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장식과 조형의 이분법을 넘어서_이선영(미술평론가)
장식과 조형의 이분법을 넘어서

- 이선영(미술평론가)

 색종이를 길게 잘라 속을 만들고, 이것을 반투명 종이로 감싸 바느질로 고정시켜 만든 단위들이 모여 복합적인 형태를 이루는 박선영의 근작들은 이태리 카라라 출신의 조각가가 구사할 법한 전형적인 조각의 문법과는 거리가 있다. 투명, 또는 반투명 소재와 인공적, 자연적 빛과 결합하는 작품들은 가변적인 설치물로 3차원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회화적이다. 벽이나 캔버스, 아크릴 등 평면에 고안된 형태를 고정시키는 부조적인 방식과 색색의 종이들이 외곽선 안쪽을 채우는 선 같은 효과를 준다는 점이 그렇다. 반투명 종이 사이의 파스텔 톤으로 빛나는 화려한 색채감은 전통적 조각이 배제하던 것이다. 자연적 요소의 조합에서 출발하여 일상과 환상의 세계로 뻗어나가는 방식에서 조각적인 무거움보다는 회화적인 날렵함을 가진다. 그러나 재료를 다루는 방식에 주목한다면, 돌 작업과 종이작업은 연속성이 있다. 작품 소재에 맞는 붉은색, 검은색 돌을 사용하거나 선적인 문양, 크리스탈 상감 기법 등으로 돌 표면을 장식적으로 처리한 점, 친근한 소재를 작은 단위로 나누어 조합하는 방식은 종이 작업에서도 변형되어 반복된다. 
가령 붉은 장미처럼 돌로 조각했던 소재가 종이작업으로 그대로 번안된 것이 있는가 하면, 돌 표면에 새겨진 자잘한 꽃무늬가 잘리고 접혀진 종이를 통해 입체로 되살아난 경우도 있다. 중력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수직으로 층층이 연결되거나, 한 사물의 표면에서 돌발적으로 돋아나는 또 다른 사물이 얹히며 나아가는 접합적 연결 방식은 돌조각 특유의 묵직함 보다는 발랄함이 특징이다. 특히 2000년대 초기 작의 주제어인 ‘마법’은 3차원 괴체가 주는 물질적 속박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듯하다. 2000년대 중반에 열린 ‘꽃이 있는 정물’전은 사계절의 산 풍경을 검은 벨기에 석과 크리스탈을 이용하여 파노라마 형식의 부조로 보여준다. 종이작업은 2000년대 중반에 선보인 대형 설치 작품 이래, 요즘까지 지속하고 있다. 작품 [마법의 정원](2005)이나 [꿈꾸는 숲, 겨울, 봄, 여름, 가을](2006)같은 가변적 스케일의 설치작품들은 라이트 박스로 만들어진 의자 등의 소품과 결합하여 더욱 화려해진 양상이다. 
돌조각과 종이작업을 같이 전시한 2007년의 개인전에는 마법 대신에 꿈이라는 주제어가 나온다. 작품 [꿈꾸는 행복]은 돌 위에 장미를, [꿈]은 나무 위에 얹힌 구두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일상과 자연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돌 작품인 [행복한 생일]이나 종이 작품인 [꽃]은 행복함과 풍요로움이 폭죽이나 꽃망울처럼 터져 나오는 형태이다. 2007년의 작가 노트에는 ‘나는 꿈꾸는 정원에 살고 있다. 그곳에 내가 사랑하는 아이와 남편과 집과 내가 꿈꾸는 것들이 있다. 그곳은 내 꿈의 세계이자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이다...’라고 적혀있는데, 순탄치는 않았겠지만 꾸준히 작업하고 생활해 온 여성 작가의 긍정적인 정서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돌조각이든 종이작업이든 박선영의 작품은 모나지 않고, 아기자기하며 따뜻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성격은 보통 ‘여성적feminine’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그러한 성질은 칭송되는 중에서도 가부장적 상징계의 주변부로 간주되어 왔다. 작가는 주변성을 억압하지 않고 상징계의 간극과 틈새를 벌려 여성적 공간을 확대한다. 박선영의 작품에 존재하는 상상적 질서의 중심에는 여성성이 놓여있다. 이것은 마법과 꿈이라는 원초적인 내용으로, 그리고 여러 단위의 느슨한 조합을 즐겨하는 형식언어로 나타난다. 
또한 작품에 산재된 다양한 중심, 이동성, 가변성은 장식성과 연관된다. 박선영의 작품은 조형성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되어온 장식을 미술 안에 복귀시킨다. 특히 올해 3월 예술의 전당에 전시된 최근 작품은 그동안 활용된 형태적 요소들이 집약된 화려함이 특징적이다. 박선영의 근작에서 장식적 모티브는 식물이나 곤충 같은 자연적 요소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화병이나 의자 같은 일상적 소재가 어우러진다. 항상성을 유지하는 요소들은 꽉 짜여진 질서로 배열되기 보다는 첨가적이며, 집합적이다. 그것은 추상적 이성보다는 구체적인 생활세계와 가깝다. 하나 더 넣어도 되고 빼도 되는 유동성과 가변성은 장식이 무엇보다도 잉여 및 여분의 것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단순한 기능과 필요를 넘어서 있는 과잉은 실재보다는 가상에 근접한다. 모더니즘 시기에 장식은 구시대의 유물로 금기시되었다. 장식은 질병이나 퇴행, 죄악 등과 곧잘 연관되었고, 장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보요 미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것이요, 정신의 진보로 간주되었다. 
장식에 대한 유혹을 극복하고 기호의 투명성과 객관성을 추구함에 있어, 그 완벽한 모델은 기계가 되었고, 여기에 경제성, 생산성, 남성성 등의 은유가 중첩되었다. 장식은 남성적 절제에 반하는 여성적 낭비와 과도함으로 매도되었다. 표면을 덮어가면서 형태를 이루는 박선영의 종이작업들은 자연과 일상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리얼리즘적인 깊이가 아니라, 마법이나 꿈같은 가상의 유혹과 유희에 경도되어 있다. 표면들을 뒤덮고 넘쳐흐르는 장식적 요소들은 명확한 이야기나 현실의 재현 대신에, 불확실한 시적 은유에 잠겨 있다. 작업에 있어서의 장식성은 이론적인 관심사와도 연결된다. 작가의 졸업 논문은 [앙리 마티스와 종이작업]인데, 색종이와 가위를 이용하는 박선영의 작업과 종이를 오려 추상적으로 배치했던 마티스의 말기 작품의 공통된 코드는 장식성이다. 여기서 장식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자연과 일상에서 길어온 요소들로 채워진다. 이러한 패턴은 실재와의 연관성을 가지면서도 사실주의의 답답한 공간을 해체한다. 특히 구성요소들을 평면에 붙여가며 완성하는 꼴라주 방식은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마티스가‘구성이란 화가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요소들을 장식적인 방법으로 임의로 배열하는 기술’이라고 말하면서,‘기분 좋은 팔걸이 의자’같은 예술을 추구했듯이, 박선영의 종이 작품 역시 조형과 자연, 그리고 일상의 화해를 꾀한다. 미술사가들은 마티스의 작품에 나타나는 장식성을 ‘단순한 장식이 아닌, 의미 깊은 추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하면서 장식을 배제했던 모더니즘의 주류에 다시 위치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대중문화와의 관계와도 그랬듯이, 초창기부터 장식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분리할 수 없는 것은 분리하고, 나머지 한쪽에만 정당성을 부여하는 배제적 과정은 교조적 이데올로기의 특징이다. 미술의 시원과 종말에 순수 조형성을 놓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주체의 의지일 뿐, 사실이 아니다. 미술사가 노르마 부르드에 의하면 20세기 미술이 점차 추상화되어감에 따라, 예술가와 비평가는 추상과 ‘다만 장식적인 것’과의 명확한 구분에 몰두하였다. 그것은 고급예술로서의 추상예술이란 위치를 명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장식예술이나 장식적 충동은 20세기 초기의 주요한 모더니스트 양식을 형성하거나, 그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피터 웨렌이 강조하듯, 모더니스트가 강조하는 조형성과 장식성의 대립은 다음과 같은 유사한 일련의 대립 쌍 중의 하나이다. 엔지니어/ 유한계급, 현실원칙/ 쾌락원칙, 생산/ 소비, 능동적/ 수동적, 남성적/ 여성적, 기계/ 신체, 서구/ 동방 등. 이런 대립 쌍 들은 정확히 동격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계열을 이루면서 서로가 서로를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껍데기 동일성에 갇힌 모더니즘의 교조적 특성이 밝혀지고, 타자들이 회귀하고 있다. 실재보다는 가상에, 기능보다는 기호에 방점이 찍히는 포스트모던 문화에서 해체는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 것들로부터 시작되는데, 여기에서 장식성과 여성성은 복귀된 타자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여성작가 박선영의 작품에서 장식성은 조형성으로 승화되어야 하는 이전 단계가 아니다. 조각과 회화 장르 사이의 교차성, 여러 가지 소재를 끌어오는 혼성성, 바느질이라는 공예적 측면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은 장식이냐 조형이냐 하는 이전 시대의 위계적 이분법을 벗어나고자 한다. 
나의 소소한 일상 - 박선영 작가
경기여성웹진 [그림 읽어주는 여자] 원고_2012년 3월호 - 여경환
나의 소소한 일상 - 박선영 작가


“도쿄의 미타카 집에 살 때에는 매일같이 근처에 폭탄이 떨어져서, 나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그러나 이 아이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지면 이 아이는 끝내 바다라는 걸 못 보고 죽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쓰가루 평야 한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바다를 보는 것이 늦어, 열 살 무렵에 처음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그때의 흥분은 지금도 나의 가장 귀중한 추억 중의 하나이다. 이 아이에게도 한번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다자이 오사무 수필「바다」중에서


‘강렬한 평범함’에 대한 단상
  꽤나 뜬금없는 일이다. 박선영의 종이 조각에서 왜 다자이 오사무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인간실격』 『만년』 등의 데카당스 문학으로 전후(戰後) 일본 문학계를 뒤흔들었고 실제로 그의 삶도 다섯 번의 자살 기도와 마약 중독으로 점철되어 결국 애인과의 동반 자살로 서른아홉의 짧은 삶을 마감했던 불멸의 청춘을 대표하는 이름, 다자이 오사무 말이다. 그의 수필집에는 놀랍게도 두 아이의 아빠로서 소박하고 다정다감했던 다자이 삶의 단편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매일 같이 폭탄이 떨어지고 방공호로 대피하는 것이 일상인 전쟁 중에서도 다섯 살 난 어린 딸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 그 마음을 배반하는 문학인으로서의 다자이는 송두리째 자신의 삶을 소설과 사회에 내던졌다. 전쟁과 패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섬세한 촉각을 가진 예술가가 현실과 예술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절규하고 쓰러지고 미치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폭탄과 아이, 바다와 평야, 추억과 흥분...수필집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난 주체할 수 없이 서글퍼졌던 것 같다.
  아주 그럴듯한 일상을 접했을 때, 너무나 평범해서 특별한 행복을 만났을 때, 문득 궁금해진다. 일상의 불균일성을 넘어서 유지되는 항상성에 대하여,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거운 감정들의 기복이 가져오는 삶의 미세한 균열들을 다시 메워낼 수 있는 그 힘에 대하여, 끊임도 없고 쉼도 없는 삶의 호흡과 함께 지속되는 그 운동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이다.
“나는 내가 꿈꾸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곳에 아이와 남편과 집과 내가 꿈꾸는 것들이 있다. 그곳은 내 꿈의 세계이자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이다.”- 박선영


‘장식적인’이라는 수식어 앞의 당당함
  박선영은 조각을 전공했지만 종이를 오리고 캔버스에 꿰매어 붙이는 종이 조각가다. 그녀의 작품은 먼저 강렬한 색채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얇은 미농지로 한번 감싸서 바느질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랑, 분홍, 파랑, 주황의 비비드한 형광색이 만들어내는 색채의 리듬감은 보는 이를 들뜨게 만든다. 현란하지만 정교한 색채의 구사는 ‘내가 입은 옷이 바로 나’라는 식의 자의식을 표출하는 여자의 패션처럼 당당하다. 그 당당함이 주는 통쾌함은 단순히 색채 감각에 그치지 않는다. 꽃․나무․호랑이 등의 명확한 소재성, 규방문화의 상징인 바느질이라는 행위를 드러내는 시침선, 그리고 크리스탈 장식까지 박선영의 작업은 무엇보다 ‘장식적’이다. 
  하지만 장식성은 왜 아직도 본질이 아닌 효과나 여분이라는 선입관과 싸우면서 여전히 마이너리티에서 그 예술적 존재감을 증명해야 하는 것일까.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회화의 발전논리로 평면성을 설파했던 1940년대 이후 그린버그의 논의들은 수없이 비판받고 의심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술의 조형성은 평면성, 추상성에서 얻어진다는 믿음은 일종의 권위가 되어 우리를 유령처럼 지배하는 것은 아닐까. 박선영의 작업은 오히려 그 장식성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강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장식성이야말로 그녀의 무기다. 
  게다가 박선영이 자신의 작업에서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바느질이야말로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지만 페미니즘에 의해 새롭게 발굴된 영역이다. 여성적인 것으로 일반화된 미의식에 대한 회고적 그리움이 아니라 촘촘한 시침선이 증명하듯 여성적 바느질이라는 행위를 전면에 내세운, 바느질을 드러내는 바느질인 것이다. 다만 그 자의식은 거창한 목표나 대의에 봉사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작품 안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것은 미적 리듬감으로 환원된다. 


일상을 긍정하는 힘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아이와 남편과 집이 자신의 꿈이며 삶이며 곧 작업이라고. 과도한 여성성에 대한 강조 대신 자신의 현재와 삶에 대한 긍정이 자리했을 뿐이다. 그녀 작품 속 꽃잎으로 된 구두를 신고 금방이라고 꿈을 꾸러 떠날 듯하고 꽃잎 들이 흘러나오는 마법의 주전자는 온 세상을 물들이는 것 같다. 자신의 일상을 물들이는 꿈과 그 꿈이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순간에 대한 고백은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 다채롭고 변화무쌍하다. 바로 일상에 대한 소박한 긍정이야말로 어떤 주장보다 강력한 바이러스가 아닐까.
“나의 행복한 일상을 고스란히 담아 작품은 만들어지고 다듬어진다. 내 작품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이 담겨지길 기대하면서...”- 박선영
작은 평화의 세계와 그 즐거움 - 박선영 마법의 이야기들
작은 평화의 세계와 그 즐거움 - 박선영 마법의 이야기들

한국 조각 계의 다양한 흐름 중에는 이른바 "에꼴  드 카라라 " 즉 카라라 학파라고 불릴 만한 다소 특별한 경향이 존재하고 있다 . 
이들 그룹 가운데에는 지금도 화랑 가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대부분의 중요한 조각가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활동이 한국조각계에 끼치는 유형 무형의 영향을 종종 확인하게 된다 .
특히 인체를 다루거나 , 대리석으로 그 재료를 삼을 때 이들의 작품경향은 쉽게 구별이 갈 정도로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어 이들이 한국 조각의 질적인 면을 향상시키는 것 못지 않게 이들에게  있어 좀더 독창적인 어법의 창조에 대한 우려감도 느껴진다 .   
물론 이들은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집단적 행동을  취하거나 전시를 갖는 구체적인 행동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조각 계의  큰 비중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우리 화단의 중요한 일군의 작가들임에는 틀림없다  . 

그래서 어느 이태리 평론가는 한국작가들,  박선영을 포함한 조각가들에 대해 " 카라라의 베르실리아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 보기 드물게 청명한 태양 빛으로 신비스러운  ,아푸아나 산맥과 트리에노  사이에 펼쳐진  이 대지 ........ 현대인간의 물질 문명적인  탐욕으로부터 태연 자약한 이 하늘 아래서 대양과 산맥이 만나고 조화를  이루는 곳 , 이곳이 한인 조각가들에게는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훈련을  쌓아 가는데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한 풍요로운 토양" 이 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로 그의 발언은 이태리에서의 한국작가들의 예술적인 부분과 취향을 잘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부분이 돌 중심의  작업과 구상성,  그리고 장식성이 높은 독특한 작업들을 보여주는 것이 그 공통된 특징으로 꼽힌다 .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박선영은 일군의 카라라의 작가들이 작업하는 경향과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여류작가여서 일단은 흥미롭다 .
그의 작업은 쉽게 구별된다 . 조각의 어떤 전통성에 그가 연연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작업이 다르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과연 이것도 현대조각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그의 최근 조각은 어떤 면에서 낯설고 공예품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라고 억울할 만큼 신선하다 .

<마법의 나무> 또는 <마법의  주전자 >, <  마법의 숟가락 > 등  그의 작품 속에는 한결같이 환상적인  부분들이 들어 있다  , 그러나  이러한 것만이 그의 작품 세계를 정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성작가답게 매우 장식적인 방법들을 빈번하게 보여 주었다 . 

이 작품들이 분명 조각적인것과 장식적인 것 사이에서  박선영만의 새로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 다만 이러한 형식의 테크닉이 예술적으로 얼마만큼 독자성과 조각의 형식적인 면에서 가치와  의미를 가지는 가에는 여전히 논란이 있을 것이며 의문으로 남는다, 
예를 들어 그가 작품을 구성하는 방법 특히 사물과  사물을 붙이거나 쌓아놓는 방법들이 이전에 볼 수  없는 독특한 그만의 언어로  해석 될 수 있지만 과연 그것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하나의 예술품으로  가치 있게 되살아나고 있는가 는 쉽게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는 같은 형태를 직립 시키는 것은  아니다 , 하지만 그 형태들이 각각의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기자기함을 주는 것이 그러하고 ,부분  부분 작은 소품들이 작은 이야기들 속에서 소박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더욱 그렇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의 작업은 여성적이면서도 장식적이고  조각의 조형성보다는 감각적인 형태의 측면들을 크게 고려하는 면들로  조각이 이루어지고 있다 .
이러한 의미는 그가 다소 무겁고 예술적인 것에만 무게를  두고 있는 우리의 조각 계에 관심 있는 성과물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
이태리에서 수학을 하였으면서도  일반적인 작업을 하는  것보다 조각분야의 다양성을 위해서도 그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
그러나 지나치게 여성적이거나 작은 오브제 중심의 작업들이  그의 작업에 새로운 가능성과 조형적인 부분을  축소시킬 우려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예술에 있어 발전이라는 것은 단순한 의식과 표현의  확대나 다양함만을 가지는 것을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어떻게 선택한 주제와 내용을 아우르는 형식을 찾아내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발전의 참다움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박선영의 작업은 분명한 자기언어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이다.  또한 일상적인 그러면서도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그저 나열하지  않고 동화적인 감정으로 결합시키는 묘미도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먼저 조각이다 라는 형식을 내세우기보다는 작품 자체가 하나의 그의 환상적인 생활 언어의 충실한 표현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 
작품이 거창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욕심만 앞선 작품들이  성행하는 현실에서 그의 작품은 우리들의 감성을 작은 평화의 세계와 즐거움의 시간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의 조각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일 것이
다 .
그러나 그 매력이 보다 우아하고 숭고하게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진정하게 자리잡기 위해 그의 작품은 좀더 장식성을 덜어내고  그 언어와 형태가 하나가 되는 종합적인 이상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
가장 아름다운 예술은 그것이  어느 한가운데 치우쳐 균형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성과 예술성이 조화를 이룰 때이기 때문이다.
- 행복한 외출 & 달콤한휴식 박선영 조각전(2012.5.25-6.5 청화랑)
- 김종근(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