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샬롬의 정원-안용준
샬롬의 정원 
                                                  
                                                   안용준 목사 (미학박사, 미술비평)

  오진은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샬롬의 정원을 가꾸는 화가다. 그의 눈엔 숨길 수 없는 생명의 노래로 가득하다. 따스한 사랑에 흠뻑 젖은 오진은 생명의 노래를 조금씩 풀어내고 있다. 이제 파릇한 길목에서 만나는 멋진 기쁨의 향연에 손을 내밀어 본다. 이 순간 무척이나 행복해 질것만 같은 애절한 감동이 밀려온다. 하늘에서 임하는 빨강 노랑 파랑의 꽃들이 아름다운 자연의 연주 속에 새 노래가 되어 온 누리에 울려 퍼진다. 사랑을 머금은 창공은 하늘의 무지개를 그리며 축복을 약속한다. 
  이렇듯 오진의 심미적 체험은 단순한 재현(Representation)의 단계를 뛰어넘어 거룩한 신성의 반영으로 나아간다. 단순히 자연의 정보를 제공하거나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삶에 찌든 영혼에게 유연한 사고와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최선인 걸 안다. 그래서 정원은 단순한 물리적 환경의 카피가 아니게 된다. 그곳은 은혜와 풍요로움이 숨 쉬는 샬롬의 공간이다. 마치 예루살렘으로 묘사되는 도시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묘사되었듯이(계 3:12, 21:10), 오진이 마련한 정원은 하늘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오진은 샬롬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소통에서 온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엔 자유의 유토피아가 자리한다. 이 자유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며 인간 가운데 이루어지는 ‘불의’와 ‘부조화’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여기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이 상태는 우리의 환상이라고 단번에 치부될 수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여전히 우리의 소망이 되어왔음을 부인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오진이 가꾸는 정원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생겨나고 자란 곳이다. 그곳이 우리에게 소중한 까닭은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가 자연의 산과 하늘과 냇물로 이루어져 있는 까닭이다. 생명의 신비가 느껴지는 그곳엔 가을 봄 여름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꽃이 핀다.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어 풀싹이 돋아나고 메말랐던 나무 가지에 새움이 눈 틀고 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적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오진의 화폭엔 우리의 빈 마음을 채워줄 만한 넉넉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럴듯하게 위조된 관계 앞에서 상처 입은 영혼이 찾아와도 좋다. 우리를 사로잡고 환각시키는 거짓 정보로 좌절을 맛본 영혼이 달려와도 좋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이미지에 맘을 빼앗긴 영혼이 치유를 위해 성큼 다가와도 좋다. 가슴을 움켜쥐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자에게 주자고 마련된 작은 정원이 우리의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선 텅 빈 마음을 맘껏 풀어헤쳐도 좋다. 하나 둘 우리 마음의 조각들을 투영시켜 보면 알게 된다. 단순한 아름다움의 고귀함이 무엇인지를. 
  오진의 예술은 우리의 내적 인간이 나날이 새로워지도록 독려하고 있다. 그는 전달하려는 이미지가 축복받은 명상의 느낌까지 포용되도록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감상자의 살아 있는 감성이 화면에 투영되어 심오하고 풍부한 미적 형식을 수용하도록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근대 미학(美學)의 거장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미에 관한 논의를 상기케 한다. “미(美)에 관한 쾌감은 단순히 향수(享受)의 쾌감이 아니요 반성(反省)의 쾌감이다.” 진실로 감상자의 참여를 요구하는 예술적 구조를 높이 평가하는 열린 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