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교감-마주보다
교감-(마주보다)

 조각은 공간 예술이라는 말이 떠 오른다  2002년 개인전에 거대한 원통형 철 파이프로 공간을 하나의 선(틈)으로  내부와 외부의 공간 이동이라는   작품을  개인전에 발표 한 적 있다.
 이번 춘천 심포지움의 작업도 공간을 비워내고 작품내부의 공간에 관람자가 들어와  마주보는 얼굴 사이에서 실제적인 교감을 유도하고자 하였다. 
화강암 원석 높이2200mm에서 포천에 석산에서 주문 채굴해서 가져와 내부의 원형공간을  만들기 위해  와이어 커팅 작업으로  원통형을  비워내고 그것을 또 다시 비워내어 세 개의 덩어리가 보여졌다.  
다시 말해 하나의 원석에서 두 개의  원통 덩어리가  태어나고 태어난 것이다.  

 조금 벗어난 애기일수도 있지만 종교 에서는 자기 자신을 버리거나 비워짐의 결과로  다른 하나가 생기는 것은  하나의 이치라 애기한다.  이번 심포지움 작업도  하나의 거대한 원석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은 내면의 존재하는 서로 다른 얼굴이다
얼굴 시리즈 작업의 대부분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얼굴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각자 다른 부분을 바라보는 얼굴 일 수도  있다. . 또 다른  빠져나온 원통형의  돌의 이미지는 더 단순해진 얼굴이미지로 보여진다. 마지막의  나온 원기둥 돌의 얼굴이미지는 서로 다른 측면의 남 여 모습으로 음과 양의 조화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번 심포지움의 테마 또한 회복과 치유의 기념비인 만큼  본인 작품도  내부와 외부, 안과 밖, 세 개의 돌은 하나의 돌 인 것처럼 서로 연관적이고 상대적이지만 하나인 것이다 
   그것들이  작품에서 나타내고자하였다.   보여 지는 두 얼굴은  실제 하는 얼굴이기보다는 
내면의 서로 다른 얼굴이고 나아가  마주보고 소통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제작하고  이후 공원에 설치한  “교감“작품은 지나가는 일반인들이 얼굴안의 내부의 공간에 들어와  사진을 찍는 포토 존으로 참여한다.  

이번 작업은 먼저 나 자신과 교감으로 시작하여  나아가 춘천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이  작품내부에 들어와 교감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보다 많은 관람자가  작품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작품 얼굴 안으로 들어와  
 자기 자신의  내면의 얼굴이 무엇인지 느끼고... 
작고 소박한 명상이나 기도로  지친 마음의 위로가 되기를 희망한다. 

상상력과 꿈꾸기의 DNA를 가진 작가-이재언

상상력과 꿈꾸기의 DNA를 가진 작가

    얼마 전 조각가 민성호의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그의 대형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2007년 카라라 체류중 잠시 귀국하여 개인전을 가졌을 때 보았던 ‘날아가다’의 연속물이었다. 그로테스크한 변형과 트랜스포머 같은 이중적인 이미지, 어딘지 모르게 냉소적이고 심각하면서도 캐릭터 모형 같은 가벼움과 코믹함이 살짝 묻어 있는 특이함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설정이 비현실적인 것이면서도 얼굴의 표정만큼은 속도감만큼의 상기된 상태이다. 근원을 모를 자아의 불안이라는 행간을 살짝 읽을 수 있다. 언뜻 작가 자신의 얼굴인 것도 같은 느낌의 얼굴들이 대부분 그런 표정들이었다. 작업노트에서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일련의 흔적’이라고 밝히고도 있지만, ‘얼굴은 실재하는 허구’라는 명제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얼굴은 성인의 얼굴인데, 몸통은 이제 막 자아의 정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영아기 유아의 모습이다. 이런 작가의 얼굴 시리즈는 자아의 자율성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밝히려 했던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거울 단계 이론’을 연상시키고 있다. 거울 단계 이론에 의하면, 거울에 비친 자기의 이미지는 단지 신체가 현실적 공간에 반영된 것으로, 그것은 그림자이며, 그것은 자기의 실재 혹은 내면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는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주체에 대해 언제나 타자로만 머물며 이상화되기 쉽다는 것이다. 결국 거울 단계는 행복한 단계이기는 하지만, 허구적인 단계이며, 타자를 통해서만 자아가 구성되는 단계이다. 따라서 그 원형은 언제나 자기 소외적인 것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자아에 대한 불안의 근본 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연인지 의도된 결과인지 확인한 바 없지만 작품들이 아주 흡사한 맥락이다.
 

    이후 작가의 작품은 ‘집’ 시리즈를 선보였다. 조그맣고 아담한 집에서 뿜어낸 연기가 바람에 휩쓸려 옆으로 날리고 있는(땅에 닿는) 모습의 작품들이다. 기이하고 심각한 작품만 선보였던 작가가 서정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선보인 것이 어딘지 생뚱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반전과도 같은 이중적 코드가 내장되어 있다. 구름 같은 연기의 끄트머리에 귀의 형상이 숨어(변형되어) 있는 것이다. 꿈을 꾸는 귀, 어디선가 흘러온 선율을 듣는 귀, 진실을 듣는 귀이다. 이제 무한한 상상의 바다 위에서 그것의 기호적, 상징적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가 즐겨 구사하는 어법은 언제나 다중적이다. 때로는 그러한 다중 코드가 조금은 편하게 교감하기보다는 긴장하여 독해에 집중해야 하는 점도 있지만, 작가의 거칠 것 없는 번득이는 감각은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여도 좋다. 길들여지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적인 세계는 찰나의 교감보다는 점수(漸修)하듯 두고두고 음미할 때마다 신선한 묘미가 솟는 것이다. 작가의 조각은 ‘낯설게 하기’ (Dépaysement)의 조합이기에 다듬어진 것에만 익숙한 감각에는 뜸 들이는 과정을 조금 필요로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에서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가 솟구친다.  
    작가가 그토록 다중적인 코드의 작품에 집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떤 무의식적 배후가 있는 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의식 너머의 상상력에서 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인류의 상상력은 대개 무엇과 무엇의 결합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그러한 합성물은 무수히 등장한다. 켄타우로스(반인반마), 키메라(사자/염소/뱀), 라미아(여자상반신/뱀 하반신), 미노타우로스(황소 머리 남자)......등 수많은 혼성종들을 만들어낸 상상의 원형 혹은 DNA는 지금도 활발히 작용한다. 가장 최근에 컴퓨터와 전화기를 합성시켜 ‘똑똑한 전화기’를 만든 스티브 잡스도 그 DNA가 두드러졌던 사람이다. 민성호 작가도 유독 꿈꾸기와 상상력이 두드러지는 사람인 것이다. 뭇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DNA 말이다.
                                 
                                                      이      재      언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