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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7 Korean ' 우무길 조각가'-엄금희 기자
우무길 조각가 



조각과 건축, 그 둘은 공간이라는 개념 안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각은 3차원의 입체작업이며, 재현하는 매체이다. 전통 조각은 내부보다는 외부가 중시되었고, 또한 작가의 의도나 표현보다는 기념비적 성격을 띄고있다. 건축은 공간을 활용하는것으로서 존재하며, 조각은 외피가 있으나 건축물은 외피와 내부공간이 함께 존재한다. 내부공간이 존재한다라는것은 곧 생활 경험이 이루어지는 3차원적인 공간으로서, 내부공간의 기능에 따라서 겉피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또한 건축은 시공과 설계를 필요로 한다. 즉, 건축물은 심미적 효과보다 내부 공간의 기술력 등이 좀더 중시된다. 하지만 건축가들은 미적표현에 점차 욕심을 내었으며, 미술관, 갤러리는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가능했고 또한 기술력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선호하게 된다. 하지만 건축이 미를 추구하는것에 중점을 두게되면, 즉 디자인이 건축물의 기능을 압도하게 될시에는 이는 건축이 아닌 조각이 된다. 따라서 우무길 작가를 만나는데에 있어서도, 조각과 건축의 의미에 대한 공간의 예술성을 찾게 된다. 
우무실 작가의 작업실에서 만난 조각과 건축의 공간 그리고 대지미술과 미니멀리즘의 공간개념에 대한 내용과 우무길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 조각과 건축이 어떠한 관계성을 갖으며 공간을 이루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조각의 공간에 도시를 만들다
전통적 조각의 장소와 시간성을 나타내던 받침대가 점차 작품에 흡수되어서, 우 작가의 아우라를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이는 미니멀아트를 기점으로서, 받침대가 없이 갤러리 바닥에 놓이고 공중에 설치된다. 때문에 이는 관람객의 직접 체험이 가능하다. 
프랑스의 형상학자 메를로 퐁티는 ‘세계속의 나’를 주장하였다. 이는 공허한 공간이 아닌, 상황과 문맥속에서 나를 강조하는 공간을 주장한다. 즉 몸이 필요하며 몸의 경험을 전제로 하고있다. ‘관람객을 포함한 공간속의 사물을 제작하자‘는 것으로서, 미니멀리즘의 공간이 나타난 것은 메를로 퐁티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미니멀리즘 건축의 형성과 그 표현 특성에 있어 투영과 반영에 의한 자아적 이미지의 표현을 우 작가가 시도하고 있다. 
재활용되는 스트로폼의 공간마다 세상이야기를 우 작가가 담아낸다. 
주제는 '유토피아'다. 그간 공간과 도시의 이미지 형태를 조형화해 오면서 '공작도시'가 트레드마크였는데, '유토피아'가 또 다른 세상의 이상향을 만들어내고 있다.
'유토피아'를 주제로 삼은 것은 작가가 꿈꾸는 세상이다. 세상을 떠올릴 때마다 늘 함께 붙어다니는 일종의 ‘꿈’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바라보고 산야의 풍광을 바라볼때마다 작가를 추억속으로 이끄는 것은 도시의 풍경이다. 사람들 가운데 섞여 있으면서도 고독한 공간에 널려있는 건축물과 사람이다. 지친 도시생활에서도 꿈을 일깨우는 이정표이자 재생의 원천. 그런 이상향을 떠올리게 하는 '유토피아'야말로 우 작가에겐 꽤나 의미있는 대상물이다.
작업은 폐스트로폼을 이용해공간과 공간으로 형성된 무수한 도시를 하나의 덩어리를 형성해 지구를 만들고 또다른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런 작업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또는 의도적으로 덩어리에 세상이 하나, 둘 형성된다. 그렇게 생겨난 세상은 수없이 반복되는 우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공간 속에서 시간성을 느끼게 하는 효과도 함께 가진다. 마치 오랜시간 잊고 있던 도시에서 마침내 땅 위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작업이다. 
한편 조각물의 표면에 난 구멍은 월드컵 구장이 되고 축구장이 되며, 또다른 형태의 도시를 만들어낸다. 최근까지 우 작가가 도시의 이미지 형태를 원과 지각과 네모와 세모를 결합한 구조로 작업, 결국 도시의 비어있는 조각으로 대상의 존재감을 극대화시켜왔다. 작업 방식과 주제는 바뀌었지만 대상물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이전과 비슷하다. 
우 작가는 “도시의 구멍은 인간의 고독이기도 하다" 며 "비우고 채우는 방식의 인간 삶의 또다른 방식으로 도시에 접근한 것”이라며 “그 빈 공간에는 세상의 이야기가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우 작가는 계명대학교 미술대학과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99년 제18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우수상, 2000년 제19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제22회 중앙미술대전 특선을 받았으며, 개인전 5회 단체전, 초대기획전이 100 여회 이상이다. 다수의 환경조형물을 제작하였다.


건축과 조각은 신세계의 행복한 조형이다 
몇 년 전에 지어진 비엔나 건축가 아돌프 이보게와 조세프 호프만에 의해 모델에 대한 juxtaposed 때 Kazimir Malevich의 조성 'Architektons'은 (ca. 1920), 흰색 사각형 블록, 완전히 새로운 역사적인 의미를 받아, Architektons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적 의미다. 
1926 년 우주선에서 맨해튼의 스카이 라인을보고시 콘스탄틴 Brancusi를 외쳤다. 
도시에서 이상향을 찾는 유토피아는 신세계다. 우 작가의 예술세계는 조각적 조형에 대한 쉼 없는 탐구이자 동시에 '멋진 신세계'의 구축이며 동경이다. 변화무쌍하나 일관된 조형탐구가 조각의 근원이다.
신세계는 조각이 닿고자 하는 이상향이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현실에서 벗어나 형이상학이다. 현실에 존재하나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꿈일 수도 있다. 
우리는 꿈을 나아가고 끝없이 몽상한다. 조각은 평면에 대응하는 조형의 3차원적 공간과 달리 3차원을 형성하는 그 안쪽 공간에 대한 상상이다. 그래서 그는 덩어리(mass)가 아닌 덩어리 내부의 '빈 공간'을 사유했고, 더 나아가 그 빈 공간을 관통하는 '구멍(hall)'을 실험했다. 우 작가는 우주공간에서 조각과 인간의 삶에 필요한 공간을 찾고 건축의 예술성을 덧되었다. 
공간과 인간의 삶에 있어 조형적 사유는 인류가 수 천 년을 지탱하고 쌓아 온 '도시와 공간'이다. 고대도시에서 중세도시 그리고 근대도시에서 현대도시로의 진화는 건축적 공간을 구조화하는 인간의 공간상상을 가장 화려하게 노정한다. 유목과 정주, 침략과 방어, 소통과 불통, 사원과 마을, 고립과 공동체의 반목 내지는 충돌이 끊이지 않고 피어올랐던 탈주와 통섭의 공간이다.
우 작가가 지속해 온 예술세계는 그래서 정적이지 않고 상호 융합적이며, 박동하며 솟구치는 혼합공간이다. 조각적 공간들은 문득 또다른 우주의 출현 공간이다. 지금은 사라진 역사의 공간일수 있고, 현대의 첨단도시이기도 하다. 어디에서 나왔던 그 세계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순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맞붙고, 미래와 먼 과거가 회통하는 방식으로 공간이 창출된다. 그런 이종교합의 공간들에서 인간이 상실했고 파괴한 '유토피아'의 실체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 유토피아는 우 작가의 조각이 만들어 내려는 신세계의 행복한 조형이다. 



Brave New World,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다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발표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서기 2545년의 미래를 그야말로 '멋지게' 보여준다. 여자는 극심한 신열과 산통으로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고 지금처럼 사교육에 열 올리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은 인공수정으로 태어나 유리병에서 보육되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은 20세기 인류의 경쟁사회나 위험사회도 겪지 않는다. 지능의 우열로 지위를 결정하니까. 뿐인가, 첨단과학으로 개인은 할당된 역할만 자동수행하면 되고, 고민이나 불안은 신경안정제 한방이면 해소된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폭풍우(Tempest)'5막 1장에서 여주인공 미란다는 "아아,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오, 멋진 신세계여!"라 외쳤다. 구세대의 정치적 투쟁 따위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희망의 외침인데, 헉슬리가 인용한 이 구호는 그러나 희망을 더 큰 희망으로 키우지 않고 비관으로 돌려놓는다. 과학이 지배하는 사회는 사실 휴머니즘이 거세된 디스토피아의 세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멋진 신세계, 그 세계의 슬픔은 옛 문명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국가의 국민이 - 그래서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문명국의 국민들은 옛 문명의 국민을 야만인이라 불렀다 - 이러한 문명국에서 살 수 없어 자살하고 마는 스토리의 결말에 있다. 우무길의 '멋진 신세계'는 무엇일까? 그동안 그가 보여준 작품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의 한국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1970년~80년대의 새마을 운동과 90년대 이후의 신도시 개발을 떠올린다. 20세기 한국사회를 추동했던 도시화의 윤리에는 옛 것이란 부정되거나 폐기되어야 할 관습 따위로 정의되었다. 그러므로 1백년 아니 5백년의 고택이든 기억이든 그 무엇이든 '새마을'의 근대화를 위해선 부서지고 지워지고 파괴되어야 했다. 그런데 파괴된 자리에 들어선 것은 유토피아적 새마을이 아니라 뿌리 없이 부유할 수밖에 없는 유령도시의 그림자였다. 우무길은 그토록 강력하게, 저돌적으로 이 사회가 꿈꾸는 '유토피아적 새마을'에 대해 속으로 궁구했다. 또한, 한순간에 세워지고 사라지고 몰락하는 유령도시가 아닌 진정으로 꿈꿀 수 있는 희망세계로의 유토피아는 무엇인지도 찾아 헤맸다. 그 사유의 끝에서 그는 희망도 절망도 하나고, 슬픔도 기쁨도 하나인 그 자신의 멋진 신세계를 떠올렸다. 헉슬리보다 앞서가지 않고, 조지 오웰보다 늦게 가지 않는 그의 도시는 '공작도시(工作都市)'였다. 


도시, 세상을 만드는 조물주의 놀이다
우 작가는 집을 소재로 하던 것에서 벗어나 도시를 소재로 변화하고 있다. 집이 개인과 함께 가족사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해준다면, 도시는 개인과 가족의 집합체인 사회의 아이덴티티를 말해준다. 이를테면 한 시대를 관류하는 지식체계며 가치체계인 패러다임이다. 집과 도시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체성의 집이다. 작은 정체성과 큰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고립된 정체성과 관계적 정체성이 일정한 차이를 매개로 서로 물려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집은 그저 집이 아니고, 도시는 그저 도시가 아니다. 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이 생성되는 원천이며, 한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지나는 홀이다. 작가가 집이나 도시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감각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상은 영락없는 집이며 도시지만, 정작 이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은 것은 그 형상이 암시하는 의미,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의미, 곧 아이덴티티와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아이덴티티와 패러다임의 상호작용성이며 상호내포성이다. 이와 함께 근작에서의 소재가 집에서 도시로 옮겨온 만큼 그 정체성과 관련하여 특히 관계적 성질이 강화된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말하자면 소재의 면에서나 의미론적 측면에서 상호간 이질적인 차이를 싸안으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도시생태의 일면이 부각된다. 
가전제품을 구입하면, 이동 중 부주의로 인한 예기치 못한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스티로폼으로 만든 틀이 가전제품과 함께 온다. 우 작가는 이 스티로폼을 덧붙여나가는 방식으로 무한 증식되는 도시, 중첩되고 변주되는 도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중첩되고 포개지면서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거대 도시 이미지를 축조해낸다. 
주지하다시피 스티로폼 틀은 가전제품의 종류에 따라서 그 크기나 형태가 결정되며, 따라서 가전제품만큼이나 다양한 크기나 형태가 가능해진다. 한편으로 스티로폼 틀과 가전제품 그리고 도시의 건축물은 일종의 형태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개는 반듯한 기하학적 형태를 기본형으로 하여 이를 일정한 형식으로 변주해낸 것들이다. 아마도 기능주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기능주의 건축은 동선을 최소화한 것이란 점에서 편의성은 높이 살만 하지만, 그 와중에 도시 풍경을 획일적이고 무미건조한 것으로 바꿔놓은 것도 사실이다. 기능주의에 나타난 획일성은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 자본주의의 욕망과 딜레마가 부각된다. 
도시를 소재로 한 작가의 기획은 어쩌면 이런 기능주의 도시에 나타난 획일화의 경향성을 깨트려 그 사이로 틈을 내고 숨통을 트는 기획, 도시생태를 실천하는 기획일 것이다. 

엄금희 기자 ekh@dailycn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