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심오한 단순, 자연에의 귀의 _윤진섭(미술평론가)
심오한 단순, 자연에의 귀의 
윤진섭(미술평론가)

Ⅰ.
 예술가들은 일상생활에서 조차 몸의 전 감각을 열어놓고 지내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만큼 감성이 섬세하며 여린지라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거나 마음을 다치기 일쑤다. 정에 약해, 비에 젖어 떨고 있는 새를 보면 애처로운 감정을 느낀다. “어찌 그런 일이 유독 예술가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을 한다. 
 얼마 전, 이 글을 쓰기 위해 안준희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녀의 근작들이 예전의 작품에 비해 한결 부드러워진 것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왜 그럴까? 그 이유가 궁금해서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나를 보며 그녀는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부쩍 작업의 기세(氣勢)가 약해졌다고. 
 환갑을 넘긴 나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그림의 세(勢)가 약해졌다고 해서 마냥 그녀를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작가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작풍(作風)이 변할 수 있는 충분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이며 무엇보다 삶의 실존적주체가 아닌가? 작풍이 변했으면 변한대로, 또 다시 새롭게 전개될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항해를 계속해가야만 할 고독한 존재가 아닌가? 
 작업의 기세가 좀 약해졌다고 해서 그것이 강한 느낌을 자아내던 과거의 화풍에 비해 작품이 더 나빠졌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연륜이 깊어질수록 공자가 말한 귀가 순해지는 상태, 즉 ‘이순(耳順)’의 경지에 접어들었음을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준희의 연륜이 어느덧 환갑을 넘어섰으니 귀에 들리는 갖가지 소리를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더구나 그녀의 경우 서체추상의 외길을 삼십년 이상이나 줄기차게 걸어왔으니 이 분야만큼은 나름 정립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도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 발굴되지 않았을 뿐이며, 작업에 대한 평단의 의미부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Ⅱ.
 서체추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안준희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획(筆劃)이 지닌 기세와 붓의 운용 방식이다. 즉 붓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작업의 성패가 갈린다. 그것은 흡사 검객이 칼을 쓰는 것과 같으니, 거기에 따른 수련이 매우 중요하며 타고난 감각이 뒤따라야 한다. 다행히 안준희의 감각은 매우 예민해 보이며, 색의 배치에서 드러나는 색감 또한 탁월한 편이다. 단지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관건이라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 서체추상의 화풍을 견지하는 작가층이 두터운 만큼 어떻게 이들과 차별화를 이루어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나가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실로 안준희의 고민은 이 지점에 두어지고 있으니 작가 자신이 정신적 고통을 토로하고 있듯이, 뛰어넘어야 할 산들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과거의 작품에 비해 한결 부드러워 보이는 근작들은 어떤 모색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일러 ‘자연과의 동화(同化)’ 내지는 ‘자연에의 귀의’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지금이야 말로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자연의 요체(要諦)를 간명한 구조와 ‘무작위(無作爲)의 의지’로 풀어가는 중이라고 말하련다. 그러니 일단 산 하나는 넘어선 셈이다. 새로운 경지를 열기 위해서는 과거는 깨끗이 잊어야 하는 법. 안준희는 이제야 말로 ‘허(虛)’를 얻기 위해 ‘실(實)’을 버려야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실제로 그러한 길을 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걸 알기위해서는 10년 전의 개인전 팜플릿(‘빈 하늘에 던지는 사유’, 한전플라지 갤러리, 2008)에 실린 도판들과 근작들의 내용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전시가 중요한 이유는 이 때 처음으로 돌가루(石粉)를 주재료로 사용한 작품들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돌가루를 미디엄에 개서 캔버스에 바른 이유는 마치 흙벽과도 같은 푸근한 질감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단점이라면 개칠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실 안준희가 스스로 친 배수진과도 같은 제작방식이었다. 동양의 서예가 극도로 피하는 개칠을 허용치 않는 돌가루의 속성은 일획((一劃)에 안성맞춤이며, 이 일획론은 동양 고유의 화론인 것이다. 따라서 안준희는 이로써 서양과는 차별되는 입지를 다지는데 일단 이론적으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엇인가? 다소 나이브하게 말하자면 일획론에 근거를 둔 한국 혹은 동양의 다른 작가들의 작풍(作風)과 차별화되면 되는 것이다. 이를 좀 더 부연하자면, 누구의 작품과 비슷하거나 닮은 듯한 분위기를 풍기면 작가로선 그만큼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황토색 담벼락을 연상시키는 캔버스 바탕에 검정색 유성물감을 듬뿍 묻힌 붓을 즉발적으로 내갈긴 안준희의 2008년 무렵의 작품들은 기세가 강했다. 붓을 캔버스 표면에 힘줘 찍듯이 그을 때, 검정색 물감이 사방에 튀고 그 흔적은 고스란히 작품의 일부가 됐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는 산, 사람, 내(川), 길, 나무, 새를 연상시키는 형해화(形骸化)된 자연과 사물의 요체를 춤추듯이 직관적으로 그려나갔다. 상형문자와도 같은 그녀의 필획들은 캔버스에 각인된 행위의 흔적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안준희의 작업은 일종의 퍼포먼스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런 작업이 작업실에서 그녀 혼자에 의해 고독하게 이루어지며 아쉽게도 관객은 그 결과물인 작품만을 화랑에서 본다는 점일 게다. 이 시기에 이르면 1995년 도올갤러리에서 연 개인전의 출품작들의 근간이었던 적, 청, 황, 흑, 백 등 오방색이 주조를 이룬 가운데 검정색 필선으로 과감하게 화면분할을 하던 작풍(作風)은 완전히 사라지기에 이른다. 
 
Ⅲ. 
 이쯤에서 다시 근작으로 돌아가 보자.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두터운 황토벽과도 같은 캔버스 표면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파운데이션을 두껍게 발라 자연색의 피부를 은폐시켰던 위장막을 거둔 여인의 얼굴처럼 해맑아 보인다. 또 하나의 변화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바탕으로서의 대지(臺紙)가 사라지고 배경과 그 위에 베풀어진 필획들이 동등한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자연과의 동화(同化)’니 ‘자연으로의 귀의’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이처럼 극소화된 필획의 자취에 기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비해 더욱 넓어진 여백의 기능에 힘입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비해 더욱 엷어진 회색, 갈색, 청색, 살색 등 중성색의 등장은 얼핏 몰개성적(沒個性的)으로 보이나 바로 이 점이야말로 자연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는 작가의 의지의 발로인 것이다. 
 이제 비로소 안준희는 시(詩)를 동경하는 상태에 접어든 것은 아닌지? 자연의 섬세한 떨림에 귀를 기울이고,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예술의욕을 드러낸 것은 아닌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준희의 근작들 중 몇몇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이나 무심코 지나치곤 하던 담벼락의 낙서를 연상시킨다. 그런가 하면 작은 물방개들이 노는 연못가에 몇 개쯤 삐죽 모습을 드러낸 수초들이나 혹은 한여름의 고즈녘한 연못 풍경? 
 그녀의 작품 중 하나는 추사체의 무(無)자 보다 더 단순한 무엇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자. 그 무엇이 됐든 자연을 향해 한 발 내디뎠으니 그 연륜에 값하는 새로운 풍경이 아니런가? 이제 산 하나를 넘었으니 다음에 나타날 또 다른 풍경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영과 필획의 교감-서성록
1995년 개인전 평론
영과 필획의 교감
-안준희의 작품전에-
                                               
서성록 (미술평론가)

안준희가 93년의 작품전에 이어 통산 다섯 번째 작품전을 갖는다. 첫 전시를 83년 아랍미술관에서 가진 이래 작가는 일관되게 추상회화에만 전념, 자신의 작업을 심화시켜 오고 있는 중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변화가 없을 리 없다.  80년대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서정추상 흐름에서 서체회화로의 이행을 지적할 수 있을 정도인데 여전히 붓놀림을 강조한다든지 작위적 행위를 가급적 피하고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이라면, 호쾌한 필선과 정돈된 색 그리고 대담한 화면 구성을 직감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와 함께 불타는 열정과 잔잔한 사색을 번갈아 교차시키면서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안준희가 자신의 작업에 주된 어휘로 삼고 있는 것은 선과 면이다. 어떤 면에서는 선과 면이 그의 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두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에는 순색 또는 중간색도 빠짐없이 들어간다. 색중의 색, 즉 모색(母色)이라고 불리는 현색도 그가 즐겨 사용하는 색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러한 색은 어떤 연상을 일으키거나 감성을 환기하기보다는 무리를 지어 색 면을 이루거나 설사 색 면을 이루지 않더라도 독자적으로 서식하면서 화면을 한층 기품 있게 꾸며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은 주춧돌 역할을 해주고 있는 면에 집중되게 마련이다.
 안준희는 선과 색 면을 적절하게 요리하고 안배할 줄 아는 작가라고 생각된다. 두 요소는 화면에서 끊을 래야 끊을 수 없는 없는 밀접한 사이로 자리 잡을 뿐만 아니라 속도와 세기, 그리고 속성 면에서 상호보완을 이루어 화면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형성물로 이상화시켜간다.
 그가 구사하는 선은 주도면밀한 기하학처럼 계산되어 나온 것은 아니다.  임의적 자태를 취하고 있거니와 그 발생에 있어서도 자유로운 운필에 의한 것이다.  어쩌면 송가는 대로 또는 붓 가는 대로 화면에 내맡긴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태어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일체의 의식 활동이 배제된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거기에 깃들어 있는 듯하다.  붓을 먹에 푹 담아 모필 전체에 흔건히 배인 먹물을 캔버스에 마구 뿌려놓은 듯한 인상이다. 힘찬 것이 있는가 하면 약한 것이 있고 빠른 것이 있는가 하면 느린 것이 있다. 또 굵은 것이 있는가 하면 얇은 것,  곧은 것과 휘어진 것도 볼 수 있는데 형호(荊浩)가 말한 근육골기의 4세( 四勢)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용필을 통하여 충천한 생명감을 표출하고 작가의 들숨과 날숨을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그에게 선은 그 자체가 자율적 개체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어느 누구에게 봉사하지 않는다는 애기다.  ‘단음조’에 비유할 수 있는 필획은 일개 물리적 행위에 불과하나, 그 물리적 행위가 아무런 동기 없이 꾀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의 감정, 정서, 기분에 따라 붓놀림이 달라지 게 되며 결국 그 기분상태가 선의 표정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있어 또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곧 색 면이다.  필획이 지나간 자리의 대부분, 그리고 아직 정복되지 않은 공간으로 남아 있는 색 면은 난필(亂筆)의 선과 견주어 대조를 이룬다.  허(虛)의 공간, 즉 텅 ‘비워진 자리’로서 현존한다.  차라리 영원히 비워진 채로 남아 있기를 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말을 바꾸자면, 필선을 아우르고 보듬어 주는 동시에 그 색 면을 보는 사람을 아득한 명상의 세계, 즉 무의 세계로 인도한다.  흡사 힘 든 일과로 찌든 육체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기라도 할 것처럼, 아늑함과 포근함마저 느끼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 비워진 자리는 ‘색 면’이 아니라 ‘여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언젠가 안준희는 자신의 작품을 ‘영과 필획의 진정한 교감‘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몇 안되는 조형어휘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지만, 작가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심원한 것, 즉 자아의 심적 상태와 부단한 시도의 일환으로 얽히며, 그 속에서 우리는 작가의 심적 상태가 화면이라는 물질공간과 어울려 동질화 또는 일체화되는 과정을 바라보게 된다.


生의 원천적 흐름 위에 선 繪畫-장석원
1984년 11월 1일(목)~7일(수) 현산미술관
2회 안준희 작품전 

生의 원천적 흐름 위에 선 繪畫
                             
장 석 원( 전남대교수, 미술평론가)

안준희의 그림은 自然人의 視角을 뒤흔드는 작업이다. 형식을 탈피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형식에 이르는 자유로움이 눈앞에 보인다.  시각적 제한을 받는 조형성을 탈피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生의 원천적 흐름에 가까워지려는 그의 노력은 繪畫 자체의 기원에 대한 發生論的인 해석을 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의 그림은 무엇을 그리고 있다기 보다는 그의 내부에 잠재된 충동을 빌미로 생의 원초적 비밀을 토로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生의 내부에 잠재된 기민하고 뜨거운 용액이 방류되어 흐를 듯한 활력을 보여준다.
 나로서는 그가 자주 얘기하는 禪的 경험이라든지, 카오스의(chaos)에의 심취, 세련된 본능이라는 말들을 지나가는 얘기로 흘려버릴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은 순간순간의 필획이주는 표현력과 뉴앙스에 全身的인 주의를 쏟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일회적인 표현력과 순간성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고 만다.
 그의 그림이 지니고 있는 개방적 성격은 열려진 마음의 열려가는 자취를 남긴다.  나로서는 그의 열려지는 형식이 그 정신적 체험이 깊어질수록 더욱 단순하고 보편적인 결정체를 낳으리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일단 그의 작품이 제시하는 유형은 날짐승이 창공을 날면서 활짝 제치고 있는 날개 짓처럼 활달하고 자유로운 형태로 와 닿는다.
 일단 어법적으로 맞아 들어오는 것이, 필획을 사용하여 필획으로 그치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필획이 생의 체험 형식으로 융합하는 心地의 아이텐티티(identity)를 지니고 있다.

禪的인 경험이라는 것도 고도로 발달된 직관적 느낌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 禪的인 
교감을 감이 바라는 나의 언어들은 촉발적인 순발력을 요구함으로서 붓과 정신이 혼연일체 되어 내재된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화한다.  한 획 한 획의 무게와 색채, 조형성 등 은 무의식 속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상의 작가의 말은 순간순간의 촉발적인 필획의 힘을 주시하며 그 의미를 요해코저 하는 태도를 담고 이다.  다시 말해서 생자체가 가진 비논리적 現前性 앞에 유기적이고 찰라적인 모습의 원천적 힘을  털어 놓으려는 것이다.  그 순간에 직관이 서려 있다. 직관을 직감하는 순간성과 영원이 교차하는 계기가 있다.
 흔히들 안준희의 그림을 두고 추상표현주의 스타일이 아니냐고 한다.  그것은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림이란 그 양식적 한계를 넘는 수가 있으며 그의 그림은 추상표현주의적 어법 위로 심적 표현력의 범위를 한껏 넓히려고 하고 있다.  자신의 삶 속에 본질적으로 부딪쳐 오는, 흐름 자체의 무반성적이고 비 관념적인 속성이 그로 하여금 꾸준히 作畵衝動을 일으킨다.
 生의 원초적 상태가 그러했을 것처럼 혼돈상태의 그것을 그의 말마따나 세련된 본능으로 바꾸는 데에는 그림을 보다 스스로에게 밀착되도록 轉化시키는 힘이 필요하다. 여기서 구체적인 언어가 탄생한다.  이 언어는 더욱 절실하고 간결한 보편성을 띄게 될 것이다.  여기에 안준희가 가고자하는 회화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