을 대지로 삼는 마술이라고나 할까? 이완숙 작품의 여인은 작가의 거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작가 자신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엔 그녀의 삶이 통째로, 혹은 온전한 삶의 부분이나 삽화들, 그리고 작가의 꿈과 환상 나아가 그녀의 염원과 삶을 바꾸거나 유지해나가는 마술이 담겨있다. 그녀의 작품을 보는 일은 작가가 가진 생각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재미가 있고,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표정을 살피거나 늘 등장하는 사물들의 의미관계를 되새겨보는 재미도 있다. 기실 그녀의 여인은 거의 전편일률적인 표정을 가지고 있다. 혹은 표정이 없다. 그러나 쌍안경 안에 있는 눈은 최대한 멀리 그리고 자세히 보려고 인상을 쓰고 실눈을 뜬 것처럼 느껴지고 비슈누처럼 새 위에 앉아있는 여인은 매우 온화해 보인다. 중절모를 쓴 사내가 서서 어깨에 손을 얹은 여인은 다소곳하지만 조금은 경직된 표정으로 읽힌다. 그렇게 여인의 표정은 보는 이를 통해서 풍부해지고 감정이 이입된다. 이렇게 이입되는 감정이 작은 마술이 되어 보는 이의 삶을 변화시킨다. 이완숙의 여인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은 작가 자신의 화신인 여인이 주는 정서의 ‘환기’이다. 이완숙의 작품은 흔히 생활세계라고 말하는 우리의 일상과 그 삶의 터전에서 우리가 꾸는 꿈을 만나게 한다. 일견 동화적 상상력으로 보이는 일상이 가진 힘과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마술적인 힘이 그녀의 작품이 가진 본령이다. 소소하고 일상적이지만 꿈을 꾸고 그 꿈을 현실로 바꾸고 삶을 살아내는 힘을 가진 여인이 작품의 주연배우이자 그녀 자신이다. 사막은 황량하고 방문객이라고는 먼지투성이의 트럭 운전사밖에 없는 곳이더라도, 빛나고 이름다운 인생이 그곳에서 만들어지고 타인에게 전염되어 유토피아가 되는 일을 예술이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작품을 통해서 종종 느낀다.
3. 특히 입체를 다루는 예술에서, 작가는 사라지고 조형물 업자만 넘쳐난다. 조각가는 없어지고 조각가가 없어졌으니 당연히 전시도 없어졌다. 조각가들의 전시 대신 생겨난 것이 환경조형물 혹은 건축물 미술작품을 위한 미니어처 견본시장이다. 세상은 계속 변화하고 예술의 형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런 변화들이 아쉬울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 꾸준히 작업을 하고 그것을 발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전히 작업이 생계가 되지 못하는 것도 현실이고 전시 공간이 널려있는 것도 아니다. 공공의 전시장들이 언제나 작가를 반기는 것도 아니고, 상업적인 공간들은 아라비아 숫자로 작가들을 걸러낸다. 전시를 통해서 오랜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지속되는 것은 기쁜 일이다. 기쁘다기보다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주변에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각종 미술 관련 협회나 모임에 이름은 올라 있으나 폐업에 가까운 오랜 휴업 중이거나 협회전이나 동문전에 소품을 출품하는 것으로 면피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잊을만하면 개인전 소식을 전해주는 오랜 사람들의 소식은 반갑고 고맙다. 그래서 작품을 가로 세로로 분해해서 분석한다거나 의미를 기술한다거나 일정한 범주의 이론을 가지고 작품을 재단하는 일 대신에 그녀가 지속해서 작업을 하고, 해를 여러 번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통해서 작품을 보여주는 것에 감사를 보내고 싶다. 계속해서 이완숙의 전시소식을 듣고 작품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사족: 그녀라는 말은 서양말을 번역하면서, 남녀를 구분하려고 일본인들이 쓰기 시작한 말이 우리에게 정착했거나 일본에는 있는 말을 받아들여 쓴 말일 듯싶다. 그래서 웬만하면 이 말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완숙의 작품을 보면서 처음 생각난 말이 ‘그녀’이므로 다른 말로 바꾸는 것 보다 그냥 ‘그녀’라고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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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Criticis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