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NEWS
2018-01-12 Korean [스포츠 조선]

소박하고 아름다운 고향의 풍경들을 우리의 미감이 느껴지도록 승화시켜온 박윤성화백(http://blog.naver.com/pysung51)이 그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화단에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어 화제다. 70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겸재 정선의 작품에 매료돼 우리의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형상화시켜온 박 화백은 지난 7월 11일부터 8월 11일까지 한 달 간 겸재 정선기념관에서 겸재 맥찾기 유수 작가 초청전에 39점의 작품을 출품, 새로운 산수를 연출해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는 산수를 진경화하되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재창조하며 겸재 정선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해냈다. 투박한듯 하면서도 무겁지 않고 양감이 풍부한 주홍색 필선이 뼈대를 이루고 있는 박 화백의 작품들은 더운 기운과 함께 밝은 광채를 뿜어낸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힐만큼 역동적인 기운이 감돈다. 온통 화폭마다 붉은색들이 향연을 이루며 꿈틀거린다. 1975년 부산 공간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어느덧 경력 38년의 부산 화단의 대표적인 중견 화가로 입지를 다져온 박 화백은 고향의 풍경들을 민화적인 미감으로 선보이는 한편, 우주에 관심을 갖고 하늘 연작 시리즈를 경주 남산의 불적지를 다니며 사람과 그들의 흔적을 표현하였으며 백두산, 금강산, 북한산등을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재해석하여 우리의 전통미술의 조형미를 개척해왔다.
박 화백은 오는 9월 26일 부산 갤러리 몽마르뜨에서 제15회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경주 남산, 운주사의 불적지, 금정산 풍경 등을 주로 전시할 예정이라고. 박 화백은 “우리 자연은 곳곳에서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곳곳을 다니며 그 얼굴들을 새롭게 그려보고 싶습니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박윤성 화백은 스포츠조선 ‘2013년 기획특집 자랑스러운 혁신한국인’의 문화예술부문에 선정되었다. 출처:스포츠조선
2018-01-13 Korean 작품 속 고향, 작품의 귀향

작품 속 고향, 작품의 귀향
서양화가 박윤성, 고향 진주서 첫 전시…26일까지 경남문화예술회관
김민지 기자 kmj@idomin.com     2013년 04월 22일 월요일
진주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서양화가 박윤성(61)이 26일까지 진주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전시를 연다. 작가가 고향에서 전시를 연 것은 처음. 80여 점을 내놨다. 그의 1970년대 작품부터 최근 작품까지다.
진주 출신답게 촉석루, 서장대, 영남포정사, 남강유등 등을 그린 작품이 대거 눈에 띈다. 금강산, 영취산, 북한산 등도 있다.
그는 서양화가지만 작품은 동양적이다. 즐겨 사용하는 붉은색은 주술적이고, 자연 풍경을 단순화한 것은 민화적이다.
작가가 붉은색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목공예가인 아버지 때문.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만든 밥상, 제사상 등을 자주 봤다"며 "그것은 모두 붉은색이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세부적인 묘사를 과감히 제거해 단순화하는 방식으로 작품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요즘 그가 그리는 작품은 과거와 달리 추상적인 느낌을 준다. 최근 작품 '북한산'은 뚜렷한 사물의 경계를 흩뜨리고, 발랄함과 어둠의 양극단을 오가는 것 같다.
박윤성 작가는 "그림으로 고향을 찾기는 처음이라 미안한 마음이 크다"면서 "그림의 시작은 내가 놀던 고향 풍경이었다. 여태까지 작업한 것을 고향에서 꼭 펼쳐 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2018-01-12 Korean 캔버스•나무결에 거친 표현••• ‘주황색깔 자유인’
캔버스•나무결에 거친 표현••• ‘주황색깔 자유인’
[주경업이 만난 문화지킴이들] - (17) 서양화가 박윤성

당리동 사거리 그의 화실은 유회구 냄새와 나무결의 은은한 향으로 가득 찼다. 캔버스 앞에서 목조각대 앞으로 옮겨 앉은 박윤성 씨가 최근 옮겨온 향나무를 조각도와 끌로 새기고 파내는 작업에 몰입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작품진열대 위에도 완성했거나 제작 중인 목조각품들로 가득 차 있다. 요즘 나무결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다. 끌 가는대로 두들기고 쪼아내면서 유화작업으로 피로해진 눈을 쉰다.

화가라기 보다 차라리 자유롭고 싶어 그림그린다는 박윤성(朴倫性, 1951년 생) 씨 어릴 적부터 눈이 시리도록 보아 온, 아버지가 만든 소목(小木, 나무로 만든 가구따위)에 입힌 옻칠 또는 붉은 색깔(엄밀히 말하면 주황색)의 강렬한 매력을 잊지 못해 이를 재현하고 있다. 더러는 주술적인 의미로 부적과 원시적인 냄새도 풍기기에 민화에서 그 해법을 찾기도 한다. 터실터실 단순화시킨 화면전체에 깔려 있는 원초적 느낌의 붉은 빛깔은 크레파스로 꾹꾹 문질러 놓은 유치원생 그림을 연상케도 한다.

박윤성은 경남 진주 토박이로 조부(박길용)‐아버지(朴道和)‐동생(朴倫基) 3대에 걸쳐 전승해 오고 있는 백골장(白骨匠, 칠하지 않는 목기와 가구) 집안의 장남이다. 특히 아버지가 만든 8모나 12모로 각이진 개다리소반은 솜씨가 가장 빼어나서 백골은 통영 등으로 보내어져 옻칠을 입혀 팔려 나간다. 한때 박씨네의 백골장롱 솜씨에 감탄한 서울 인사동 상인들은 이를 대량으로 주문 구입하여 서울 칠공방에서 고급 칠을 하고 장석을 달아 고가품으로 팔았었다. 진주중을 졸업하고 막내 삼촌의 권유로 부산 경남고로 진하였기에 집안 공방일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눈만 뜨면 망치•대패•끌•톱소리를 듣고 자랐고 어머니가 백골 위에 입히는 옻칠작업을 지켜보며 살았기에 육순이 넘은 지금에도 문득 들려오는 환청과 칠냄새를 느낄 때가 있단다.

요즈음은 소반을 찾는 이도 장롱을 찾는 이도 없어 부친 사후 일손을 놓은 상태이지만 아버지의 손을 거쳐 손끝에서 완성되는 공예품에 대한 궁금증이 컸던 만큼, 미적감각이 뛰어난 눈썰미로 아버지의 ‘붉은 색’을 읽어내었고 이를 캔버스에 담아 내었다.

72년 부산교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부임한 후 본격적으로 그림그리기에 들어갔다. 헌책방골목을 다니며 구입한 일본 미술잡지 「미술수첩」 등에 수록된 그림들을 보고 습작의 힘을 길렀다. 단색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힘 있어 보였다. 그리고 푸른색을 즐겨썼다. 「촉석루」, 「남강유등」 등을 즐겨 그렸다. 이른바 70년대 초의 ‘푸른색시대’다. 80년에 이르면 화면은 주황색으로 옷을 갈아 입는다. 유년의 강력한 느낌이 옻칠색으로 나타났다. 황토색 보다 짙은 주술적인 냄새도 풍겼다. 마치 주사(朱砂)로 부적을 그리듯 그렸다고 수근 그렸다. 서양물감으로 우리 냄새를 풍기고 싶은 화가의 단순한 마음의 표현이었는데.

하늘 별자리를 소재로 한 「하늘」 연작은 민화적인 요소가 결집된 작품이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하였으리라. 80년 후반이면 백두산과 금강산을 답사해온 느낌으로 북한산을 그리는 등 간결하면서도 대범, 단순한 해학의 서정성 짙은 회화미의 선으로 나타난다. 위장된 가면을 벗어버린 원초적인 표현으로서 알갱이(뼈대)만 화면에 가득찼다.

이즈음 교대 선배 김영주 씨 권유로 당시 동아대 미술과 김종식 교수를 만난다. 준비해간 그림을 본 선생의 “단색으로 그린 것은 데생이지 그림이 아니야”란 충격적인 혹평을 듣지만 이후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로 선생과 가까와진다. 74년 노랑 바탕에 붉은 점과 선으로 그린 「서장대」는 선생과의 교감을 이끌어 내었고 그림그리는 방법과 전시장들의 그림얘기를 나누며 밤이 맞도록 술잔을 비워댄다. 그림이 좀 맘에 들면 “박군 술많이 묵었능가베”, 마음에 차지 않으면 “어이 박군 술많이 먹어야겠네” 작업성과를 술에 비견하면서 사제의 정을 두터이 했다. 평소 주촌에서 만난 스승은 언제나 수첩 꺼내어 스토로그(선긋기) 작업을 하고 있으면서 그림에 대한 집착을 키워왔다. 박윤성은 그런 스승의 모습을 닮고 싶었다. 그런 한편 술 취한 스승을 껴안고 대청동 계단길을 올라 집에 이르면 대문을 가로막고 선 사모의 호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사모의 역정은 제자들이 앉은 술좌석을 엎을 정도여서 으례 그려려니 넘기고 말 일이었다.

자기 그림 속에 빠져 버린 박 화백은 학교 근무할 때도 짜투리 방을 작업실로 꾸미고 쉬는 시간, 점심시간이면 붙박혔다. 어떤 때는 조•종례 시간도 모르고 작업하다가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방해받지 않고 마냥 그림만 그리고 싶었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71년 첫 발령받은 신선초등학교를 시작으로 20여년 몸담은 교직을 떠나야 했다.

1992년 전업작가를 선언하고 명퇴했다.

그러나 준비없이 시작한 자유는 대책없는 자신을 옥죄어 오기만 했다. 그렇게 2년을 시골(진해 웅동)에 칩거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본 부인(천영희)의 도움으로 부산에 와서 집 가까이에 작업실을 마련하게 되었고 안정을 되찾아 눈만 뜨면 작업실에 달려갔다.

97년 5월의 서울 도울아트타운에서 전시한 「박윤성, 우리의 자연과 문화전」은 박윤성의 자유분방하고 싶은 내면의 세계가 짙은 주황색으로 나타났다. 경주 남산에서 만난 마애불을 굵고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 부처도 뭉텅그린 선 하나로 함축하였다. 꿈틀 거리는 선 속에서 부처가 살아났다. 그리고 영취산•승학산•천황산•화왕산 등을 그렸다. 그는 자연을 품에 안고 작업한다. 이 시기에 함께 선보인 목판화도 이색적이었다. 다듬지 않은 나무판 속에 하늘을 새기고 바다를 그려 넣고 풍경을 새겨 예의 붉은 색으로 찍어 내었다. 2003년 6월의 「금강산그리기전」에서는 화가의 기운과 욕망이 송곳처럼 날이 섰다. 화면전체에 흐르는 붉은 기운이 사위스럽기까지 하다(서울 가나아트센터).

2012년 꽃상여 타고 소천(召天)한 아버지의 애잔한 모습을 그린 「아버지전」(2013, 해운대 몽마르트갤러리)은 오히려 처절하리만큼 생략된 선의 유희였다. 차라기 “미친 놈 거기 그림이가” 내뱉던 아버지의 노기띤 호통이 그리워지는 화가의 절박한 내면세계의 표현이었다.

어느 날 진주 본가에서 버려진 나무들을 주어와 깎고 다듬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칼가는 솜씨며 나무결 보는 눈 등 나무 다루는 일이야 백골장 부친의 등 너머에서 배우고 익혀 몸에 벤 일이 아니던가.

익숙한 솜씨로 한 작품 뚝딱 완성하기도 했다. 나무결 따라 새기다 보면 문득 그림속의 선 위에 옷을 입히는 느낌이 들기도 했으리라.

2대째 이어오던 가업을 동생에게 떠넘기고 건축공부를 해보리라 부산으로 유학왔었지만, 삼촌의 권유로 교육대학에 진학하면서 어릴 때부터 즐겨하던 그림공부로 목표를 정한다. 학생들 가르치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지만 그림으로 향한 욕구는 불 같아서 결국 퇴직하고 전업화가의 길을 택하였다. 자유스러워지면 그림그리는 재미밖에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갈등의 연속이었고 이를 극복한 지금은 개성 있는 중견화가로 입지도 분명해졌다.

박 화백의 하루 일과는 이른 새벽 2시 경 눈뜨면 작업실로 출근하여 다른 사람들 출근시간까지 작업한다. 그에게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황금시간이다. 라면도 끓일 줄 모르던 박 화백이 요즘 술 안주도 곧잘 장만한다. 막걸리 한 잔에 풍성한 그림얘기들로 작업실이 만당한다.

2018-01-12 Korean 그들이 선택한 부산의 풍경<物像으로서의 의미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풍경과 자연물을 그림의 소재로 택하는

<그들이 선택한 부산의 풍경<物像으로서의 의미>
풍경이란 자연물을 토대로 그 주변전체를 아우르는 환경이거나 자연물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게다가, 특정한 한 지역의 정서를 가진 풍경이라면 그 자극의 강도는 보다 직접적이다. 부산의 비구상미술에 대비되는 구상계열 작가 들 중 표현 기법상 확연히 드러나는 ‘힘과 기’를 그 주요 표현방식으로 구상 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풍경과 자연물을 그림의 소재로 택하는 6명의 작가들의 전시. 이 전시에 모이게 된 작가들은 이러한 시각현상을 자기만의 독특한 물상으로 치환하는데 오랜 기간 동안 천착해온 작가들이다. 쉽게 눈에 드는 작업방식보다 대상의 본질과 그 사물의 성격을 최대한 진중하게 표현하려는 기다림의 미학을 알기에 오히려 굳건하면서도 활기찬 회화성을 획득한 작가 들이다. 이 전시는 독특한 개성으로 표현된 또 다른 모습의 부산 및 부산주변의 자연과 풍정(風情)을 느껴볼 수 있으며 타지 및 외국관광객에게는 미술적 체험을 통한 부산의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함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