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폴 고갱의 작품화풍
폴 고갱의 화풍과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으로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고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자신의 생각과 상상을 강렬한 색채로 표현했으며,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했다.
○ 생의 마지막 10여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생활하며 작업하였고 이 시기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고갱의 작품감상팁
고갱의 흔적이 흥미로운 이유 : 고갱이 사망한 지 1년 뒤인 1904년, 파리에 온 어느 젊은 영국인 작가는 최근에 타히티에서 사망한 프랑스인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을 느낀다. 그의 일생이 흥미로운 소재라고 생각한 영국인은 13년 뒤인 1917년에 타히티를 직접 방문해 고갱의 흔적을 찾아 다닌다. 그 와중에 그는 고갱이 제1차 타히티 체류 시 머물렀던 오두막의 문짝에 그려놓은 그림을 찾아내 헐값에 구입해 영국으로 가져온다. 이 영국인 작가 서머싯 몸은 소설 <달과 6펜스>(1921) 발표와 함께 큰 성공을 거두었고, 문명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갔다는 고갱의 전설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타히티 방문에서 몸이 거둔 성과는 소설뿐만이 아니었다. 단돈 400프랑을 주고 산 고갱의 문짝 그림이 반세기 뒤인 1962년에는 1만 7천 달러로 가격이 껑충 치솟았기 때문이다. 말년의 고갱은 돈이 없어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먹을 것과 맞바꾸곤 했는데, 마을의 중국인 식품점 주인은 그렇게 해서 얻은 고갱의 데생을 주로 ‘포장지’로 사용했다. 타히티의 백인들 중에는 고갱이 그려준 초상화를 못마땅해 해서 다락에 처박아놓았다가 훗날 화상에게 처분하거나, 또는 고갱의 그림 선물을 아예 거절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로선 고갱의 사후에 그 그림의 가치가 얼마나 막대하게 치솟을지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건 아마 고갱 자신도 몰랐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