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무상무념의 미학을 추구한 조각가_이일영 칼럼니스트

무상무념의 미학을 추구한 조각가 

이일영 칼럼니스트

 

조각가 민성호의 작품을 대하면 얼굴(face)을 본질적 주제로 깊게 사유한 의식을 만나게 된다. 작가는 얼굴이 역사적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인류 진화와 문화에 큰 영향을 가져온 의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작가의 작품은 오랜 진화에서 오늘의 모습을 가진 얼굴에 대한 깊은 헤아림을 담고 있다. 다양한 얼굴 모양과 특징이 문화적 표현과 식별로 이어져 화장과 문신에서부터 환경과 문화를 나타내는 상징과 같은 실체를 해체한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얼굴이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주요한 바탕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표정과 표현이 인간관계의 감정과 소통인 점을 중시한 것이다.    

 

작가는 국경이 없는 마음의 거울과 같은 감출 수 없는 특징을 부여받은 저마다의 얼굴이 가지고 있는 신성한 본질을 자아로 인식하였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대량 생산과 복제로 이어지는 산업의 산물처럼 획일화되어가는 오늘의 얼굴에 대하여 잃어버린 자아의 소중함을 일깨운 의식을 말한다.  

 

작가는 실체적 미를 바탕으로 더욱더 심미적인 사유를 추구한 작품들을 작업하여 왔다. 자아의 깊숙한 추구이다. 다양한 행위를 통하여 변화하는 얼굴이지만, 떼어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본질로 탐구한 것이다. 얼굴을 모티브로 삼아온 작가의 작품에서 오늘날 추상화된 작업의 변화를 깊숙하게 이해하게 되는 배경이다. 

 

작가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서 본질이 훼손되면 존재가 성립되지 않는 철학적 사유를 건져 올린 것임을 중시하여야 한다.  

 

지난 4월 작가는 장흥 해태 아트밸리 자연휴양림에 있는 동굴 전시실에서 6개월 동안 싸임조각전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동굴형태의 전시실을 자신의 작업에 대한 터널과 같은 과정으로 견준 것이다. 동굴을 벗어나 바라보게 되는 빛처럼 자신의 작업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을 추구하려는 가짐이었다.

 

전시 작품은 다양한 재료로 작업한 얼굴의 주요한 형태를 추상화하였다. 그중 온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미학적으로 매만진 입술을 부각하였다. 이는 본질의 추구와 함께 얼굴에서 유일하게 다양한 기능이 있는 입술의 소중함을 의식적으로 연관시킨 것이었다. 이렇듯 얼굴은 작가의 오랜 작업의 바탕이었으며 근원이었다. 

 

작가는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이탈리아 여행을 갔다가 피렌체 북서쪽 100km 거리에 있는 대리석 채석장으로 유명한 카라라(Carrara)에 아예 머물렀다. 이는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양질의 재료가 널린 환경에서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작은 대리석을 모아 재료에 적합한 얼굴 조각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2000년에 이탈리아 북부 중세 베로나 왕국의 역사적 유산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베네토주 베로나에 소재한 스쿠올라 델 마르모(대리석 기술학교)에 입학하였다. 대리석에 대한 실체적 탐구와 가공 기법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학교였다. 

 

대리석 기술학교를 졸업한 작가는 세계적으로 정통한 권위를 자랑하는 이태리 까라라 국립미술대학 조각과에 입학하여 박사 최고위 과정까지 7년 동안 공부하였다. 당시 작가는 유학 중에 현지에서도 권위를 인정받는 공모전에 연속하여 작품을 출품하였다. 

 

이로 인하여 2006년 이탈리아 리미니 국제 조각가를 위한 야외조각미술 대상(2006)과 이탈리아 제1회 제노바 비엔날레 제노바시장상에서부터 2007년 베네치아 국제청년미술공모전 대상과 2009년 이탈리아 제노바 비엔날레 조각 부분 1등 상을 수상하였다. 

 

작가의 이탈리아 공모전 참여를 통한 수상에서 주목하게 되는 사실은 단순하게 수상의 영예를 추구한 것이 아닌 점이다. 작가는 이탈리아 현지 재료로 작업한 작품의 공모를 통하여 재료를 다루는 기능적 기술에 엄격한 현지 공모전에서 치열하게 갈고닦은 조각술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으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정통한 조각술을 바탕으로 승화된 예술성이 중시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이탈리아의 엄격한 평가 기준에서 인정받는 바탕을 일구려는 의식이었다.

 

작가는 인간의 삶이 빚어내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담아내는 거울과 같은 얼굴을 바탕으로 심층적인 사유를 담아내는 작업을 지속하였다. 특히 인간 누구나 내면 깊숙하게 간직한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과 보이지 않는 얼굴이 가지고 있는 양면의 심미적 감정을 담아내기 위하여 자연적 재료인 돌을 쪼아 깎아내고 연마하였다. 단순화되어 가는 얼굴이 생겨나기 시작한 배경이다.

 

이처럼 단순화를 추구한 작가의 작품에서 살펴 갈 대목은 사랑(LOVE)이라는 텍스트를 가느다란 브론즈로 형상화한 사랑의 얼굴 연작이다. 이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의 작품들과 의식적인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소통이라는 감정을 중시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내면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나무로 표현한 자라나는 생각 시리즈 작품 또한, 자연 그대로의 순수 속에서 생성된 소통과 교감을 중시한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자꾸만 형태가 사라진 얼굴의 추상화로 생겨난 여백을 가슴으로 생각하는 경험을 반복하였다. 마침내 허구와 실체가 모호한 작품을 바라보게 되면서 인간의 삶에서 휴식이 신체와 정신 그리고 감정의 균형을 가져오는 필수적 가치라는 사실을 깊게 인식하였다.

 

이러한 맥락은 2007년 즈음부터 작품에 실체적인 물고기가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작품이 등장하는 배경과 과정이다. 이를 헤아리면 삶의 터전인 물 밖을 나온 물고기를 휴식을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비추어가기 시작한 변화를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작품의 연속에서 작가 스스로 기도와 명상으로 정신적 휴식을 취하는 순례자가 되어 무거운 본질의 돌을 이고서 앉아있는 사람으로 표현된 것이다. 

 

휴식시리즈는 돌 위에 돌을 이고 있는 인체의 조형적 어법을 추구하였다. 이에 자연적 사암(sandstone)을 소재로 머리 위에 자연석을 이고 있는 다수의 작품을 선보인 의식의 해체는 중요하다. 작가는 자연적 사암의 특성과 신체의 외형적 동질성을 긴밀하게 융합하였다. 마침내 그 형상은 다양하지만,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인간이 돌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형상으로 빚어낸 의지를 관통하게 된다. 이는 현실 속의 삶에 무게를 품고 있지만, 머리보다 가슴이 가까운 감성을 흥건하게 담아낸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자아와 본질을 추구한 얼굴에서 감정과 표현을 내면의 사색으로 쌓은 휴식이 되어 쉼에서 일깨운 사유적 의식에서 탄생한 작품이 ‘연기의 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연기(Smoke)는 사물이 불에 연소할 때에 생겨나는 기체와 기운이다. 물리적 관점으로는 소멸하는 기체이지만, 철학적 관점에서는 그림자로 비유되는 서정적 의미를 강하게 품고 있다. 이를 융합하면 자연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내면에서 깊숙하게 매만지고 있었다.

 

나아가 연기란 변화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연기가 솟아오르는 과정은 불꽃과 같은 짧은 순간의 연속이지만, 그 실체적 모습은 아름다운 형태를 남기는 순간적인 미적 경험으로 연결된다. 이와 같은 흐름에서 작가는 오랜 역사 동안 변화를 추구하고 갈망한 아름다움의 실체가 얼굴이었음을 중시한 것이다.  

 

작가는 실재와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기에 대하여 물질과 정신 그리고 현실과 꿈이라는 이분적 감성으로 일깨웠다. 이는 가려진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은밀함을 품고 있는 연기에 대하여 진리와 허구라는 의식으로 해체한 의식은 중요하다. 오랫동안 일구어온 작업의 바탕인 얼굴에서 추구한 본질과 자아에 대한 일깨움을 일관되게 추구한 의지가 극명하게 살펴지기 때문이다. 

 

더욱더 긴밀하게 정리하면 작가의 작품은 본질과 자아의 실체인 자연의 돌을 매개체로 내면의 감정을 담아내는 얼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표정마저도 벗어놓은 휴식으로 드러누웠다. 이를 일깨워 소유의 경계마저도 포용한 연기의 집으로 승화시켜 동행의 쌍두마차로 끌고 온 작업이 비상(飛翔)이다. 

 

비상이란 높이 올라가고, 더 멀리 나아가는 욕구이며 더 나은 미래를 상징한다. 이는 일상적인 제약과 속박을 벗어나는 자유와 해방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의식을 관통한 작가의 작품에서 날으는 것이란 땅에 발을 딛는 속박과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표현된 작가의 사유적 상상력은 경이롭다.

 

얼굴과 휴식에 이어 연기와 비상으로 이어온 작품의 흐름과 변화는 마침내 무상무념을 매만지고 있다. 무상무념이란 동양 철학과 대승불교의 정신 수행에서 생겨난 개념으로 정신적 평화와 깨달음을 추구하는 의식과 맞닿아 있다. 무상(無相)이란 대승불교에서 집착하는 모습 즉 형상이 없다는 말이다. 대승(大乘-mahayana)이란 깨달음을 향해 가는 큰 수레 즉 커다란 탈 것을 의미한다.  . 

 

이는 상(相)이라는 문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일깨워 그릇된 것을 버린다는 의미와 바탕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는 사실에서 얼굴을 바탕으로 한 서로를 마주 보는 형상의 작품에 담긴 내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나아가 무념(無念) 이란 마음이나 의식이 무심한 상태를 나타내는 동양 철학적 개념으로 욕망과 함께 미루어 생각하는 인간의 이성적 분별에 의하여 생겨나는 인간의 고통과 불만을 해소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불교 수행에서 기원한 심리학적 개념으로 마음 챙김으로 번역되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와 맞닿은 현재의 순간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자각하는 상태이다. 

 

 

 

심리치료의 세계적 권위자인 하버드 의과 대학 임상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거머 박사는 불교 명상의 핵심인 마음 챙김을 기반으로 심리치료의 선구적 지평을 제시하였다. 그는 마음 챙김을 자각(awareness)과 주의(attention)와 기억하기(remembering)로 정리하였다.

필자는 민성호 작가의 정통한 조각술을 기반으로 사유의 여행과 같은 깊은 의식에서 빚어낸 작업의 흐름과 변화를 중시한다. 나아가 오늘날 치열하게 매만지는 작품 무상무념을 특히 주목한다. 

 

이는 형태의 미로 존재하는 조각 예술에서 모든 분별과 욕망을 버린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여 정신적인 해방과 깨달음을 찾으려는 작가의 내면적 의지가 제시할 작품에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교감-마주보다
교감-(마주보다)

 조각은 공간 예술이라는 말이 떠 오른다  2002년 개인전에 거대한 원통형 철 파이프로 공간을 하나의 선(틈)으로  내부와 외부의 공간 이동이라는   작품을  개인전에 발표 한 적 있다.
 이번 춘천 심포지움의 작업도 공간을 비워내고 작품내부의 공간에 관람자가 들어와  마주보는 얼굴 사이에서 실제적인 교감을 유도하고자 하였다. 
화강암 원석 높이2200mm에서 포천에 석산에서 주문 채굴해서 가져와 내부의 원형공간을  만들기 위해  와이어 커팅 작업으로  원통형을  비워내고 그것을 또 다시 비워내어 세 개의 덩어리가 보여졌다.  
다시 말해 하나의 원석에서 두 개의  원통 덩어리가  태어나고 태어난 것이다.  

 조금 벗어난 애기일수도 있지만 종교 에서는 자기 자신을 버리거나 비워짐의 결과로  다른 하나가 생기는 것은  하나의 이치라 애기한다.  이번 심포지움 작업도  하나의 거대한 원석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은 내면의 존재하는 서로 다른 얼굴이다
얼굴 시리즈 작업의 대부분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얼굴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각자 다른 부분을 바라보는 얼굴 일 수도  있다. . 또 다른  빠져나온 원통형의  돌의 이미지는 더 단순해진 얼굴이미지로 보여진다. 마지막의  나온 원기둥 돌의 얼굴이미지는 서로 다른 측면의 남 여 모습으로 음과 양의 조화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번 심포지움의 테마 또한 회복과 치유의 기념비인 만큼  본인 작품도  내부와 외부, 안과 밖, 세 개의 돌은 하나의 돌 인 것처럼 서로 연관적이고 상대적이지만 하나인 것이다 
   그것들이  작품에서 나타내고자하였다.   보여 지는 두 얼굴은  실제 하는 얼굴이기보다는 
내면의 서로 다른 얼굴이고 나아가  마주보고 소통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제작하고  이후 공원에 설치한  “교감“작품은 지나가는 일반인들이 얼굴안의 내부의 공간에 들어와  사진을 찍는 포토 존으로 참여한다.  

이번 작업은 먼저 나 자신과 교감으로 시작하여  나아가 춘천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이  작품내부에 들어와 교감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보다 많은 관람자가  작품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작품 얼굴 안으로 들어와  
 자기 자신의  내면의 얼굴이 무엇인지 느끼고... 
작고 소박한 명상이나 기도로  지친 마음의 위로가 되기를 희망한다. 

상상력과 꿈꾸기의 DNA를 가진 작가-이재언

상상력과 꿈꾸기의 DNA를 가진 작가

    얼마 전 조각가 민성호의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그의 대형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2007년 카라라 체류중 잠시 귀국하여 개인전을 가졌을 때 보았던 ‘날아가다’의 연속물이었다. 그로테스크한 변형과 트랜스포머 같은 이중적인 이미지, 어딘지 모르게 냉소적이고 심각하면서도 캐릭터 모형 같은 가벼움과 코믹함이 살짝 묻어 있는 특이함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설정이 비현실적인 것이면서도 얼굴의 표정만큼은 속도감만큼의 상기된 상태이다. 근원을 모를 자아의 불안이라는 행간을 살짝 읽을 수 있다. 언뜻 작가 자신의 얼굴인 것도 같은 느낌의 얼굴들이 대부분 그런 표정들이었다. 작업노트에서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일련의 흔적’이라고 밝히고도 있지만, ‘얼굴은 실재하는 허구’라는 명제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얼굴은 성인의 얼굴인데, 몸통은 이제 막 자아의 정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영아기 유아의 모습이다. 이런 작가의 얼굴 시리즈는 자아의 자율성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밝히려 했던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거울 단계 이론’을 연상시키고 있다. 거울 단계 이론에 의하면, 거울에 비친 자기의 이미지는 단지 신체가 현실적 공간에 반영된 것으로, 그것은 그림자이며, 그것은 자기의 실재 혹은 내면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는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주체에 대해 언제나 타자로만 머물며 이상화되기 쉽다는 것이다. 결국 거울 단계는 행복한 단계이기는 하지만, 허구적인 단계이며, 타자를 통해서만 자아가 구성되는 단계이다. 따라서 그 원형은 언제나 자기 소외적인 것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자아에 대한 불안의 근본 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연인지 의도된 결과인지 확인한 바 없지만 작품들이 아주 흡사한 맥락이다.
 

    이후 작가의 작품은 ‘집’ 시리즈를 선보였다. 조그맣고 아담한 집에서 뿜어낸 연기가 바람에 휩쓸려 옆으로 날리고 있는(땅에 닿는) 모습의 작품들이다. 기이하고 심각한 작품만 선보였던 작가가 서정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선보인 것이 어딘지 생뚱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반전과도 같은 이중적 코드가 내장되어 있다. 구름 같은 연기의 끄트머리에 귀의 형상이 숨어(변형되어) 있는 것이다. 꿈을 꾸는 귀, 어디선가 흘러온 선율을 듣는 귀, 진실을 듣는 귀이다. 이제 무한한 상상의 바다 위에서 그것의 기호적, 상징적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가 즐겨 구사하는 어법은 언제나 다중적이다. 때로는 그러한 다중 코드가 조금은 편하게 교감하기보다는 긴장하여 독해에 집중해야 하는 점도 있지만, 작가의 거칠 것 없는 번득이는 감각은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여도 좋다. 길들여지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적인 세계는 찰나의 교감보다는 점수(漸修)하듯 두고두고 음미할 때마다 신선한 묘미가 솟는 것이다. 작가의 조각은 ‘낯설게 하기’ (Dépaysement)의 조합이기에 다듬어진 것에만 익숙한 감각에는 뜸 들이는 과정을 조금 필요로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에서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가 솟구친다.  
    작가가 그토록 다중적인 코드의 작품에 집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떤 무의식적 배후가 있는 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의식 너머의 상상력에서 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인류의 상상력은 대개 무엇과 무엇의 결합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그러한 합성물은 무수히 등장한다. 켄타우로스(반인반마), 키메라(사자/염소/뱀), 라미아(여자상반신/뱀 하반신), 미노타우로스(황소 머리 남자)......등 수많은 혼성종들을 만들어낸 상상의 원형 혹은 DNA는 지금도 활발히 작용한다. 가장 최근에 컴퓨터와 전화기를 합성시켜 ‘똑똑한 전화기’를 만든 스티브 잡스도 그 DNA가 두드러졌던 사람이다. 민성호 작가도 유독 꿈꾸기와 상상력이 두드러지는 사람인 것이다. 뭇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DNA 말이다.
                                 
                                                      이      재      언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