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준렬 형의 침묵(沈黙) 개인전에 부쳐...

준렬 형의 침묵(沈黙) 개인전에 부쳐...

 

작품은 꼭 무언가 의미 있는 내용을 화폭에 담아내야만 하는 것일까? 만일 그 의미를 종이나 캔바스에 표현해 내지 않는다면 좋은 작품이라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추상미술을 두고 예술철학론의 관점으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과연 일반인들은 그 그림들을 두고 좋은 그림들이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혹은 작가들이 예술이라는 무게를 더하기 위해 스스로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일반인들에게 좋게 봐 달라는 설득의 개념으로 그 이론을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라면 시대가 지난 어느 시점에 그들의 행위가 당시의 철학 논리와 부합하듯 끼워 맞추어 시대를 대변하는 훌륭한 예술로 승화 되었으니 그렇게 봐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작가들이 시대의 사조와 관계없이 추상이던 구상이던 그들 마음속의 사실성(reality)을 표현해 내었음에도 굳이 어떤 무언가(예술의 이상) 있는 것처럼 이론을 대입시켜 마치 포장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보아도 이론의 간섭이 없다면 미술을 아는 누군가 설명하는 것처럼(내용이던 형식이던 불구하고) 관람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여 지지 않음에도 그렇게 봐야만 한다고 강요 하는 것은 아닐까?

 

준렬 형은 지난번의 개인전에 이어 두 번째 침묵(沈黙)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2020년에 시작한 침묵 시리즈는 먹줄을 장지에 튕기어 만들어낸 먹선(墨線)들이 습도에 의해 번져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선을 그려내고 있는데, 이 선들은 여백을 세심히 고려하여 화면에 배치하면서 아무런 자연의 형상을 표현하지 않았음에도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또 어떤 작품은 한지를 제작하면서 틀에서 떼어낼 때 자연스레 생긴 끝 쪽 단면을 그려질 장지에 덧대어 놓고 농담을 달리하여 먹물을 뿌려내며 여러 중첩을 가하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한지를 오려낸 흔적들을 덧대어 앞의 방법을 반복한 뒤 떼어내면서 이삼중의 편차로 드러난 실루엣은 마치 기하학적 추상인듯 하면서도 다른 시각에선 전통창호의 손가락 구멍을 통해 들여다 본 한편의 풍경화 같기도 하다. 또 다른 작품에선 장지 위, 아래에만 먹물을 튕겨내어 여백을 시원스레 살리고 있는 작품들을 보노라면 정제되지 않은 미니멀 아트의 회화를 보는 것 같다가도 시원스레 펼쳐진 너른 들판의 설국(雪국)을 연상하게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물에 스며드는 먹물의 생리를 이용하여 만들어지는 자연스런 형상을 화면 중앙에 아주 적절히 배치한 작품들은 얼핏 보면 오래된 수석의 단면을 보는 듯 착각하게도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시나 하얀 종이와 먹물의 흔적 들 뿐 어떠한 형태를 그려내거나 표현해 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말함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일이나 나의 눈에 비춰 연상하게 하는 그런 형상들은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내 눈의 착각임이 분명한데, 그렇게 보여지기를 갈망하는 나의 관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형은 근래에 왜 이런 작업들을 몇 해째 지속하고 있는 것일까? 다만 작가 스스로 화면과 대화하며 먹물을 통한 감성의 놀이(일반적으로 빈둥거리며 노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룰을 정하고 하는 행위)를 즐기고 있다는 생각은 저버릴 수 없다. 그러나 왜 많은 종류의 물감들을 두고 하필이면 어떠한 색채도 보여 지지 않는 흑색의 먹물을 선택하고 있는 것일까?  

 

불과 몇 해 전 까지 형의 작업들은 수없는 실험의 연속이었다. 고단 하리 만치 노동력이 많이 투여되는 실험 작업들은 형식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에 있어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내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선 과거의 작업에서 보여 지는 것들처럼 표현되거나, 혹은 그려지거나, 또는 만들어 지거나, 어떤 화두를 던지듯이 오브제를 이용하거나 또는 추상성이 함유된 입체적 형태의 것들 이거나 하는 것은 더 이상 보여 지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과거 내재적이던, 외재적이던 작품에 많은 이야기를 더하며 본인의 미술로 주변 세상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고단한 작업에서의 탈출이 아닐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작업재료들을 거부하고 단순히 장지를 이용하여 선긋기 작업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미술에서의 어떤 욕심도 배재한 채 무채색의 먹물만을 고집하고 있는 이유 때문이다. 다만 그림그리기의 기본이 되는 미술재료들을 배재하고 먹줄을 이용한 직선을 선택하고 있음이 일반 선긋기와 다른 점이며, 화면의 구성을 생각하여 선의 배치와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세심히 선택하는 것은 추상성의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1차적인 선을 위하여 먹물을 튕겨 화면을 구성하고 난 후 그 선위에 컴포지션 구성을 생각하여 물을 붇거나 습도를 높여 먹물이 스스로 장지에 스며들어 방향을 정하며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나 그 자연스러움을 위하여 철저히 의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작업과정은 아마도 먹물과 화면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연적 현상과 형태에 대하여 형 스스로 기존 작업들에서 취해왔던 의미를 부여하거나 내용을 더하여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과거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화폭이 스스로 하나의 형식을 만들어내는 그 고유의 자유를 주고자 하는 매우 계산된 일인지 모른다. 어쩌면 처절 하리 만치 내적 갈등의 구조를 마음의 모방인 것처럼 지난 작품들에 옮겨놓으려 애써온 시간들 이었지만, 여러 계절을 겪어온 탓일까, 금번 전시의 제목(沈黙)처럼 모든 내용들을 배제하고 먹물이 소리 없이 농담을 만들며 스며드는 잠잠한 상태, 그 평화로움을 위하여 화면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자연스런 형태를 깊이 관조하며 놀이하는 듯하다.


박준렬 작가의 환원 작품에 대하여

준렬 형의 환원(還元) 개인전에 부쳐...

 

환원(還元)이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내 형 준렬의 작업에 있어 환원이란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껏 내가 겪은 준렬 형은 퇴색된 적 없는 순수성향만을 보여 왔는데 어째서 작품을 통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환원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형과 아주 오랜 시간 함께 하였음에도 작품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논의를 깊게 나누어 본적이 없었으니 한심할 노릇이다. 비로소 이번 기회에 형 작품에 대한 나의 주관적 생각을 논한다는 것에 적잖이 흥분되고 밤잠이 설쳐질 정도나 한편으론 누가 되지 않을까하여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준렬 형의 작품을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20여 년 전 하남의 송정마을 작업실에서 였다. 성격 만큼이나 깔끔하게 정리된 작업공간과 시원한 벽면들 사이로 걸려있는 초기의 작품들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분명 화려한 색채로 다소 도식화 되어있는 풍경화 안에는 묘하게도 추상의 모티브들이 보여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상을 통하여 세상을 은유하고 있는 새로운 표현 형식의 작품을 가까이 접하면서 커다란 충격이 일기까지 했다. 그 중에서도 같은 형식의 표현기법에 의해 제작된 산소의 그림은 나에게 있어 형의 작품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대표작으로서 당시의 충격은 상당한 것이었다.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려 서너대의 담배를 연이어 뻑뻑 빨아대었음에도 좀처럼 심장의 고동소리가 멈추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 분의 묘소인지 알 수 없으나 말끔하게 벌초를 한 듯한 평범한 산소의 풍경은 봉분을 덮고 있는 뗏장의 표현이 마치 고슴도치의 가시만큼이나 날을 세우고 있어 삶과 죽음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을 냉정히 판단해 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듯하여 그날의 충격은 실로 오랜 시간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이후 형의 작업은 좀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변환을 꾀하기 시작한다. 변형된 캔버스에 가시나무의 형상을 그려 넣는가 하면 가시의 일부분을 극대화 하여 화면 전체를 장식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회화가 가진 구상의 형식은 점차 사라지고 실제의 사물로서 표현하고자 하는 즉물성(卽物性)의 오브제 형식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자 변화였다. 가시나무를 형상화 한 도조작업을 시도하는가 하면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농기구 및 생활 집기에 바늘을 빼곡히 꽂아 새로운 오브제를 만들어내기도 하였고, 나아가 투명 아크릴 판위에 바늘을 거꾸로 꽂아 예민한 바늘 끝의 날카로움을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그것이다. 때론 섬뜩한 생각마저 감돌게 하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본인의 작업을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식의 전환이었겠지만 넓게는 주변의 급격한 변화에에서 온 격렬한 심적 변화일 것이다. 그를 성장하게 한 농촌의 목가적인 풍광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변화로 점철되었고, 신과도 같았던 아버지의 빈자리는 돌아갈 귀향처를 잃어버린 새가 공허한 날개짓을 반복하는 것처럼 허망한 듯한 내면의 이야기를 가시나 금속의 바늘을 이용하여 은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함부로 만질 경우 고통이 수반될 누구나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소재인 바늘과 가시가 주가 되었다는 것은 서서히 바뀌어지는 주변의 환경이 풍요로울 것만 같았으나 오히려 심적으로 더욱 냉랭하고 차가운 내재적 심성을 싹트게 함으로서, 쇼윈도에 갇혀진 것 같은 박제된 주변의 환경을 그려내고자 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한동안 작업의 주된 소재가 되어왔던 바늘과 가시의 일련 작업들은 형의 마음속에 내재 되었던 풍경화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굳이 용어를 빌어 쓰자면 가족을 비롯한 주변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말로서 표현되지 못한 심상에 담겨진 내재적 풍경을 끄집어내는 ‘마음의 모방’(mimesis of mind)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동안 형의 바늘 작업은 일반적이지 않게 많은 노동력이 투여됨과 동시에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이었다. 마치 농사를 짓듯 계획적이고 때를 놓치지 않는 성실과 강한 인내를 요하는 작업들로서 본인 스스로를 혹사해왔던 과정은 흡사 농사꾼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아마도 성장기를 거치며 늘 가까이 접해왔던 주변 농토들의 모습은 아버지의 정원-가족전체의 경제활동 무대였으며, 생활의 무대였고 감성의 근원이었던-으로 각인되어 그 향수를 잊지 못함이었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한동안 작품의 제목으로 쓰여 왔던 조침문(弔針文)이란 제목만 보더라도 본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해 보고자 한 적극적 차용이 아니었을까 한다. 물론 형 작업의 외형적 형식은 오브제로서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대상으로서 혹은 순수 오브제로서의 미학적 내용이 아닌 현대미술의 형식적 내용을 가장한 내면 풍경화였으며, 한땀 한땀 바늘을 꽂아내는 고된 일련의 과정은 마치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에 앞서 농부의 과정을 재현하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근래에 들어 형의 작업은 또 다른 전환기를 맞고 있다.

 

종전 세상에 대해 경종을 울리듯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서 있던 바늘들이 눕기 시작 했으며, 까칠한 본연의 형태가 불에 녹아내려 또 다른 형질의 모습으로 전환되고 있다. 

흙으로 만들어진 도판위에 바늘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러 금속조각을 올리고 구우면서 불에의해 녹아내린 물질의 흔적을 통해 하나의 형상을 재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도판위에 그려진 형상은 의도하였으나 의도되지 않은 모습으로 그 형태를 그려내고 있다. 이는 여러 시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결과이겠지만 지극히 우연이면서도 필연적인 결과의 산물인 것이다. 이렇게 사각위에 하나의 형상으로 환원된 도판들은 바닥과 벽면을 가리지 않고 그리드 형식으로 배치하여 전시함으로서 회화의 미니멀리즘을 차용함과 동시에 공간에 구애됨이 없이 무한정 뻗어 나아갈 수 있는 장(場)의 개념을 추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순수 물성(物性)인 오브제(objet)로 환원되고 있다는 것은 나의 속단일지 모르나 종전 까지 작품이 이야기를 담아내고 타자로 하여금 읽혀지기를 바랐던 내면의 심적 갈등이 이제는 순수 대상으로서만 존재시키려는 의도는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삶의 무게만큼이나 날카로웠던 바늘의 끝은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닳고 닳아 그 날카로움이 무뎌지고 본래의 물성인 뾰족했던 바늘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비교적 오랜 기간 바늘 끝 모양만큼 날카로웠던 내적 갈등의 틀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사물이 탄생되기 전의 물질에 지나지 않았던 그 원형의 형상으로 돌려놓고자 함은 마치 달관한 듯한 본인의 내재적 순수로 회귀하고자 함인지도 모른다. 또 이러한 변화는 초기에 작업하여 왔던 풍경회화의 일루전적 요소와 조침문을 통해 읽혀지길 원했던 내용적 요소를 제거하고 순수한 물체 자체의 속성과 그것이 환원을 통하여 만들어내는 형식만을 가지고 소통하고자 하는 심미적 대상성(objecthood)의 요구는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이제는 오랜 동안 내면을 괴롭혀온 아버지의 정원에서 벗어나 내 형 준렬의 정원을 형성할 시기인가 보다.

 

 


침묵(沈默)에 부쳐...

들숨과 날숨의 소리조차 멈추었다!

 

숫돌에 갈아놓은 듯 예리한 엄지와 검지의 손톱이 먹줄을 소리 없이 튕겨낸다!

 

먹물은 한지 위에 뿌려진 분무의 습도를 타고 아무 소리도 없이 하얀 장지에 살며시 스며든다!

 

어떠한 마티에르나 형태가 뚜렷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의도한 검은 먹선 주변으로 스스로 번져나가 만들어낸 자연스런 먹의 번짐만이 침묵(沈黙) 속에 있을 뿐이다!

 

 

 

 

 

지난해 형은 환원이란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도판 위에 바늘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러 금속 조각을 올리고 구우면서 불에 의해 녹아내린 물질의 흔적을 통해 하나의 형상을 재현해 내고 그 방형의 도판작업들을 그리드 형식으로 배치하여 무한정 뻗어 나아갈 수 있는 장의 개념을 보여주었던 것이 불과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안에 또 다시 종전의 것들과는 너무도 상이한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건 뭐지? 그동안 아주 긴 시간 작업하여 왔던 오브제 형식을 벗어던지고, 더불어 회화의 구상성을 배제한 채 최소한의 예술이라 부르는 미니멀 성향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시간 형의 작업은 매우 많은 변화들을 보여왔으나, 나의 좁은 소견으론 일련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감히 생각되어진다. 초기 작업에서 보여왔던 신 구상회화에서 선보인 모티브들은 형이 그때까지 경험했던 삶의 모습을 은유화하고자 했던 추상풍경화였으며, 이어서 시도된 바늘과 가시의 일련 작업들은 갑작스런 주변 환경의 변화로 인해 마음 속에 내재된 거칠고 복잡했던 심상을 오브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함이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리곤 근래 까칠한 바늘 끝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했던 복잡한 심상을 허물을 벗듯 털어내고는 오브제 본연의 물성을 과감히 회화적 형식과 접목하여 오직 물성이 가진 자체만으로 보여지기를 시도한 것은 그동안 일련의 작업들에서 보여지는 마음의 모방(mimesis of mind)으로부터 해방되어 순수물성 자체로 돌아가고자 함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무겁고 중함으로 늘 행해왔던 작업의 무게를 내려놓고 선(線)을 통해 가볍게 산보하듯 나는 놀이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쉽사리 생각되는 놀이는 결코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반성, 그리고 사유를 통해 과감히 내려놓은 결과의 선(線)이다. 회화를 처음 배우며 날실과 씨실처럼 수없이 내리 그었던 선(線)이지만 이제는 철저한 의도에 의하여 그려진 선이면서 동시에 바탕이 되는 한지의 자유에 의해 만들어진 선이다. 또한 그동안 수없이 작업을 통하여 내용으로 담고자 했던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다시 선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함인지도 모를 일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는 조주스님의 말처럼 겪고 나니 과정만 있었을 뿐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뿐인데...

 

아마도 이후에 시도되는 작업은 종전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사뭇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상범(하남문화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