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박수만의 덜 약삭빠르고, 덜 민첩하며, 덜 자기방어적인 인간형_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박수만의 덜 약삭빠르고, 덜 민첩하며, 덜 자기방어적인 인간형(人間形) 

-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1.

 박수만의 회화는 연한 분홍색을 기조로 하는 일종의 인물화이자 풍속화이기도 하다. 이 주조적인 색조는 그의 회화 전반에서 어떤 종류의 급진성이나 과도함도 배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일관되게 수평적인 터치들의 결합은 그 각각의 주제나 소재, 메시지가 무엇이건, 그의 회화가 정서적인 온화함과 안정감을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이로 인해 주름이 때론 깊게 패어 있고, 깡마른 신체에 양팔이 보이지 않는 경우조차 단지 비극의 단초로만 독해되지는 않는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외 없는 회화적 변형에 의해 고유하게 성격화되어 있다. 그들의 얼굴이 우선 충분히 패턴화되어 있다. 이마에 선명하게 패인 주름은 그가 살아 온 생의 여정이 어떠했던가에 대한 일종의 기호적 지표다. 눈썹은 몇 개의 점선으로 도식화되어 있고, 코는 적절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두 개의 점과 명료하지 않은 명암에 의해 묘사된 낮은 콧대로 이루어져 있다. 코 옆 부분에 위치한 가로방향의 진한 터치는 돌출된 광대뼈의 함축된 묘사에 해당된다. 위 아래로 각각 두 개의 선으로 희화화된 입술은 그 간격을 통해 때론 조금 열려있거나 굳게 다문 다양한 표정들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우스꽝스럽게 축약, 묘사된 얼굴과 머리의 스타일, 과장된 목 부위와는 표정에 담긴 심각성을 완화, 또는 둔화시킨다. 

 그럼에도 그들이 아마도 전형적인 한국인의 도상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신체적 얼굴 때문이기 보다는, 내적인 진실의 반영인 표정 때문일 것이다. 어눌하게 축약된 얼굴이 만들어내는 표정은 다소 근엄하고 경직되어 보인다. 상대적으로 크고 넓적한 얼굴에 비해 유난히 작은 눈이 비중으로 인해 표정은 자주 모호하고 중립적이지만, 그 행간엔 얼핏 어떤 회한과 자조, 체념과 관조, 그리고 때론 다소의 긴장과 불안의 흔적이 배어있다. 작품 <내 안의 일상>은 얼굴에 대한 박수만의 관점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에 의하면, 얼굴은 기억의 저장과 관련된 일련의 시간적 기제다. 얼굴은 그 자체로 역사적 내러티브다. 표정은 과거라는 재료들로 만들어진 시간의 작품이다. 귓전에는 오래 전에 ‘들었던’ 것들이 여전히 속삭인다. 코는 옛사람의 냄새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 어떤 것도 ‘지나가버렸다’거나 ‘사라졌다’고 서술되지 않는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과거를 거닌다는 것에서 조금도 덜어져 있다 않다. 얼굴은 그자체로 과거며 현재고, 또한 미래다. 왜 아니겠는가! 

 

 2.

 박수만의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알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존을 은폐하고 가리는 사회적 기제의 전적인 부재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은 전적으로 노출된 상태며, 그것은 사회적 차원의 부재를 또한 의미한다. 즉, 우리는 그들이 사회라는 공공영역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그들은 농부거나 법관일 수도 있고, 교사거나 학생일 수도 있다. 사회적 지위의 고하, 명예의 유무, 귀천의 구분에 대한 어떠한 외부적 참조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자거나 여자며, 누군가의 부모거나 자녀며, 한 가족이나 사회공동체의 일원이이라는, 지극히 생래적인, 곧 존재와 실존 자체로부터 유래하는 것들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여기서 그들은 모두 실존이라는 공통의 근거만을 알리바이로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하나의 존재론적 텍스트라면, 그것은 매우 희화적인, 그러나 어떤 상징성이 가미된 텍스트임에 틀림이 없다. 신체는 고유한 방식으로 변형(deformation)되어 있다. 이 변형에 의해 하나의 몸통에 두, 세 개의 머리가 붙기도 하고, 앙 팔은 아예 누락되어 있으며, 다리는 가늘고 길며 무릎 관절은 병적으로 각져 있다. 두상은 확대된 대신, 몸통은 왜소하고 뻣뻣하며 부자연스럽다. 대부분의 여성은 다소 길게 늘어진 젖가슴이나 상대적으로 조금 더 둥글게 처리된 골반 부위 정도로 약술된다. 때론 짧은 머리와 몇 개의 점으로 된 목젖이 그가 남성임을 확인하는 유일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생략되거나 강조되고, 변형된 박수만의 인간들은 훨씬 더 어눌해 보인다. 그들의 큰 머리와 생략된 양팔, 그리고 뻣뻣해진 다리는 그들의 반응양식과 운동을 심각하게 제한할 것이 분명하다. 이로 인해 그들은 변형이전의 정상인보다 덜 약삭빠르고, 덜 민첩하며, 덜 자기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난처하고 고단한 상황들 속에서, 그리고 점점 더 가열찬 것이 되어가고 있는 생의 경주에서 (훨씬 더 흔한 인간형인 발 빠르고 손이 잰 사람들만큼) ‘잘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세련된 표현어법이나 오차없는 셈, 전략, 기회주의, 즉물적 성취주의 따위가 그들 몫의 서술일 개연성은 실로 낮다. 

 그런데, 바로 이 결핍과 부재, 부적절함으로 인해 그 표현은 훨씬 더 흥미로운 현대인의 풍자가 된다. 작가의 독특한 변형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것에 의해, 우리는 ‘특이할 것이라곤 없는’ 일상적 삶을 사는 사람들, 곧 우리 자신이기도 한 인간형과 ‘정확하게’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박수만의 2008년 작 <인생>에서 그들은 각자 자신의 번호표를 달고 달리는 마라톤 선수로 비유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신기록을 내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들처럼 말이다. 

 

 3.

 때로 박수만의 인간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모호하고 허공에 산화된다. 소통은 단절되고 독백으로 종료된다. 화면 곳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思考)의 단초들, 앞뒤가 잘려나간 기억의 편린들, 희미해져버린 추억, 또는 어떤 고백과 내밀한 것들의 발설이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방식은 아마도 ‘주관적 도상학’이라 해야 할 것으로, 그것들을 관류하는 맥락을 정확하게 독해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의 회화가  ‘중얼거림, 독백, 상념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정의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박영택) 그렇더라도, 박수만의 독백의 주체는 독자(獨子)로서의 자아가 아니며, 그 독백은 대화의 한 형식이다. 그들은 서로로 인해 존재하고, 서로 앞에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신학자의 은총의 빛보다 자연의 빛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카르트를 인용한다. 하지만, 그의 세계에 깊이 배어있는 ‘인간주의’가 보는 인간은 데카르트의 회의적 인식론자로서의 인간을 훌쩍 넘어선다. ‘타자는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적 실존주의도 박수만의 인간을 담아내기엔 부적절한 그릇이다. 그들은 혼자일 때조차 끊임없이 대화를 제안하고, 자신의 독백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담론(談論)이란 것도 결국 밥상머리에 마주 앉은 인간의 상호작용일 뿐이다. 그것이 손자를 등에 업고 있는 할아버지와 무엇이 다르랴! 이는 작가가 퇴계 이황의 사단 칠정론(四端 七情論)을 논하는 것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예컨대 인.의.예.지(仁義禮智), 곧 측은히 여기는 마음(仁)과 악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義), 사양하는 마음(禮),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知)의 실현이 타자로 나아가는 길목에서가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박수만의 인간은 결코 독처(獨處)하는 인간이 아니다. 작품 <뫼비우스>를 보라.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 얽혀 있으며, 때론 투정으로 때론 연민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인간이다. 그들은 서로 맞물려 있고, 그로 인해 생은 혼자 풀어낼 수 없는 마법이 된다. 세상은 그들이 함께 모여 만들어가는 신비로운 큐빅이다. 결국 세상이란 이 특별할 것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관계들의 유형에 다름 아니다. 

 박수만의 인물들은 서구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이 오랫동안 간과해 온 길목에서 진정한 생의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분홍 인간과 인간성 회복의 가능성_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강선주

‘분홍 인간’과 인간성 회복의 가능성

-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강선주

 

박수만은 사회변혁 운동으로서 민중미술이 한창이던 1980년대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대학 생활 중 군사독재 청산의 계기가 되는 6.29 민주화 선언을 경험하고, 민주화 운동 세력의 집권과 냉전 시대의 종식으로 민중미술의 운동적 성격 또한 약화 되어가던 90년대 전후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삶, 사회, 역사의 구체적인 모습을 표현하며 민족 현실과 민중의 삶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했던 민중미술이라는 시대적 유산을 물려받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대의보다는 개인의 성취로서 새로운 미의식을 찾으려 했던 민중미술 이후의 변화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작가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말에 이르는 이 시기에 박수만은 고독하고 불안한 인간을 상징적인 기물이나 대비가 강한 원색의 색채로 담아낸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다. 포장마차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구체적인 인물도 있지만 대체로 색채로만 표현된 추상적인 배경 속에서 턱을 괴거나 우산을 쥐고 의자에 앉은 사람, 입을 가린 사람, 부유하는 사람 등이 홀로 등장한다. 개별자로서 자기 존재를 자각하고 고뇌하는 인간에 대한 재현을 면 분할과 색채 표현 등 조형 탐구를 통해 실현해 나갔다.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회화의 주제들은 점차 일상생활과 밀착된 벽사 기복의 감수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 꿈, 미래, 구원, 황금돼지, 부적 등과 같이 현실 세계의 절망과 염원을 동시에 내포하는 이 주제들은 초기에 주목했던 인간의 본성으로서 고독과 불안이라는 실존적 개념을 민중의 생활 정서로서 욕망과 좌절로 구체화했다. 이는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회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주요 메시지이자 감성의 토대가 된다. 

  

  세기말적 우울을 지나 밀레니엄 시대로의 도래에 응답하듯 2000년대를 전후로 박수만 작업의 양식적 경향은 확연히 달라졌다. 우선 크게 눈에 띄는 변화는 원색에서 파스텔톤으로 나아가는 색채와 일과를 되새기는 그림일기, 인격화된 동물과 사물로 인간 사회를 풍자하는 그림 우화,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이야기식 화면 구성이다. 박수만을 작가로서 강렬하게 각인시킨, 이른바 ‘분홍 인간’도 바로 이 시기에 탄생한다. 

  <가면>(2001)은 ‘분홍 인간’의 탄생을 예고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가 선택한 분홍색의 정체가 암시된다. 그의 분홍색은 검은 선과 푸른색으로 표현된 맨몸의 한 인물이 두세 개의 가면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것으로, 그것은 벌거벗은 살덩어리를 넘어 맨몸보다 더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인간의 내면이자 상처 입은 내면에 대한 표현이다. 푸른색을 경유하는 분홍색 몸은 외부로부터 손상된 몸인 동시에 훼손된 정신이기도 하다. 분홍색 몸은 이후 박수만식 회화 구성의 주인공이자 메시지인 ‘분홍 인간’으로 발전하여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호화된 캐릭터로 지속되고 있다.

   

  ‘분홍 인간’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표현, 깊이감을 없앤 평면적인 구성과 부드럽고 따뜻한 색채 속에서 무거운 비극으로 전달하기보다 가벼운 희극으로 다루어진다. ‘분홍 인간’은 대체로 팔과 발이 없이 몸과 머리만 존재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들은 머리에 밥그릇을 이거나 지붕 위에 올라서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몸 자체가 옷이 되는 등 먹고 입고 사는,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와 관련된 일상성과 연관되어 있다. 멀뚱하게 뜬 눈으로 때로는 상념에 빠지고 때로는 세속적인 것들을 갈망하며 때로는 발버둥 치다가 짓밟고 짓밟히는 인간들의 관계 안에서 혼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온전히 소유하지도 제대로 포기하지도 못하는 삶의 어려움은 자잘한 일상의 사물을 그리고 다시 지워내는 반복된 회화적 행위 속에 표현된다. 일상적 삶에 대한 통속적 표현은 인간성을 억압하는 현실과 체제에 대한 저항성을 갖게 하기보다 현실에 대한 대중적 공감과 감정적 동조를 끌어내는 데 더 효과적이다. 생존을 향해 악다구니 쓰는 개인, 대량 생산과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익명의 대중, 욕망하고 착취당하는 모순된 관계의 인간 집단 속에서 다양하게 표출되는, ‘분홍 인간’을 통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발화는 불분명한 말들, 불투명한 서사, 형태의 파괴, 왜곡, 단순화라는 회화적 표현 속에서 유쾌하고 안전하게 드러난다. ‘분홍 인간’은 생존을 부여잡고 있는 일상의 통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회복의 가능성을 향해 있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박수만이 자신의 회화를 통해 이들을 연민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한 정서는 최신작 <요가>(2024)에서 극대화된다. 몸에 좋다는 채소와 과일을 발판 삼아 딛고 올라 기괴한 요가 동작을 펼치는 인물은 더 앙상하고 더 주름진 몸 이외에 달리 변한 것 없이 늙어가는 ‘분홍 인간’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집, 자동차, 나무, 새, 술병으로 둘러싸인 여전한 일상에서 몸과 마음과 정신의 안정과 정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요가하는 ‘분홍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돌보며 현 상태를 힘겹게 버티고 서 있다. 무리 속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공간에 집중하는 태도는 무념의 상태를 향한 실천적 행위가 될 수 있을지언정 사회적 모순으로부터 기인한 상처를 치유하거나 인간다운 삶을 회복할 충분한 조건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 단위의 수행 결과와 한계는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형상 속에서 이미 예측되는지도 모른다. 삶이 안전하게 지탱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개인들의 자신만을 위한 성실한 정진을 넘어서는 물질적 토대의 변혁이다. 1980년대 민중미술을 역사 속으로 흘려보낸 이후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인간화를 더욱 가속하는 우리 현실의 토대로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변혁 말이다. ‘분홍 인간’의 극복되지 못하는 현실성과 그로 인해 인간의 원초성으로 회귀하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닮아 있기에 더욱 씁쓸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