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매일 자라나는 생각에 몸을 맡기기_ 이병국(시인)

매일 자라나는 생각에 몸을 맡기기

이병국(시인) 

 

차곡차곡 쌓여 가는 이미지가 있다. 출발은 하나의 사물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내 시야로 들어와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흙과 물과 바람과 해”를 만나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하나씩 둘씩 “생각과 생각과 생각과 생각이” 만나 자란다. 누군가는 잡념이라고 치부하고 한쪽으로 치우려고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울까. 한 잔의 물컵에 떨어진 물감 한 방울이 번지는 것을 보면 생각이란 녀석도 그렇게 번져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잡념이라고, 쓸데없는 공상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여, 모이고 모여 한 편의 시가 되고, 한 점의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의 연쇄는 우리의 의지 너머에 있어 어쩌지 못할 때가 많다. 저기 어딘가에서 매일매일, 혹은 매 순간 무럭무럭 자라나, 집을 짓고 길을 내어 마을을 이룬다.

이곳과 저곳이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듯이. 생각이 생각을 불러오는 것처럼 내가 너를 불러오고, 우리라는 관계를 만들어 낸다.

박노을의 작품들을 만나면 그것이 어떻게 시각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잔 위에 잔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잔을 쌓는다. 층층이 쌓인 잔들은 제각각의 색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위태롭지만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나름의 정리” 중인 셈이다.

제멋대로이고 어디쯤에서 멈출 것인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그 어딘가에서 나름대로 정리된다. 그러고는 “뿔뿔뿔뿔이 나”는 것처럼,

평형을 이루는 조화가 어느 지점에서 하나의 큰 정념으로 자리 잡는다. 뿔처럼 자라난 싹들이 화분을 넘어 대지를 채우듯이, 위태로운 혼란 끝에 닿는 어떤 평형의 상태라고나 할까.

나는 그 앞에서 가슴을 쓸어내며 숨을 한번 몰아쉬게 된다. 그리고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불안과 안심을 동시에 느낀다.

박노을은 그것들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매일 자라나는, 알 수 없는 생각의 연쇄가 그러하듯이.
 
  매일의 생각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각각의 집을 이룬다. 이번 전시에서는 제외되어 있지만 박노을의 세계를 살필 때 일련의 집을 그린 작품들을 빼놓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형태로 어울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골목을 끼고 서로 연결되어 있거나 길로 이어져 있다.

그게 아니어도 서로서로 등을 맞대고 있거나 겹쳐 있다. 원환적(圓環的) 구조로 서로 맞닿아 있는 집들은 동네를 이루고 마을을 이룬다.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혹은 서로가 서로를 잇고 있는 이러한 세계는 박노을의 작품이 갖는 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무리를 이룬 꽃의 형상처럼 혹은 보글보글 솟아오르는 말풍선의 빗금들처럼 더불어 함께 있음, 랑시에르 식으로 말하면 사이에-있음(étre-entre)으로서 함께-있음(étre-ensemble)이다.

물론 여기에서 정치적 주체의 장소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박노을의 작품이 내면화하고 있는 바는 비어 있는 공간들을 통해 자기가 다른 자기와 관계를 맺어 하나를 형성하는 주체화 과정처럼 보인다.

그것은 또한 전형적인 투시도법에서 벗어나 평면적 공간으로 재배치되면서 종적 위계를 멀리하고 횡적 포용의 지점으로 나아간다.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이루는 캔버스의 세계. 그러나 그것이 더 넓은 세계를 지향하며 캔버스 밖으로 뻗어 나간다. 그림도 자라나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이 자라나듯 집과 집이 맞닿은 곳의 여백이 하늘에 닿고 하늘은 캔버스 밖의 세계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역설적으로 사물을 통해 캔버스 밖을 안으로 끌어 들인다.

주전자든 컵이든 혹은 화분이든, 그것들이 생성하는 말풍선은 캔버스 밖 다채로운 해석의 틈새에서 비롯된 감정을 (빗금 친 목소리와 새싹의 이미지로) 캔버스 내부로, 동일성의 확장 가능한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다.

사람이 부재하는 그림이 오히려 사람을 그림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럼으로써 개별적 존재로서 주체의 부재를 이야기하며 작품을 더욱 다양한 의미망에 놓이게 한다.

  이번 전시의 표제작을 보면 그것이 어떻게 반복, 변주되는가를 알 수 있다. “growing everyday”는 여러 개의 화분에서 자라나고 있는 꽃을 보여준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자라나듯 화분 속의 꽃들도 무럭무럭 자란다. 아니 모락모락 피어난다. 그러나 그렇게 피어난 꽃잎들을 보고 있으면 마냥 즐겁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왜일까. 꽃의 생각, 목소리가 화폭을 넘어 느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꽃잎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것은 마치 악수를 하려는 손들처럼 보인다. 저마다 어딘가로 손을 내밀고 있는 듯하다.

서로가 분명 어우러져 있는 형상이지만 뭔가 다르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비어 있는 공간 너머로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은 집과 마을의 원환적 구조의 지향성과는 차이가 있다.

뾰족한 꽃잎들의 모양과 그들이 향하는 방향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보면 이 작품은 타인과의 관계 맺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한 주체의 자기 증명의 어려움은 한 화분에서 나도 서로 다른 쪽으로 꽃을 피우는 것과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서 나서 나에게서 멀어지는 생각의 다발들이 나 아닌 다른 존재에 닿아 나로 되돌아올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개별적 존재로서 주체는 자신을 증명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계속 꽃을 피워낼 저 화분들의 가능성이 언젠가 완전한 관계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악수하려는 손은 또 다른 악수하려는 손을 만날 것이다.

그 순간 위태롭게 쌓여 있는 잔들처럼 불완전한 존재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온전한 주체로 맺어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람을 지움으로써 개별적 존재의 불안을 증명하고 사물을 통해 그것을 위무해 주는 방식을 통해 무엇과도 소통할 수 없는 존재의 불안이

그 불안정함으로 인해 타인과 “동등한 관계”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박노을의 작품들은 말한다.

그때, 말풍선의 빗금들이 부풀어 오르며 모두가 동일한 주체로 ‘함께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매일 매일 자라나는 수많은 생각들이 그것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등에 불을 켜야 할 시간이다. 서로의 이야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우리 모두 지켜볼 수 있도록. 누군가의 집 창문으로 보이는 식탁 풍경은 곧 앉게 될 누군가를 궁금하게 한다.

의자 하나와 물잔 하나. 그 위로 아직 켜지 않은 등이 하나 있다. 불이 켜지지 않은 등은 언젠가 켜질 것이다. 그럼으로써 지금은 없는 누군가가 곧 나타날 것이다.

박노을의 일련의 작품들이 그러듯이 등은 존재를 불러온다. 집과 마을이 전면에 제시되는 작품에도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가로등은 길을 비추며 부재한 존재를 증명한다. 어딘가에 있을, 곧 저기 골목 어딘가에서 걸어 나올 지도 모를 존재를 품고 있는 것이다.

곧 집으로 들어와 등에 불을 켜고 의자를 빼어 앉고는 차를 입에 댈 누군가. 자신과 자신을 만났던 모든 존재와의 시간을 연쇄적으로 떠올리며, 지금의 자신을 자신이게끔 한 것들을 음미할 것이다.

지금은 부재한, 그럼에도 언제나 함께 있는 모든 존재를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존재가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등을 밝히고 매일 자라나고 있는 생각들에 몸을 맡기도록 하자.

충실한 불안의 친밀한 공동체_이병국(시인, 문학평론가)

충실한 불안의 친밀한 공동체

- 박노을 전시 <열린 창 닫힌 문>

이병국(시인, 문학평론가)

 

 

나는 서 있다. 닫힌 문 앞에서, 망설이며, 누구를, 무엇을 들여야 할지 모르는 채로. 흐리게 바랜 마음은 여백이 아니라서 엇비슷한 금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균열. 보여주려는 마음과 그것을 꺼리는 마음이 어깨를 겯고 힘겨루기를 한다. 너를 향한 환대의 조건은 나를 잃지 않는 데 있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이야기한 긴수염고래의 대화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투명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황은 이상적이다. 그러나 아무런 매개 없이 동시성 속에서 직접 연결되는 환대는 언제든 ‘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몬다. 실상 공동체가 상상하는 충만은 어떤 결손, 즉 나의 상실을 은폐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상적인 사유로 표상된 친밀함의 공동체는 내가 마땅히 따르고 추구해야 할 무엇이 되어 나를 문 앞에서 망설이게 한다. 

 

흥미롭게도 박노을의 ‘흰’ 시리즈의 작품들은 문 앞에 ‘나’를 놓아두지 않는다. 아니, 아예 문이 보이지 않는다. 문 없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룬다. 이 마을은 공동체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모든 집들이 서로의 몸을 서로에게 기대어 서로를 지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음으로써 고유함을 유지한 채 온전히 자신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온전한 나로부터 비로소 이루어지는 우리라는 공동체. 어쩌면 여기에서부터 절대적 환대가 가능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절대적 환대란 타인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이다.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우호적인 친교를 맺어 서로가 서로의 벗이 되도록 한다.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너를 나의 곁으로 받아들여 자리를 내어주고, 그럼으로써 나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人間)이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단어이듯이 이는 마땅히 취해야 할 일이겠으나,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싶고 너무 쉽게 다가오는 것을 꺼리게 되는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마음을 실존에의 열망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본질에 앞서는 실존의 불확정성과 그로부터 기인한 자유로운 선택이 주는 불안과 긴장은 존재의 곡진함으로 스스로를 증거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박노을의 불안과 긴장은 ‘흰’ 시리즈의 문 없는 집들과 그것을 둘러싼 하얀 공간으로 시각화된다. 세계에 거주하는 공간 안쪽을 상상함으로써 존재를 공(空)과 멸(滅)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역설적인 의지. 박노을은 닫힌 문 곁에 열린 창을 내어놓음으로써 내적 충동을 최소화하는 한편에서 존재가 고립되지 않도록 한다. 불가피하게 언어화될 수밖에 없는 관계를 말풍선의 빗금으로 치환하여 드러냄과 감춤의 불안을 고통이 되지 않게 절제된 미학의 층위로 흐르게 이끈다. 때문에, 존재의 내면과 세계가 마주하여 서로의 고유함을 인정한 채로 공명할 수 있도록 하는 창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박노을의 작품은 지독하게 아프면서도 동시에 절박한 외침을 침묵으로 전환하여 창의 안과 밖을 잇고 우리라는 공감의 바탕에 밀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열린 창 닫힌 문’이 지향하는 세계는 작품이 보여주듯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봄으로써 각각의 집들이 조형하는 형상 속에서 모순된 마음을 충실하게 반영된다. 개별적 존재들은 파편화되지 않고 군집으로 구성된다. 배경과 대상을 구분하지 않아 개방된 경계면으로 말미암아 작품 속 세계는 그 자체로 활짝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노을의 이러한 세계 인식은 경계를 지워 위계를 삭제하고 평면적 공간으로 세계를 재배치하여 열린 공간을 통해 횡적 포용을 가능케 한다. 경계가 무화(無化)된 박노을의 작품 세계는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까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써 쉽게 다가와 존재를 흔드는 타인의 마음까지도 포용하여 불안이 야기한 망설임마저 저 경계 너머로 밀고 나간다. 

 

박노을이 낸 길을 따라 우리는 이제 세계의 여백과 그 여백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본다. 얼핏 간과하기 쉬운 비행기는 관람자의 시선을 붙잡으면서 작품을 가로질러 우리를 저 캔버스 밖으로 인도한다.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세계. 포용되지 못한 위계와 풍문의 상상적 형상으로 말미암아 존재의 불안을 야기하는 저 바깥에의 사유. 캔버스 안에 고착된, 닫힌 문과 열린 창들을 짊어지고 보잘것없는 세계의 비루한 삶을 견뎌낸 우리와 함께 나아간다. 이는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 창을 통해 자신을 표상하는 불가피한 마음을 존재론적 비약의 순간으로 개시하는 것이다. 이전과 이후는 다를 것이다.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스럽겠지만 그 불안과 걱정의 충실함으로 우리는 동등한 존재로 친밀한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환대하는 관계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움직인다. 닫힌 문 안에서, 열린 창 바깥으로. 그러곤 열린 창 바깥에서 닫힌 문 안으로 들어오는 마음들을 맞는다. 그 마음을 의자에 앉히고 탁자 위에 따뜻한 차를 내어놓는다. 창으로부터 비춰오는 빛으로 불을 밝히고 마주 앉아 마음과 마음이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며 온기를 나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빗금들은 균열이 아닌 하얀 내면의 빛줄기가 되어 주변을 채운다. 이 채움이 닫힌 문을 열어 집과 집을 잇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 나를 당신에게로, 당신을 나에게로 이끈다. 그럼으로써 아직 무엇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 바깥은 우리의 이야기로 가득 찰 것이다. 

충실한 불안의 친밀한 공동체

이병국

 

 

 

문이 닫혀 있습니다, 창은 열려 있고요

실은 문 없이 창만 내어놓았습니다

 

너머로 보이는 집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그림자를 나눠 갖습니다

 

가끔은 테이블 등 아래에서 차를 나누기도 하고 멀어질 수 있는 만큼 거리를 두기도 합니다 거의 모든 것의 실례를 채웁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여기가 어디라도 좋겠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바깥을 찾아

마음을 뒤적입니다만

드나드는 손이 없어 간결합니다

 

빗금을 긋고 밟지 않으려 종종거립니다 종일 들뜬 기분으로 종알거리기도 하고요 언제나 다른 목소리가 보글보글 끓어오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열린 창이 가까이 보이면 없는 문이라도 열어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머그잔 위로 피어오른 구름에 비행기를 그려 생각을 태우기도 하죠 하얗게 그을린 마음이 알아보지 못하는 마을에 불시착하고 시차에 사로잡혀 가까운 골목을 서성입니다

 

다음을 한참 되뇌다 보면 서로를 밀어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자에 걸터앉아 언젠가 열렸던 나를 떠올립니다

당신이 서운했다면 사과할게요

안과 밖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모두가 흰빛으로 우리가 됩니다

 

텀벙텀벙 

저녁이 오고

문을 그려 슬쩍 빠져나옵니다

창이 열려 있지만

아무도 없어서 들킬 염려는 없어요

일상의 사물과 장면_박노을
일상의 사물과 장면
- 박노을

수동적이고 함부로 다루면 깨지기 쉬운 사물인 컵과 화분에 자신을 담는다. 타인에게 말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담아내는 대상이 바로 이러한 물건이다. 그것들은 자신의 빈 공간에 무수한 이야기와 추억을 담는다. 비밀을 공유한 사물들은 말풍선을 통해 언어화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낸다.

여러 모양의 사물은 한데 모여 하나를 이루고 있는 듯 하면서도 서로에게 무심하게 놓여 있으며 사물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버리고 질감, 무게표현을 삭제함으로 마치 사물이 벽이나 테이블에 붙어있는 것처럼 평평하게 표현한다. 각기 다른 시점을 가진 사물들은 원근법을 상실한 채 화면 위에 2차원으로 정착시키며 그것들이 한 화면에서 공존하도록 표현한다.

작품에 주요 소재가 되는 집이라는 공간은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안식의 공간이다. 집이라는 단어는 인간을 외부로부터 보호함과 동시에 격리함을 뜻하는 이중적 의미도 내포한다. 사람이 자기 의지에 의해 집안에 은둔해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집밖의 세계와 단절된 상태가 되며 이는 곧 타인과의 관계의 단절까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은둔을 통해 단절을 의도하였기에 불안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의지에 의해 선택한 집안으로의 칩거이므로 다시 밖으로 향하고자 하는 선택을 하게 되면 언제든지 단절은 소통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은 문과 창의 설정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집 안에 있을 때에는 타인과의 관계, 집 밖의 세계와 단절된 상태이므로 작가가 선택한 집안으로의 은둔과 칩거는 외부적 강압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써 일시적인 안정과 의도된 단절을 의미했으므로 언제든 창과 문이라는 외부로 향하는, 혹은 향할 수 있는 출구를 통해 소통의 가능성과 재개에 대한 심리 상태나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축적된 집의 형상이나 창과 문은 작가의 작업에 있어 중요한 기억과 의미를 차지한다. 즉, 집이 갖는 의미는 외부와의 단절에서 오는 온전한 안식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단순히 묘사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닌 감정이 이입된 하나의 상징물들로 형상화 한다.
따로 또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의미_이병국(시인)

따로 또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의미

이병국(시인)

다시 한 번, 위태롭게 쌓여 있는 것들과 우리는 마주한다. 냄비와 주전자와 컵과 잔, 그리고 다시 주전자.

쌓여 있는 사물들은 중력에 의해 바로 밑의 사물에게 자신의 무게를 오롯이 전한다. 그 무게는 가장 아래에 놓인 사물로 향하고 또한 그것을 지탱하는 바닥으로 향한다.

박노을이 캔버스 위에 그려내는 층의 이미지는 집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하나씩 포개져 층을 이루는 집들은 평면 위에서 서로의 어깨를 대고 창에 불을 밝히려 한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순간으로 말미암아 집은 삶의 적막이 재현된 찰나를 그렇게 그림 안으로 불러온다.

누구와도 함께 하지 못하는 삶의 개별성처럼 박노을의 작품들이 스산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박노을의 지향이 온축(蘊蓄)되어 있는 지점은 따로와 함께의 경계에 있다. 개별적 존재가 층을 이루어 통합적이고 총체적 사유로 나아가는 경계는 연대의 위태로움을 내포한다.

어깨를 결고 있는 듯한 집들의 공동(共同)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작은 존재들의 쓸쓸한 자기 위안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삶의 개별성이 만들어내는 스산한 풍경이 존재의 내면과 맞물리면서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고립된 기분을 불러온다.

“서로는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주고” 힘이 되어 주지만 “적절한 거리 유지”가 되지 않을 때, 서로는 서로에게 불편과 거부로 인식된다.

그 경계가 지극히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도 큰 심리적 거리를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 타자를 밀어냄으로써 존재는 더욱 개별화된다.

  박노을의 “하얗고 바랜 마음”전이 지닌 특별한 의미는 불편과 거부 속에서도 존재가 지향할 수밖에 없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다.

벽과 벽이 마주한 단절된 공간으로서의 집이지만 창으로 비치는 불빛은 그 안에 머물고 있는 존재를 감각하게 한다.

그 존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창밖에서 누군가와 함께 머물렀으리라.

비록 지금은 하나 뿐인 의자에 앉아 있을지라도 주전자 위로 가득 피어오르는 말풍선을 채우는 이야기를 존재는 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박노을의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첩첩산중의 외따로 놓인 단독자의 고립이 아닌, 그 곁을 항상 함께 하는 그래서 층으로 곁을 걸고 있는 위로의 보금자리인 셈이다.

지치고 힘들어 바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박노을은 타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박노을의 감각이야말로 개별적 존재의 소외로부터 벗어나도록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가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위태롭게 쌓여 있는 사물들은 자신의 무게를 아래로 아래로 보낸다.

그렇지만 박노을의 작품 속 사물들은 타자에게 자신의 무게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무게를 타자에게 의지하는 한편 그 자신도 타자의 무게를 공유한다.

결국 개별적 존재는 자신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는 한편 그 자체로 공동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은 창밖으로 따뜻한 불빛을 밝히는 집이다. 집들의 층위는 위계가 아닌 그 안에 살고 있는 존재의 포용으로 말미암아 연대와 위로의 형상으로 재정립된다.

박노을의 작품은 이러한 위안의 층을 차곡차곡 포개어 놓음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따로 또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