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인간의 삶을 반추하는 소나무의 삶과 정신에 대한 진솔한 미학_김이천(미술평론가)
인간의 삶을 반추하는 소나무의 삶과 정신에 대한 진솔한 미학 

  박정기 작가는 미술대학 졸업 후 오랫동안 고등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려왔다. 정년을 앞두고 퇴직하고 비로소 전업 화가로 전직했다. 그동안 그는 여덟 차례의 개인전과 다수의 기획전을 가졌으며, 대한불교미술대전 대상과 교육부장관상(미술영재교육 부문)을 수상하고, 대한민국미술대전 등의 심사위원을 지내면서 괄목할 만한 화업을 쌓았다. 이렇게 작가가 30년 넘게 추구해온 회화 세계는 아름답고 신비한 대자연에 대한 예찬이었다. 그것도 서양의 고전이라 불리는 아카데미즘에 기초한 ‘사실성(事實性)’의 추구였다. 무엇보다 그의 사실성은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외형 재현에서 나아가 대상 속에 내재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작화 태도는 그가 1997년에 쓴 석사학위 논문 ‘한국 소나무 그림의 미의식’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소나무의 개념과 특징, 소나무 그림의 역사와 가치 등에 대한 학술적 고찰을 이룬 이 논문을 토대로 그는 한국 소나무의 삶과 정신의 진솔한 표현에 천착해오고 있다. 
  그는 현장에 나가 직접 소나무 숲을 사생하고, 거기서 받은 인상과 감정을 캔버스에 옮기면서 생생한 현장감과 함께 소나무가 지닌 내밀한 정서까지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소나무 그림에는 빛이 있다. 계절 따라 이른 새벽부터 어둑해지는 늦은 오후까지 소나무에 비친 다양한 빛의 변화가 가득하다. 마치 소나무 숲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의 소나무와 그 주변의 공간은 사실적이고 환영적(幻影的)이다. 소나무와 그 사이로 비치는 신비로운 햇빛, 잔잔하고 고요히 흐르는 청정한 기운이 그의 소나무 그림에서 느껴진다. 바쁜 일상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나와 마음껏 쉬고 싶은 휴양의 공간이다. 무엇보다 박 작가의 소나무 그림은 그가 일기에서 밝혔듯이 ‘인간의 삶을 자연과 하나로 보는 유기체적 자연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하늘 높이 수직으로 솟은 줄기에서 삶의 경쾌함을, 따사롭고 밝은 여백에서 삶의 싱그러움을, 소나무 줄기의 곡선을 통해 생생한 성장과 강인한 생명력, 어려움 가운데 찾아오는 희망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인간의 삶을 반추하는 박 작가의 그림 속 소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애국가 2절의 첫 소절에 “남산 위에 저 소나무”로 등장하는 한국의 상징적인 나무로서 그 품질이 좋아 예로부터 건축이나 가구의 목재로 사용되었고, 그 뜻이 좋아 그림이나 공예의 소재로 애용되어왔다. 특히 엄동설한에서도 푸른 생명력으로 유지하는 속성 때문에 옛사람들은 소나무를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굳은 기상과 절개의 상징으로 여겼고, 강한 생명력으로 오랫동안 죽지 않고 장수하여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도(十長生圖)’의 소재로 자주 표현해왔다. 또한 민간에서는 소나무 가지를 문 앞에 세우거나 지붕 위에 두어 사악한 기운을 내쫓고 공간을 깨끗하게 만드는 벽사(辟邪)와 정화(淨化)의 도구로 사용했다
  박 작가의 논문에 따르면, 소나무는 한자로 ‘松’(송)이다. 이는 나무 ‘木’(목)자와 공평할 ‘公’(공)자가 좌우에 나란히 붙은 합성어인데, 진시황제(259~210 BC)가 길을 가다가 만난 비를 피하게 해준 소나무에 하사한 공작 작위에서 유래한다. 영어 ‘Pine’[松]은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서 목양의 신(牧羊神)인 판(Pan)이 그와 바람의 신 보레스에게 사랑을 받았던 요정 피티스(Pitys)가 두 사랑에 괴로워하다 투신자살한 산의 낭떠러지에 자라난 나무에 붙여준 이름 ‘Pinus’에서 유래한다. 
  이렇듯 역사적·신화적 개념을 지닌 소나무는 박정기 작가의 그림에서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실제와 같은 환영(幻影, illusion)이 느껴진다. 이러한 환영은 본래 서양에서 2차원의 평면을 3차원 세계를 명암법과 원근법을 이용해 사실적으로 그려서 진짜처럼 보이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통일신라의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老松圖)>나 조선 인조 때 김명국이 공주의 빗접에 그린 곤충 이[蝨]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새들이 소나무 그림을 보고 날아들어 부딪치고, 공주가 빗접의 이 그림을 손톱으로 눌러 죽이려 했다는 일화는 이들의 그림이 서양의 ‘눈속임 그림[trompe l'oeil, 트롱프뢰유]’ 전통에 버금가는 사실성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박 작가의 소나무 그림이 이러한 트롱프뢰유적 사실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의 사실성의 그림에는 소나무가 지닌 외형적 특징뿐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한 정신성까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의 화가인 고개지(345~406)가 ‘대상의 형상을 묘사하여 형상 속의 정신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표현한 ‘전신사조(傳神寫照)’의 특징이 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신사조는 박 작가의 고향 남도의 근대회화 시조인 윤두서(1668∼1715)의 터럭 한 올까지 치밀하게 묘사한 개성 강한 <자화상>(국보 240호)이나 조선 최고의 초상화가인 이명기가 1792년에 그린 <채제공 초상>(보물 1477~1호)에서 볼 수 있는데, 초상화 속 인물의 외모는 물론 성격까지도 엿볼 수 있다. 
  박정기 작가의 소나무 그림 역시 이러한 전신사조 정신을 계승한 자연주의 회화로서 소나무의 외양은 서양 회화의 전통인 아카데미즘에 기반한 사실적인 이미지이지만, 소나무의 내면은 동양 회화의 전통인 전신사조에 기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동·서 회화의 융합적 예술로 이해될 수 있다. 나아가 박 작가의 소나무 그림은 그의 논문에서 고찰 되었듯이 절개·기상·장생·벽사·정화와 같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소나무의 길상(吉祥) 상징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라는 의미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 서양의 트롱프뢰유적, 동양의 전신사의적 사실성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박 작가의 회화 세계는 독창적이며, 의미와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김이천(미술평론가)

소나무와 더불어
소나무와 더불어
- 화가 박정기 개인전에 부쳐
                      시인 정종배

소나무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렌다
동구 밖
한 그루만 서 있어도
이 우주가 든든하다
붉은 소나무 숲 마을
그 동네 사람들도 왠지 정겹다

앞산 능선에 오래된 소나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붉은 소나무 고운 빛깔
떠난 여인 다시 온 듯 반갑다
세상을 다 얻은 듯 벅찬 가슴으로
그 소나무 숲 그늘에 머물고 싶다

다가갈수록
소나무 밑동처럼 듬직한 화가는
벌써 그런 세상을 꿈꾸었다
이미 닳고 오래된 붓으로
예술의 황홀함을 만끽하고 있다
굽고 오래된 소나무만 고집스레 그리는 화가
바라만 봐도 이미 멋진 노송이다
어느 한 그루도 잔가지 하나 닮지 않은
개성 만점 만다라 세상이다

솔바람과 숲 향기 청아한 빛
그래서 우리 마음 속 화수분 아닐까
분명 인연 많은 세상
법어 한 마디
언제 어디든 꽃봉오리 아니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