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묶기/풀기, 이중적 구조의 회화_서영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오홍석의 두 번째 개인전 《존재자의 흔적》 서문

 

묶기/풀기, 이중적 구조의 회화

Folding/Unfolding, structural duality in Hong-seok Oh's painting

 

서영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회화 본질의 탐색

필자는 오홍석의 작품에서 회화의 본질 자체를 탐색하는 의식을 보았다. 이 의식은 매우 집요하고 투철해서, 작업의 휴식과 지속이 갈마들던 삼십 여 년의 시간 속에서도 내내 시종일관했던 것으로 관찰된다. 그동안 작가가 얼마나 자주 아트페어, 단체전, 개인전을 실천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그보다는 작가 특유의 회화적 조형의식이 세월의 흐름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일관됐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한 점으로 생각된다. 

오홍석의 회화에 대한 관점은 상당히 유물론적이다. 시선을 회화의 물적 토대인 캔버스 천 자체에로 끌고 들어간 태도와 그 회화의 제로지점 다시 말해 이미지의 일루전을 소거한 상태에서 끈과 매듭 같은 소재들을 발굴해 회화의 구조를 형성해낸 일은 그의 조형의지가 관념적이기보다 유물론적 사유에 더 가깝다는 확신을 들게 한다. 이 같은 작가 작업의 특이성은 주변 동년배 화가들 작업과의 차별화를 분명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필자는 여기서 오홍석의 조형적 사유의 폭을 가늠하진 않겠다. 다만 그가 보인 작업의 이질성은 필자의 흥미를 몹시 끈다고 말하고 싶다. 

이유를 말한다면, 회화의 제로지점에서는 그 어떤 예시적 재현 형태나 설명식 혹은 서술식 묘사도 사라질 수밖에 없고, 이런 타블라 라사의 근원적 상태로부터 조형작업을 출발시킬 때는 십중팔구가 오브제나 설치작업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는 여전히 회화란 범주를 재-선택했을 뿐 아니라, 캔버스 천이라는 지지체의 물적 토대에서 발견한 가능성들을 탐색하며, 씨실과 날실 구조의 환유적 확대인 끈의 교차와 연결 및 끈의 매듭을 통해 회화의 물적 토대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나무틀 위에 팽팽히 당겨진 캔버스 천처럼, 끈과 매듭이 드러낸 더 없이 단단한 긴장감은 그의 작품의 물적 근본이 캔버스라는 사실을 분명히 주목하도록 한다.

또한 최근 작품에서 돋보이는 색채 효과는 건조한 구조 문제에 집중된 작업과정에 회화 특유의 감성적 성격을 부가하고 있다. 회화에서 선과 형태가 이성적인 요소라면, 색은 감정적인 요소이자 내면의 에너지를 분출해내는 또 하나의 본질적 요소이다. 간혹 이 색-물감이 과잉이 되면, 천과 끈, 매듭을 적시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작가가 색을 적색과 청색이라는 두 가지 간명한 대립의 색조로 압축시킨 반면 물감으로는 천 자체를 거의 염색하다시피 물들인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색조와 물감을 구분하자면, 색은 관념의 요소이고 물감은 물질의 요소이다. 캔버스, 끈, 매듭의 천 대부분을 색-물감으로 흠뻑 물들이는 과정 중에 작가는 천-텍스타일의 두께로 파고든다. 그리하여 그가 일루전의 화면을 거부하고 실제 천의 깊이로 들어가서 실증해낸 것은 여전히 회화의 유물론적 본질 즉 회화의 바탕인 천 자체의 물성이다. 바로 이것이 오홍석 회화의 특이한 질quality이 아닐까 한다.

 

묶기/풀기, 이중적 운동의 일의성(univocity)

지금까지 필자는 오홍석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이 부분을 따로 논의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논점의 핵심은 바로 작가가 자신의 손으로 종이끈을 묶고 풀어내는 이중적 운동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초기 작업에서는 주로 끈을 여러 방향으로 묶고 연결한 다음 드러난 매듭들 위에 스프레이로 물감을 뿌렸다. 매우 구축적이고 집약적인 질서의 작업이었다. 그런데 최근 작업에서는 끈의 연결 혹은 매듭을 풀거나 절단하기도 하고 심지어 바탕천을 찢기도 하면서, 그 절단의 장소를 물감으로 물들이는 요컨대 캔버스 천의 구조를 바깥으로 펼쳐보이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구축적 운동에서 해체적 운동으로, 환원 운동에서 확산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금 더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서로 상이한 이 이원적 운동의 방향은 본질적으로 상반되거나 서로를 무효화하거나 하지를 않는다. 오히려 두 제작 운동은 상호 교차적이고 상호 조응하는 관계로 서로 뗄 수 없게 얽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이처럼 풀어내는 ‘unfolding' 작업들이 이미 접고 묶는 'folding'의 작업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접고 엮었으면, 이제 그 꺾였던 주름들을 드러내 보이고 매듭들을 끊어내는 일이 발생해야 하는 것이다. 주목하건대 작가는 지금 접고 묶고 연결하는 작업과 동시에 풀고 헤쳐내고 절단하는 작업을 교차시키는 이른바 두 운동의 중첩을 통한 과도적 실험단계에 도달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이 이중적 운동을 앞서 말했던 유물론적 변증법 -변증법적 유물론이 아님- 의 조형방식으로 거듭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여기서는 작가의 생기生氣론적 의식에 더 큰 호기심을 갖고 살펴보려 한다. 

그에게 캔버스 천의 물적 구조는 수없이 많은 회화적 조형의 시도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익명의 뿌리와도 같다. 캔버스 위에 구현된 끈과 매듭, 화면 위의 요철과 구멍, 한정된 반복과 무한한 증식, 질서와 무질서, 정형과 비정형, 긴장과 이완, 환원과 팽창, 등등은 그의 작업(texturologie) 안에 무수한 다양성, 다원성을 일구어내는 요인이자, 특이한 회화적 생기 내지는 작품의 물적 활력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개별 작품들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회화적 다양체이고, 의미론적으로는 세계 혹은 존재의 원리를 암시하는 동일성을 공유한 개체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을까? 그에게 있어서 끈을 묶는 일과 풀어내는 일은 본질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의미, 하나의 목소리 즉 일의성의 운동이 아닐는지 ... 마치 17세기 바로크시대의 B. 스피노자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다양성을 인식하면서도, 전체 존재에서는 간극 없는 일의성을 확인했듯이 말이다.     

 

 

존재자의 흔적, 

혹은 차가운 감성의 전율

필자는 오홍석의 작품들 앞에서 개별 존재자의 과묵한 침묵과 결코 가볍지 않은 존재의 흔적을 느낀다. 작가의 감성은 뜨겁기보다 차가운 편이지만, 그의 낮은 온도의 내재적 감성의 울림은 결코 움츠러들지도 잦아들지도 않으면서 우리에게 고른 숨결로 전달이 된다. 예민한 관객들이라면, 엮고 묶고 풀고 끊어낸 이들 작품들로부터 지배적 이성과 절대적 관념의 틀에서 탈주한 존재자의 아픔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으리라. 확실히 그의 작품은 현상적 표면에서 독해가 종료되는 경우가 아니다. 그가 표상해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 내면 깊숙이 파고 든 것들, 의식 아래로 침강한 잠재된 것들이 현실의 시공간으로 뚫고 올라와 발생한 현실태적 양상들이다. 그의 묶은 매듭과 풀어헤친 캔버스 천의 거친 표피는 그가 초월적 관념을 향해 치켜 올려다 본 결과가 아니라, 눈길을 아래로 끌어내리면서 바라 본 지상의 형용하기 어려운 물질 즉 존재자의 살의 형상과 목소리의 결을 주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번 개인전에서 그가 보여준 역량, 요컨대 회화 본질의 탐색에서부터 묶기/풀기의 이중적 운동의 일의성을 거쳐 마침내 존재자의 다양한 흔적들을 통한 존재의 근원적 힘-그 흔적들-을 표상했음에 대해 필자는 억누르기 어려운 감흥을 느끼는 바이다. 이토록 드문 성공을 목도한 바에야 필자는 앞으로도 작가가 어떤 차원으로 옮아가면서 우리를 전율케 할는지 계속 기대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