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양화정, 그의 빛은 사랑이며 하늘의 은총_서성록(안동대 교수 ‧ 미술평론가)

평론

 

양화정, 그의 빛은 사랑이며 하늘의 은총

 

 

 

- 서성록(안동대 교수 ‧ 미술평론가)

 

 

 

성장한다는 것의 비극중 하나는 우리가 사물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성장할수록 어릴 때 가졌던 순수함이 사라져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작열하는 태양의 뜨거움, 달의 은은함, 비의 촉촉함, 하늘의 푸르름, 기묘한 구름의 형상, 바람의 선선함, 셀  수 없는 파도의 부딪힘, 무수한 꽃들의 피어남 등에 익숙해져 자연의 오묘함에 무감각해졌다면 그것만치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예술가는 우리 눈에 익숙해진 것들을 원래대로 돌이켜 놓는 주인공들이다. 우리로 하여금 짧은 시간이나마 순수하고 꿈꾸는 눈을 가진 어린 아이가 되게 만든다. 

양화정은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눈길을 돌린다. 그가 멈추는 대상은 자연의 사태들로, 이미 우리의 눈에 익숙해져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는 눈과 귀를 열어 나무와 꽃을 응시한다. 그들이 무엇인지 캐묻지 않더라도  함께 거기에 있는 자체만으로 기뻐한다. 존재의 신비를 즐거워한다.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평범한 것을 평범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잘한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서 거기서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발견한다. 

그의 그림을 보면 식물 이미지, 곧 꽃, 풀잎, 줄기, 나무가 등장한다. 이런 이미지들은 화면에 ‘붙박이’로 등장한다. 눈에 익은 이미지들을 다루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잘해봐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다. 관건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들을 어떻게 소화해내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는 분홍, 초록, 황토색 등 선명하고 채도 높은 색들을 사용하여 생명의 소망이 깃들어 있는 순수하고 싱그러운 감정을 실어낸다. 이미지에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이 얹혀지면서 화면은 활기를 띄게 된다.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다. 그의 화면에 이미지는 화사하고 영롱하게 등장한다. 

그의 그림에서 모든 도상들은 행복에 겨워하는 것 같다. 밝고 화사한 분위기의 색상과 함박웃음을 짓는 꽃들을 보면 그늘진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유쾌한 환희의 색상, 그리고 고조된 마음이 함께 곁들어져 축제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근래에 작가는 빛을 형용하기 위해 동그란 투명, 반투명 플라스틱, 혹은 반짝이는 크리스털 플라스틱을 부착하는 등 작품에 약간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부착된 동그란 플라스틱들은 광선을 반사시키며 비가시적 존재를 은연중 암시한다. 빛의 등장으로 그는 한층 궁극적 실재를 향한 갈망을 나타낸다. 

빛이 없다면 자연물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빛은 식물의 성장을 도와주고 생명을 주며 열매를 맺게 한다. 식물이 푸르고 숨 쉬는 것은 모두 빛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마운 빛을 작가는 빼놓을 리 없다. 

그림에서 그가 말하는 것도 빛의 존재와 관련이 있다. 식물에게 성장을 가져다주듯 신령한 광채는 우리 영혼을 만족시키고 풍족케 한다. 갇힌 자를 자유케 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며 상처난 자를 치유하는 초월적인 빛이다. 그러한 빛은 사랑이며 하늘의 은총이다. 어둠을 물리치며 움츠림과 매여 있는 데서 풀려나오게 하기 때문이다. 그 빛으로 가까이 갈수록 행복하며 멀어질수록 불행해진다. 식물을 키우듯이 인간 영혼에 생명의 양식이 된다. 

처음 품은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개는 출발할 때의 순수성을 잘 지키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해진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면 처음의 순수성을 품었는지조차 까마득히 잃어버리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망각과 변질에도 끄떡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자연의 질서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순수함이 무엇인지 가리켜준다. 각별한 주의를 갖는 사람에게는 태초의 순수성까지 알려준다. 자연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사실 우리가 갖지 않은 ‘지속성’과 ‘의연함’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람을 품어주고 자신의 순수성을 지켜오는 자연의 본성에서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보존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품는 법을 배운다. 사람이 의식하든 의식치 못하든 자연은 늘 우리 곁에서 미소를 보낸다. 꽃은 어떤가? 그것은 우리에게 향기를 주고 아름다움을 주며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이렇듯 하나님의 너그러움과 평안을 꽃에서 찾는다면 지나친 발상일까? 그가 꽃을 선택한 것은 단순히 예뻐서가 아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작용했겠지만 더 고상한 이유가 있다. 꽃을 그리는 것은 바로 축복과 위로, 사랑의 감정을 전달하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기 때문이다. 아픈 자에게 꽃을 주듯 꽃을 받는 사람은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마찬가지로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은 싱그럽게 채색된 꽃그림을 통하여 순화된 감정을 전달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그림을 잘 그렸나 못 그렸나를 작품의 평가기준으로 삼는 것 같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 존재 자체를 순수한 눈망울과 벅찬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하는 문제이다. 벅찬 가슴으로 그려지지 않은 작품은 겉이 아무리 근사하더라도 공허하며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다. 

양화정의 그림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매일 한 번씩이라도 세상을 꿈꾸는 눈으로 바라보는 일, 그것은 참으로 쉽고도 어렵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