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금영보 작가의 작품세계

금영보의 작품들은 번잡하고 목소리 큰 동시대 미술생태에서 가장 근원적인 조형성으로 자신만의 가치체계를 일궈내 보인다. 그의 화면에 주로 등장하는 호랑이나 말, 닭을 비롯해 사람들(어린왕자, 소녀, 아이들 등)은 해학성을 통해 현실로부터 어느 순간 이탈된 존재의 그림자이면서 이야기를 이끄는 서술자로 나타난다. 이들은 때로 주체이지만 또 다른 방향에선 시간과 조우하는 관찰자가 되기도 한다. 

 

너무나 친숙하여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 같은 일상성을 담아내면서도 그의 작품들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시각을 포괄한 ‘정서의 공유’부터 이뤄지는 양태는 그의 그림에 몰입하게 만드는 흥미로움이다. 그건 구상적인 표현으로 정겨움과 친밀함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서정적이면서도 밝은 세계를 표상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 탓이 크다.

 

실제로도 서툴고, 어수룩하게 보이면서 전혀 꾸밈이 없는 금영보의 작품은 살가움과 친근함이 우선한다. 질박한 색채, 익살스럽고 소박한 이미지, 장난기 가득한 호랑이와 우스꽝스럽게 생긴 말, 무심한 듯 놓인 까치며 오리의 형상도 형상이거니와 그 형상들의 취하고 있는 모습에서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물의 묘사에 선행되는 서술형 구조는 우리를 작품 자체와 마주하게 한다.

 

금영보의 작품들과 민화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점은 외형에 있다기보다는 심리적 결부가 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우리전통문화의 한 유산으로서 단순하고 솔직하며 소박하게 표현해준 하나의 뚜렷한 장르인 민화와 작가의 본능적인 회화 의지와 욕구의 표출, 그리고 그 사이를 관통하는 생활 습속에 얽힌 순수하고 대중적인 지점에서 보다 깊은 근친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사물 자체의 리얼리티에 대한 관심 혹은 표피적인 ‘닮음’과는 거리가 있다. 아니, 차라리 비지성적 부분 가운데 습관에 의해 지성적 부분으로 전향되는 감정적 능력인 에토스(ethos)와 가깝다. 작가는 이를 ‘풍토성’이라 칭한다.

 

풍토성, 그것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유지하는 풍토의 독특한 특색을 말한다. 풍토는 고유의 자연환경과 습관적-습속적 정서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딱히 규정하긴 어렵지만 공동체의 암묵적 테제를 바탕으로 한 자기이해 방식 아래 구현되는 개념이다. 이는 예술에서 자연적인 것들과 습관적-습속적 이미지로 드러나며 전적으로 시간성과 공간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발현된다. 그림들은 이리보고 저리 봐도 우리네 삶의 한 장면과 시대를 반추하는 ‘공감’이 개입이라는 공통분모가 녹아 있다.

 

금영보의 많은 작품들에서 알 수 없는 공감이 발생하는 이유는 사실상 ‘재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리얼리즘에 귀속되는 것도 한 몫 하지만 신화와 같은 이야기들, 시간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이미지들, 한국민의 익숙한 조형적 근간을 읽게 하는 한국인의 미의식과 정서에 침투하는 탓도 작지 않다. 특히 우리 정신과 마음속에 면면히 흘러온 미적 기질이 그의 낱낱의 작품들과 교배된다는 것이야말로 공감과 공유의 이유이다.

 

홍경환


그림으로서의 그림, 우리 그림의 창의성으로 꽃피우다! 금영보 화가_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그림으로서의 그림, 우리 그림의 창의성으로 꽃피우다! 금영보 화가

- 2022년 5월호(151호)

by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너는 그림을 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아무데나 낙서하듯이 그림을 그려 야단도 많이 맞았죠. 중학교 때 대전에서 아버지 고향인 옥천으로 전학을 갔는데, 방과 후 미술선생님과 항상 그림을 그렸어요. 선생님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화지, 물감 등을 저에게 매번 챙겨 주셨죠. 그러다 고교 입학을 앞두고 누나가 살고 있는 서울 근교 안양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즐겨 그려서인지, 미술시간에 선생님은 항상 저에게 “너는 그림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던 어느 날 미술반을 활성화 시키고자 선배가 찾아왔고, 저는 미술반 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미술반은 풍경과 정물위주의 그림을 주로 그렸던 중학교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죠. 비율을 나누며 똑같이 그리는 석고데생을 처음 접하니 잘 하지 못했어요. 항상 잘 그린다는 말을 들어왔던 저는 자존심이 상하고 오기도 생기더군요. 바로 따라 잡으리라는 마음으로 노력한 끝에 인정을 받았고, ‘나도 미대를 가도 되나?’ 하며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죠. 

 

5년 넘게 그려온 그림을 다 소각하다!

그 당시 우리나라 미술계는 서구 쪽에서 이미 10~20년 지나간 그림들이 유행했는데,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면 당연히 추상미술을 시켰어요. 구상미술을 한다고 하면 교수님들께 눈치가 보일정도였고, 별종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였죠. 그렇다보니 대학 선후배 대부분 그림이 다 똑같았어요. 추상화 중에서도 비정형의 의미를 가진 앵포르멜 계열의 굉장히 강렬한 추상을 많이 했었는데, 저도 그냥 휩쓸려 ‘어~’하고 따라 간 것이죠. 이런 가운데 그림 그리기가 너무 싫더라고요. 특히 추상이야말로 진짜 내적인 표현 활동인데, 똑같이 그리는 것이 강요된다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이 부분은 우리나라가 유독 심했던 것 같아요. 사실 작가는 본능적으로 자기와 자기 그림을 일체화 시키고, 여러 갈등으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때 자신에 대해 좌절을 쉽게 겪기도 하거든요. 졸업 후, 약 10년 정도는 전시회를 못했어요. 개인전을 하려면 많은 작품으로 나를 드러내야 하는데 저 스스로 흔들리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시기에 제가 그린 그림이 다 쓰레기처럼 느껴져서, 대학시절부터 졸업 후까지, 5년 넘게 그린 작품을 다 소각했죠. 그러면서 서구의 인식으로 박힌 원근, 입체, 빛, 비율 등이 몸에 배여 이것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쳤어요. 사물을 보면 자동 그 잣대로 보고 바로 손으로 갔으니까요. 눈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그것이 표현 되어야 하는데, 그림을 기계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화가로서 새로운 나의 정체성을 찾아서

미술을 공부하며 계속적으로 서구적인 것을 강압 받았다면, 이제는 본래의 내가 있어야 하고 화가로서 저의 정체성을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그래서 ‘우리 그림’이라고 할 만한 것들, 한국화나 동양화로 전통회화, 수묵화, 불교미술, 민화 등을 찾아 봤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우리 그림이라고 볼 수도 없더군요. 이 중에서도 한국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정하다보니 이름 없이 그린 ‘민화’에 집중하게 되었어요. 그때가 1997년 즈음으로 25년 전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찾다보니 도리어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미술, 공예품, 민화를 연구한 게 많았고, 우리나라에서는 수집도 되지 않고 드물었어요. 하지만 놀라운 것은 제가 본 민화가 대단히 현대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어찌 보면 촌스럽다고 할 만한 유치함과 그림을 구성하는 형태, 방식이 지금 봐도 좋은 느낌이었어요. ‘아! 이것이다! 이것을 공부하면서 내 정체성을 찾고, 원했던 것들을 공부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민화를 복원하는 것은 연구자의 몫으로 저에게는 의미가 없었죠. 저는 창작자이니 민화가 만들어내는 그림의 구성 원리나 방식을 빌어 활용하고, 개인이 아닌 우리 공동체 고유의 미의식, 즉 같은 산을 보고, 같은 물과 음식을 먹는 공동체라는 핏줄로 무엇을 공통적으로 추구하는지 알아야겠다고 한 것이죠. 이런 미의식이 제 안에도 있을 것이고 이것을 진하게 표현해보자 했습니다. 추상으로 하다 구상으로 전환하는데 있어 내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어떤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죠.

 

민화를 현대화한 작가가 아니다!

저에 대한 평가로 종종 ‘민화를 현대화한 작가다’라는 말을 하는데, 전혀 아닙니다. 민화는 엄연히 하나의 양식이고, 민화 자체가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기에 ‘민화를 베이스로 하는 작가’라는 말까지는 괜찮습니다. 저는 저의 핏줄에 있는 민화적인 요소를 원근 없이, 배열된 느낌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의식에 맞는 작업이 무엇일까 찾아가던 중에 민화의 표현 방식이 답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민화에는 원근이나 빛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어요. 저는 그림으로서 뭔가 튀어나오게 입체감을 주어 깊이 끌어들이기 위한 원근을 주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림은 그림으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면을 원했거든요. 민화는 딱 앞뒤의 구분을 주는 원근의 공간이 없었죠. 빛이 있어야 입체가 느껴지는데, 빛이 느껴지지 않으니 입체가 없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낙서 같은 그림의 느낌이 바로 민화였던 것이죠. 현대적으로 보자면 민화의 구성이 너무 좋았어요. 예를 들어 집과 물고기가 있다면 물고기가 더 크고 집이 작을 수도 있는 그게 아주 좋았던 거죠. 이것은 현대의 초현실주의적인 그림보다도 저한테는 더 충격적이었거든요. 뭔가를 배치하며 맞추어놓는 것이 아닌, 늘어놓은 방식이 나만의 그림 양식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고, 현대에도 부합할 수 있겠다 생각한 것이죠. 즉, 저는 민화를 현대화하는 것이 아닌, 민화의 창의성을 원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민화를 밑바탕에 두고 저를 규정짓고 표현하려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닌, 풍토적인 작가로 민화도 내 일부이고 내 핏줄, 내 몸속에 있기에 민화의 감성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색을 직접 만들다

지금은 유연해졌지만, 초기에 서양의 것도 아니고 더 나아가 중국, 일본의 것도 아닌 완벽하고 순수한 우리 그림을 생각하다보니 물감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어요. 붉은색 하나만 하더라도 한 가지 색이 아닌 우리만의 느낌을 갖는 색이 있는데, 저는 벽돌을 절구에 빻아 체로 쳐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모시 느낌의 미색을 낼 때 음식점 앞에 있는 연탄재를 사용했어요. 연탄재로 색을 내면 미묘한 음양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 연탄재의 부드러운 바깥 부분을 곱게 빻아 물에 담가놓으면, 부드러운 재가 위에 뜨는데 이것을 체로 받쳐 사용한 것이죠. 깊은 검정색을 만들려면 시골 폐가의 아궁이나 굴뚝에 있는 그을음이 최고죠. 유화나 아크릴 물감의 검정이 막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이라면, 이것은 먹이 스며들어 베인 느낌입니다. 까만데 아주 영롱하고 그 안에 초록까지도 담겨있지요. 그림의 재료를 직접 만드는 것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려면 약 2주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힘든 과정이기도 하죠.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지만, 그런 경험들이 민화에 더 깊이 집중하는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림은 그림이었으면 좋겠다!

서양미술의 출발이 똑같이 그려내는 게 목표일정도로 입체감, 원근, 빛을 많이 연구해 사진처럼 재현해 내는 것을 많이 해왔습니다. 물론 이러한 연구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림은 사진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림이기에 어린아이처럼 그릴 수 있고 형태나 원근이 무시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장르의 하나인 극사실주의(hyperrealism)에서는 거의 과일이 튀어나올 정도로 그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그런 그림에 별로 감흥이 없어요. 왜냐하면 사과를 그린다고 할 때 보는 사람에 따라 보고 느끼는 것이 굉장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과자체가 아닌, 해석하는 즉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감정이나 표현 양식이 중요한 것이죠. 사과를 얼마나 똑같이 그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는 이의 감정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꾸준한 작품 활동이 영감의 원천

예전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다면, 지금은 너무 그릴게 많아요. 작업을 하다보면 창의적인 그림이나 자기언어, 양식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거든요. 이전에는 작품을 쉬고 있으면 뭔가 막힌 것 같았는데, 지금은 작업을 늘 생활처럼 하니 전처럼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제 안에 경험치가 많이 쌓였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다음에 그릴 그림이 현재의 그림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예들 들어 10호 구성의 그림을 작업하는데 100호, 200호 크기의 그림을 어떻게 그려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생각나는 것이죠. 

 

나를 자극하는 작가와 작품들

저의 부족한 부분을 건드려주는 작가와 작품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예전 추상을 할 때는 스페인 표현주의 화가이자 조각가, 미술 이론가였던 ‘안토니 타피에스’ 작품을 많이 봤습니다. 영국화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도 저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죠. 베이컨은 원초적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화풍으로, 사람 몸을 살코기처럼 짓뭉개서 그려놓는 화가입니다. 같은 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우리 주변의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들을 깔끔한 표현으로 그려내는데, 그림을 참 잘 그리는 화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적 추상화를 확립한 ‘장욱진’화가가 있습니다. 사물을 보는 방식이 저와 비슷한 부분이 있어 이분의 그림을 많이 참고했죠. 하지만 대학 교수님들에게는 한 분도 영향을 받지 못했어요. 너무 획일적이었으니까요.

 

 

전업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은 작품을 팔고 구입하는 분위기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2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 전환점이 한국국제아트페어(KIAF)가 만들어지면서였어요. 저도 아트페어가 기회가 되어 그림이 많이 팔렸고,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전업작가로 살아남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중도에 포기가 많죠. 많은 미대생들이 배출되지만 졸업해서 쭉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5% 정도이니까요. 100명이면 5명 정도만이 살아남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는 셈이죠. 그러니 그림을 사는 분위기가 아니면 투잡, 쓰리잡을 해야 견딜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저도 사명감으로 했던 것 같아요. 그림을 한다고 하면 아주 힘들게 살 것을 각오해야 했고, 견딜 만큼 견디고 너무 힘들면 아이들 레슨, 학교강의도 해야 했으니까요. 요즘은 무엇보다 작가가 스스로 마케팅도 할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젊은 작가들 보면 이 부분이 몸에 배었더라고요. 굉장히 좋은 거죠. 현실적인 부분이 해결되어 전업작가로 그림에 몰두한다면 경쟁력도 갖추고 외국으로도 나갈 수 있는 기회도 생기니까요. 

 

금영보 화가

한옥을 설계하고, 어릴 적 그림을 직접 그려 그림책으로 묶어주신 아버지의 재능과 솜씨를 물려받은 금영보 화가. 화가로서 가슴이 뛰고, 창의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지루하지 않아, 30여 년 동안 그림을 쉬어 본적 없다고 말하지만, 때론 화가로서의 삶이 불안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더군요. 모든 그림을 불태우고 찾아간 자신만의 그림, 금영보 화가 속에 있는 민화의 DNA로 본인의 감성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작품들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를 통해서도 한류를 타고 잘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