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미의 조각, 자연의 결과 질감을 드러낸 조각_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 |
김정미의 조각
자연의 결과 질감을 드러낸 조각 -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김정미의 근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작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전작과 근작이 유기적으로 연속돼 있기 때문이다. 전작에서는 주제의식이 크게 조각의 본질에 대한 관심과 자연의 본성에 대한 관심으로 구분돼 있는데, 근작에서는 이 두 지층이 하나로 통합된 인상을 준다. 물론 인간의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조건에 대한 관심과 상황인식에서 비롯된, 다른 경향성의 작업들도 있다. 하지만 이 작업들은 이후 작가의 작업이 보여주는 일관성과는 다소 그 맥락이 동떨어져 보이며, 초창기의 작업인 만큼 진지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습작기나 통과의례 정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이렇듯 조각의 본질과 자연의 본성을 경유해서 근작에서 마침내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 그 과정이 마치 정립과 반립을 거쳐 변증법적 합일에 이르는 사유와 사상의 전개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외관상 조각의 본질과 자연의 본성은 서로 다른 전망에 속해 있다. 조각의 본질은 모더니즘 서사에 그 기반을 두고 있으며, 자연의 본성은 자연주의(사실적인)의 전망에 내포돼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근작은 이처럼 서로 다른 전망의 두 경향이 통합 제시됨으로써 특유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가장 조각적인 형식에다 자연의 본성을 담아내고, 그 과정에서 조각과 자연은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 삼투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전작을 분석함으로써 근작의 이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조각의 본질로 예시된 <상자>와 <자리> 연작, 그리고 자연의 본성으로서 예시된 <자두>에서 엿보이는 경향과 태도는 다만 그 형태와 소재가 바뀌었을 뿐 그대로 근작의 한 부분으로 용해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작가는 시종 대리석이라는 특정 재료를 사용하는데, 이 또한 본질과 본성을 겨냥한 주제의식을 일관되게 지지하는 대목이다. 결국 조각의 본질은 대리석의 물성과 연계돼 있으며, 자연의 본성 또한 대리석의 본성에 연루돼 있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에는 조각의 본질과 자연의 본성 그리고 대리석의 물성이 하나로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김정미의 근작에는 사과와 씨앗 그리고 가랑잎이 소재로서 도입된다. 이 소재들이 하나같이 자연에서 채취한 것들이며, 그리고 사실적인 형태로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전작에서 자연의 본성으로 예시된 <자두>와의 연장선상에 있다. 특히 마른 감씨를 소재로 한 <씨앗>이나 <가랑잎>이 그러하며, <사과> 연작은 이와는 좀 다른 맥락에 속한다. <사과> 연작에서는 감각적인 형태(사실적인 형태)에 대한 충실한 재현을 넘어 기하학적인 형태(추상적인 형태)와의 대비 내지는 조화를 꾀한 듯한 느낌이다. 사과를 얹어둘 일종의 좌대를 끌어들인 것인데, 그 형태나 구조가 <상자>와 <자리> 연작을 변주한 것 같다. 그 좌대는 위에 얹힐 사과를 위한 부수적인 장치로서보다는 그 자체 독자적인 개체성을 확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과와도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마치 한 몸(한 피스)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킬 만큼 심플한 구조와 정적인 느낌이 감지되는 그 오브제는 단순한 좌대가 아니다. 그리고 이는 <자리>가 외관상 의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의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좌대나 의자는 다만 구실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은 조각의 본질(최소한의 구조에 대한 환원주의적 태도)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추수된 형태이며 구조인 것이다. 이처럼 기하학적인 형태의 오브제와 유기적인 형태의 사과가 어우러진 경우가 있는가 하면(분리된 채 한 피스를 이루는), 아예 한 덩어리를 이루는 예도 있다. 대리석 속에 기하학적인 형태와 유기적인 형태가 함께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사과를 사각의 형태로 잘라낸 형상으로서, 때론 정사각형에 가깝기도 하고 더러는 옆으로 긴 직사각형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자연스레 사과의 유기적인 곡선과 각진 부분이 대비되면서, 특히 사과 꼭지의 움푹 파인 부분이 강조돼 보인다. 이로써 모더니즘적 환원으로 나타난 조각의 본질과 자연주의적 재현에 바탕을 둔 자연의 본성이 대리석의 물성을 매개로 해서 서로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각진 부분과 사과의 잘려진 형태가 맞닿는 부분에 생겨난 곡선이 자연의 유기적인 풍경을 상기시키는데,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공지선이나 공제선을 암시하기도 하고 계곡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처럼 작품은 사과인 동시에 풍경의 한 부분으로도 읽힌다. 그럼으로써 작은 자연(사과)과 큰 자연(풍경), 소우주와 대우주와의 유기적인 관계의 형상화가 느껴진다. 그 자체를 작가가 일상 속에서 찾아낸 자연의 본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과꼭지와 연결된 속으로 움푹 파인 부분을 형상화한 것은 아마도 사과의 생장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는 생명의 근원, 생명의 샘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생긴 모습도 그렇지만, 세상의 근원이며 세상의 배꼽(움파로스)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확대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처럼 <사과>는 배꼽을 상기시키고 몸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는 <자두>가 에로틱한 기호를 연상시키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니까 자연에서 찾아낸 몸과의 유사성(단순한 형태적 유사성을 넘어 본성의 유사성을 아우르는)인 것이며, 그 자체 자연과 신체를 하나로 보는 생태학적 인식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일체가 되지 않고서는 생각하기도 실현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이와 함께 김정미의 조각은 시각적인 경험을 넘어 거의 촉각적이다. 대리석 특유의 투명성과 더불어 부드럽고 섬세한 굴곡과 표면질감에서 자연의 육질이 느껴지는 듯하다. 자연 고유의 생명을 머금은 듯한 곡선과 표면질감을 얻기 위해 작가는 일일이 손사포질로 그 표면을 갈아낸다. 이렇게 한 작품을 갈아내는데 짧게는 하루가 꼬박 걸리기도 하고 길게는 수일이 걸리기도 하는데, 어찌 보면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과정이 아닐까 싶다. 작가에게 있어서 대리석의 표면을 손으로 갈아낸다는 행위는 그 자체 대리석 속에 숨겨진 자연의 결과 질감을 찾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대리석의 질감과 손의 질감이 긴밀하게 교감하고 삼투되는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자연의 질감이 찾아지는 것이다. 그 과정 중에 대리석과 손,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서로 혼재된다. 주와 객의 구별이 뚜렷하면 대리석의 단단한 재질을 뚫고 부드러운 속살에, 자연의 질감에 이르지 못한다. 나를 허물 때 너에게 건너갈 수 있고, 너에게 동화될 수 있고, 너와 일체가 될 수 있다. 메를로 퐁티는 나와 너(세계) 사이에 우주적 살이 채워져 있어서 나와 너를 주체와 객체로 분리할 수 없다고 한다. 나와 너는 진즉부터 하나이며, 똑같은 전망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대리석에 동화되고 자연에 스며든다.
로댕은 예술의 유일한 원리란 눈에 보이는 것을 모사하는 것이며, 따라서 정확하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정확하게 보고, 본 그대로를 모사한다는 것이 그러나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인식의 동물이며, 인식의 프리즘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따라서 때로는 인식이 장애가 될 수 있다. 이런 인식의 베일을 걷어내고 볼 때 세상은 처음 보는 것처럼 보이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세상은 나를 설레게 할 수 있다. 자두나 사과 등 자연을 소재로 한 김정미의 작업은 자연을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변형시키지 않는다. 가급적 자연의 원형에, 자연의 본성에 충실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를 위해 조각의 최소구조 내지는 최소한의 물적 조건으로의 환원을 수행하며, 자연의 원형에로의 환원을 감행한다. 이로써 자연에 내장된 생명력을 드러내고, 자연의 위대한 모성과 대면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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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조각 사이_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교수) | |
김정미- 자연과 조각 사이
- 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교수) -
매번 새로우면서도 너무 오래된 자연은 인간의 손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결정結晶들을 안긴다. 감각으로 사유할 수밖에 없는 자연은 작가들의 손을 무디고 곤혹스럽게 한다. 조각가의 훈련되고 단련된 손이라도 자연 앞에서는 보잘것없이 초라하고 마냥 궁핍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손은 풀 한포기, 돌 하나, 과일 한 알조차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 절망과 안타까움은 결국 자연의 피부에 붙어나간다. 자연이 만들어낸 생명체를 짐짓 조심스레 따라가 본다. 자연을 모방하다 그 자연으로부터 이탈해 인공의 사물로 들어간 현대미술의 궤적 아래서도 자연은 여전히 모든 미술활동의 중심에서 소외된 적이 없다. 인간은 이미 그렇게 만들어진 자연계 안에서 여전히 창조의 의미를 헤아릴 것이다.
김정미의 작업실은 자연 속에 있다. 자연의 일부로 편입해 들어가 그 언저리 어느 곳에 앉아 눈이 부시게 하얀 대리석을 쪼아 자연을 모방한다. 아니 자연을 해석하고 물어본다. 혹은 자연 앞에서 깨닫고 느끼고 그래서 부풀어 오른 감정과 생각의 편린을 기록한다. 작가의 작업은 자연 속에서 살다가 문득 떠오른 단상, 자연스레 삶의 반경에서 건져 올린 인상, 주변 환경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새긴 그림자 같은 것이다. 작업의 과정과 시간, 노동 또한 자연이 생명체를 잉태하고 거두어가는 과정과 동일시된다. 작가는 조금씩 돌의 내부로 들어가 과일의 충만한, 단단한 구형을 매만지고 잎사귀 하나씩을 틔우고 깊고 까마득한 물속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자연의 저쪽은 너무 깊어 가늠하기 어렵고 그것이 빚어낸 형태는 너무 완벽해 매순간 절망을 안기지만 동시에 경이로움과 신비, 영성적인 느낌을 안기기도 한다. 모든 인공의 것들이 감각과 욕망, 사유를 관리하는 시대에 여전히 자연에서 숭고함과 감동을 만나고 헤아리는 일이야말로 인간이 물질과 사물화의 과정에서 거리를 두는 일이자 오랜 시간동안 그것과 함께 살아온 인류의 지혜와 마음을 새삼 추체험 해보는 일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자연 속에 있어 인간은 그 아름다움을 창조하기보다는 발견해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술은 인간이 활동이지만 그 궁극의 목표는 자연을 닮아가는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지 않다. 동양에서 예술이란 결국 자연이 지닌 지극한 조화와 불변하는 법칙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조형화하는 일이자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의 형상을 인위에서 출발해 무위의 경지로 옮겨가는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모순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모순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자리한다. 자연을 닮고자 열망했던 것이 고대 동양인의 삶이자 예술이었기에 사람들은 돌과 물, 식물을 완상하고 이를 반복해 형상화하면서 자기 생을 완성해나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현된 예술은 자연과 구분 없이 자존한다. 좋은 예술이란 풀처럼, 물처럼, 돌처럼 자리하고 바람처럼 기꺼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술이란 소멸의 지점으로 자연스레 나아간다.
작가가 작업실/자연에서 한 일은 결국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미를 안타깝게 더듬는 일이다. 그것은 촉각적으로 자연을 쓰다듬고 애무하고 어루만져 그 형상에 기생하는 것, 그 형상을 빌어 시적인 문장을 조각화 하는 일이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을 살아낸 경험들이 고스란히 작업으로 부화되었다. 작가는 커다란 자두 4알과 나뭇잎, 수면에 퍼지는 동심원을 돌로 재현했다. 생명체가 순백의 돌로 응고되어있다. 이 식물과 물은 총체적인 자연의 이미지에 해당할 것이다. 수 억 년의 시간을 내장하고 있는 돌의 내부가 절개되면서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과정 같기도 하다. 돌은 아늑한 시간의 주름과 그가 겪어낸 자연의 변화를 안으로 단단하게 응축했다. 과일 역시 동일하다. 이 자두는 모든 식물, 과일의 상징으로 자리했다. 그것은 작고 단단하며 완벽한 형상을 갖추었다. 여리고 달콤한 속살을 부드러운 껍질로 완강하게 두른 과일은 작은 씨앗이 부풀어 올라 그렇게 만들어진 형상이자 자기 생명의 복제수단을 보호하며 그 생명력을 연장시키기 위한 장식(파레르곤)으로 풍만하다. 과일의 달콤한 살과 부드러운 향기, 아름다운 외형은 식물의 자기번식을 위한 적극적인 수단이다. 그로인해 인간은 과일을 거두고 가꾸고 번식한다. 새들 또한 과실을 쪼아 먹어 그 씨앗을 사방으로 퍼트린다. 새가 인식하는 색은 붉은 색조뿐이라 과일들은 대부분 새를 유인하는 그 색으로 자신을 알린다. 자두 한 알에도 우주자연의 신기한 섭리가 가득하다. 그런가하면 작가는 그 자두에서 관능과 미의 핵심을 엿본다. 부드러운 형태, 움푹 패인 꼭지, 유두처럼 봉곳하게 솟은 부위, 섬세하게 갈라진 틈 등은 다분히 에로틱하고 성애적이기도 하다. 아울러 여성으로서의 자기 실존의 이미지를 그 대상에 은밀하게 투사한다.
또 다른 작업은 사각형의 대리석 표면이 조심스레 융기하면서 잎사귀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돌의 피부에서 자연스레 자라난 잎과도 같다. 방향을 달리해 드리워진 잎은 잎맥을 손금처럼 보여주며 자기 생애를 증거한다. 높이를 달리해 부감된 잎사귀로 인해 그늘이 져서 그 하나의 잎들의 실존적 무게와 존재감이 극화된다. 또는 사각형의 박스형의 모서리에 드리워져 있어 나무에서 분리된 잎들이 기꺼이 대지 속으로 소멸되기 직전의 처연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사각형의 박스는 조각의 존재론적 조건을 밀어젖힌 현대조각이 도달한 최후의 지점인데 그 자리에서 다시 나뭇잎 하나가 올려져있음은 서구조각사에 대한 작가의 모종의 인식, 조각관을 은연중 그 ‘에지’(edge)위에서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또한 납작한 대리석 표면 위로 동심원이 퍼져있는 이미지는 돌의 물성에 일루젼을 얹혀놓아 하나의 풍경으로 대면시키는 작업이다. 수평의 시선 아래 바닥과 일치하는 이 풍경은 보는 이들을 저 안쪽으로 유인하는 공간으로 다가온다.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물의 내부와 질료성의 액체 내부가 모든 것을 삼키고 여운처럼 파문을 표면 위에서 보여주는 이 장면은 작가가 물에서 배운 침묵과 관용, 포용과 이해의 정도를 암시한다. 이것은 동시에 내밀한 심리적인 잔상, 개인적인 경험이나 환영의 상징이 되고 있다.
식물과 물, 돌은 작가를 둘러싼 환경이자 자연스레 눈에 들어와 가슴에 스민 대상들이다. 그것들과 함께 한 시간 동안 자연은 여러 계절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뜨거운 여름날과 거센 비, 혹독한 추위와 눈들이 마구 덤빈 작업실에서 작가는 그 자연과 힘겹고 정겨운 삶을 보냈고 그런 흔적들이 자연스레 이번 작업으로 나왔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작가의 일상의 반영이자 자연과 조각 사이에서 빚어 나온 결과물인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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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가장자리로부터 꺼내진 생명_이선영/미술평론가 | |
물질이 가장자리로부터 꺼내진 생명 (5회 개인전 평론 )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정미는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가장 오래되고도 보편적인 미학을 따르면서, 자연과 인공의 접점에서의 미묘한 게임을 즐긴다. 작가는 자연에 완전히 경도되어 인공적 수단을 완전히 놓는 것도 아니고, 인공적 기교에 탐닉하면서 자연을 멋대로 왜곡하지도 않는다. 자연에 대해 너무 수동적인 입장이 될 때, 구체적 수단은 방치되고 예술작품에는 관념이나 개념이 과도하게 침투한다. 반면 자연에 대해 너무 능동적인 입장이 될 때 내용은 추상적으로 고정되고, 예술작품에는 표피적인 기교만 남게 된다. 생각만 많아지거나(내용 위주) 손만 바빠지거나(형식 위주), 그 어느 것도 바람직한 생산물을 낳지 못한다. 자연은 인간의 사회적 삶과 더불어 예술의 가장 풍부한 참조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에, 야심찬 작가로서는 함부로 자연에 괄호를 칠 수 없다. 한편 참조대상을 명확히 포착하게 하는 인공적 기교라는 것도 인간의 생산양식의 변화(진보)와 추이에 따라 진부한 것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자연적 원천은 너무 멀리 있고, 결과물의 위상은 가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천의 풍부함과 결과의 신선함(새로움)을 모두 구비하는 것은 예술 작품 뿐 아니라, 모든 생산물의 이상일 것이다. 김정미의 조각은 거대한 원천인 자연의 근본성에 뿌리를 내리면서도, 군더더기 하나 없는 기술적 완벽성을 통해 자연의 진면모를 다시금 추체험하게 한다. 가령 이 전시의 대표적인 작품 [자두]는 자연적 대상인 자두의 정교한 기술적 재현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공적 수단의 절묘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작품 [낙엽]은 50x50x50cm의 정방형 입방체 위에 걸쳐진 나뭇잎인데, 기하학적 인공성과 유기적인 자연 형태의 대조가 특징적이다. 그러나 좌대에 해당될 법한 입방체와 본체에 해당할 법한 나뭇잎 사이에는 재료와 질감의 차이가 없는 일체형을 이룬다. 김정미의 작품에서 자연과 인공은 대조를 이루면서도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작품 [나뭇잎]은 4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의 정사각형의 돌판 위에 나뭇잎이 융기되어 있는 형태이다. 온전한 잎 새가 하나도 없이 조금씩 가장자리가 잘려 부분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마치 나뭇잎이 흐트러진 대지를 불특정하게 잘라낸 듯하다.
자연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사각형이 인공의 상징이라면, 잘려진 가장자리는 인공 만으로서는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자연의 무한성을 지시하고 있다. 정확한 구획을 이루는 절단면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무한한 자연의 편린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벽에 걸린 [풀잎]은 마치 나뭇잎처럼 보이는 실제 크기의 풀잎을 그대로 떠낸 작품이다. 대리석 작품들과는 달리, 실제와 비슷한 상을 가지고 있지만, 풀잎 6장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어 이 역시 인공적인 요소가 빠지지 않는다. 직선을 이루는 구도는 나름의 균형과 조화를 생각한 인공적인 배치이기 때문이다. 작품 [자두]는 거대한 자두 4개를 정확하게 재현했다. 자두가 이렇게 섹시하게 생긴 줄은 처음 알았다. 대리석의 자연적 무늬만이 간헐적으로 가로지르는 유백색 형상은 여인의 깊은 속살처럼 은근한 관능미가 흐른다. 매끄러운 표면으로 흐르는 봉긋한 부피감은 생명의 기운으로 충전되어 있다. 그것은 어떤 받침대도 없이 그 어느 곳에 놓여 져 있을지라도 자체의 응집성이 흐트러지지 않을 자족성을 향한다. 작품 [동심원]은 동심원을 그리는 물의 파장이 새겨진 대리석 판이다. 역시 [나뭇잎] 시리즈처럼 사각형으로 잘려진 상태이다. 그러나 나뭇잎처럼 양각된 것이 아니라 내부로 새겨져있으며, 두 판의 크기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퍼즐처럼 파장의 아귀를 맞춰볼 수 있는 대칭성을 가진다. 동심원은 자연에서 맨눈으로 발견할 수 있는 기하학적 형상으로, 굳이 형상 배후의 질서를 따로 찾을 필요가 없을 만큼, 자연과 인공의 완벽한 통일성을 보여준다. 자연과 인공이 줄다리기 하는 일련의 장치 속에서 재현된 나뭇잎, 풀잎, 과실 등은 성장하고 사멸하는 유기체의 형태를 가지면서 계획된 예술 작품 같은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에서 자연과 작품은 무한한 점근선을 향해 질주하면서 근접해 있다. 물론 자연과 인공은 차이가 있다.
‘자연적’이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가라타니 고진)을 가리킨다. 반면 인공적인 것은 짜여 진 구축물construction이나 조립품의 성격을 가진다. 한쪽은 무한을, 다른 한쪽은 유한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해 보이는 자연의 미시적, 거시적 차원에서 모종의 계획된 질서를 파악할 수 있고, 인공적 구축물에는 최초의 계획과 구도를 초과하는 몫이 있다. 그 점에서, 양자는 명확하게 구별될 수 없는 차원을 가지며, 이 접점의 지대가 예술가들로서는 가장 어렵고도 매력적인 부분이다. 과학 저술가 제임스 글리크가 지적하듯이, 자연에서 무질서함이나 우연성의 횡행은 죽음을 부른다. 자연에서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을 향해 고도로 조직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식물에서 가지들이 나오는 순서나 방향은 정확하게 똑같다. 자연은 단순한 물리법칙에 의하여 그 자신을 조직하기 시작하고, 무한한 인내로 어디서나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였을 때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상응하여 고전주의 미학은, 있음의 형식이 절대적 동일성을 인식하는데서 비로소 충족된다고 설파한다. 예술 역시 자연과 유사한 견고한 실재성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이성이다. 반면 이성으로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초과분의 몫이 없으면 예술은 단순한 기술이나 노동으로 격하될 수 있다. 김정미의 작품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물질의 가장자리에서 생명을 꺼내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은 자연의 동력학적 과정이 물리적 형태로 구체화되는데, 그것은 내용과 형식 양자 모두에서 그러하다. 가령 엽 맥이나 파장을 이루는 미세한 자연의 결과 그것의 몸통을 이루는 재료의 암맥(대리석 내부의 주름)이 미묘하게 뒤엉키며 생명의 율동을 표현한다. 거기에는 명확한 형태의 재현으로 나타나는 엄밀한 질서와, 이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카오스의 흐름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질서의 구조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명의 신축성과 융통성(변형)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출전 | 경기문화재단 시각예술 부문 지원 사업 모니터링 보고서 |
ARTIST Criti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